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메달 따위 무엇에 쓸까? 한국과 중국, 일본은 서로를 불편해 한다. 다수의 한국인들은 중국이나 일본이 다른 나라와 시합할 때 이웃나라인 중국이나 일본을 응원하지 않는다. 중국관중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한국 선수를 응원하지 않는다. 이는 한류가 한 풀 꺾였기 때문도 아니고 이명박 정권의 등장 이후 한국이 우습게 보인 때문도 아니다. 사실이지 당연한 일이다. 세 나라가 서로 다른 컨셉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시샘일 수도 있다. 서로 시샘하지 말고 한중일 3국이 뭉쳐서 서구에 대항하자는 논리를 설파하려는 것은 아니다. 필자가 말하려는 것은 한중일 3국의 경쟁의식이 이유있는 경쟁의식이라는 거다. 무엇을 경쟁하는가? 한중일 3국은 공통적으로 자기네가 아시아의 대표자가 되기를 희망한다. 그 대표성을 두고 경쟁하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일본이나 중국이 국제사회에서 아시아의 대표자로 인식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서구인들이 중국문화 혹은 일본문화를 아시아 문화의 전부로 안다면 좋지 않다. 유럽여행을 하다가 중국인이나 일본인으로 오해된다면 유쾌하지 않다. 그렇다면 생각할 일이다. 한국인들은 도무지 어떤 컨셉을 가지고 있길래? 한국인들은 뭐가 그렇게 잘났다는 말인가? 서구인들이 한국인을 보고 지저분한(?) 중국인을 연상하거나 혹은 비굴한(?) 일본인을 연상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무엇인가? 한국인들은 점잖은 선비라도 된다는 말인가? ### 인간들이 왜 스포츠 따위에 열광하는 것일까? 금메달 따면 뭔가 좋은 일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꽁무니에 불이라도 붙은 양 백 미터를 부리나케 달려가거나 한대서 그것이 어찌 신통한 일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그렇다. 분명 좋은 것이 있다. 흔히 3S정책이라 한다. 독재정권이 국민을 우민화 할 요량으로 screen, sport, sex를 풀어서 국민의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술책을 펼쳤다는 거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 결과로 전두환 정권은 망했다. 프로야구를 만들고 컬러TV를 허용하고 변강쇠류 야한 영화를 허용하더니 망했다. 왜 망했을까? 그것이 대중이 사회의 전면에 등장하는 계기로 되었기 때문이다. 정치의 역설이다. 독재자가 의도한 반대의 결과가 초래된 것이다. 골방의 지식인들은 오판한다. 그들은 2002년의 월드컵 길거리 응원을 파시즘의 징후로 보았지만 나는 그것이 촛불시위로 진화했다고 믿는다. 모든 종류의 문화, 예술, 스포츠와 레저는 대중의 의사소통 속도-의사결집 능력을 높인다. 그 결과는 각성한 대중의 전면등장 그리고 민주화로 전개된다. 물론 후진국이 스크린, 스포츠, 섹스만으로 민주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만으로 민주화의 필요충분조건이 갖추어지는 것은 전혀 아니지만 다른 조건들이 갖추어졌을 때 그것이 민주화의 계기로 작용할 수는 있다. 교육수준이 높은 한국인들에게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대중이라는 존재는 본래 그렇다. 야구장에 모이든 극장에 모이든 광장에 모이든 대중은 모이기만 하면 스스로 리더를 선출하고 전복의 야심을 품는 법이다. 대중이 대중 자신을 신뢰하게 되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금메달은 확실히 좋은 것이다. 왜 좋은가? 그 안에 이야기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건 이야기다. 하다못해 한 동안 대화가 뜸하던 가족 간에 이야깃거리가 생기는 이익이 있다. 그렇다. 한국인들은 가슴 속에 이야기 하나씩을 품기 원한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나라마다 다르다. 중국인들은 15억 인구라는 스케일에서 절대적인 압박을 받는다. 15억을 통제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중국의 역사는 한 마디로 배신과 분열의 역사다. 향당(鄕堂)이라는 것이 있다. 청조말기에 중국 남부의 아무개 가문과 아무개 가문이 각각 가병 수십만을 동원하여 전쟁을 벌이는 식이다. 그 규모가 장난이 아니게 크다. 