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광장이 그대를 부른다” 서태지가 컴백한다는데 그래봤자다. 이미 망가졌다. 철 드는데 실패했다. 그는 아직도 16살 소년 흉내를 내고 있다. 그에게는 존 레넌이 말하였고 신중현이 말하였던 그것을 말할 용기가 없다. 있는 수요에 공급한다면 상품이다. 장사꾼에 불과하다. 예술가가 아니다. 왜? 미완성이기 때문이다. 완제품이 아닌 반제품을 팔기 때문이다. 완제품이 아니면 안 된다. 소통이 아니면 안 된다. 진짜가 아니면 안 된다. 그의 콘서트에 백만 관객이 와도 단지 상품거래에 불과하다. 젊은이들의 가슴에 영감을 불어넣어 주지 못한다. 거듭나게 하지 못한다. 그의 음악에 혼이 없다. 옛날에는 조금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왜인가? 그는 맞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철이 든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예술이란 무엇일까? 완전성은 무엇일까? 완제품은 무엇일까? 소통은 무엇일까? 진짜는 무엇일까? 영감은 무엇이고 혼은 또 무엇일까? 이문열이 아무리 많은 책을 팔아도, 김용옥이 TV에 나와서 허벌나게 떠들어도 끝내 어른되지 못한다. 세상 전부와 홀로 맞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철이 든다는 것은.. 혼자가 된다는 것이다. 저 광장에 선다는 것이다. 역사의 무게를 오롯이 짊어진다는 것이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다. 예수처럼! 백범처럼! 전태일처럼!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뚜벅뚜벅 걸어간다는 것이다. 거기 또다른 지평이 있다. 무엇인가? 내가 태어나기 전에 모든 것이 세팅되어 있었다. 내 성도, 내 이름도, 내 성별도, 내 신분도 나의 의지로 선택한 것이 아니다. 어머니, 아버지, 누나, 형, 가족, 친척, 대한민국.. 모든 것이 사전에 결정되어 있었다. 대통령은 원래 박정희로 정해져 있었다. 나는 어릴 때 박정희=대통령으로 알았다. 모든 것이 원래 정해져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어른들 말 잘 듣고 내 자리만 잘 찾아가면 된다고 여긴 것이다. 어느 순간 박씨 아닌 다른 대통령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유신 아닌 다른 체제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충격받았다. 문득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시간은 정지되었고 태양은 빛을 잃었다. 숨조차 쉬지 못한다. 모든 것이 사전에 정해져 있다면.. 완벽하게 세팅되어 있다면.. 정해져 있는 내 자리만 찾아가면 그만이다. 임금은 임금자리, 신하는 신하자리, 백성은 백성자리.. 봉건제도다. 남편은 남편자리 아내는 아내자리.. 전근대의 성차별이다. 그게 편하다. 법으로, 제도로, 전통으로, 관습으로, 규범으로 그것은 정해져 있으니 편하다. 궤도를 달리는 열차처럼 제 시간에 꼬박꼬박 출석만 해주면 할 일 다하는 거다. 수 천년 동안 군말없이 그렇게 노예되어 살아왔던 거다. 어느 순간 깨닫는다.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 선택의 기로에서 되돌아보면 믿고 의지할 것은 하나도 없다. 가족도, 국가도, 민족도 모래성이다. 지푸라기 같다. 우주 안에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바로 거기가 출발점이다. 그 지점에서 자신이 전부 새로 세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회로 나아갈 때, 직장을 정할 때, 결혼할 때, 질병에 걸렸을 때, 가족을 잃었을 때, 좌절할 때, 거부되고 배척될 때 인간은 비로소 깨닫는다. 인간은 본래 버려진 존재라는 사실을. 그러므로 구원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철 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선택해야 한다는 사실을.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든 가치, 모든 의미가 다 그러하다는 사실을. 서태지의 노래에 그러한 고민이 없다. 