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이를테면 이런 거다. 초등학생 때 그림을 그리다 보면 뭔가 제대로 되어주지를 않는다. 이상하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어떤 답답함이 있다. 원근법 때문이라고 알아채는 것은 나중의 일이다. 여러분은 어렸을 때 세상이 뭔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는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답답함을 느끼지 않았는가? 만약 아무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섭섭하다. 그게 ‘언어’라고 알아챈 것은 필자가 아홉살 때다. 국어사전이 잘못되어 있었다.(중략.. 예전에 여러 번 말했다.) 딱 걸린 거다. ‘이거다’ 하고 쾌재를 불렀다. 지금도 그 순간의 설렘을 기억한다. 옳고 그르고 간에 애초에 언어가 틀렸다. 논쟁할 필요없다. 언어를 바로잡으면 저절로 결론이 나와준다. 예컨대 ‘자유’라는 단어는 원래 우리나라에 없는 단어였다. 서구에서 수입한 개념이다. ‘깨달음’이라는 단어가 없는 서구중심의 기술문명이 21세기에 이르러 한계에 직면한 것도 마찬가지다. 자유라는 단어가 없기 때문에 아시아는 자력으로 봉건시대를 벗어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만약 서구의 침략이 없었더라면 중국 중심의 아시아는 일천 년 후에도 과거와 별반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아시아의 민주화 속도는 자유 개념을 이해하는 속도다.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왜? 자유 없어도 먹고 살만하기 때문이다. 여전히 독재자를 추종하며 자발적 노예가 되고 있는게 현실이다. 지금 일본의 세습총리, 한국의 세습녀, 북한의 세습아, 중국의 태자당이 다 그지경이다. 뿐이랴! 재벌의 3세경영에 교회세습이 모두 그러하다. 묻노니 이 글을 읽는 그대는 자유라는 개념을 이해했는가? 설마 그럴 리가. 기술시대가 가고 디자인시대가 와야 참된 자유를 깨닫는다. 지금 한국인이 이해하는 자유는 속박에서 풀려나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수준이다. 그 다음 계획이 없다. ‘그래서 어쩌라고?’ 자유가 곧 돈이고 자유가 개인의 지켜야 할 재산임을 깨닫지 못한다. 그냥 바깥 공기가 시원하니 좋다는 식이다. 자유는 상호작용할 때만 의미있다. 상호작용이 없는 자유는 무인도에 고립된 사람의 자유다. 무인도에 그대는 자유로운가? 천만에. 그대는 고독하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없으면 사랑하지 않는다. 중국에는 ‘전희’라는 개념이 없기 때문에 ‘한국사람은 다 변태다’ 하는 소문이 났다고 한다. 중국드라마에 사랑싸움에 대한 묘사가 있는지 모르겠다. 자유라는 단어가 없으면 남의 종살이를 하면서도 비참을 깨닫지 못한다. 깨달음이라는 개념이 없는 프랑스는 일부 지식인 중심으로 불교가 유행하고 있지만 라마교의 환생에나 관심이 있다. 기독교는 노예교와 해방교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모세가 유태인들을 해방시켰지만 그들은 스스로 노예를 자처하며 이미 이루어진 해방을 되풀이하고 있다. 해방 이후의 계획이 없는 거다. 그리스인은 미 그 자체를 숭상했다. 사람을 위한 미가 아니라 미 그 자체의 결을 따르는 미를 추구한 것이다. 사람을 이롭게 하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아름다움 그 자체를 완성시키려 한 것이다. 이는 레벨이 다르다. 한국인이 여전히 자유를 이해하지 못하듯이 일부 서구인들은 여전히 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서구인도 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판에 한국인이 미를 옳게 이해할 리 없다. ‘나는 빨간 옷이 좋다’는 태도와 ‘저 사람이 파란 옷을 입었으니 나는 빨간 옷으로 균형을 맞춰야 이 모임이 멋진 한 폭의 그림이 되겠다’는 생각은 수준이 다르다. 진짜와 가짜는 가려진다. 여자는 집을 예쁘게 가꾸고 남자는 차를 깨끗하게 관리한다는 말이 있다. 자기만족을 위해 청소하는게 아니다. 자기 집에 찾아온 손님의 기분을 위해서도 아니다. 너와 나의 관계발전을 위한 것이다. 심지어 김봉남 패션이 패션이라고 믿는 사람도 한국에 있다. 장난하나? 자유의 의미는 상호작용에 있다. 미의 의미도 역시 상호작용에 있다. 자기만족적인 소승(小乘)적 미는 진짜가 아니다. 