중국사의 혼란에는 향당간의 암투가 무수히 개입되어 있다. 그들은 조상대대로 원수로 지내며 이민족을 끌어들여 같은 한족을 공격한다. 그러다가 급기야는 영토를 통째로 이민족에게 내주고 만다. 그러한 역사를 가진 중국이 공산당이 되었건 누가 되었건 내부의 끝없는 소모전을 끝막고 15억 인구를 결집시켜 내는 것은 그 자체로 의의있는 일이다. 중국인들은 그 자체로 감격해 한다. 그것을 굉장한 것으로 여기며 스스로 대견해 하면서 그것을 조금도 평가해주지를 않는 한국과 일본을 야속하게 생각한다. 개막식이 짝퉁이니 어쩌니 하며 소소한 것을 가지고 치사하게 흠을 잡는다고 여긴다. 중국은 크다. 15억 인구를 탈탈 털면 야오밍도 나오고 류시앙도 나온다. 기본적으로 하드웨어가 받쳐주는 사람을 골라서 슈퍼맨으로 키워내는 것이 그들에게 있어서 스포츠의 목적이다. 슈퍼맨을 발굴하는 방법으로 15억 인구가 하나의 방향을 쳐다보게 만드는 것이다. 그 자체로 엄청난 성과가 된다. 한국인은 다르다. 한국인에게 있어 스포츠란 찬양되어야 할 슈퍼맨의 발굴이 아니라 전혀 다른 것이다. 한국의 영웅은 가까운 주변에서 나와야 한다. 어렸을 때 가난한 집안환경을 극복하고 각고의 노력과 정신력으로 금메달을 따는 것이어야 한다. 그 성공은 본인의 실력 덕분이 아니라 다 주변 선배와 팬들 덕분이어야 한다. 한국인의 금메달은 15억 분의 1에서 받쳐주는 탄탄한 하드웨어가 아니라 한국인 특유의 총명함이나 정신력 따위에서 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중국인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스포츠가 아니다. 몸으로 때우는게 스포츠지 무슨 정신력 타령이란 말인가? 무엇인가? 중국에는 중국방식의 성공의 모습이 있는 것이다. 중국류의 본받을만한 역할모델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미국인도 마찬가지다. 중국이 15억 인구를 대상으로 한다면 미국인들은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다. 기본적으로 인간이 아닌 펠프스류 별종들을 발굴한다. 그들의 영화가 주로 슈퍼맨이야기로 되어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중국인들도 슈퍼맨 숭상심리가 있다. 나는 중국인들이 15억 인구의 거대함에 짓눌려 위축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영웅에 대한 갈망으로 나타나고 모택동에 대한 숭배와 독재정권의 유지로 나타난다고 믿는다. 한국인들은 다르다. 요즘 한국인들은 대통령을 자기집 고양이 보다 못한 존재로 여긴다. 한국에는 기본적으로 영웅이 없으며 영웅이 나와도 자기 주변에서 자기와 대등한 존재로 나와야 한다. 모든 한국식 영웅은 드라마 대장금처럼 어릴 때 무지하게 고생을 해야 하며 방해자를 만나서 온갖 수난을 겪고 훌륭한 스승을 만나서 뭔가 전수를 받아야 한다. 영웅답지 않게 주변의 도움에 의존하는 것이 한국식 영웅 캐릭터다. 일본인은 또 다르다. 그들은 야구팀이 한국에 패배하자 곧 징벌의 방법을 조직적으로 모의한다. 한국의 팬들은 홧김에 욕설로 게시판에 도배를 하여 분풀이를 하는데 비해 그들은 다른 형태의 집요한 방법을 쓴다. 그들은 심지어 호시노를 삭발시킬 계획을 논하기도 한다. 호시노가 결국 팀에 사과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한국인이 단지 화풀이 대상을 찾아 분노를 배설하는데 비해 그들은 긴밀하게 모의하여 조직적인 응징을 즐긴다. 일본 네티즌의 리플에는 아랍권의 명예살인을 연상하게 하는 섬뜩함이 있다. 파키스탄의 가난한 농부가 자기 딸이 부정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살해한다. 문제는 그 살인이 어째서 명예인가다. 농부의 항변이 이렇다. “돈도 없고 권세도 없는 우리같은 가난한 농부들은 명예만이 유일한 살길이라오. 명예가 없이는 우리 가족이 하루도 살 수가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딸을 희생시켰소.” 이해가 안 가는 일이다. 가난한 농부집안에서 무슨 명예타령이란 말인가? 그들이 말하는 명예란 ‘왕따 당하지 않는 권리’을 의미한다. 부족공동체의 성원으로 인정받고 부족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 명예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일본인들의 응원문화에서 나는 그런 것을 느낀다. 우리가 작당하면 너 하나쯤 보내는 것은 일도 아니라는 식의 표현들이 난무한다. 어쨌든 그들은 호시노 감독의 사과를 끌어내는데 성공했다. 한국선수들은 왜 눈물을 흘리는 것일까? 지나친 감정표현은 매너없는 것이다. 