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오세님의 글에 대한 것이오. “내 몸 더러워졌다는 생각은 망상이고 악몽…행복해지는 길 찾아야”
- 우울증으로 약물치료를 받고 있는데, 제 우울증의 근본에는 가족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릴 때 아버지가 저를 성폭행했습니다. 알코올 중독인 아버지 때문에 집안엔 부부싸움이 잦았습니다. 어릴 땐 아버지만 미웠는데 아버지를 괴롭게 만든 게 어머니란 생각이 들면서 작년부터는 어머니도 미워졌고, 7년 만에 아버지를 만났을 때 증오심과 불쌍하다는 감정이 동시에 들었습니다. 부모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또 결혼을 하고 싶은 데 어렸을 때 받은 상처를 상대방한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고 남자를 사귀기도 어렵습니다.
= 어떤 사람이 나를 납치해서 강제로 마약주사를 놨다고 합시다. 마약에 취해 있다가 정신이 들면 탈출을 시도했고, 실패하면 다시 마약을 맞는 일이 되풀이 됐습니다. 이렇게 여러 해 동안 고통을 겪다가 경찰 단속으로 거기서 풀려나게 됐습니다. 이제 나는 마약을 안 맞아도 됩니다. 그런데 이제는 내 스스로 마약을 찾아서 맞습니다. 마약을 하면 처벌을 받는다고 해도, 가족과 경찰이 말리는 데도 숨어서 마약을 합니다. 누가 나에게 왜 마약을 하냐고 묻는다면, 내가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강제로 나를 마약 중독자로 만들었으니 내 책임이 아니라 그들 책임이라고 하겠습니까.
처음에는 분명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 있었지만 지금은 괴로워하는 것이 습관이 돼서 아무도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 없는데도 나 혼자서 괴로워하고 있는 겁니다. 원인이 어디서 어떻게 생겼든 지금 마약을 하는 이 습관은 나의 습관이고 내가 이것을 멈춰야 내 인생이 좋아집니다. 나를 납치해서 마약을 주사한 그 사람이 나한테 잘못했다고 빌어야 마약을 끊을 겁니까? 아버지가 개과천선해서 나한테 잘못했다고 빌어야 내가 이 고통에서 벗어날 겁니까? 아버지로부터 내 고통이 시작됐다고 하더라도 지금 이 고통은 내 것입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이 괴로움이 일어나게 된 원인이나 책임을 따지는 게 아니라 그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해지는 길을 찾는 일입니다. 그러려면 우선 부모님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설령 성폭행을 했다 하더라도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고 있는 것은 부모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어떻게 그럴 수 있나, 딸을 폭행한 아버지에게 어떻게 감사하라는 건가, 이런 생각이 들겠지만 그렇게 생각할수록 내 고통은 점점 깊어집니다.
‘아버지가 나를 성추행했다’는 생각도 사실은 하나의 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내 손을 잡았던 그 순간에 그는 내 아버지가 아니라 그냥 한 남자였을 뿐입니다.
그러니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어머니 아버지 감사합니다. 낳아주시고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매일매일 어머니한테 108배, 아버지한테 108배, 오직 감사하다는 기도만 하세요.
물론 그의 행위가 잘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나에게 좋을까요. 제법(諸法)이 공(空)하다고 했습니다. 이 몸도 공한 것입니다. 부처님이 와서 내 머리를 쓰다듬고 나를 껴안아준다고 해서 이 몸이 성스러워질 수 없고, 낯선 남자가 와서 나를 껴안고 성추행을 했다고 해서 이 몸이 더러워질 수 없습니다. 이 몸은 더럽히려고 해도 더러워질 수 없고 성스럽게 하려고 해도 성스러워질 수 없습니다. 성추행을 당했다는 그 생각이 나를 더러움에 빠뜨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를 껴안았을 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면 사랑을 받았다고 하고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면 성추행을 당했다고 합니다. 성추행을 당했는지 사랑을 받았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그가 아니라 나 자신입니다. 이 도리를 깨쳐 버리면 어릴 때 상처를 담박에 벗어날 수 있고 이 도리를 못 깨치면 죽을 때까지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내 몸이 더러워졌다는 생각은 망상이고 악몽입니다. 질문자한테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결혼할 상대방한테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처님 저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저의 몸과 마음은 깨끗하고 청정합니다.’ 아침마다 이렇게 108배를 하면서 기도하세요. 그렇게 꿈에서 깨어나고 상처를 치유하고 나서 결혼을 생각하는 게 좋겠습니다.
이상 법륜의 발언에서 숨은 전제를 찾아보시오.
