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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1959 vote 1 2012.12.09 (14:42:51)

 

    큰 바위님의 리플을 밑에서 가져옵니다.

 

    승자독식
    전쟁필수
    약육강식
    부익부빈익빈은 당연한거.
    이렇게 보면 존엄은 어디에 들어서야 하는 건지.
    경쟁이 인류를 발전시켰다. 이건 모든 인류 역사, 교육, 철학, 경제, 정치가 그렇게 부추겨 온 것인데, 그래서 살아남기 위해서 경쟁할 수 밖에 없다고 그러는데, 거기에 존엄과 공동체가 어떻게 들어서야 하는 건지.......
    나는 승자독식을 싫어하고,
    전쟁보다는 평화를 좋아하고,
    약육강식보다는 약자돌봄
    부익부빈익빈을 당연한 것이 아닌 잘못된 구조로 보는데, 깨달음이 오질 않음.
    넬슨 만델라, 마틴 루터 킹 주니어, 예수, 석가, 카테리 테카키타, 화이트헤드, 데스몬드 투투, 유영모, 김구, 함석헌, 손양원, 틱낫한, 하워드 제어, 토마스 머튼, 소로우 같은 사람들을 좋아함. 국가, 민족에 얽매이지 않고 인간의 존엄을 놓고 소통하고 관계했던 사람들이기에.........

 

    ###

 

    이런 질문 흔하다. 아마 이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분들이 많을 것이다. 그래서 고맙다. 그런데 성의가 없다. 나는 구조론이 목숨을 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조문도 석사가의(朝聞道夕死可矣)라 했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정도의 기개는 있어야 한다. 이는 나의 희망사항이다. 무리인가?

 

    무엇인가? 진리를 이야기하는데.. ‘그래서? 내 몫은?’ 이러면 짜증나는 거다. 이거야 뭐 사업을 하는데 법인도 설립하기 전에 배당금 내놓으라는 식이 아닌가? 승자독식이 싫다고? 내 몫을 달라는 이야기다. 몫은 각자 챙겨야 한다.

 

    불쾌한 것은 ‘승자독식 전쟁필수 약육강식 부익부빈익빈은 당연한거.’ 라는 전제를 깔고 들어간다는 것. 나는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그렇게 느꼈다고? 느끼지 말고 읽어야 한다. 제대로 읽어보지 않고 대충 느끼려 하면 곤란하다.

 

    구조론은 이론이다. 이론은 결과만 따먹으려 하면 안 되고 과정을 꿰어야 한다. 구조론은 당연히 승자독식 반대, 전쟁반대, 약육강식 반대, 빈익빈 부익부 반대다. 그런데 최종결론이 그런 거고 과정은 심오하다. 함부로 규정할 수 없다.

 

    답은 현대성이다. 현대성을 획득하면 승자독식은 사라지고, 전쟁은 억지되고, 약육강식도 사라지고, 빈익빈 부익부도 없어진다. 봄에 새 가지가 날 때는 평등하다. 왜냐하면 현대성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가을이 되면 쭉정이와 알밤이 가려진다. 승자와 패자가 나누어진다. 구조론은 기승전결의 기만 주목한다. 결은 관심없다. 관계에 관심을 둘 뿐 의미는 필요없다. 의미를 취하려 들므로 승자독식 문제가 불거져 나오는 것이다. 가을의 수확에 집착하지 말고 봄의 탄생을 주목하라.

 

    입학만 하면 되지 졸업은 필요없다. 밥상을 받으면 되지 구태여 그 밥을 먹을 필요는 없다. 끽다거라 했다. 끝내 그 차를 마시지 않는 것이 깨달음이다. 성철은 그 잔을 비우지 않았고 숭산은 낼름 비웠다. 상대로부터 어떤 대접을 받느냐가 중요할 뿐 거기서 무엇을 취하느냐는 필요없다.

 

    문재인이 안철수를 어떻게 대접하느냐가 중요하지, 문재인 밑에서 총리나 장관을 하는데는 관심이 없어야 한다. 대접을 받으면 격이 올라가고 격이 올라가면 그 다음은 자기가 알아서 해야 한다. 떠먹여 달라면 곤란하다. 노무현은 고건, 이해찬, 정동영, 김근태, 추미애, 천정배 등에게 두루 기회를 주었다. 대접을 해준 것이다. 그 다음은 각자가 자기 능력대로 챙겨가는 거다. 왜 떠먹여주지 않느냐고 투정부리는 자는 이인제다.

 

    보통은 모로가도 결과만 내면 되지 않느냐고 말한다. 구조론은 결과 필요없고, 시작만 제대로 하면 된다는 거다. 시작은 탄생이다. 탄생의 지점에서 모두는 평등하다. 그것이 현대성이다. 결과를 보는건 봉건성이다.

 

    모든 사건은 어떤 둘의 만남으로부터 시작된다. 만남 그 자체를 보는 것이 구조론이다. 그것이 관계다. 만나서 '응응응을 했느냐'에 관심을 두는 자는 ‘개새끼’다. 그거 의미를 추구하는 거다. 그 의미를 버려야 한다.

 

    존엄은 만남이다. 이명박이 아무리 까불어봤자 나를 만날 수 없다. 만나도 진정으로 만날 수 없다. 북과 북채가 만나면 소리가 나야 한다. 소리가 나지 않으면 만나도 만난게 아니다. 만날 사람이 만나서 제 소리를 내는 것이 존엄이다.

