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youtube.com/watch?v=FIGGdsMrsw8&feature=youtu.be
- 화질이 안 좋게 올라갔는데 설정에서 퀄리티를 높여서 보십시오.-
예술의 이해 구조론은 의미가 아니라 관계다. 의미는 그림 안에서 기승전결의 질서를 찾고 관계는 그림 밖에서 그 질서를 찾는다. 무엇보다 인류역사 전체가 하나의 그림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 안에 기승전결이 있다. 한 폭의 그림 안에도 기승전결이 있다. 조형적 질서가 있다. 인류의 기승전결이라는 조형적 질서 안에서 그림의 기승전결을 찾는 것이 그림을 이해하는 것이다. 두 그림이 만난다. 두 세계가 만난다. 그 만남은 하나의 점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화가는 점을 그린다. 아니 점을 그려야 한다. 점을 그리지 못하면 화가가 아니다. 다들 점을 그리고 있다. 자연의 봄여름가을겨울이 있고, 원형이정이 있듯이, 인의예지가 있듯이, 전체과정이 있고 그 안에 결이 있다. 이를 통짜덩어리로 이해하는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한다.
최승호 시인의 인터뷰를 참고하자. 이미지는 살이고 리듬은 피요 의미는 뼈다. 그런데 살과 피는 빼고 뼈만 보라고 한다. 아니 틀렸다. 이미지는 살이고 리듬은 뼈고 의미는 허튼소리다. 허튼소리 하는 자는 때려잡아야 한다. 의미가 들어가면 그것이 논설이지 어찌 시이겠는가 말이다. 의미를 배제하는 지점에서 시는 시작된다. 의미가 들어가는 지점에서 시는 사망한다. 그림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는 사람은 좀 아닌 거다. 그런 식의 감동을 주려고 하는건 아카데미즘이다. 인상주의는 감동을 주지 않는다. 감동은 의미에서 나온다. 그 감동을 때려잡아야 한다. 거기가 인상의 출발점이다. 그림이 단순히 브랜드 값이라고 생각해도 곤란하다. 결을 읽어야 한다. 화룡점정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조응은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기승전결 안에 방향성이 있다. 방향성 다음에 완전성이 있다. 때려죽여여 할 아카데미즘은 고흐의 초년그림과 같고 피카소의 청색시대와 같다. 이론적인 그림도 좋지 않다. 고갱이 고흐를 비판할 때와 같고, 피카소가 입체파를 실험하던 때와 같다. 추사가 중국그림체를 모방하던 시대와 같다. 그게 이론그림이다. 의미를 따지는 것도 양식이 덜 만들어진 이론그림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덜 여물었다. 조응은 청색시대를 졸업하고 이론시대를 졸업하고 자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등장한 것이다. 그런 결을 읽을 수 있어야 진짜가 된다. 우주의 결과 내 안의 결이 만나는 지점에서 조응은 탄생하며 그게 그냥 나오는게 아니고 그 유파의 리더가 되었을 때, 그래서 따르는 무리에게 새로운 방향을 제시할 때 비로소 나와주는 것이다. 추사가 점 하나 찍었을 때는 따르는 선비가 3천이었다고 한다. 이우환도 세상의 무수한 스티브 잡스들이 자신을 모방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점 하나 찍어주는 것이다. 스티브 잡스의 아이폰, 아이팟, 아이패드, 맥북에는 돈을 잘 갖다 바치면서 그 아이디어의 원조인 이 그림에는 10원도 아깝다는 인간이 인류의 99퍼센트다. 그러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1프로다. 1프로인 우리가 세상을 이끌어간다. 우리가 이 하나의 점이다. 우리가 세상에 점 하나 찍는다. 우리가 아담의 손끝과 하느님의 손 끝이 만나는 지점이다. 우리가 세상의 나아가는 방향성을 제시한다. 순수성, 활동성, 대칭성, 거쳐서 완전성으로 나아간다. 그림을 그린다는 생각을 한다면 틀렸다. 여러분 마음속에 이미 그려져 있어야 하며 그림을 보는 순간 ‘그래 바로 이거야’ 하고 터져나와야 한다. 오래 기다렸던 것이어야 한다. 그런 분위기 안에서 그림은 스스로 캔버스를 찢고 세상 안으로 뛰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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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0쯤
어? 싶어서 캡쳐해봤습니다
좋은데요~
그렇다고 손가락만 본건 아니구요
달을 보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ㅎㅎ
구조론 회원들도 잘 준비해서 느낄 수 있는 자리에 서라?
그리고 느꼈으면 활용해라. 잡스처럼.
하지만 잡스처럼 입 닦지말고 양심껏 지불해라?
이렇게 정리해 봅니다
지불에 방점을 찍으면 곤란하고 중요한 것은
금덩이가 눈앞을 지나갈 땐 적어도 알아봐야 한다는 거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금덩이가 눈앞을 지나갈 땐 가만있다가 지나가고 난 다음에 화를 내지요.
금덩이를 알아보려면
자신이 적어도 은덩이는 되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은덩이가 되는 것도 쉬운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것은 수련으로 이룰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금덩이가 될 필요는 없고
그 금덩이 세력 뒤에 가서 줄 서면 됩니다.
예수도 줄 잘못 서는 바람에 구세주가 되어버린 거고
공자도 줄 잘못 서는 바람에 성인 반열에 올라버린 거고
석가나 혜능이나 성철이나 다 마찬가지요.
피카소도 세잔 뒤에 줄 섰다가 그렇게 되었고
원래는 다 줄 서는 건데
흐름을 타면 성인도 되고 위인도 되고 대가도 되고 그러는 거죠.
엉뚱한 줄에 서면 곤란하고.
관계를 보아야하는데 계속 내용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네요.
줄에 서있다고 생각될때마다. '어 이줄이 아니네..?!'
의미로서가 아니라 관계로서 이해해야되는데..
중고딩때 영단어 외우는것처럼 계속 단어의 의미에만 치중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습관이란게 인생을 걸쳐 만들어진기라.. 생각의습관의 길을 새로 만드는것이 수월치가 않네요.
송두리채 바꿔버리는.. 잠이 안와 새벽2시에 거리를 걷다가 올정도의.. 두근거림과 깨우침이 쉽지가 않습니다.
지금 저에게는 구조론을 알아가는 것 역시 확률을 높여가는 방법밖에 없는거같네요.
세잔과 피카소의 만남 또는 앙리 마티스의 만남은 입체파와 야수파를 낳고
살바도르 달리와 루이스 부뉘엘의 만남은 안달루시아의 개와 황금시대를 낳고
거투르트 스타인과 헤밍웨이의 만남은 노인과 바다를 낳고
장 그리니에와 알베르 까뮈의 만남은 이방인을 낳고
앙드레 바쟁과 장뤽 고다르 또는 프랑스아 트뤼포, 끌로드 샤브롤과의 만남은 누벨바그를 낳았다.
세키네 노부오의 작품을 본 이우환은 내가 기다려온 것은...바로 이런 것이야! 라며 반응했고
모노파의 이론적 토대를 만들었으며 작품 조응을 내놓는다.
만나야 할 사람끼리 온전히 만날때 낳음이 있다. 그 안에 방향성이 있다.
세상은 참!!
돈오를 점수로 설명하려니 늘 한계가 있기 마련이죠.
돈오를 돈오로 알아보는자는 1%
돈오를 점수를 통해 돈오라고 억지로 아는자99%
점수를 통해 돈오를 알아가고
돈오는 점수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는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