부조리의 극복 당신은 문제의 해결을 원한다. 문제는 당신의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장애물은 오직 힘에 의해서만 제거된다. 힘은 차원의 상승에 의해서만 획득된다. 같은 층위에서는 힘을 얻을 수 없다. 당신은 더 많은 시간을 투입하는 방법으로 어떻게 해 보려고 하지만 상대 역시 같은 방법을 쓰므로 선(線) 상에서 교착된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레벨을 올려야 한다. 선에서 이루지 못한 것을 면으로, 입체로, 밀도로 상승시켜서 해결해야 한다. 하부구조에서 실패한 것은 상부구조에서 해결된다. 문제는 어떤 방법으로 상부구조로 올라설 것인가이다. 일치에 의해 가능하다. 완전성에 의해 가능하다. 낳음의 자궁을 세팅하는 방법으로 가능하다. 당신은 파트너와 호흡을 일치시키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자물통과 열쇠는 일치할 때 문은 열린다. 남녀는 일치할 때 서로 통한다. 고저와 장단은 일치할 때 화음을 이룬다. 일치를 계속 추구해 들어가면 최종적으로 얻는 것은 일의성이다. 너와 나의 구분이 사라지고, 장벽을 넘어 하나가 되는 경지다. 그것은 70억 인류가 하나의 조상에서 갈라져 나온 바와 같다. 최초의 하나, 최상의 하나에 도달하는 것이다. 정상에서 전모를 바라보는 것이다. 인류 모두가 공유하는 하나에 도달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의 별을 공유한다. 우리는 하나의 언어를 공유한다. 아니다. 우리는 하나의 별을 공유하지 않는다. 누구는 지구의 반대편에 있고 누구는 건너편에 있다. 누구는 영어를 쓰고 누구는 한국어를 쓴다. 우리는 서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 그러나 본질에서 하나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언어가 달라도 표현이 다를 뿐 소통은 같다. 사이트가 달라도 인터넷은 같다. 지구의 반대편에 있어도 태양은 하나다. 진리로 보면 같다. 일의성에 도달할 때 문제는 해결된다. 그것은 모두가 한 편이 되는 것이다. 세상이 가는 방향으로 갈 때 그것은 달성된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전개에 따라 다섯 일치가 필요하다. 자기규정, 타자규정, 관계규정, 피아구분, 상호작용이다. 자기규정은 내가 누구인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진정한 나는 일치되는 나다. 세상과의 일치, 진리와의 일치, 역사와의 일치, 진보와의 일치다. 깨달음에 의해 가능하다. 나의 몸은 일치하지 않는다. 나의 마음은 일치하지 않는다. 너와 나의 만남만이 일치한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몸이 아니며, 나는 나의 마음이 아니고, 나의 의사결정영역이다. 이 지점에서 너와 나는 다시 만나야 한다. 둘때는 타자규정이다. 내가 누구를 만나는가이다. 완전한 내가 완전한 상대를 만난다. 그것은 완전한 자연이며, 완전한 세상이며, 최종적으로 신이다. 무신론자라 해도 이 지점은 부인할 수 없다. 완전한 나와 만나는 완전한 타자는 있을 수 밖에 없다. 완전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관계규정이다. 너와 나와 완전한 만남은 믿음이다. 그리고 그 믿음을 현실에 펼쳐낸 사랑이다. 완전한 나와 완전한 너 그리고 둘 사이의 완전한 관계를 설계하기다. 믿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니다. 완전한 계획, 완전한 설계 안에서 믿음은 성립한다. 넷째는 피아구분이다. 둘이 하나가 되면 방향성이 성립한다. 혼자 있으면 방향이 없지만, 둘이 손을 잡으면 앞뒤가 되고 상하가 되고 전후가 된다. 하나가 가면 하나가 따른다. 그러므로 방향성이 생겨난다. 그 방향은 생장의 방향, 열림의 방향, 진보의 방향이어야 한다. 그래야 함께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멈춘다면 함께할 수 없다. 닫힌다면 함께할 수 없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너와 나는 완전히 남남이 되고 만다. 무엇인가 한다면 방향은 생겨난다. 그럴 때 선택해야 한다. 옳고 그름 중에서 선택해야 하고 선과 악 중에서 선택해야 한다. 마땅히 진리를 선택하고, 진보를 선택하고, 역사를 선택해야 한다. 답은 정해져 있다. 높은 층위로 올라서는 것이다. 같은 곳을 바라보며 함께 앞으로 나아가기다. 다섯째는 상호작용이다. 함께 갈 때 완성된다. 이야기는 완성되고 드라마는 완결되며 결실은 획득되고 아름다움은 얻어진다. 패션과 디자인과 화음은 이루어진다. 작품은 탄생한다. 즐겁다. 유쾌하다. 그리고 짜릿하다. 인간의 삶은 이러한 다섯가지 일치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자기규정을 통한 나와 세상의 일치, 타자규정을 통한 신과의 합일, 관계규정을 통한 믿음의 합일, 피아구분을 통한 방향의 일치, 상호작용을 통한 소통의 일치를 끌어낸다. ◎ 자기규정 .. 