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놈놈놈이 있는 풍경” ‘디워소동’ 이후 영화를 안 보게 되었다. 한국영화에 대해 품었던 실낱같은 기대와 애정은.. 이제 확실히 접었다..고 할 수 있다. 절교다. 그 사이에 충무로도 많이 피폐해졌다. 뭔가 파장 분위기.. 씁쓸하다. 한 십년 떠들더니 벌써 끝인가? 필자가 영화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거기서 ‘진보의 공식’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무릇 진보란 것은.. 진보를 열망한다고 해서 진보가 되어주시는 것이 아니옵고.. 구체적인 진보의 토대를 개척했을때라야 이루어진다. 60년대 이후 대중 미디어의 등장, 80년대 이후 전화기의 등장, 2천년 대 이후 인터넷의 등장과 같은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소통의 밀도가 높아질수록 의사소통≫의사결정의 속도가 높아져서 그만큼 민주주의가 진척되는 것이다. 반면 조폭언론의 등장과 같은 매체의 타락은 민주주의를 질식시키기에 충분하다. 그들이 소통을 가로막고 의사결정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민주주의가 가능했던 것은 그곳에 도시가 있었고 광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근대 서구의 민주화 과정도 마찬가지다. 구텐베르그가 금속활자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근대의 이성은 학자의 골방이 아니라 시장의 물정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소통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모든 진보하는 것에는 공식이 있다. 있어야 할 것이 갖추어져야 민주주의라는 시스템은 작동한다. 진보의 싹은 튼다. 그 중에 하나라도 빠지면 엇길로 새고 만다. 명박이 나대는 작금의 현실과 같다. ### 각설하고.. 민주주의는 좌파의 특기인 학습이나 조직이 아니라.. 대중매체의 선점에서 얻어진다는 필자의 지론을 영화의 흥행에 대입하면.. 영화의 본질은 비쥬얼이라는 결론이 얻어진다. 직설적으로 말해서.. 이창동이 아무리 좋은 영화를 찍어봤자 그것은 소설의 번안이지 진정한 영화가 아니라는 말씀이 되겠다. 거기에 진보가 없으니까. 결국 영화라는 것은.. 감독이 어떤 기상천외하고 기기묘묘한 초식을 구사하여.. 도무지 어떤 방법으로 변덕도 심한 대중을 살살 구슬러서.. 극장이라는 어두컴컴한 공간에 1시간 반 동안 잡아가둬 놓느냐는.. 그러한 기술이 되어주시겠다. 무엇인가? 소설은 혼자 읽는 거다. 왜? 글자가 딱 찍혀서 나오기 때문이다. 에컨대 내가 세익스피어의 햄릿 한 구절을 떠올리고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고 썰을 풀짝시면.. 그 구절을 읽은 사람은 “맞어 맞어” 맞장구를 칠 것이고.. 뭐 읽지 않은 사람도 ‘그런가벼! 암은..’ 하고 고개를 주억거릴 것이다. 영화는? 영화는 글자가 딱 찍혀 나오는 것이 아니다. 아주 말솜씨가 있는 사람이 썰을 풀어야 약간의 소통이 이루어진다. 말하자면 영화는 현장성이 중요한 것이다. 현장의 목격자라야 서로간에 소통이 되는 것이다. 