이문열의 소설에 그러한 고민이 없다. 김용옥 강의에는 그러한 고민이 전혀 없다. 서태지의 저항은 기득권의 철옹성에 대한 순진한 소년의 치기어린 투정일 뿐이다. 무엇인가? 그의 투정은 국가, 민족, 제도, 시스템이 왜 가엾은 어린 나를 보호해주지 않느냐는 칭얼댐이다. 그것이 본래 무(無)였다는, 허(虛)였다는, 적멸(寂滅)이었다는 깨달음이 그의 음악에 존재하지 않는다. 허공에다 대고 목청높여 항의하고 있었더라는 깨달음이 존재하지 않는다. 존 레넌의 Imagine에는 그것이 있는데 서태지에겐 없다. 그러므로 불완전하다. 제로베이스에서 출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간에서 어중간하게 출발해서 중간에서 어중간하게 결론내렸으므로 반제품이다. 완제품 아니다. 그러므로 예술이 아니다. 잘 팔리는 상품에 불과하다. 완전성이 아니면 안 된다. 정상에의 초극이 아니면 안 된다. 그 경계를 넘어서고서야 인간으로 하여금 전율하게 하는 소통의 혼은 실리는 것이다. 서태지의 음악에 그 혼이 서리지 않았다. 어린아이의 손에 쥐어주는 사탕에 불과하다. 어린이날 하루 써먹는 고무풍선이다. 축제가 끝나고 날이 저물면 바람은 빠지고 그 고무풍선은 쓸쓸하게 버려진다. 내 인생이 통째로 그 길거리에 버려진 채로 떠도는 고무풍선임을 절절하게 깨달아야 한다. 눈물겹게 깨달아야 한다. 국가나, 제도나, 민족이나, 전통이나, 관습이나, 시스템의 헛점을 폭로하고 고발한다는 식은 유치하다. 인간은 원래 벌거벗고 태어난 존재다. 백지상태에서, 제로베이스에서, 원점에서 다시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미 존재하는 국가가 개인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다. 전혀 아니다. 착각하지 말라. 꿈 깨라. 진짜는 저 광장에서 만들어진다. 그대 저 광장에서 오늘 새로 탄생하는 진짜를 목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역사의 현장을 목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시대의 증언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지 않으면 그대 영원히 어른이 되지 못한다. 미성숙할 뿐이다. 그대 인생 통째로 그러하다. 혼이 서리지 않은 모조품. 프로야구 감독이 나이가 서른이 넘고 자식이 두엇 있는 선수들을 부르며 ‘우리 애들이 어쩌구...’ 그런다. 감독 입장에서 선수는 여전히 아이다. 왜 나이 서른이 넘어도 그들은 여전히 아이 신세를 면치 못하는 것일까? 시스템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궤도 위를 달리기 때문이다. 팀에 갇혔기 때문이다. 깨닫기 위해서는, 철들기 위해서는, 어른되기 위해서는, 그 궤도, 그 시스템을 벗어나야 한다. 그 모든 것이 적막한 허무 위에 쌓은 모래성임을 알아야 한다. 87년의 그 여름에 동대문에서 종로 2가까지 정신없이 내달렸다. 최루탄, 지랄탄, 사과탄, 벼라별탄을 다 맞아도 끄떡없다. 처음 30분 정도 눈이 따가울 뿐이다. 코앞에서 사과탄이 터져도 부릅뜬 눈 감지 않는다. 나는 그해 여름 저 아스팔트 위에서 철이 들었다. 자부심을 얻었다. 당당함을 얻었다. 통쾌해졌다. 흐르는 계곡 물에 발 담그고 시원한 막걸리 한 잔 걸치고 큰 너털웃음 한 번 터뜨릴 수 있었다. 소요자재로 돌아가기다. 저 푸른 하늘 저 까마득하게 높은 위에 무엇이 있는지.. 저 깊은 땅 저 깊숙한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내가 왜 이 인생을 꼬박꼬박 살아가야 하는지.. 지푸라기 같은 인생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 그때 알았다. 내 인생을 일관하는 테마와 온갖 질곡을 평정하는 나만의 스타일이 그제 정해졌다. 나침반과 지도를 얻었다. 태양은 새롭게 빛나고 아침 안개는 그 거룩한 휘장을 걷어냈다. 돛 높이 올리고 거침없는 항해 가능하다. 원래부터 정해져 있다는 따위는 없다. 전쟁이 나면 총을 들어야 국민의 자격이 있다. 국가는 그 지점에서 건설되는 것이다. 진짜 국가, 진짜 헌법은 조상에게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저 광장에서 매 순간 새로 태어나는 것이다. 저 광장이야말로 국가를 잉태하는 위대한 자궁이다. 무질서의 극을 넘은 저 광장에서 인간에 대한 근원에서의 신뢰가 싹튼다. 조직과, 시스템과, 제도와, 질서에 의존하는 한 그대 결코 인간을 신뢰할 수 없다. 