깨달음의 의미도 상호작용에 있다. 내가 뭔가를 깨달았다는 것은 안 쳐준다. 그래서 어쩌라고? 다음 계획이 없다. 해방되고도 노예로 되돌아가 출애굽쇼를 반복하는 기독교도처럼 제자리 걸음이다. ◎ 기독교 해방 – 죄 짓고 회개하기를 반복한다. 죄는 노예의 언어다. 반칙이라는 단어는 선수에게 해당될 뿐 심판에게 해당되지 않는다. 주인에게는 죄가 해당되지 않는다. 구원의 개념은 죄를 사면받는게 아니라 애초에 해당없는 것이다. 성인이 되면 담배 사는데 민증제시를 요구받지 않듯이. ◎ 소승적 깨달음 – 점수타며 깨닫기를 반복한다. 좋은 언어가 좋은 세상을 만든다. 그림에 원근법이 있고 소실점이 있듯이 언어에 메커니즘이 있고 방향성이 있다. 명사나 동사는 좋은 언어가 아니다. 언어는 전제와 진술의 구조로 세팅된다. 그것은 수레와 같다. 언어에 태우는 것이다. 그것은 아(我)도 아니고 타자(他者)도 아니며 그 사이도 아니고 그 사이의 관계발전이 가리키는 방향이다. 나는 변하지 않는다. 너도 변하지 않는다. 진정 변하는 것은 너와 나의 사이다. 깨달은 사람이 다른 사람이 된 것은 아니다. 노예가 자유민이 되어도 다른 사람이 된 것은 아니다. 나도 변하지 않고 너도 변하지 않으나 관계는 변한다. 남남사이가 친구사이로 변하고 친구사이에서 연인사이로 변한다. 연인사이에서 부부사이로 변한다. 변하는건 사이다. 진정한 것은 사이 뿐이며 그 사이의 발전이야말로 참으로 빛나는 것이다. 깨달음은 관계의 발전방향이다. 참된 자유는 세상과의 관계를 바꾸며 상호작용을 통하여 그것을 진보시킨다. 참된 사랑은 너와 나 사이의 관계를 바꾸며 부단한 상호작용으로 그것을 심화시킨다. 참된 깨달음은 세상과 나의 관계를 역전시킨다. 세상이 나에게 일방작용하는 관계면 노예다. 세상의 작용에 맞서 내가 응수하면 자유다. 깨달음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높은 레벨로 올라서야 한다. 상호작용하는 관계여야 하며 그 상호작용을 통하여 관계를 발전시켜야 한다. 그냥 상호작용에 머물러도 피곤하다. 연주자와 피아노가 만났다면 거기서 새로운 곡을 탄생시켜야 한다. 낳아야 한다. 신곡의 진보만이 진정하다. 악기도 그대로고 연주자도 그대로이나 세상과의 상호작용하는 레벨이 달라졌기에 싸이는 다른 사람이 된 것이다. 상호작용 메커니즘의 진보방향을 포착해야 한다. 문제는 이러한 개념이 없다는 거다. 해방이 되어서도 노예모드로 돌아갔다가 다시 해방되기를 되풀이하고 있다. 해방되어 자유민으로 올라서는 것이 아니라 해방되는 순간의 재미에 중독된 거다. 깨닫고서도 다시 깨닫기놀음을 반복하고 있다. 미(美)를 아는척 하지만 자신과 주변을 아름답게 가꾼 다음에는 할 일이 없다. 세상을 새로 디자인하는 진짜배기 과업에 나설 생각은 못하는 거다. 피아노를 치는데 신곡의 발표가 없다. 그림을 그리는데 옛날 그림이다. 소설을 쓰는데 그 안에서 21세기가 발견되지 않는다. 시라고 쓰긴 썼는데 매가리가 없다. 세상을 흔들어놓지 않는다. 현대성의 부재, 소통의 부재, 낳음의 부재다. 그렇다면 고립된다. 소외되고 만다. 상호작용하지 못한다. 비유로 말하면 그 사람의 카스트는 낮다. 능력 뿐이거나 매력 뿐이다. 창의력이 없다. 국어사전 자유(自由) 다른 뜻(4건) 왜? 언어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국어사전이 틀렸다. 자유가 어찌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이겠는가? 그렇다면 들판의 개나 여우나 쥐에게도 자유가 있겠네? 천만에. 이건 아니다. 세상과의 상호작용하는 구조 안에서 든든한 자기 포지션을 가져야 자유다. 축구선수라면 골키퍼든 공격수든 수비수든 포지션이 있어야 한다. 그게 없으면 자유가 아니다. 국어사전이 틀렸다. 자기 마음대로 하는게 자유일 리가 없다. 세상 마음의 결과 자기 마음의 결이 일치하여 서로 공명할 때만 자유가 있다. 연주자는 전곡을 외우기 전까지 자유가 없다. 연주할 수 있어야 자유다. 화가는 그릴 수 있어야 자유고 가수는 립씽크를 극복해야 자유고 네티즌은 컴맹을 극복해야 자유다. 자기 그림을 그릴 수 있어야 하고 자기 노래를 부를 수 있어야 한다. 못하면 시다바리다. 국어사전 사랑 다른 뜻(3건) 사랑이 어찌 어떤 상대를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이겠는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매력에 끌려서가 아니다. 뇌가 무의식 중에 그 대상을 자신의 일부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대상에 대한 나의 태도이다. 나라는 것이 무엇인가? 나의 몸뚱이나 나의 마음은 진정한 내가 아니다. 몸은 하드웨어고 마음은 소프트웨어다. 그것이 어찌 나이겠는가? 말이나 되는가? 