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이렇다거니 저렇다거니 하고 말한다면 바보같은 거다. 중요한건 당신이다. ‘신이 어떻다’는 말에는 그 신을 바라보는 ‘나’가 어떻다는 의미가 숨어 있다. 신이 어쨌건 신의 사정일 뿐 당신에게는 발언권이 없다. 신이 어떻다고 말하는 즉 그 신이 당신에게서 분리된 타자일진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신과 나를 분리하는 순간 소외는 일어났다. 관계가 없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노예가 주인을 어떻다고 말하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유명한 금강경 사구게를 인용하겠다. 凡所有相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이 말이 유명하니까 뭔가 대단한 뜻이 있을듯 하지만 그럴 리가 없잖은가? 우리가 초딩도 아닌 바에 말이다. 여기서 임팩트를 주는 대목은 확신에 찬듯한 마지막의 '즉견여래' 네 글자다. 아마 여기서 많이들 낚였을듯. 이 네 글자에 무슨 대단한 뜻이 있을 리가 없으니, 그저 문장을 끝내려고 얼버무린 말일 뿐이다. ‘범소유상 개시허망’에서 본론은 나왔고 뒷부분은 사족이다. 그런데 시(詩)다. 시적 긴장감에 이 게송의 열쇠가 있다. '개시허망'과 '즉견여래'가 대칭을 이룬다. 독자들은 이 지점에서 시적 영감(靈感)을 받는다. 그런데 영감이 뭐지? 완전성의 느낌이다. 완전성은 뭐지? 손뼉이 마주치는 거다. 하이파이브와 같다. 그것은 만남이고 소통이다. 무엇과 무엇의 하이파이브인가? 부정과 긍정의 하이파이브다. 개시허망은 일체의 부정이다. 즉견여래는 위대한 긍정이다. 부정과 긍정의 대칭에서 묘한 시적 긴장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게 독자는 영감을 받는다. 왜 영감을 받을까? 뇌가 흥분하기 때문이다. 왜 뇌의 특정 영역이 활성화 될까? 공감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일상적으로 하이파이브를 경험하는 것이다. 원인과 결과가 마주치고 시작과 끝이 맞물린다. 늘 그러하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고, 견우와 직녀가 만나고, 꽃과 꿀벌이 만난다. 투자와 수익이 만나고, 노동과 임금이 만나고, 공부와 성적이 만난다. 우리의 일상은 온통 만남 투성이다. 만나서 손뼉치고 악수한다. 그래서 기쁘다. 그러한 기억이 우리의 뇌에 축적되어 있기 때문에 그 지점에서 뇌가 흥분하는 것이다. 그렇게 영감을 받는다. 그것이 완전성이다. 음과 음이 만나서 화음을 이루고, 인물과 사건이 만나서 드라마를 이룬다. 아름답다. 무엇인가? 답은 내부의 의미가 아닌 외적 관계에 있다. 안이 아니고 밖! 금강경 사구게의 의미는? 없다. 중요한건 관계다. 만남이며 소통이며 악수이며 손뼉이며 하이파이브다. 화음이며 리듬이며 박자며 장단이다. 드라마다. 범이니, 상이니, 허망이니, 제상이니, 비상이니, 여래니 다 개떡같은 소리다. 이런 단어에 붙잡힌다면 초딩이다. 진실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무슨 뜻일까? 뜻이라는건 원래 없다. 뜻에서 뜻을 찾으면 뜻을 찾을 수 없다. 첫째는 신 한줄에 꿰어지는 것은 포지션이다. 포지션을 꿰는 것은 포메이션이다. 신이 영화라면 인간은 관객이다. 관객이 없는 영화는 죽는다. 영화가 없는 관객도 죽는다. 둘은 만나야 한다. 만나서 예쁘게 맞물려야 한다. 그 지점에서 갈채가 쏟아져야 한다. 그렇게 영감을 받아야 한다. 혹자는 신을 찬양하려고 한다. 그들은 신이 대단하다고 말한다. 신을 높인다. 그만큼 인간은 낮아진다. 