 

    승자독식.. 무엇을 독식하지? 의미를 독식하는 거다. 근데 그 의미를 구조론은 부정한다. 결국 독식하는 것은 없다. 색즉시공이기 때문이다.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놀이를 하는데 자신이 이겼다고 우기는 자가 있다. ‘그래 네가 이긴거 맞다. 근데 너랑 안놀아.’ 우겨서 이기면 뭐하냐고? 관계가 끊기는데. 승리는 의미다. 의미를 추구한즉 관계를 잃는다. 관계없는 의미는 쭉정이다. 의미는 사라진다.

 

    빈익빈부익부? 부자는 승용차로 출근한다. 빈자는 지하철로 출근한다. 빈자와 부자는 마주칠 일이 없다. 그러므로 관계는 단절된다. 관계가 단절되면 끝난 것이다. 부자라고 뻐길 수 없다.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외계인과 같다. 외계인이 나타나서 ‘나 부자인데’ 해봤자 아무도 관심이 없다. 소통되지 않기 때문이다.

 

    답은 현대성이다. 넬슨 만델라, 마틴 루터 킹 주니어, 예수, 석가, 카테리 테카키타, 화이트헤드, 데스몬드 투투, 유영모, 김구, 함석헌, 손양원, 틱낫한, 하워드 제어, 토마스 머튼, 소로우들이 어떤 사람인지 다는 모르겠으나 현대성을 획득한 사람은 옳고 봉건성을 획득한 사람은 틀리다.

 

    율곡은 현대성을 획득했으므로 옳고 퇴계는 봉건성을 고집했으므로 틀리다. 문재인은 현대성을 획득했으므로 옳고 박근혜는 봉건성을 고집하므로 틀리다. 현대성은 탄생이다. 새로 탄생한 사람을 거느린 쪽이 옳다. 젊은이가 옳다.

 

    승자독식을 싫어하는가? 그렇다면 현대성을 획득하라. 전쟁보다 평화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현대성을 획득하라. 약육강식보다는 약자를 돌보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당연히 현대성이다.

 

    현대성은 새로 시작하는 거다. 반장을 학기초에 정해놓고 1년간 맡긴다면 봉건성이다. 매일 새로 반장을 뽑는다면 그것이 현대성이다. 재용이처럼 아버지 것을 제것이라고 우기면 봉건성이다. 과거가 미래를 억압하므로 봉건성이다.

 

    아마 본문에서 1등만 가치있고 2등은 의미없다는 식의 표현에 걸리셨나 본데 그런 자구에 얽매인다면 기본적으로 글읽기의 태도가 잘못된 거다. 구조는 관계, 깨달음은 관계다. 관계는 만남이고 그 만남의 시간은 특정된다. 하나 밖에 없다.

 

    예컨대 친구를 만난다면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는 거다. 여기서 언제의 시간도 어디서의 장소도 누구의 대상도 반드시 하나여야 한다. 1+2=3이다. 답은 하나다. ‘왜 3만 예뻐해? 4와 5는 밉상이냐?’ 하고 시비하면 곤란하다.

 

    현대성은 시간이고 시간은 무한하며 그러므로 모두에게 기회가 간다. 4는 2+2를 취하면 되고 5는 2+3을 취하면 된다. 공평하다는 거다. 1등을 없애버리고 모두가 꼴등을 하자 이건 답이 아니다. 모두에게 1등할 기회를 주는 것이 공평하다. 존엄은 절대적으로 1이다. 2는 이미 존엄이 없다.

 

    교회앞을 지나가다 찬송가 소리를 듣는다. 하느님을 찬양하고 있다. 그런데 그 찬양소리를 들은 하느님이 불쾌할 거란 생각은 왜 못할까? 찬양한다면 상대가 높고 자신은 낮다는 이야긴데 낮은 사람을 만나면 유쾌할까?

 

    낮은 사람은 노예다. 노예를 통제하는 사람은 마름이다. 그 사람들은 졸지에 하느님을 마름으로 취직시켰다. 하느님이 원하는건 찬양이 아니다. 북은 북채를 원하고 북채는 북을 원하지만 진짜는 소리를 내는 것이다.

 

    북도 북채도 필요없고 소리가 진짜다. 하느님은 친구를 원하며 그 친구는 대등하게 만나야 하고 북채의 북이 되어야 하고, 범종의 당목이 되어야 하고 서로 대등하게 1 대 1로 만나야 한다. 만나서 소리를 내야 한다.

 

    1 대 1로 만날 뿐 1 대 다(多)로 만나지는 않는다. 10만 명을 모아놓고 한꺼번에 만난다면 만나는게 아니다. 그건 만남이 아니라 지나쳐감이다. 당신은 60억명의 군중 속에서 1/60억의 자격으로 하느님과 만나겠는가?

 

    100대 1로 만나자고 하면 노무현 대통령이 초청해도 나는 안 간다. 그것은 만남이 아니기 때문이다. 1초를 만나도 대등하게 만나야 진짜다. 하느님이 60억초의 시간을 내면 60억명을 다 만날 수 있다.

 

    구조론은 결과가 아닌 원인, 하부구조가 아닌 상부구조, 양이 아닌 질, 결이 아닌 기, 끝이 아닌 시작, 가을이 아닌 봄, 죽음이 아닌 탄생에 의미를 두는 것이다. 내가 이창호와 바둑을 둔다면 그렇게 만난 그 자체가 영광이지 누가 이겼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파퀴아오와 메이웨더가 싸운다면 둘의 만남 그 자체에 의미를 두어야지 승자가 누구냐는 중요하지 않다. 메시와 호날두의 대결을 보고 싶은 거지 둘 중에 누가 센지를 판별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이렇게 친절하게 설명해줬는데도 ‘그럼 입학만 하면 되고 졸업은 필요없는 거에요?’ 하고 어깃장 놓는 사람 꼭 있다. 예컨대 그대가 김태희를 만났다고 치자. 만나서 어쩔건데? 그 장면 꽤 어색하지 않은가?

