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구글검색으로 우연히 얻은 글 일부를 이미지 파일로 저장하였습니다. 원본은 http://cafe.naver.com/rafulra/1833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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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해보면 의외로 점수를 주장하는 사람이 많음을 알 수 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성철스님이 떠난지가 엊그젠데 벌써 다 잊어버렸을까? 그런데 원래 그렇게 되게 되어 있다. 모든 가르침은 일원론으로 시작하지만 결국 이원론으로 변질된다. 율곡으로 시작되지만 퇴계로 변질된다.
무엇인가? 수요공급의 법칙이다. 시장이 원하는 대로 말해주는 것이다. 질문하는 사람이 원하는 답을 해준다. 만약 돈오가 옳다고 말하면 황당한 반격을 받게 된다. '그런데 스님은 여기서 뭐하고 있죠?' 돈오가 옳다면 게임끝. 상황종료. 하릴없이 절밥을 축내고 있을 이유가 없다.
사찰도 필요없고 종교도 필요없다. 스님도 필요없고 신도도 필요없다. 그러므로 자기모순, 자가당착, 이율배반의 모순에 빠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점수하지 않을 수 없다. 애초에 종교라는 시스템 자체가 잘못인 거다. 인정해야 한다. 필자가 돈오를 말하는 것은 불교를 부정하는 거다.
본문에 드러나 있듯이 이 양반들은 결과에 관심이 많다. 깨달음을 무언가 되는 것이라고 믿고 그것이 되려고 한다. 그걸 타인에게 입증하려고 한다. 계속 방어전을 하려고 한다. 계속 그 지위를 누리려고 한다. 웃기는 짓이 아닐 수 없다. 챔피언 되면 그만이지 방어전은 해서 무엇하리?
결과가 아닌 원인을 바라보아야 한다. 김대중 대통령은 '무엇이 되고자 하지 않았고 무엇을 하려고 했다'고 늘 말씀하셨다. 대통령이 되는 것과 남북화해를 하는 것은 다르다. 되는 것은 결과고 하는 것은 원인이다. 끝은 필요없고 시작이 중요하다. 불쏘시개만 던져놓고 표표히 떠난다.
그 불은 어떻게 될까? 관심없다. 나는 기승전결의 기에 선다. 다만 한 알의 작은 불씨를 던질 뿐이다. 그 결과는? 여러분의 몫이다. 세상의 몫이다. 내 일은 여기까지. 깨달으면 그 뿐 그것으로 무엇을 하고자 할 필요는 없다. 불은 타오른다. 세상을 뒤엎는다. 그것은 세상의 몫이다.
깨달음은 '하는' 것이지 '되는' 것이 아니다. 하면? 잘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다.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다. 결과는? 확률이 결정한다. 그렇게 조금씩 확률을 높여가는게 중요하다. 그래서 되면 좋고 안되어도 그만이다. 내가 바라는 바는 무언가 결실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인간선언이다.
◎ 하면 - 된다. ◎ 하다 - 되다. ◎ 원인 -> 결과
전태일이, 윤봉길이, 이순신이 무언가 대단한 업적을 이룬 것은 아니다. 전태일 이후 나아지지 않았고, 윤봉길 이후 곧바로 독립되지 않았고, 이순신 이후에도 나라는 여전히 어려웠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있음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수한 전태일, 윤봉길, 이순신을 낳았다.
깨달음은 총을 손에 쥐는 거지, 그 총을 잘 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총을 쥐면 자연히 사격연습을 하게 된다. 사격연습은 하거나 말거나 각자 알아서 할 일이다. 그런데 저절로 하게 된다. 왜? 재미있으니까. 사격을 잘해야만 깨달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총을 손에 쥐어야 깨달음이다.
사격을 해서 몇 방을 맞춰야 한다는 커트라인 따위는 없다. 개가 깨달으면 잘 짖을 것이요, 화가가 깨달으면 잘 그릴 것이요, 가수가 깨달으면 잘 노래할 것이다. 어느 정도로 잘해야 합격이라는 따위는 없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다 그림을 잘 그려서 부자가 된 것은 전혀 아니다.