글자가 아니라 그림이기 때문이다. 결국 영화가 영화인 이유는.. 거기에 무슨 교훈이 있고 감동이 있고 대단한 가르침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런 꼰대짓이나 하기 위해서 영화를 본다는 등신은 도무지 도움이 안 되는 화상이니.. 차라리 묻어야 한다. 2002년 월드컵 길거리응원은 우리에게 체험의 공유를 주었다. 우리 세대의 어떤 일체감을 준 것이다. 그것이 축제의 본래의 기능이다. 그러한 체험의 공유가 2008년 촛불로 발전한 것이다. 서로 연관성이 있다. 바로 그거다. 영화는 체험의 공유를 통하여 정서적 결속력을 끌어올림으로써 민주주의의 토대가 되는 의사소통≫의사결정의 속도와 밀도를 높인다. 그러므로 진보의 밑천이 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 있어서 영화는 진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화를 말하는 것이다. 물론 모든 영화가 그러한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영화는 걍 상품이다. 그렇다. 우리에겐 축제가 필요하다. 체험의 공유가 필요하다. 정서적인 유대가 필요하다. 우리끼리 통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그것으로 결속력을 얻고 그것으로 나아가 조중동을 퇴치하는 자산으로 삼아야 한다. 그러므로 결국 그림에서 진보가 일어나지 않으면 영화는 죽는다. 대중과 함께 호흡하지 못한다. 물론 그림+감동+지식이면 더욱 좋지만 영화의 핵심은 그림이다. 영화만이 가질 수 있는 현장성이다. 감동이나 지식은 영화 아니라도 얼마든지 조달이 가능하다. 오직 영화만이 일구어낼 수 있는 고유한 가치가 있다. 이창동이 아무리 좋은 영화를 만들어도 아류가 안 나온다. 아류가 쏟아지고 속편이 쏟아지고 붐업이 되어야 우리만의 공감대가 얻어지는 것이다. 그래야 진짜다. 디워 이후 그림에서 진보가 일어났는가? 놈놈놈에서는 도무지 어떤 진보가 있었지? 도찐개찐이다. 그런데도 평론가들은 한결같이 찬사를 보낸다. 내러티브가 빈곤하기로는 디워나 놈놈놈이나 오십보 백보인데도. ### 영화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한국영화가 특별히 후지기 때문이다. 그림이 후지다. 그러나 후진 만큼 개량할 점이 있다. 말하자면 눈에 빤히 보이는 정답이 있는 것이다. 눈앞에 정답이 있는데 빤히 정답을 보고도 정답을 맞추지 못하니.. 지켜보기 안타까워서 몇 마디 언어를 보태게 되는 것이다. 놈놈놈은 글래디에이터의 영향을 받았다는 김성수의 무사(2001)를 약간 개량한 정도라 하겠다. 놈놈놈이 무사와 다른 점이 있다면 ‘해외로케 쪽박의 법칙’을 제법 피해간 정도다. 충무로에 해외로케만 하면 대략 망하는 괴담이 있는데.. 그 이유는 와호장룡이 기와지붕 위로 휙휙 날아다니며 지극히 중국적인.. 고색창연한 중국건물의 속살의 보여준데 비해.. 철부지 한국 감독들이 해외 나가서 뭣도 모르면서 피상적으로다가 수박겉 핥으며 헤매고 다니기 때문이다. 무사가 사막을 찍어왔지만 사막 특유의 시점을 보여주지 못했다. 사막이 아니라 모래더미를 찍어온 것이다. 사막이란 무엇인가? 아주 멀리서도 보인다. 사방에 알몸으로 노출되어 있다. 그야말로 무방비 상태인 것이다. 사막이란 참으로 두려운 것이다. 소름이 확 끼친다. 오싹해야 한다. 