 

    나라면 어색한 만남은 갖지 않는다. 만나서 기껏 사인이나 받을 뿐이다. 더 이상 진도를 나갈 수 없다. 만약 진도를 나간다면? 결혼한다고? 그렇다면 먼저 그대가 걸맞는 남자가 되어야 한다. 어울리는 스펙을 갖추어야 한다.

 

    이건 김태희를 만나는 것과 상관없는 당신의 문제다. 무조건 김태희를 만나기만 하면 된다고 우기는 사람 있다. 그래서? 만나서? 호텔로 간다고? 가서? 어쩌려고? 결국 이 남자는 김태희를 만나는데 관심이 있는게 아니라 ‘나 김태희와 호텔에서 하룻밤 보낸 사람이야’ 하고 자랑하는데 관심이 있는 것이다. 누구에게? 우선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그 자랑은 또다른 기승전결의 기다. 결국 기에 관심이있는 거다. 시작부분에 관심이 있는 거다. 무엇인가? 입학만 필요하고 졸업은 필요없다는게 구조론의 입장이다. 그런데 대부분 졸업한다. 왜?

 

    졸업해야 스펙을 쌓아서 직장에 입학하고, 좋은 직장에 입학해야 좋은 여자와의 결혼에 입학하고, .. 계속 입학이 필요한 거다. 결국 입학에 관심이 있어서 졸업을 하는 거다. 졸업에 관심이 있어서 졸업하는 사람은 없다.

 

    인생의 졸업은 죽음이다. 죽으려고 사는 사람은 없다. 다들 탄생에 관심이 있는 것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 탄생하고 입학할 때 학생으로 탄생하고 사귈 때 우정으로 탄생하고 취업할 때 직장인으로 탄생하고 결혼할 때 부부로 탄생하고 자녀를 얻을 때 부모로 탄생한다. 계속 탄생에 관심이 있는 거다.

 

    나는 낚시하러 가는데 관심이 있지 물고기를 잡는 데는 관심이 없다. 물고기를 잡더라도 잡아서 탄성을 지르고 감탄하는데 관심이 있지 그 물고기를 먹는데 관심이 없다. 먹더라도 맛을 보는데 관심이 있지 배를 채우는데 관심이 없다.

 

    나는 건물을 설계하는데 관심이 있지 그 건물에 입주하는데는 관심이 없다. 입주하더라도 입주하여 다들 만족해 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는데 관심이 있지 거기서 잘 먹고 잘 사는데는 관심이 없다.

 

    나는 만나서 그대의 웃는 얼굴을 보는데 관심이 있지 만나서 어떻게 하는데는 관심이 없다. 어떻게 하더라도 그 어떻게 하는 과정의 또다른 만남에 관심이 있을 뿐 그 어떻게 해서 무슨 쾌감을 얻는데는 관심이 없다.

 

    인간은 끝없는 탄생, 끝없는 만남을 원할 뿐 그 탄생의 결과인 죽음, 그 만남의 결과인 소득에는 관심이 없다. 설사 그 소득에 관심이 있더라도 그 소득을 통한 또다른 만남에 관심이 있을 뿐, 거기서 무언가를 챙기는데는 관심이 없다. 챙기더라도 그 챙긴 것으로 또다른 레벨의 만남으로 나아갈 뿐 거기서 주저앉아서 음미할 생각은 없다. 어차피 공수래 공수거다. 인생에서 아무 것도 챙길 수 없다. 대신 만날 수 있다. 만나서 소리를 낼 수 있다. 그것이 전부다.

 

    결론적으로 존엄은 어떤 사건의 시작부분을 보는 시선을 얻어야 한다는 거다. 시작이 아닌 끝단을 주시하고 있다면 답이 없는 거다. 대화는 불통이다.

 

    결과가 공평해야 한다는 주장은 끝단을 보는 시선이다. 무리다. 개도 공평하게 사람처럼 투표권을 가져야 한다는 시각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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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바위님의 질문은 미리 답을 정해놓고 ‘내게 맞는 떡을 입에 넣어 줘.’ 하고 요구하는 것 같소. ‘경쟁이 다는 아니다’ 라고 말해야지 무작정 경쟁은 안 된다는 식은 곤란하오.

 

    * 어떤 사람들이 경쟁없이 사는 데, 그리고 평화주의로 사는데, 그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보면서 대뜸 하는 말이, 저 사람들이 사는 건 사는게 아냐. 경쟁력이 없어 한마디 하고 말더군요. 말한 사람은 자신의 패러다임과 구조가 완전 뽀롱나는 줄도 모르고...말이죠.
   

 

    평화주의가 무기력, 무책임, 나태함의 변명으로 된다면 곤란하오. 경쟁하지 않고도 이기는 방법이 있는데 왜 경쟁하느냐가 맞지 무작정 비경쟁을 주장하는건 답이 아닙니다. 총칼로 싸우기보다 문화로 싸우는게 맞고, 이기려고 싸우는 것 보다 즐기려고 싸우는게 맞습니다. ‘싸운다’는 표현이 걸려서 문화로 싸우는 것도 싸우는 것이니까 싫다고 말하면 말트집이 되겠죠. 문화로 싸우는건 싸우는게 아니지요. 노는 거지. 열심히 놀아서 놀이에도 이겨야 한다는게 아니오. 영심히 놀지 않고도 이기는 길은 있다는 겁니다. 꼭 이겨야 한다는게 아니오. 정답이 있다는 거지요. 말의 표현에 걸리지 말고 본질을 보시오. 우주는 팽창하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팽창 싫어’ 이건 곤란하죠. 생물은 진화하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진화 싫어’ 이건 곤란하죠. 역사는 진보하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진보 싫어’ 이건 곤란하죠. 역사의 진보, 생물의 진화, 공동체의 발달, 우주의 팽창, 엔트로피의 증가 이건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고 그 사실은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지구가 태양을 도는데 ‘나는 도는거 싫어.’ 이건 아니지요.