영화를 높이고 관객을 낮춘다. 관객이 초딩이면 그 영화는 초딩영화가 된다. 그 방법으로 그들은 신을 모독한다. 이런 식으로 어긋나면 만날 수 없다. 악수할 수 없다. 하이파이브는 실패다. 신은 높고 인간은 낮다는 식이면 영화는 높고 관객은 등신인 거다. 영화가 높으면 관객도 높아야 하이파이브는 이루어진다. 관객이 낮으면 영화도 자동으로 낮아진다. 그것이 소통이고 완전성이다. 그것이 미학이다. 신이 위대하다는 말은 신을 높이는 말이 아니라 자신을 낮추는 말이다. 개미가 보면 바퀴벌레도 위대하다. 인간이 개미가 된다. 중요한 것은 신이 높으냐 낮으냐의 사실여부가 아니라 이런 식이면 애초에 뜻이 없다. 개시허망이다. 그 영화에 관객없다. 영화를 높이고 관객을 낮추면 아무도 극장을 찾지 않는다. 극장의 좌석배치만 보더라도 관객이 영화보다 낮지 않다. 둘은 대등해야 한다. 무엇인가? 인간이 신을 이해하는 만큼, 신과 소통하는 만큼 신은 성립한다. 절대자라는 단어는 형용모순이다. 신도 1+2의 답을 3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 만들 수 없다. 이는 신의 문제가 아니다. 신이 1+2를 4로 만들 수 없다고 해서 신의 한계가 어쩌고 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언어의 문제다. 신이 고민할 일이 아니라 언어가 고민할 일이다. 무엇인가? 완전성이다. 진정한 완전은 소통의 완전이다. 완전한 것은 손뼉이 마주치는 것이며 서로가 만나는 것이며 만나서 소통하는 것이며 소통하여 진보하는 것이다. 그 안에 만남의 구조가 있다. 그 구조로 에너지를 태우는 것이다. 그것은 살아서 펄떡펄떡 뛰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서 생동하는 모습이 누군가에게는 불완전해 보인다. 틀렸다. 불완전해 보이는 것이 진정으로 완전한 것이다. 완전한 것은 통하는 것이다. 그렇다. 통해야 한다. 신과 통해야 신이 완전하다. 아무도 신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신은 이해되는 만큼 존재하는 것이다. 소통을 통해 이해된다. 신과 인간이 손을 맞잡아야 서로 완전해진다. 이는 보편적 원리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여기서 이미 절대자로서의 신은 죽었다. 신이 이미 죽었는데 즉견여래가 다 뭐겠는가? 관객없는 영화의 죽음, 영화없는 관객의 죽음, 둘은 동일한 포즈다. 신도 제로, 인간도 제로. 둘 다 지워진 상태, 완전히 표백된 지점. 원점에서 다시 만나야 한다. 거기서 신과 인간의 대화는 서로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것만이 의미있다. 그 이전의 모든 전제는 지워진다. 이러한 원리는 신이 있든 없든, 무신론이든 유신론이든 상관없이 두루 적용된다. ◎ 세상의 본성은 완전성이다. 소설이든 시든 만화든 영화든 그림이든 음악이든 모든 낳음의 영역에 이 원리는 공통된다. 완전성은 상호작용에 있다. 방송국과 라디오는 상호작용한다. 라디오 없는 방송국은 죽은 방송이며 방송국 없는 라디오 역시 죽어 있다. 인간없는 신은 죽은 신이며 신없는 인간 역시 죽어 있다. 서로를 분리하고 구분하는 즉 이미 죽어 있다. 신을 자기의 맞은 편에 두고 바라보는 관점을 가진 즉 이미 믿음은 증발하고 없다. 소외는 일어났다. 소통은 막혔다. 이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이든 남자와 여자의 관계이든 정치가와 유권자의 관계이든 마찬가지다. 범소유상이 개시허망할 뿐 아니라 범소유상이 개시허망하다고 말하는 것도 허망하다. 허망하지 않은 것은 상호작용 뿐이며 상호작용은 손뼉이 마주치는 그 한순간에 성립할 뿐이다. 