1만명이 총을 쏜다고 치자. 잘 쏘는 사람도 있고 못 쏘는 사람도 있다. 1만명이 깨달았다고 치자. 제대로 깨달은 사람도 있고 뻘로 깨달은 사람도 있다. 그 흐름 안에서 그 문제는 저절로 용해되고 해소된다. 그 안에서 무수한 상호작용이 일어난다. 시장이 성립하고 생태계가 작동한다.
1명을 완벽한 명사수로 만들기보다, 일만명에게 총을 나눠주는게 현명한 방법이다. 스마트폰이 세상을 바꾸는 이유는 졸라리 많기 때문이다. 소니의 완벽함보다는 구글의 다국적군이 이긴다. 깨달음의 시장, 깨달음의 생태계, 깨달음의 방향성이 형성되면 점수의 문제는 저절로 사라진다.
깨달음이 세상에 먹히지 않는 이유는 덜 깨달아서 그런게 아니고 수행이 부족해서가 아니고 단지 세상이 깨달음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만명에게 총을 나눠줘서 세상을 바꾸는게 중요하다. 시장을 만들고 생태계를 만들고 방향성을 제시하고 도도하게 전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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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이야기는 종교집단에서 하는 소리입니다.
이 사이트에서 할 말씀은 아닙니다.
경지라는 단어 자체가 비교어입니다.
경계를 나누면 이미 깨달음과 거리가 멀어졌습니다.
깨달음은 이다/아니다이고
그 이하에 따라오는
있다/없다
같다/다르다
옳다/그르다
맞다/틀리다가 아닙니다.
수행으로서의 종교. 혹 생활로서의 종교. 그거에 잘못은 없는데,
'완전성' 혹은 '일반성'이 전제되지 않는 수행은, 그냥 '열심'일뿐. 자기 만족.
그럼에도, 인간이라는 존재는, 무언가를 열심히 하지 않으면 불안해한다는것.
그것만은 분명한계.
3명6통이 종교 집단에서 하는 말이라면
여기에서 돈오돈수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종교집단을 예를 들어 설명하는 것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나요?
무슨 말씀인지?
한국어가 안 되시는지?
억지 말씀이오.
그야말로 고추밭에 우담바라가 필 말씀.
부처님 볼에 우담바라가 피면
'아 요새 스님들은 저러고 노는구나'
하고 웃어넘길 일이지 그걸로 문답하고 해설하고 해야 하나요?
3명 6통 어쩌고 하면
'아 옛날 스님들은 동지섣달 긴긴 밤에 저러고 놀았구나'
하고 웃어넘길 일이지
턱도없이 구조론 연구소에서 논할 거리가 된다고 믿소이까?
종교 물에서 놀고 있다보니 항상 그런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조론에 적응하기 까지 잘 꼴봐 주시기 바랍니다. ㅎㅎ
가끔씩 신선함을 느끼곤 합니다.
기본적으로
진짜와 가짜를 가려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비교판단되는 용어를 사용하면 일단 가짜입니다.
예컨대 누가 공중부양을 한다고 하면
1센티를 부양하는지 100미터를 부양하는지가 판단되어야 합니다.
무슨 신통력이 있다고 하면 어느 정도의 신통력인지가 판단되어야 하는 거죠.
이런 식으로 2차적인 숙제를 남기면 일단 개뻥입니다.
진짜라면 절대어를 써야 합니다.
점수는 어느 정도의 점수냐 하는 숙제를 남깁니다.
숙제하면 일단 가짜지요.
졸라리 고맙수다.
신통력 하니까 떠오르는 이야기
어느 마을에 성자가 살고 있었다. 그 명성이 온 나라에 자자했다.
하루는 신통력을 지니고 있다는 남자가 성자를 찾아왔다.
능력 대결을 하기 위해서였다.
남자가 말했다."저는 오랜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제 능력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는 물위를 걸어서 강 저편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시 이쪽으로 물위를 걸어 도달했다.
"어떻습니까. 제 신통력이. 성자라고 소문이 자자하신데 저에게 뭔가 보여주시겠습니까?"