 

   
    * 기회의 균등. 시간의 공평성 - 많이 들어온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정말 그러냐? 현대성이 그걸 보장해 준다는데, 정말 그러냐는 것이 제 안의 질문입니다.

 

    구조론은 ‘A면 B다’의 조건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무작정 절대적인 균등과 공평은 당연히 없습니다. 돼지나 개에게도 투표권을 주지는 않습니다. 일정한 조건에서 일정하게 대응하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기회의 균등은 절대로 없습니다. 절대적인 공평도 절대로 없습니다. 그래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성폭행범이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너도 날 성폭행하면 되잖아. 자 성폭행 해. 지난 번엔 내가 했고 이번엔 네 차례야.’ 하면서 빤스를 내립니다. 근데 이러면 공평할까요? 성폭행 피해자가 성폭행 가해자를 성폭행 하면 공평할까요? 무리하게 균등을 추구하려 하면 곤란합니다. 단 일정한 조건에서 일정하게 대응한다는 규칙만이 공정하게 작동할 뿐입니다. 개는 개답게 살고 사람은 사람답게 사는게 공평하지 개도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건 무리입니다.

 

    우주는 팽창하고 생명은 진화하고 역사는 진보합니다. 그 안에서 경쟁은 필연이며 경쟁 그 자체를 죄악시하면 곤란합니다. 문제는 경쟁의 폭주입니다. 인간이 경쟁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작정 경쟁을 반대하는게 아니라 경쟁하기 위한 경쟁, 쓸데없는 경쟁을 안 하는게 중요합니다. 애들이 놀이터에서 자유롭게 놉니다. 성적도 없고 경쟁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도 보이지 않는 경쟁은 있습니다. 그걸 문제삼을 일은 없습니다. 대부분 경쟁과잉은 후진국의 문제이고 에너지의 부족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며 인류가 저온핵융합을 하거나 공해없는 토륨발전을 하면 경쟁과잉은 해소됩니다. 그때는 산업경쟁이 아닌 문화경쟁의 시대가 열리는 것이며 경쟁의 폐해는 최소화 됩니다. 단 경쟁 그 자체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경쟁을 죄악시 할 것이 아니라 사회의 활력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단 잘못된 경쟁, 허무한 경쟁, 경쟁하기 위한 경쟁을 비판해야 하는 것입니다.

 

    경쟁하는 이유는 창의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창의하지 못하는 이유는 갑이 아닌 을이기 때문입니다. 남자는 경쟁하지만 여자는 경쟁하지 않습니다. 생물의 진화원리상 그렇다는 겁니다. (여자도 시험치잖아. 여자도 경쟁하잖아 하는 사람은 한국어가 안 되는 사람임. 맥락을 파악할 것.)여자는 낳지만 남자는 낳지 못하기 때문에 경쟁하는 것입니다. 낳는 사람은 주인공이고 낳지 못하는 사람은 엑스트라이기 때문입니다. 경쟁은 엑스트라가 하는 것이고 주인공은 경쟁 안 합니다. 창의는 본래 비경쟁입니다. 관계는 무한한 창의가 가능합니다. TV는 소극적인 시청자로 만족해야 하지만 인터넷은 독립적인 창의가 가능한 공간입니다. 인터넷은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TV시청자는 의미를 추구하고 인터넷 이용자는 관계를 추구합니다. 구조론은 TV시청할 시간에 블로그 운영하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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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깨달음은 결과측이 아닌 원인측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확 틀어야 합니다. 원인이 끝나고 결과가 온다고 믿으면 착각입니다. 원인 안에 결과가 있는 것입니다. 만나서 행복해지는게 아니고 만남 안에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대한의 행복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최대한의 만남을 추구해야 합니다. 만났으니까 되었다는 식이면 곤란합니다. 좋은 사람을 만났으니까 이젠 됐다며 한 시름 놓는 사람은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입니다. 제대로 만나기는 이제 시작입니다. 답은 시작에 있습니다. 시작이 지나고 끝이 오는게 아니라 하루 안에 한 시가 있고 한 시 안에 일 분이 있듯 커다란 하나의 시작 안에 작은 끝들이 여러개 있는 것입니다. 작은 시작 말고 커다란 시작을 얻을 때 당신의 모든 문제는 씻은듯이 해결됩니다.

 

http://gujoron.com/xe/?mid=Moon




프로필 이미지 [레벨:12]wisemo

2012.12.09 (19:12:55)

"현대성은 새로 시작하는 거다."

구조론의 이러한 문답속에 배울점과 답이 좀더 선명해지는 것 같습니다.

나서서 못하는 쑥스러움을 숨기며...^^


프로필 이미지 [레벨:18]차우

2012.12.10 (01:37:44)

사람과 사람이 만날 때도 일회성만남이 아닌 끊임없는 만남이 성립되겠군요. 끊임 없이 소통하며 끊임 없이 발견하는 과정이라..

