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 안에 숨이 턱턱 막히는 긴장의 공기가 감돌 때, 그 충전된 에너지에 의해 인간은 동기부여 된다. 그것은 힘이다. 그 힘이 인간을 일어서게 한다. 그냥 힘 말고 살아가는 힘 말이다. ◎ 정령신 - 힘이 센 자에게 복종한다.(완력, 물리력) 인간은 어떻게 힘을 획득하는가? 수렵과 채집에 종사하는 부족민이라면 당장 들판을 뒤져서 음식을 구해야 하므로 어떻게든 살게 된다. 하루씩 살아내다 보면 어느 새 이만큼 살아져 있다. 그러나 문명인은 다르다. 그 응답의 속도가 느리다. 오늘 일을 해도 월급은 다음달에나 통장에 들어온다. 그래서 오늘 하루를 살아내는 힘이 필요하다. 그 힘은 자연의 물리적 힘과 다르다. 그 힘은 시간의 흐름 안에서 기승전결을 연결시켜 하나의 사건을 완성시키는 힘이다. 시작과 끝이 맞아떨어지고, 원인과 결과가 맞아떨어지고, 봄의 파종과 가을의 추수가 맞아떨어져야 한다. 그것은 미학의 힘이고 완전성의 힘이다. 그렇다. 신에 대한 인식은 그 완전성의 힘에 대한 인식이다. 중요한 것은 인류가 그 힘을 이미 발견했는가이다. 그렇지 않다. 여기서 문제의 발견이다. 과학은 인간의 잠재한 힘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서 종교가 존재한다. 어떻든 종교가 일부 사람들에게는 살아가는 힘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신(神) 개념의 의미는 그 완전성의 힘에 있다. 힘은 발견된다. 그러므로 신은 발견된다. 완전성이 발견되고 상호작용이 발견된다. 마찬가지로 ‘나’ 역시 발견된다. 묻노니 그대는 그대 자신을 충분히 발견했는가? 나의 힘을 발견했는가? 그대 내면의 감추어진 힘을 발견했는가? 대개 그렇지 못하다. 힘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 감추어진 힘을 발견하는 것이 깨달음이다. 나의 힘은 내가 어떤 대상과 맞서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그 대상과의 상호작용을 발견하는 것이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나란 무엇인가? 나의 몸이나 마음이 나일리야 당연히 없지 않은가? 그것은 비유하자면 컴퓨터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다. 하드웨어는 나가 아니며 소프트웨어 역시 나가 아니다. 그 컴퓨터는 인터넷과 연결될 때만 유의미하게 작동한다. 컴퓨터의 파워를 켜주는 인간이 없으면 컴퓨터는 죽은 존재다. 상부구조다. 나는 나의 의사결정 영역이다. 의사결정영역은 인터넷이라는 상부구조 안에서 작동한다. 라디오는 방송국과 연결되어야 살아서 호흡한다. 방송국을 잃은 라디오는 공허한 잡음을 토할 뿐이다. 인간은 과연 얼마나 스스로의 판단으로 의사결정하고 있는가? 의사결정영역의 크기는 자유의 크기에 비례한다. 문제는 한국어 혹은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에 자유라는 개념이 없다는 거다. 자유가 없는데 어떻게 자유를 인식하겠는가? 인터넷이 없는데 어떻게 컴퓨터가 작동하겠는가? free나 liberal이 자유의 전부는 아니다. love의 어원은 liberal이다. 파생어는 believe다. 자유의 결과는 믿음이고 믿음의 결과는 사랑일진대 사랑이 없고 믿음이 없는 자유가 어찌 자유일 수 있겠는가? 한국인들은 자유라는 말을 들으면 자율 혹은 방종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율(律)은 구속인데 어찌 그것이 자유와 연결될 수 있겠는가? 자유는 사랑인데 방종이 어찌 사랑이겠는가? 한국인은 자유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굳이 말하자면 자유는 권(權)과 가깝다. rights는 ‘오른다’는 뜻인데 이는 천칭의 저울접시에 올린다는 말이며 저울 접시가 바르다(balance)는 뜻이다. ba-는 둘이고 lance는 접시인데 천칭에는 두 개의 접시가 달려있기 때문이다. 권(權)은 대저울의 저울추다. 권의 저울로 달아서 합격 판정을 받으면 위로 올리고 불합격이면 아래로 내린다. 올리는 것이 right이고 남는 것이 left다. left의 어원은 남는다(be left)이다. 