힌트를 드리자면 .. 종교인에게 물으면 종교적인 답이 돌아오고, 법률가에게 물으면 법률적인 조언이 돌아오고, 오세님에게 물으면 심리학적인 답이 돌아오고.. 뭐 이런거 아니겠소? 애초에 종교가 잘못된 거지 법륜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소? 이런걸 실은 한겨레가 잘못이지.. 누가 저한테 똑같은 질문을 해도 공적인 질문이냐 사적인 질문이냐에 따라 답은 다를 것이오. 게시판에서 질문하면 독자들을 의식하여 답을 하고 전화로 질문하면 듣는 제 3자가 없으니 다른 답을 하게 되오. 당연하지 않소? 이상은 힌트고 덧붙여서 법륜이 간과한 것은 무엇인지 말해보시오. |
고립된 곳이라면 근친끼리 붙어먹어도, 아버지가 자식을 죽이고 아들 어머니를 취해도 문제될것 없소. 다만 그렇게 고립되어 죽어갈뿐.
하지만 이곳은 오천만 인구가 사는 대한민국이오.
법륜의 원시적인 방식은 이제 더 이상 먹히지 않소.
이젠 누군가의 성폭행 사실이 알려지면 거의 즉결처분감이오
여론으로 뭇매 그다음엔 사법처리.
이젠 아동성폭력은 공소시효조차 없어질 판이오.
이런 세상에서 뭐? 백팔배?
별 수 없소. 법륜은 이제 인도네시아로 가야할 것이오.
그러고보면 법륜이 자꾸 후진국으로 진출하는데 이제 그 이유를 알 것 같소.
마약 인용예가 성폭행과 전혀 맞지 않는 인용같소.
성과 관련된 죄악은 정도문제에 따라 상대방 특히 여성들이 짧게는 수년 길게는 평생 정신적 부담으로 가다가 중간에 잘 못되면 자진 하는 경우들이 많은 것 같소.
나는 정신병환자와 같은 범주로 이런 폭행의 희생자들은 특별 복지정책을 택해 본인이 원하는 순간까지 완벽하게 국가가 보호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오.
왜냐 이건 대책이 없으니까. 본인도 힘들고, 주변인도 힘들고, 공동체의 에너지 소모가 너무나 커지니까...
심리문제는 무엇보다 철학과 인문 교육이 빈곤할 수록 더 악화되는 것은 자명한 사실일 것이요.
우리는 과거 적어도 한세대 이상 이부분에 있어서 실패했슴을 인정하고
미래를 보고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오.
당장 나라의 지도부들이 머릿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 모르겠소...
linux 나 unix os 시스템에서 모든 프로세스는 부모 프로세스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예상치 않은 사유로 부모 프로세스와 관계가 끊어져 부모는 자신의 자식이 어떻게 됬는지 모르고 자식은 자신의 부모가 누구인진 모르는 프로세스가 발생하는데 이걸 좀비 프로세스(zombie process) 라고 부릅니다.좀비 프로세서는 메모리만 차지하고 있어서 관리자에 의해 강제로 kill 당하거나 발견이 안되면 시스템이 리부팅 될때 까지 살아있죠.
프로세스가 좀비프로세스가 되는 이유는 자체의 문제도 있지만 시스템 메모리가 순간적 모자라거나 네트워크 오류등 주변환경의 문제 일 수 있습니다.
이런경우 원인을 찾아 수정 하지 않으면 저절로 나아지지는 않습니다. 비슷한 상황이 오면 또 발생합니다.
어찌보면 법륜은 하나의 좀비 프로세스에게 어쩌고 저쩌고 이야기 하고 있는 거 같은데. 이건 개인 차원에서 해결되지 않고 zombie process가 발생하지 않도록 개선하지 않으면 나중에 os가 메모리가 부족해져서 시스템이 다운이 됩니다.
법륜이 간과한 것은 개인의 존엄입니다.
개인의 존엄이 없으면 가족, 사회, 국가, 우주의 존엄도 어불성설입니다.
억울하지 않은 사람이 억울한 사람과 똑같이 분노할 때 정의는 실현된다는 말처럼....
법륜은 정의가 무엇인지도 헷갈리고 있습니다.
도대체 상담자가 당한 피해가 공적인지 사적인지도 모르고 있구만...
인간의 존엄을 해하는 것은 우주적인 범죄로 보아야 하는데
종교로 보면 범죄도 해탈에 필요한 마구니쯤으로 여기는 착각입니다.
숨은 전제는
만일 개인의 존엄을 이야기하면 종교는 무용지물이 되므로... 존엄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승가에 속한 사람으로 승가도 유지하고 승적도 유지하지 위해서 그렇게 답변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에게 저는 아무일도 없었고 청정합니다 라고 말하면서 108배를 하라고 하는 것은
또다른 범죄를 용인하는 것으로서 매우 부적절한 답변입니다.