한 곡 안에서 여러 악기가 수없이 만나 그 과정 자체가 리듬을 이루고 강약을 이루어 화음을 만들어 결국은 전체의 아름다운 교향곡을 이루듯이

만날 때 완전한 예술이 탄생한다고 생각합니다.
[레벨:11]큰바위

2012.12.10 (11:53:09)

글 고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우선 큰바위님의 질문은 미리 답을 정해놓고 내게 맞는 떡을 입에 넣어 줘.’ 하고 요구하는 것 같소.” 라는 느낌이나 판단은 오버하신 것이구요.

    

이전 댓글의 표현, 승자독식 전쟁필수 약육강식 부익부빈익빈은 당연한거. 이렇게 보면 존엄은 어디에 들어서야 하는 건지라는 말은 저의 전제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전제라는 말입니다. 세상이 그렇게 전제한다는 거고, 저는 그 전제가 잘못되었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당연한거." 뒤에 나오는 "이렇게 보면 존엄은 어디에 들어서야 하는 건지.”라는 질문을 붙인 겁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전제를 잘못되었다고 보는 저의 전제가 잘못되었다면, 다행입니다. 세상이 올바로 돌아가고 있다는 증거가 될테니까요.

 

어쨌든 구조론의 과정을 중시 여기는 것이라든가, 결과보다 원인, 하부구조보다는 상부구조, 양보다는 질........ 등에 대한 내용은 제 입장과 다를 바 없고요.

 

구조론은 당연히 승자독식 반대, 전쟁반대, 약육강식 반대, 빈익빈 부익부 반대다.” 이런 입장을 알기 때문에 여기에 들어와서 글을 읽고 있는 거겠지요.

 

또 하나의 사족을 달자면 문구에 얽매이는 읽기라 할지라도 가을이 되면 쭉정이와 알밤이 가려진다. 승자와 패자가 나누어진다. 구조론은 기승전결의 기만 주목한다. 결은 관심 없다. 관계에 관심을 둘 뿐 의미는 필요 없다. 의미를 취하려 들므로 승자독식 문제가 불거져 나오는 것이다. 가을의 수확에 집착하지 말고 봄의 탄생을 주목하라.”라는 글의 전체적인 맥락은 받아들이지만, 한 나무에서의 쭉정이와 알밤을 승자와 패자로 보는 시각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사람들 중에는 땅이 아플까봐 쟁기도 기계적인 쟁기를 사용하지 않고, 화학비료 안 쓰고 음식물들은 모조리 모아서 땅으로 돌려주고, 소출이 적어도 화학비로 안쓰고 유기농 고집하고, 전기 안쓰고 나무 때는 길을 선택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이들을 너무나 쉽게 패자로 규정합니다. 정말 그럴까 싶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너무나 성공, 실패, 12등식으로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분류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전 댓글은 이러한 사고방식에 대한 저의 반기인 셈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평화주의를 추구한다면, 진리와 연결될 수 밖에 없기에 무기력, 무책임, 나태함의 변명으로 될 가능성은 없다고 봅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12.12.10 (12:05:09)

제가 주문하는 바는 기본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라는 겁니다. 그런데 님은 바꾸었을까요? 바꾸지 않았다는게 제 지적입니다.

 

예컨대 이런게 있습니다. 소설의 결말이 마음에 안든다고 작가에게 항의하는 독자들이 있어요. 해피엔딩으로 끝내달라는 거죠. 즉 그들은 결말에 관심이 있는 겁니다. 결말이 좋으면 다 좋다는 거에요. 근데 전 짜증나거든요.

 

왜 결말에 관심을 가지죠? 춘향과 몽룡이 만나서 잘 먹고 잘 살았을까요? 제가 보기에 춘향은 고집이 세고 결기가 있어서 현대라면 몽룡과 곧바로 이혼했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들이 신분의 한계를 극복하고 대등하게 만났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그 이후에 이혼하건 말건 그건 제 관심사가 아닙니다.

 

이런건 사람들과 대화해보면 항상 느끼는건데, 다들 '최후'를 생각하고 자기 행동을 정하더군요. 저 사람과 최후까지 잘 될 수 있을까? 그런데 왜 지금 이 순간의 완전성을 생각하지 않는지? 최후에는 너나 나나 공동묘지가 예약되어 있는데.

 

예컨대 저는 최진실과 조성민의 잘못된 결혼을 지지했습니다. 그때 저는 말했죠. 3년 안에 깨진다. 그러나 지지한다. 멋지잖아. 그런데 다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더군요. 깨질 결혼을 왜 하냐는 거지요. 결혼자체가 중요하지 결혼해서 잘 먹고 잘 사는게 중요한가요? 결혼 자체에 의미를 두지 않고, 결혼후에도 잘 먹고 잘 살려고 무리하게 욕심을 냈기 때문에 둘 다 불행해진 거 아닌가요?

 

저는 이러한 본질에서 많은 사람들과 부딪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와 보는 방향이 달라요. '한 나무에서의 쭉정이와 알밤을 승자와 패자로 보는 시각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님의 이런 표현도 여전히 그곳에 시선이 가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왜 그 쪽을 보고 있느냐죠. 저는 동의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애초에 그쪽은 보지 않는다는 거죠.

 

유기농 고집하는 사람들을 저는 좋게 보지 않습니다. 승자 패자 떠나서 그 사람들도 어떤 결과에 관심이 있더라는 거죠. 그게 몸에 좋다는 식으로 주장하면 황당한 거죠. 제 관심은 그런 사람들이 그런 장소에 모인다면 뭔가 재미있는 모임이 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유기농이 몸에 좋아? 웃기셔. 농담하는거 맞죠.