진정 사랑할 수 없다. 그럴 때 아이처럼 울게 된다. 광화문에 버티고 선 저 컨테이너 박스들을 보라. 저것이 이명박의 울음소리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운다. 펑펑 운다. 눈물 콧물 흘리면서 운다. “엄마 왜 나를 도와주지 않아!?” 들리지 않는단 말인가? 저 광장에 서 보지 않는다면, 그대 목숨 걸어보지 않는다면, 그대 영원히 어른이 되지 못한다. 어린아이는 태어날 때 모든 환경이 사전에 세팅되어 있다. 그것은 건드릴 수 없는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내 자유의지의 결정범위는 한정되어 있다. 나는 단지 정해져 있는 내 할 일만 하면 된다. 문제는 방해자다. 방해자만 제거하면 된다. 국가가 불안한 건 간첩 때문이지. 사회가 불안한건 도둑놈 때문이지. 간첩은 신고하면 되고 도둑놈은 잡으면 되지. 높으신 나으리들이, 믿음직한 순경들이 잘도 해결해주지. 내겐 착한 아이의 배역이 주어져 있고 그 배역을 열심히 연기하면 되지. 그러나 과연 그럴까? 그대 상실할 때, 그대 낙방할 때, 그대 배신당할 때, 그대 운명의 기로에 설 때 아무도 대본을 보여주지 않는다. 퍼뜩 깨닫는다. 그대 인생이 통째로 우스꽝스런 연기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진짜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철이 든다는 것은 그 세팅되어 있는 모든 것을 無(무)로 되돌리기다. 원점에서 새로 시작된다. 그것들이 차차로 세팅하여 가는 전체과정을 안다. 초기조건을 안다. 자궁을 얻는다. 출발점을 확인한다. 시작부터 끝까지 1사이클의 전개과정을 안다. 피드백을 얻는다. 기어이 완성한다. 수도꼭지만 틀면 저절로 물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유수지로부터 파이프를 연결해서 물이 나오도록 했다는 것을 안다. 누군가가 저 아스팔트 위에서 그 거룩한 피를 흘렸기 때문에 오늘 그대에게 허용된 약간의 자유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순식간에 무로 되돌아갈 수 있는 아슬아슬하고 조마조마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창조자의 관점에 서는 것이다. 정해진 궤도 안에서 그냥 자기 자리만 찾아가면 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알고보니 대통령은 그냥 어떤 아저씨였더라. 국가는 그냥 사람들의 복잡한 약속과 관습의 어정쩡한 집합들이었더라. 길 모르고 무리지어 가는 군중처럼 말이다. 어설프기 짝이 없다. 윤리, 도덕, 규범, 체제, 그 모든 것이 근본을 알 수 없다. 모래성 위에 지어진 허상이다. 그대는 그만 털썩 주저앉고 만다. 어쩔 것인가? 그대는 어떤 나침반으로 인생의 항로를 새로 설계하고 세상과 맞서는 그대의 고유한 포즈를 세팅할 것인가?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면 그 궁극의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에 대한 근원의 신뢰다. 그 신뢰는 존엄에서 얻어진다. 그 존엄은 인간 개개인이 가치판단과 의사결정의 1 단위로 작동하는 데서 얻어진다. 내가 주인이고 내가 결정한다. 내가 서명한다. 철저한 개인주의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한 개인의 무게가 인류 전체와 맞먹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저 광장에 서 보지 않고는 그대 그 신뢰를 얻을 수 없다. 그 존엄을 얻을 수 없다. 그 주인자격을 얻을 수 없다. 그럴 때 그대 인생 헛살고 만다. 그대가 권력을 믿고, 제도를 믿고, 법을 믿고, 시스템을 믿고, 부모처럼 의존하며 의심하기를 두려워 하는 한.. 그대 어떤 글을 써도 아류에 불과하다. 어떤 작품을 내도 모조품에 불과하다. 반제품에 불과하다. 어쩌면 그대 인생이 통째로 짝퉁인지도 모른다. 그 모든, 그 전체과정이 오롯이 그대 내부에서 나와야만 한다. 국가도 개인도 매 순간 새로 태어나야 한다. 저 광장에서 오늘 진짜가 탄생한다. 목격하고 증언하기를 두려워 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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