나의 의사결정 영역이 나다. 인간의 뇌는 나의 몸과 마음 뿐 아니라 나와 상호작용하는 타자의 마음과 주변의 환경까지 나로 인식한다. ‘지아’가 아프면 ‘후’도 아프다. 타자를 자신으로 인식한다. 피아의 구분이 육체나 마음에 있을 리 없다. 상호작용 메커니즘 개념이 없으므로 국어사전은 잘못 씌어진 것이다. 언어가 틀렸으니 세상이 바로 이해될 리가 없다. 소실점을 찾아야 한다. 그림이 틀린 것은 원근법을 배우지 못해서다. 안 되니까 여백이라 하며 대충 얼버무려 놓는다. 이건 아니다. 미(美)를 절대의 지고한 가치로 놓고 탐구하던 그리스인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예컨대 국가나 정치에 대해 논한다면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주의 개념을 중등학교 시절에 학습하게 된다. 정치나 국가의 목적이 공공의 이익에 있다는 거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그렇다면 왜 마약을 권하지 않지? 행복이라고 하면 술이나 담배나 섹스나 마약이나 도박이 최고다. 왜 국가는 술과 담배를 공짜로 나눠주지 않는가? 왜 섹스와 마약이나 도박을 권하지 않는가? 정치(政治) [명사] 정치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할 리가 없지 않은가? 정치가 사회 질서를 바로잡을 리 없지 않은가? 정치는 친구 사이에도 있고 회사 내에도 있고 동호회에도 있다. 모든 의사결정에 정치가 있다. 메커니즘으로 보아야 한다. 정치는 집단의 의사결정 구조다. 정치나 국가의 목적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 아니라 합리적인 의사결정 시스템의 건설이다. 옳은가가 아니라 합리적인가다. 약자를 도와야 한다는 것은 옳음이다. 그것이 지속가능한 구조인가를 묻는다면 합리성이다. 정치의 우선은 옳음이 아니라 합리성에 있다. 그러나 한국의 먹물 진보는 옳음에 붙잡혀 있다. 아랫돌 빼서 위에 올리는 식은 옳음일 수 있어도 합리적일 수 없다. 전제와 진술의 구조를 이해해야 한다. 전제를 그대로 둔 채 진술만 바꾼다면 자기기만이다. 그런데 다들 그렇게 한다. 잘못한건 윗선이지만 말단의 김병만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고 정치를 잘못한게 김정일이지만 북한 주민에게 책임이 간다. 우리가 북한 주민을 나무라지 않아도 구조적으로 그쪽에 피해가 간다. 실질적인 피해자는 북한 주민이다. 책임은 결코 피할 수 없다. 전쟁이 나면 다 죽는다. 지도자만 책임이 있는가? 피해자가 책임자다. 인간의 모든 실패는 부당하게 자기를 개입시키기 때문이다. 이해를 조정하고 질서를 바로잡는다는 것은 이미 인간의 의도가 개입된 거짓이다. 절대로 자연의 결을 따라가야 한다. 인간이 원하는 미가 아니라 미 그 자체의 결에 따른 미여야 한다. 나를 배제하고 의도와 목적을 배제하고 ‘위하여’를 버리고 ‘의하여’에 충실해야 한다. 언어에도 원근법과 소실점이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자체의 결따라 가야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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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가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미(美)가 무엇인지, 깨달음이 무엇인지 하나씩 알아간다는건 피곤한 일입니다. 몰아서 한꺼번에 아는 길로 올라타십시오. 그것은 세상을 원근법으로 바라보고 소실점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언어에도 원근법이 있고 소실점이 있습니다. 모든 단어는 상호작용의 메커니즘을 나타냅니다. 나도 아니고, 너도 아니고, 너와 나의 사이도 아니고, 그 사이에서 상호작용하는 구조의 현대성있는 진보입니다. 그것이 진짜 나이고, 진짜 자유이고, 진짜 사랑이고, 진짜 아름다움이고, 진짜 깨달음입니다.
몸은 내가 아닙니다. 마음도 내가 아닙니다. 의사결정 영역이 진정한 나입니다. 그것은 차도 아니고, 차의 운전수도 아니고, 도로도 아니고, 그 자동차의 역주입니다. 달려가는 동안에 나는 존재하고, 멈추는 즉 나는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진짜 나를 배짱좋게 받아들이십시오. 그래야 세상을 만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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