 

제가 관심을 두는 것은 그 방법이 재미난 사람들을 특정한 시공간의 장소에 모을 수 있느냐에 있습니다. 그걸로 건강하게 백살까지 잘 먹고 잘 살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헉~!

 

 

프로필 이미지 [레벨:12]wisemo

2012.12.10 (13:22:50)

이런 것이 구조론적 사고임을 새삼스레 느끼고요,

구조론적 사고는 새롭게 사물을 보는 시각이라 봅니다.

새롭게 보기위해서는 뇌를 말랑말랑하게 할 필요가 있다 보고요,

이러기 위한 훈련이 무엇이냐가 큰 화두가 아닌가 합니다.

***

"지금 여기서..."를 항상 어디선가 누군가가 말하는 것을 보았는데, 이제 조금 뚜렷해집니다: 

지금 이순간의 중요성이 있고, 그것의 완전성을 생각해야하고 그리고 그것이 반복될 뿐이면 끝. 3년아니라 백년아니라...! 

'항상 새롭게' 

'매일 새롭게'

의 뜻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

그리고 행간을 보고 좋은 '관계'는  재미나 흥을 창조함을 전제로 한다로 생각이 드는데요...?! 당근이네...^^

[레벨:11]큰바위

2012.12.10 (23:06:35)

제가 설명하는데 있어서 관점이 좀 잘못되었군요.

제가 말한 사람들은 결과 중심적인 사람들이 아닌데, 제가 말한 것이 그렇게 표현되었군요.

재밌게 건강하게 사는 사람들이 유기농 하는 사람들,

아예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아온 사람들,

애초부터 자연에 해를 끼치는 것을 고려하지 않은 사람들....

건강하게 살기 위해 유기농하는 것은 결과나 목적에 두지 않은 사람들인데, 제가 글 쓰기에서 잘못 표현했군요.

김동렬님의 본질 추구에서 다른 사람과 보는 방향이 다른 것은 익히 알고 있습니다.

지금 죽어도 인생은 괜찮은 거.

지금 이 순간이 진리 안에 있으니까.

뭐 그러면 된거지요. 그러면 원인까지도 따질 필요 없는 거 아닌가요?

인생이란 의미부여가 아니라, 존재하니까 있는거잖아요.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12.12.10 (12:58:26)

2212.GIF

 

원인 다음에 결과가 나온다는 시각과 원인 안에 결과가 있다는 시각은 매우 큰 차이가 있습니다.

과연 이 부분에 있어서 거대한 방향전환이 이루어졌느냐죠.

이게 안 되는 사람과의 대화는 한계가 있습니다.

 

원인은 반드시 상부구조에 있고 그 사건 전체를 지배합니다.

예컨대 1년 안에 1월이 있는 거죠.

 

1월이 원인이면 2월은 결과가 아니라 1년이 원인이면 1월이든 2월이든 결과라는 거죠.

1년은 태양과 지구와의 관계입니다.

 

상부구조가 있다는 말이지요.

 

 

예컨대 두 사람이 다툼을 벌인다면 원인은 무엇일까요?

'쟤가 먼저 나를 때렸어.' '아냐 쟤가 먼저 나를 노려봤어.'

둘 다 틀렸습니다.

 

두 사람이 좁은 공간에 있다는게 원인입니다.

그 결과는?

싸움이죠.

근데 싸움이 끝나도 둘은 계속 좁은 공간에서 마찰하고 있습니다.

 

즉 원인은 결과가 나올때까지 그대로라는 거죠.

원인이 끝나고 결과가 나오는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원인 안에 결과가 들어있는 거에요.

 

이 구조를 모르기 때문에 아무리 평화주의를 주장해도 평화는 오지 않는 거죠.

승자독식, 약육강식, 전쟁필수를 입으로만 야단칠 것이 아니라

얼른 그 지옥의 공간에서 빠져나와야 한다는 거죠.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 공간에 그대로 머무르면서

말로만 승자독식반대 약육강식반대를 외치고 있으니 공허하다는 거죠. 

첨부
[레벨:11]큰바위

2012.12.10 (20:45:50)

이미 다른 방식으로 살고 있습니다.

공간에서 빠져 나와 있구요.

다만 요즈음 한국 대선을 다른 공간에서 바라보니 한편으로는 재밌고, 한편으로는 그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이 안타까워보여서요.

 

뭐 지금 사는 나라도 똑 같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요.

 

제가 아는 가해자-피해자 프로그램이라든가,

Conflict Transformation 갈등 전환이라든가,

평화주의 등은 이미 김동렬 님의 이론을 적용하여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원인에 집착하고 기본과 본질에 충실하다보니

사람들이 잘 이해를 못하지만,

이 쪽에서는 나름 근본적인 결과도 나온답니다.

 

Restorative Justice 를 공부하는 사람도 한국에 생겨나고 있는데, 이러한 관점은 김동렬 님의 구조론과 연결 될 수도 있겠다. 아니 원리에 있어서는 같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비폭력 혹은 무저항에 근거한 평화주의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이었고, 여전히 지금도 소수의 사람들만이 주장하는 패러다임이 다른 평화주의지요. 톨스토이는 이 부분에 있어서 선구자이고, 마틴루터 킹 주니어도 마찬가지구요. 이들은 당신네들의 시대와 상관없이 동렬 님께서 표현하는 현대성을 일구어 낸 사람들이라 하겠지요.

 

저는 같은 공간에 있어야 할 필요는 있다고 봅니다.