왜? 적이 10키로 밖에 있어도 까만 점으로 보인다. 한국에서는 다르다. 사방이 산이고 숲이라서 한국에서는 적이 근처에 있어도 모른다. 숨을 데가 많다. 아주 멀리.. 지평선 끝에 까만 점이 보인다. 뭐지? 작은 점이 점점 커진다. 숨을 곳이 없다. 그때의 두려움이란! 바로 그것을 잡아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사막의 속살이다. 놈놈놈은 그래도 무사의 실패를 극복하고.. 사막의 속살을 살짝 맛배기로 보여준 바가 있다. 만주대륙 분위기는 전혀 아니지만 온통 산으로 둘러쌓인 한국의 산천과 다른 시점의 깊이를 보여준 바가 조금은 있다 하겠다. ### 영화의 미래는 비쥬얼에 있고 액션에 있다. 놈놈놈의 액션은 뭐 양념을 팍팍 쳐서 초딩들 입맛에는 맞추었지만.. 그래봤자 플라이급 선수의 옹박액션을 벗어나지 못했다. 옹박이 날고 기어봤자 옹박이지 별 수 있나. 씨름이라도 그렇다. 태백장사 한라장사가 기술은 화려하다. 뒤집기도 쉽게 해치운다. 그러나 다들 백두장사 타이틀에만 관심을 가진다. 왜? 관객은 화려한 기술을 보려는 것이 아니라.. 100키로 넘는 거한들의 중량감에서 얻어지는 묵직한 긴장감을 원하는 것이다. 놈놈놈은 한 마디로 플라이급 권투선수가 가벼운 주먹을 1초에 다섯번 번개같이 내지르곤 하지만.. 헤비급 타이슨의 묵직한 한 방이 아쉬웠다고 하겠다. 그게 한 마디로 노가다 액션이다. 전략이 없다. 전술이 없다. 구로자와 아키라가 7인의 사무라이에서 보여준 그 무엇이 없다는 말이다. 54년 전에 벌써 정답이 다 공개되었는데도.. 한국의 자칭 감독들은 모방도 못한다. 능가는 못해도 최소한 베끼기는 해야 할 것이 아닌가? 진짜 한심하다. 놈놈놈의 주인공들은 전혀 머리를 쓰지 않는다. 세 바보가 똑 같이 바보인데 누가 더 바보인가를 겨루어 왕바보를 뽑되 결국 운 좋은 놈이 이기더라는 식이다. 막판에 송강호가 뱃속에서 철판을 꺼내들었지만.. ‘어쭈 머리 썼네’.. 라는 느낌보다는 생뚱맞다는 느낌이 들 뿐이었다. 송강호가 머리를 쓸거라는 기대를 주었어야 그 장면에서 쾌감이 있지. 참.. 영화 못 만든다. 머리를 쓰지 않는 액션은 밀도가 낮은 것이다. 그것은 선이 굵은 액션이 아니다. 눈만 어지러울 뿐. 선이 가늘고 번다할 뿐이다. 조금 졸았다. 머리를 쓰는 액션이 필요하다. 그것은 구라자와 아키라의 방법대로 각자가 역할을 나누는 것이다. 우선 1 대 다(多)의 대결이라면 명나라 척계광의 기효신서를 떠올릴 수 있다. 검술이 뛰어난 왜구를 잡는 방법이다. 낭선수 2인이 양쪽에서 가로막아 적의 행동반경을 좁힌다. 이때 왜구가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오면 장창수 4인이 안전한 원거리에서 공격한다. 적이 웅크리면 등패수가 바싹 달려들어 해치운다. 척계광의 원앙진은 12인조와 5인조가 있는데 방어와 공격의 역할분담을 통해 어떤 경우에도 승리하는 전술이었다고 한다. 이 전술은 임진왜란 때 평양성 탈환에도 사용되어서 위력을 떨쳤다. 이를 현대의 싸움으로 응용한다면 어떨까?.. 덩치 큰 깍두기 두 명이 좌우에 버티고 서서 적의 행동반경을 좁혀놓는다. 그 상태에서 적이 뛰쳐나오면 키 큰 녀석이 원거리에서 공격하고 적이 좁은 곳에 웅크리면 키가 작은 사람이 바짝 접근하여 해치운다. 일 대 일의 대결이라면 미야모도 무사시의 오륜서가 참고할 만 하다. 이 양반은 긴 칼과 짧은 칼을 함께 사용하는데 긴 칼은 방어용이고 짧은 칼은 공격용이다. 