공동체에 피해가 있음에도 이를 모른다면 현대성이 없는 것이고
알았다면 ...... 기득권유지 차원이겠고...
참 ... 나... 원... ㅌㅌ
마찰열에서 불이 붙는 것은 완전한 불똥 하나라오.
불이 붙었다는 것은 완전한 불똥에 하나에 의해서요.
불의 존재자체로 완전하기에 존엄한 바로 그것이오.
몸 더러워졌다는 생각은 망상이고 악몽이라는 법륜의 말은 그래서 참이오.
피해자의 존재는 완전하고 존엄하니 훼손되지 않았음을 깨달아야 하오.
단지 부싯깃이 부실했고 날씨가 궂어 비가 왔고 젖은 나무가 잘 타지 못해 큰불이 되지 못하고
마음이 아프게 되었소.
이제 우기는 지났고 마른 나무 구해서 불을 더 키워가면 되오.
결정해야할 때가 온 것이오.
나를 완전한 사람으로 대접하고 존엄하게 대할지 계속 아픈 상태로 둘지.
전자로 결정 내리면 내 존엄을 훼손하는 자에게는 죽빵을 날리고 독립하고 복수하는 것이오.
일단 무언가 결정하고 실천하는 것이오.
내가 아픈 것은 우주도 아프기 때문이오.
우주가 존엄한 만큼 나도 존엄하다오.
사실이나 진실보다는 내가 중심이다.
지금 이 사회는 나에게 행복을 주는 사회인가?
이 대한민국은 나에게 행복을 주는 공동체인가?
나는 이 대한민국이 결코 나에게 행복을 주는 곳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이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에 살아가면서
이웃에게 행복을 주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내가 변하면 사회가 변할것이라는 생각때문에.......
법륜은 자기 생각만 한것이지 공동체 의식이 없었다.
우리는 혼자 살아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웃과 살아가야하고 남편과 살아가야 하고 자녀와 살아가야한다.
그러나 아픔을 드러내지 못하고 숨기고 살아갈수 밖에없는것이 이 세상의 삶이다.
나는 숨길것이 없는 사람임으로 숨기지 않고 살아갈수 있지만....
아픔을 숨기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것을 해소할수 있는 공간이 있거나 그것을 받아줄수 있는 사회가 있다면
그 고통이 줄어들수 있을텐데.....그것이 쉽지는 않다.
이 사회가 성폭행범을 보는 눈과 피해자를 보는 눈이 아직은 시대착오적인 판단을 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사회가 성폭행범을 처벌하는 것에 부터 볼수 있다.
피해자를 두번 죽이는 경찰과 검찰 법원......그들이 변하지 않으면 피해자는 숨어버린다.
이제는 사회가 변해서 피해자가 조금씩 당당해지고 있다.
아버지에게 피해를 입은 딸은 비록 상처를 안고 있지만 당당하게 그것을 세상에 내밀었고
세상은 그것에 대답을 해야한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하겠냐? 라는 질문을 사회에게 던진것이다.
법륜은 "너가 알아서 스스로 해결해라? 라고 말한것이다.
피해자는 "내가 그것을 못해서 세상에 이것을 까발린줄 아느냐!"라고 반문할것이다.
이미 피해자의 글에서 스스로 존엄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다.
피해자는 이미 스스로 질문을 하고 답을 이미 찾았다는 것이다.
우리가 답을 줄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피해자는 답을 요구한것이 아니다.
그러나 법륜을 해답을 제시했다. 그건 해답이 아니다. 피해자가 원하는 해답이 아니다.
사회는 피해자에게 대답해야한다. 그것은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당당하게 살아가라고 말해야 한다.
당신은 피해자가 아니라고 말이다.
여기에서 법륜은 질문자를 희생양삼아 가족이라는 그리고 나아가 가족주의를 축으로 하는 우리 사회를 보호하고 있소.
인류학적으로 이런 현상은 원래 흔하오. 그리고 이러한 희생양 만들기는 원래 성직자들의 역할이었소. 법륜은 무의식적으로 고대로부터 이어지는 사제들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셈이오.
물론 원시사회에서는 이게 통했고 사실 아직도 통하고 있소. 누군가를 죽여 공동체를 안정시키는 짓은 참으로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소.
하지만 21세기는 개인의 시대이고 존엄의 시대이고 한 사람이 인류 전체의 대표자가 되는 시대라오.
존엄한 개인의 자궁이 되지 못하는 공동체는 가차없이 도태되고 격리되는 시대라오. 그것이 설령 가족이고 학교이고 직장이고 심지어 국가라도 어림없소. 전부 쓰레기통행오
지금도 인도네시아의 주술사는 부족민에게 주문과 부적을 처방하고 있소. 법륜도 마찬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