성자가 물었다. "물위를 걷기까지 얼마나 걸렸소?"
남자는 으쓱하며 대답했다. "무려 18년이나 수행했습니다. 18년을!"
성자는 남자를 측은하게 보더니
"거 바보같은 짓을 했구만.. 천원만 내면 나룻배로 강 저편까지 데려다 주는데.."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의 논쟁은 스님들의 생존권이 달린 문제겠군요.
돈오돈수
절에 있는 스님 = '나 아직 못 깨달았수다'
돈오점수
절에있는스님 = '깨달음에는 끝이 없수다'
돈오는 금을 발견하는 것이고 점수는 그 금을 캐는 것입니다.
돈오 - 금을 발견하면 되지 굳이 내 손으로 곡괭이 들고 금을 캐야 하나?
점수 - 금을 발견하면 뭣해? 내 손으로 금을 캐야 내것이 되지. 아냐?
언뜻 보면 둘 다 맞는 말 같지만 다 쓸데없는 논쟁이요.
금을 발견하고 광업권을 등록하면, 설사 그 땅이 남의 땅이라도 내게 광권이 있으므로
그 토지를 매수하여 광산을 열 수 있고, 안 되면 광업권을 전매하면 됩니다.
과학자는 진리를 발견하면 그 뿐
발명가를 발명하면 그 뿐
지사는 요원의 들불을 일으키면 그 뿐
기승전결의 기에 서면 그 뿐
그 나머지는 사회의 몫입니다.
비행기를 발명하면 뭐해? 비행기 만들어서 팔아서 떼돈을 벌어야지... 이거 멍청한 소리입니다.
발명만 하면 됩니다.
세종이 한글을 발명하면 되는 거지
그 한글로 용비어천가도 써줘야 하는가요?
홍길동전도 쓰고?
그건 후세의 몫입니다.
깨달음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혼자 고립되어 있다면
제 손으로 금을 발견하고 광산열고 채굴하고 전 과정을 다해야 합니다.
만화가들은 제 손으로 아이디어 내고, 콘티짜고, 데생하고, 지우개질 하고, 먹칠하고 다 합니다.
근데 요즘은 그렇게 안 해요.
요즘 잘 나가는 만화가들은 문하생에게 다 시킵니다.
스님들은 혼자 산중에 고립되어 있기 때문에
전과정을 혼자 도맡아 하느라고 개고생인 것이며 그것이 점수입니다.
그 복잡한 후속조치 과정은 구조론이 대신해 줍니다.
걍 구조론 배우면 됩니다.
구조론 아는 사람을 사귀어 놓기만 해도 됩니다.
일단, '열심히' 해보자. 의심하면 됩니다. '생활'은 일종의 '권태'와 같으므로, '열심'히 하는게 의미있습니다.
안그러면, 술이나 마약 도박 같은쪽으로 빠지니까요. 하지만, '진리'를 찾는일은 '일상'과는 하등 관계없습니다.
diagram을 그릴수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닫아'놓고 unkown을 찾아가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열심히하는건데, '자기불안'의 다른 이름입니다.
삼명육통[ 三明六通 ]
세 가지 지혜와 여섯 가지 신통력. 6신통이란, ① 자유로이 원하는 곳에 나타날 수 있는 신족통(神足通), ② 자기와 다른 사람의 미래의 운명과 상태를 아는 천안통(天眼通), ③ 보통 사람이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천이통(天耳通), ④ 다른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볼 수 있는 타심통(他心通), ⑤ 자기와 다른 사람의 과거세의 운명·상태를 아는 숙명통(宿命通), ⑥ 현세의 번뇌를 모두 끊고 깨달음에 이르는 누진통(漏盡通)을 말한다. 이 중 천안통의 지혜인 천안명, 숙명통의 지혜인 숙명명, 누진통의 지혜인 누진명의 세 가지를 특히 3명이라고 한다.
작은 깨달음에서는 숙명통까지는 할 수 있지만 누진통과 누진명은 깨달음의 최고 경지에 이르러야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돈오돈수의 경지는 누진통과 누진명을 얻은 경지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