적이 공격하면 긴 칼로 제 1격을 막은 다음 바짝 파고들어 짧은 칼로 해치운다. 긴 칼은 회전반경이 크기 때문에 공격하기에 편하지만 방어하기에 어렵다. 짧은 칼이 공격과 방어를 겸하는데 반해 긴 창은 공격을 할 뿐 방어를 못하는 이치와 같다. 긴 칼을 쓰는 사람은 제 1격에 실패하면 곤란해진다. 보통 무사들이 칼을 휘두를 때는 안전한 사정거리 밖에서 칼과 칼을 부딛힌다. 실상 싸움은 칼이 하고 무사들은 칼 뒤에서 숨는 것이다. 이런 겁장이의 방법으로는 이길 수 없다. 미야모도 무사시는 다르다. 그는 칼날끼리 부딛히는 것이 아니라 제 1격을 막은 다음 상대의 품으로 파고들어 몸으로 부딪혀 버린다. 적은 상대편이 자신의 칼날이 그리는 회전반경 안으로 파고들면 어쩔줄 몰라하며 뒷걸음질 친다. 계속 뒷걸음질 치다가 궁지에 몰리면 털썩 주저앉게 된다. 원래 칼잡이들의 대결은 칼날끼리 싸우게 하고 사람은 뒤에 숨는 법인데 미야모도 무사시는 그 규칙을 깨버린다. 2차대전 때의 공중전을 참고할 수도 있다. 전투기가 1 대 1로 붙으면 선회반경이 작고 기동력이 좋은 일본의 제로기들이 우세하지만.. 제 1격에 해치우지 못하면 둔중한 미군기의 편대공격에 살아남지 못한다. 미군기들은 장갑이 두꺼워서 일본기의 총탄세례에 잘 부서지지 않는다. 제 1격에 어떻게든 살아남기만 하면 근접하여 편대공격의 역할분담으로 장갑이 얇은 일본기들을 단번에 쓸어버린다. 그런데 왜 한국의 액션은.. 류승완의 죽거나 아니면 나쁘거나 이후 리얼액션을 표방하며 개싸움이나 할 뿐.. 전략이 없느냐가 나의 불만이다. 플라이급 선수들이 그냥 노가다를 지루하게 반복하는 것이다. 주인공 둘이 등을 맞대고 수십명의 적들에게 포위되어도 역할분담이 없다. 도무지 역할분담 안할거면 왜 등을 맞대고 난리야? 편대공격은 한 명이 앞에서 적을 유인하고 한 명이 뒤에서 공격하여 쓸어버리는 것이다. 그런게 있어야 한다. 주인공을 포위한 조폭들도 마찬가지다. 빙 둘러싸고 있지만 그냥 우두커니 서 있을 뿐 실제로는 1 대 1의 대결을 지루하게 반복한다. 낭선수와 등패수와 장창수의 역할분담이 없으니 재미가 없다. 스티븐 시걸의 떡대전술도 싱겁긴 하지만.. 시걸 아저씨는 적어도 두들겨 맞지는 않는다. 주인공이 죽도록 맞기만 하는 한국액션은 정말이지 질렸다. 차라리 임권택의 장군의 아들이 좋았다. 결론적으로 영화는 결국 그림으로 승부해야 하고 그림이라면 액션이 개척의 여지가 있고 그것은 역할분담을 통한 편대공격이라는 것이 필자의 지론이다. 거기다가 지형지물의 이용이나 지형적인 잇점의 선점전략이 보태지면 더욱 좋다. 결국 관객이 원하는 것은 전문성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다. 노가다 삽질이 아니라 전략과 전술에 의해 문제는 해결된다. 영화가 그것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전략은 주변환경을 이용하는 것이고 전술은 공격과 방어로 역할을 분담하는 것이다. 모든 성공한 영화에는 그것이 있다. 모든 실패한 영화에는 그것이 없다. 충무로의 위기라 한다. 꼴 좋게 되었다. 더 박살이 나야 한다. 그들이 겸허함을 배울 때 까지. ### 덧글.. 김지운은 놈놈놈을 캐릭터 영화로 가져가려 한 모양인데 역할분담이 없으니 캐릭터가 죽었다. 무한도전만 봐도 역할분담이 있는데. www.drkimz.com.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