단지 같은 공간에서 문제가 일어나면 잠시 다른 곳에 갔다 와서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같은 공간에 있어야 한다는 거죠.

또한 다른 곳에 갔다  올 때는 이전과 똑 같아서는 안되고요......

물리적 공간을 벗어날때, 심리적, 정신적, 영적 공간을 내면에 만들고 와야겠지요.

 

원인과 결과 하나의 짝이지만, 윗 도식보다 아랫  도식이 잘된 설명이라겠습니다.

 

제가 동의한다 반대한다는 표현에 얽매이지 마세요.

저 나름대로의 표현이니까요.

 

그렇지 않아도 제가 맞아요, 그렇죠 이런 표현을 많이 쓰는데, 이것 때문에 힘들어 하는 사람들도 있다더군요. 최근 지인의 지적이었습니다. 여기서도 듣네요. 고쳐야 겠습니다. 지적 감사합니다. 인생이란 죽을 때까지 배우는 거라는 생각을 다시 해봅니다. (인생이 학교고,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죽을 때까지 배우다 간다는 생각을 합니다. 조문도석사가의 중학교때 배운 것 유효합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12.12.10 (16:03:33)

부연한다면
평화주의..좋습니다.
그런데 팔레스타인은 평화를 위해 이스라엘에 굴복해야 할까요?
식민지 조선은 평화를 위해 일제에 굴복해야 할까요?
존엄은 원인입니다. 존엄 때문에 전쟁할수도 있고
존엄 때문에 평화할수도 있어요.
존엄에 주의가 가야하고 평화는 물론 전쟁보다 낫지만
평화하기 위한 평화는 아니라는 거죠.

존엄이 관계맺기를 통하여 평화의 확률을 높이는 것은 분명하지만

평화가 최종적인 목적이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인간관계의 질을 업그레이드 하는 것이 최종목표여야 합니다.

인류가 커다란 하나의 뇌를 만들어가는 거죠.

평화는 부수적으로 따라옵니다.

인류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인류공동의 프로젝트를 제시할 때

그 과정 안에서 모든 갈등은 저절로 용해되고 평화는 자연히 달성됩니다.

[레벨:11]큰바위

2012.12.10 (20:55:54)

인간이 존엄하기 때문에 평화를 외치는 것이지,

평화를 위해 평화를 외치는 사람이 있을까요?

 

전쟁은 인간의 존엄을 짓밟는 최악이기 때문에,

(전쟁은 조금도 선할 수 없다는 것이 제 생각)

평화를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존엄 때문에 평화할수는 있지만,

존엄 때문에 전쟁할 수는 없습니다.

 

존엄이 짓밟혀 있다면 그건 이미 그 자체로 전쟁의 상황이고 전쟁입니다.

 

단 평화의 상태가 전쟁의 부재를 말하는 건 아닙니다.

평화는 관계 언어니까요.

(내면의 평화까지도 자기와 또 다른 자기와의 관계, 자기와 자기 안의 타인과의 관계, 자기와 신과의 관계, 자기와 환경, 사물과의 관계. 이것이 깨지면 평화를 잃는 거죠. 전쟁의 부재가 평화로 보일수는 있으나 평화 그 자체는 아니라고 봅니다. 평화는 훨씬 더 큰 상위 개념이지요)

 

인간관계의 질을 업그레이드 하는 것이 "최종  목표"^^여야 한다.

그러면 평화는 부수적으로 따라온다. - 빙고 -

 

 

 

 

프로필 이미지 [레벨:1]존슨

2012.12.10 (18:26:54)

궁금합니다.

동렬님이 말하는 깨달음은 awakeness 혹은 nirvana 인가요.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12.12.10 (19:14:06)

awakeness은 어떤 깨달음이지 보편적인 깨달음은 아닙니다.

뉴턴은 말의 힘, 소의 힘이 아니라 힘 그 자체를 발견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구조론은 어떤 구조가 아니라 구조 그 자체의 발견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자동차의 구조, 혹은 건축의 구조 이건 아니죠.

모든 차차로 이루어지는 조직, 사건, 생명, 역사, 자본, 물질에 공통되는 보편구조를 의미합니다.

nirvana는 종교적인 관점에서 많이 왜곡되었습니다.

nirvana는 일체의 번뇌가 없는 상태라고 하는데 이건 적절한 표현이 아닙니다.

뭐가 아닌 것이라고 말하면 안 되고, 뭐인것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깨달음은 완전성의 깨달음이고, 완전성은 관계의 완전성이며, 관계는 어떤 둘의 사이에 있고

그 사이를 깨닫는건 깨닫는게 아니고, 상부구조로 올라가서 그 사이를 규정하는 형식을 깨닫는 것입니다.

예컨대 좁은 공간에서 둘이 싸우고 있다면, 그 둘의 사이는 갈등상태겠지요.

그 사이의 갈등상태를 깨닫는게 아니고, 그 갈등공간의 존재를 깨닫는 것이 진짜입니다.

그 사이를 담아내는 그릇이 있다는 거지요.

그 사이를 보는 것은 한번 뒤집어 보는 것이고 손가락을 보는 것이며

그 사이를 담아내는 그릇을 보는 것이 달을 보는 깨달음입니다.

그 차이는 맞설 수 있느냐에 있습니다.

그릇은 손으로 다룰 수 있지요.

그 사이를 손으로 다룰 수 있어야 완전합니다.