인간은 소통하여 신을 성립시키는 것이다. 여래를 보는건 없다. 여래와의 하이파이브가 있을 뿐이다. 즉견여래! 내가 여래를 볼 때 여래도 동시에 나를 보지 않으면 실패다. 금강경 사구게가 영감을 주는 것은 개시허망의 부정과 즉견여래의 긍정이 만나서 하나의 세트를 이루며, 남자와 여자가 만나 환희하듯이, 음과 음이 만나 화음을 이루듯이, 원인과 결과가 맞아떨어지듯이, 우리가 그것을 자연에서 무수히 경험하고 공감하기 때문이다. 소통의 장면에서 짜릿하였던 경험 말이다. 소통할 때 짜릿하다. 만화에서 소설에서 드라마에서 영화에서 작가의 의도와 관객의 공감이 만날 때 저릿하다. 너와 내가 만날 때 가슴은 뜨거워진다. 금강경 사구게 안에 무와 유, 부정과 긍정의 소통이 있다. 그래서 깨닫는다. 일상에서 그러한 맞아떨어짐을, 화음을, 소통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느낄 수 없다. 영감을 받을 수 없다. 신명이 일어날 수 없다. 그것은 자기의 기억 속에서, 본능 속에서, 유전자 속에서 주파수를 불러내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여래를 보았느냐 보지 않았느냐 혹은 신이 있느냐 없느냐, 인간이 신을 알 수 있느냐 없느냐의 부질없는 논란을 떠나 세상이 그러한 완전성의 원리, 상호작용의 원리, 미학의 원리에 의해 작동한다는 것이다. 의미라는 것은 원래 그 순간의 손뼉의 마주침이다. 내가 손을 내밀 때 상대방도 손을 내밀어야 악수가 된다. 그러나 보통 사람이 하는 이야기는 대략 그 상대방이 없이 혼자서 손을 내밀었는데 악수실패, 허망해, 허망해, 허망해.. 무한반복. 혼자서 거울보고 악수하려니 실패하는건 당연하다. 소외를 극복하고 소통으로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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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전의 양면에서 하나를 분리하면 나머지 하나도 소멸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특수한 예가 아니라 보편적인 존재의 참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원자와 원자가 만나서 물질을 이룹니다. 그 원자도 쪼개보면 만남이며 남는 건더기는 없습니다. 신도 그러하고 인간도 그러하고 사랑도 그러하고 믿음도 그러합니다. 만남은 존재 이후의 일이 아니라 존재 자체의 자궁입니다. 만나서 존재가 이루어집니다. 붓과 물감과 종이가 만나서 그림을 이루듯이. 음과 음이 만나서 악을 이루듯이. 어떤 것이 완전한 것이 아니라 만남만이 완전합니다. 만남을 떠나 절대자도 없고 완전도 없고 신도 없습니다. 당신이 믿든 안믿든, 존재는 만남이며, 믿음은 그 만남에 대한 당신의 태도이고, 믿음의 부정은 만남의 부정이며 곧 소외가 일어나고 존재는 사멸합니다. 신을 자신과 분리된 별도의 타자로 보는 맹목적인 믿음은 표면의 만남이고, 진정한 믿음은 나의 전체로 상대의 전체를 만나는 것입니다. 신의 전부를 만나지 않으면 신을 만난 것이 아니며, 신을 만나지 않았다면 신을 믿는 것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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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뿌지직
통하다 신이되었다.
내안에 신이 있고 신안에 내가 있다.
아버지 안에 자식있고 자식 안에 애비있다.
그렇게 세상이 하나되고 신나길.........
구조론 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