오른손은 무기를 들어 올리는 손이다. 왼손은 남는 손이다. 올리다에서 옳다가 나온 것이며 balance에서 바르다가 나왔다. 자유는 저울에 올리는 것이다. 곧 합격하여 권리를 얻는 것이다. love는 liberty를 얻은 신부가 신랑을 believe 하여 도망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는 게르만족의 납치결혼과 관련이 있다. 유목민은 겨울에 모였다가 봄에 흩어지기 전에 결혼해야 한다. 신부가 봄의 유목시기에 남편이 아닌 오빠들을 따라가버리면 영영 이별이기 때문이다. 이때 신랑은 신부를 감시하는데 love에 의해 liberty를 얻으면 believe가 형성되어 결혼이 유지된다. 신랑에 대한 신부의 평가가 right면 저울이 balance되어 rights가 획득된 결과로 서로가 liberty 되면 love인 것이다. 자유는 권리이며 그 권리는 평가와 사랑과 믿음에 의해 성립한다. 그러나 한국인 중에 자유라고 하면 거기서 사랑, 믿음, 평가, 권리, 인권을 떠올릴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자유를 모른다. 자유를 모르면서 자아를 알겠는가? 어찌 나를 알겠는가? 나는 나의 의사결정영역이다. 의사결정영역은 나의 인권(rights), 나의 자유(liberty), 나의 사랑(love), 나의 신용(believe), 나의 평가(balance)로 이루어진다. 나가 그냥 나인 것은 아니다. 개나 돼지가 들판을 자유롭게 뛰어다닐지언정 그것이 자유로움이되 자유는 아닌 것과 같다. 아무 의미 없다. 자유가 없고, 신용이 없고, 권리가 없고, 사랑이 없을진대 나의 결정할 몫은 없다. 한국인의 자유 개념에는 타자와의 내밀한 상호작용의 개념이 없다. 올려서 평가할 천칭접시가 없다. 풀려난 망아지가 들판을 뛰어다니다가 결국 마굿간으로 되돌아오고 마는 것과 같다. 무인도에 고립된 자유와 같다. 방송국 잃은 라디오 신세다. 인터넷 끊어진 컴퓨터 신세다.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나는 나의 의사결정영역이며 그것은 타자와의 상호작용에 의해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서구인은 깨달음을 알지 못한다. 깨달음을 설명할 수 있는 적당한 단어는 영어에 없다. 깨달음은 존엄이다. 존엄은 소외의 극복이다. 그것은 소통이다. 소통은 미학적 완전성이다. 서구인들은 소외나 소유나 소속은 알아도 소통은 모른다. communication은 그저 연락 정도의 개념일 뿐이다. 그 안에 사건의 기승전결이 없기 때문이다. 원형이정이 없고 인의예지가 없다. 소통은 역시 상호작용이다. 타자와의 능동적인 교감이어야 한다. 그 안에 포지션과 고저와 장단과 하모니가 있어야 한다. 이명박이 라디오에서 떠벌이는 짓을 소통이라 하면 곤란하다. 야구선수는 공과 방망이로 소통하는게 아니다. 공격수와 수비수의 포지션으로 소통하는 것이다. 방망이는 누구나 휘두를 수 있다. 공도 누구나 던질 수 있다. 포지션은 조가 맞아야 한다. 팀이 편성되어야 포지션이 생긴다. 혼자서 머리에 힘 주고 있어봤자 깨달음은 없다. 포지션에 의해 완전성의 깨달음이 얻어지고 인간은 힘을 얻는다. 종교가 강조하는 삶을 살아가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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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참된 의미는 삶을 살아가게 하는 동기부여의 힘에 있습니다. 그 힘은 완력이 아니고 완전성의 힘입니다. 그것은 원인과 결과를 잇고, 기승전결을 짜맞추고, 시작과 끝을 호응시키고, 남과 여를 짝짓게 하고, 손뼉이 마주치게 하고, 팀을 이루게 하고, 포지션을 구성하고, 우정과 의리와 사랑과 믿음과 아름다움을 이루는 힘입니다. 하나를 잃으면 전부 잃게 되고, 하나를 얻으면 전부를 얻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얻었습니까? 종교에서 그것을 얻을 수 있습니까? 아니면 과학에서 그러한 전망을 찾고 있습니까? 만약 진짜배기를 원한다면 동행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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