대응할 수 있고 상호작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깨달음은 종교적 관점에서 접근하면 곤란하고

인간의 뇌구조 그리고 공동체적 본능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인간의 뇌는 원래 사건의 결말부분을 바라보도록 되어 있고

그에 따른 문제를 공동체에 의존함으로써 해소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은 개인의 문제를 공동체에 떠넘기는 방식으로 해소하도록 되어 있으며

그 방법은 갈등을 해소하는게 아니라, 계속 갈등을 키워서 갈등의 근본을 노출시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갈등은 커져서 전쟁으로 치닫지만 대신 갈등이 근본적으로 해소될 확률을 높입니다.

인간은 문제를 해결하는 현명함 보다는 문제를 떠넘기는 어리석음을 통해 진화한 것입니다.

정치도 보면 문제를 잘 해결하는 진보가 지고

갈등을 증폭시켜 문제를 더 크게 만드는 보수가 집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간이 원래 그렇게 만들어진 불쌍한 존재라는 거지요.

갈등이 증폭되면 미국이 개입하고 미국이 개입하면 해결될거라는

무의식적인 집단적 사고가 있으며

그러다가 러시아에 개박살 난 경우가 그루지야죠.

한국도 뭐 별다를건 없고.

그게 어리석은 인간 본능이고 인간은 원래 오판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생각도 무조건 오판으로 보면 맞을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김두관부터 손학규까지 줄줄이 오판하는게 정상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이 필요한 거죠.

 

인간은 원래 공동체단위로 판단하도록 세팅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공동체의 리더 마음을 가지면 문제를 바로볼 수 있습니다.

그 공동체의 단위가 작은 가족, 부족, 국가를 넘어 우주적으로 확대되어야 하는 거죠.

 

여기서 nirvana와의 본질적인 차이는

nirvana 역시 원인이 아닌 결과를 보는 관점에서 만들어진 단어라는 것입니다.

깨달음은 거대한 만남이지 자기 안에 어떤 뭔가를 챙겨넣는 것이 아닙니다.

결과가 아닌 원인의 관점에 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awakeness 보다는 nirvana와 가깝지만 둘 다 아닌 거죠.

 awakeness는 개별적인 사건에 붙잡혀 있고 nirvana는 자기에 붙잡혀 있습니다.

내 마음이 평안하다는 식으로 말하는 건 한 마디로 족같은 수작입니다.

네 마음이 어떤지 누가 물어봤냐구요?

네 마음이 어떻든 그건 결과죠.

결과면 이미 실패.

 

진리와 통하는게 중요합니다.

역사와 반응하는게 중요합니다.

파도를 타는 서퍼처럼 세상의 진보하는 흐름 안에서 자연스러워야 진짜입니다.

큰 세상과 만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nirvana를 결과가 아닌 원인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은 자기 안에 진리가 있는게 아니라

진리라는 든든한 빽을 가지는 것이며 언제든 그 진리를 불러올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진리 앞에 가서 서는 거죠.

자기 컴퓨터에 위키백과를 채워넣는게 아니라 그저 인터넷에 접속하는 겁니다.

나는 마음이 편안해.. 이런 멍청한 소리 하면 안 되죠.

나는 언제든지 진리를 불러올 수 있어. 이게 맞는 거죠.

그것은 금고를 갖고 있는게 아니라

금고의 열쇠를 가지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번역할 적당한 영어 단어는 없습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1]존슨

2012.12.10 (19:57:04)

순간에 감응하는 자질..

관계속에 녹아드는 태도..


이런 보석들이 지적 능력 활동을 통해 키워질지 회의적입니다.


모든 전쟁은 평화로 끝납니다.

핵전쟁이 일어나서 인류가 전멸해도 지구는 평화로울겁니다.

하지만 마음의 평화는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마음을 제껴버릴때 침묵속에서 명료함과 통찰력을 발견하곤 합니다. 


마음의 영역에서 지적 훈련으로

그 너머에서 오는 열매와 보석을 얻을수 있겠습니까.


첫단추가 꼬였는데 간지가 날수 있을까요.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12.12.10 (21:07:36)

그러므로 상호작용을 강조하는 겁니다.

개인의 지식.. 점수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혼자 깨달았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번뇌도 없고 두려움도 없고 무엇도 없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은 점수가 아닌 돈오인 것이며 돈오는 만남이고 관계이고 실천입니다.

개인의 지적능력은 자기만족에 불과할 뿐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여러 사람이 여러 세계의 여러 파도와 맞설 때 위대한 연주는 얻어집니다.

그 안에 아름다움이 있고 완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나야 하고 만나서 함께 하나의 방향으로 나아가며

흐름을 만들어야 하고 삶의 스타일을 만들어야 하고

부단한 상호작용을 통해 현대성을 획득해야 합니다.

동(動)에 답이 있으며 정(靜)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한 사람의 돈오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만 사람의 돈오는 세상을 바꿉니다.

한 사람의 인상주의 그림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만 사람의 인상주의는 실제로 세상을 바꾸었습니다.

[레벨:3]귤알갱이

2012.12.11 (15:38:55)

본문 읽다가 그냥 떠올라서 하나 적습니다.
일본 드라마 "결혼 못하는 남자"가
우리나라에서 리메이크 됐었습니다.
일본 원판의 결말과 달리 우리나라 방송에서는
남녀주인공의 결혼으로 끝내더군요.
뭔가 많이 아쉬웠습니다.
두 사람이 결혼하지 않아도
지금 만나 행복하다는 사실을 이미 보여줬는데
일본 원판에서처럼 그대로 마무리 했다면
더 상큼하고 신선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그러 사람들은 항상 결말에 관심을 갖기 마련이니까요.
결혼 안하면 결과적으로 불행할거라고 보는거죠.
지금 좋아도 나중에 후회할거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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