롯데 감독 로이스터가 팀에 한 말이 있다. 빈 볼을 맞아도 아픈 표정을 짓지 말라는 거다. 그래야 상대팀이 얕잡아보지 않는다는 말이다. 나는 로이스터가 한국의 문화를 모른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좁은 나라다. 약하게 보인다고 해서 얕잡아보고 몰매주는 나라가 아니다. 왜냐하면 한국인들은 주변에서 너무나 깊숙히 개입하기 때문이다. 세세한 개인사정까지 배려하며 약자를 동정하는 문화가 일반화 되어 있다. 그래서 한국선수들은 좀 어리광이다. 아기가 우는 이유는 자기 손가락에 난 상처를 엄마가 몰라주기 때문이다. ‘나의 고통을 알아줘!’ 이런 거다. 그럴 때 왈칵 설움이 복받치고 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거다. 한국선수들은 주변의 기대에 지나치게 부담을 받고 있다. ‘네가 메달만 따온다면 나는 혼이라도 팔아서 너를 돕겠다’는 식으로 나오면 눈물이 나오게 되어 있다. 이겨도 눈물이고 져도 눈물이다. 눈물이란 무엇인가? 한국인이 특히 술취한 사람이 실수를 저질러도 관대하게 용서하듯이 상대방이 긴장을 풀고 친숙하게 다가오게 하는 전략이다. 누군가의 품에 안기는 스킨십을 원하는 거다. 긴장하지 않고 다가가서 흉금을 터놓고 주저리 주저리 신세한탄 하기는 한국인의 컨셉이다. 모든 드라마와 음악과 미술과 건축에 조금씩 반영되어 있다. 그렇다. 그들은 가슴 속에 각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 이야기는 영감을 준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정보의 전파속도를 높인다. 그것이 경쟁력이다. 그것이 문화의 힘이다. 만약 모든 사람이 문학과 예술과 드라마와 스포츠를 돈이 안 된다는 이유로 거부한다면? 문화와 예술을 거부하고 모두가 삽들고 돈 되는 건설에 나선다면? 서로는 대화하지 않게 된다. 정보의 전파속도가 느려지고 사회적 의사결집-의사결정의 속도가 극도로 느려진다. 갈등은 유지되고 사태는 교착되고 모든 것이 극도의 난맥상에 빠지고 만다. 그 사회는 경쟁력을 잃는다. 모든 것은 만남과 소통으로 이루어진다. 예술가는 만남에서 아이디어를 얻고 발명가는 대화에서 건수를 챙긴다. 정보가 경쟁력이며 문화야말로 그 정보소통의 토대인 것이다. 그 이야기의 다양성에 주목할 일이다. 한중일 3국이 각자 목표를 정하고 주변과의 관계에서 동기를 얻으며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는 방식은 다르다. 중국인들은 15억의 시선을 한 지점에 모을 슈퍼맨을 원하고 한국인은 가난한 소년이 자수성가하여 꿈을 이루는 해피엔딩의 드라마를 원하고 일본인은 집단의 응집력을 끌어내는 조직적 행동을 원한다. 한국사회의 모순도 마찬가지다. 기성세대의 이야기와 젊은 세대의 이야기가 충돌한다. 눈물도 많고 한도 많은 박정희 세대의 낡은 이야기와 구김살 없이 자란 젊은 세대의 싱싱한 이야기는 다르다. 우리는 민주화를 통해서 세계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하고 그들은 일본, 미국의 노예로 취직해서 왕따의 공포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젊은이들은 멋진 파트너를 원하고 기성세대는 믿음직한 가부장을 원한다. 아세아에 무수한 국가가 있지만 실제로는 한중일 세 나라가 있을 뿐이다. 이 세 나라만으로 유럽의 무수한 국가들이 가진 다양성을 갈음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의 다름을 존중해야 한다. 하나의 이야기에서 하나의 정체성이 나온다. 하나의 존재의 토대가 된다. 나라가 크고 작고 잘살고 못살고는 중요하지 않다. 자기 이야기를 가지는가가 중요하다. 금메달 따위가 대수겠는가? 중요한건 이야기다. 금메달이든 무엇이든 그것을 계기로 우리의 가슴 속에 심어준 이야기는 씨앗이 되어 싹이 트고 자라나고 꽃을 피우면 결국 대중이 사회의 전면에 등장하는 계기로 되고 언젠가는 세상을 바꾼다. 이야기를 품어야 한다. ‘너는 누구인가?’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것이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답할 수 있을 때 한국인과 그 문화가 아시아의 대표가 될 수 있다. 아시아라 하면 변발을 한 청나라 관리나 역시 변발을 하고 게다를 신고 칼을 찬 일본의 사무라이를 연상하지 않고 한국의 선비를 연상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 금메달 몇 개로는 가능하지 않지만 금메달이 심어준 꿈으로는 가능하다. www.drkimz.com.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