완전한 나는 누구인가? - 깨달음. 이러한 일치를 통하여 인간은 살아가는 힘을 얻는다. 공과 방망이의 일치를 통하여 타자는 홈런을 치고, 재료와 매수의 일치를 통하여 투자자는 이익을 얻고, 마음과 마음의 일치를 통하여 남녀는 사랑을 얻는다. 모든 것은 일치에 의해 일어나며 그 일치의 장(場)은 상부구조에서 얻어진다. 그대가 서 있는 위치보다 한 차원 위에서 결정된다. 잔과 주전자의 일치는 주둥이에서 얻어진다. 에너지의 출구가 아닌 입구에서 얻어진다. 실무선에서의 불일치는 팀장선에서 일치되고 팀장선에서 불일치는 사장선에서 일치된다. 초의 불일치는 분에서 일치되고, 분의 불일치는 시에서 일치되며, 시의 불일치는 일에서 일치되고, 일의 불일치는 월에서 일치된다. 낮은 단계에서 틀어지고 높은 단계에서 일치된다. 아래로 갈수록 방해자가 많기 때문이다. 닫힌 곳의 불일치는 열린 곳에서 일치된다. 보수에서의 불일치는 진보에서 일치된다. 골목에서의 불일치는 광장에서 일치된다. 시골에서의 불일치는 도시에서 일치된다. 그러려면 높은 단계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나 자신을 깨달음의 레벨로, 타자를 신의 레벨로, 둘의 관계를 믿음의 레벨로, 둘의 만남을 진리의 레벨로, 둘의 소통을 아름다움의 레벨로 격상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비약하지 않으면 안 된다. 특수에서 틀어진 불일치를 보편에서 일치시키고, 다양성에서 불일치를 일반성에서 일치시킨다. 그럴 때 일의적으로 결정된다. 전체가 한 줄에 꿰어진다. 엔진에서 일어난 동력이 기어를 거쳐 바퀴까지 한 줄로 연결된다.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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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은 신에 대해 관심이 있습니다. 무신론자도 예외가 아닙니다. 신이라는 단어를 쓰든 안 쓰든 상관없이 인간은 공통적으로 두려움의 문제, 부조리의 문제, 허무의 문제, 세상과의 관계설정 문제를 깊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신의 포지션이 있다는 거지요. 나와 타자와의 일의성의 문제를 고민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서부터 모든 것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나와 신과의 관계설정 혹은 나와 세상 전체와의 관계설정에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설정은 먼저 내가 누구인가 하는 깨달음 곧 자기규정, 그리고 나는 지금 어디서 누구를 왜 상대하는가 하는 타자규정에 의해 가능하며 나와 타자가 어느 지점에서 어떤 방식으로 맞닥들이느냐 하는 일의성의 문제가 제기되는 것입니다. 선택은 당신의 몫이며 거기에 연동되어 당신의 모든 것은 결정됩니다. 누구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삶인가 죽음인가? 의미인가 허무인가? 떳떳함인가 두려움인가? 합리성인가 부조리인가? 끝까지 갈 것인가 여기서 주저앉을 것인가? 당신의 결정에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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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표현이요.
일단 베껴놓았소.
무엇을 선택한다는 것은 그것을 선택함으로써 선택하지 않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거꾸로 내가 무엇을 선택한다는 것은 그 선택으로 가장 중요한 것을 얻겠다는 것이며, 결국 모든 걸 얻는 것이다.
지금 내가 수학 공부를 한다는 것은 다른 것을 다 포기한다는 걸 말한다.
지금 내가 캐나다에 산다는 것은 다른 곳에 사는 것을 다 포기한다는 걸 말한다.
지금 내가 구조론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다른 곳에 있는 정보 읽기를 다 포기한다는 걸 말한다.
선택이 삶을 규정한다.
선택이 포지션을 규정한다.
선택이 방향성을 규정한다.
그러므로 어떠한 선택이든 그 선택으로 가장 중요한 것을 얻어야 하며, 결국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LG 전자는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고 했는데,
사실은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하기도 하고,
영원을 좌우하기도 한다.
글의 맨 마지막 문장, "당신의 결정에 달려 있습니다."
가슴을 쿵 내리치는 명문이다.
모든 비극은 선택하지 못함에서 비롯됩니다.
그의 선택이 실은 선택이 아니라 등떠밀렸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지요.
내가 누구인지를 타자의 시선으로 규정하는 것이야말로 비극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