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세상은 무엇에 의하여 작동하는가? 소년이 처음 세상과 조우했을 때의 질문이다. 소년으로 하여금 세상이라는 무대로 뛰어오르게 하는 동기는 무엇이며, 소년이 그 무대에 무사히 오르기까지 인도하는 길은 무엇이냐다. 누구도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돈, 출세, 명성 따위는 사회가 만들어낸 허상이다. 그것은 타인과 비교되는 것이며 결국 남이 가니까 멋모르고 가는 거다. 일찍이 기독교가 원죄를 말했고, 석가가 고(苦)를 말했으며, 마르크스가 소외를 말했으나 대개 외부에서의 위협일 뿐, 내 안 깊은 곳에서의 부름소리는 아니다. 이 질문에 대답할 때가 되었다. 인간은 존엄으로 산다. 세상은 완전성에 의하여 작동한다. 우주에 질서를 부여하고, 자연에 미(美)를 부여하고, 생명에 진화를 추동하는 것은 근원의 완전성이다. 내 안의 완전성을 일깨우는 것이 깨달음이다. 완전성으로 세상에 맞서는 것이 존엄이다. 아기 때는 누구나 완전하다. 부모의 곁을 떠나 세상과 충돌하면서 그 완전성이 훼손된다. 실패하고 좌절하면서 어색함과 창피함을 당한다. 고립되고 배척될 때 비참을 맛보고 삶의 부조리를 발견한다. 그 부조리에 맞서 싸울 때 소년은 철이 든다. 그렇게 인간은 삶의 동기를 얻는다. 완전성은 관계의 완전성이다. 관계는 토대의 공유다. 부모의 품을 떠나 독립하면서 토대를 잃고 금 밖으로 밀려나는 것이 비참이다. 반면 세상과의 온전한 소통에 성공하여 토대를 공유하는 수준을 끌어올릴때 인간은 안정감을 느낀다. 그렇게 삶의 밀도를 끌어올리는 것이 존엄이다. 완전성은 내부에 기승전결의 결을 가진다. 자연의 완전성과 반응하는 내 안의 결을 갖추는 것이 스타일이다. 그것은 건반악기의 건반과 같고 현악기의 현과 같다. 삶의 장면들에서 어색해지기 쉬운 약한 고리를 보호할 때 세상을 연주하는 내 안의 현은 갖추어진다. 그것이 스타일이다. 내 안의 결과 세상의 결을 일치시킬 때 세상을 흔드는 큰 소리가 난다. 내 안의 완전성이 세상의 완전성과 반응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 소년은 세상이라는 무대로 거침없이 뛰어오를 수 있다. 세상은 나를 연주하고 나는 세상을 연주한다. 그 모습은 아름답다. 돈오스타일로 세상을 바루자.
###
인간으로 하여금 삶이라는 거친 바다로 뛰어들어 거침없는 항해를 하도록 추동하는 것은 어색함과 떳떳함이라는 방향타입니다. 인간은 언제라도 창피함을 피하고 자랑스러움을 따르도록 세팅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우주가 전개하고 생명이 진화하게 하는 본질입니다. 자기 안에 그 방향타를 갖추는 것이 스타일입니다. 한 번 뒤집으면 바다가 보이고 두 번 뒤집으면 방향타가 보입니다.
http://gujoron.com/xe/?mid=Moon ∑ |
동렬님이 말씀하신 이것이 새로운 종교성 혹은 영성과 낡은 영성을 가늠하는 기준이 될 것입니다.
낡은 종교성/영성: 기승전결의 기에 원죄, 고, 소외처럼 출발부터 부정적임. 이 구조에 따르면 인간은 원죄, 고, 소외라는 낮은 곳에서 구원, 해탈, 해방이라는 높은 곳으로 기를 쓰고 올라가야 함. 한 마디로 개고생 시나리오. 마치 외인구단처럼 주인공은 구원에 이르기 위해,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해탈하기 위해, 소외로부터 벗어나 해방을 얻기 위해 졸라게 고생해야 함. 전형적인 플러스 사고방식.
새로운 영성: 기승전결의 기에 완전성, 진리, 선함, 아름다움처럼 출발부터 긍정적인 어휘를 씀. 이 구조에 따르면 인간은 신의 완전성을 배달하고, 이 땅에서 구현하고 창조하는 존재임. 따라서 이러한 이야기 구조에 따르면 인간은 그저 방해되는 것들을 제거하기만 하면 됨. 주인공이 자신의 타고난 천재성, 완전성, 창조성을 드러내는데 방해되는 각종 조연과 방해물들을 하나씩 제거하기만 하면 됨. 그러면 이야기가 완성~ 한 마디로 마이너스 방식.
비유하자면, 낡은 종교에서는 인간을 동굴 안에 갇힌 눈 먼 존재로 여깁니다(플라톤의 동굴의 비유). 그러다 운 좋게 바같 세상을 구경하고 돌아온 선지자가 나머지 눈 먼 존재들을 이끌어 빛으로 데려간다는 시나리오를 신봉하지요. 그들에 따르면 성직자는 눈 뜬이고, 대중은 눈 먼이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눈 뜬 이가 눈 먼이를 이끌고 동굴 밖으로 나간다는 신화를 신봉하고 또 전파하지요.
하지만 새로은 종교 혹은 영성에서는 다릅니다. 인간은 눈이 먼 적이 없고, 원죄도 없고, 소외된 적도 없고, 무명에 빠진 바도 없습니다. 이미 신의 완전성이 내 안에도 갖추어져 있고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빠진 적도 없는 구렁텅이에서 벗어나기 위해 허우적대는 것이 아니라. 그저 통하여 알아보고 반응하고, 전달하는 것이 전부. 눈가리개를 벗고 처음부터 우리 곁에서 빛나고 있던 완전성이라는 태양을 바라보고 그 빛과 온기를 즐기고 누리고 이용하는 것이 할 일의전부.
쉽게 말해 과거의 종교는 삶의 에너지를 얻기 위해, 동기부여를 위해 나뭇가지들을 모아다가 손바닥 아프게 졸라게 마찰시켜 간신히 불씨 한 점 얻어냈다면, 미래의 종교는 그냥 물이 콸콸 쏟아지는 폭포에다 물레방아를 달거나, 바람이 세차게 부는 언덕에 풍차한대 설치하거나, 천연가스가 꽉 차있는 곳에 그냥 파이프 하나 꽂는 식으로 삶의 에너지를 얻어내고 인간을 동기부여시킬 수 있어야 함. 그러기 위해선 낡은 이야기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고, 소외, 원죄, 이런 이야기는 이제 더 이상 인간의 주목을 받지 못합니다. 그런 건 존엄하지 못한 노예들이나 혹하는 단어입니다. 여전히 그러한 단어들에 꽂혀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 몸부림치는 사람들은 있겠지만, 그건 점점 소수가 될 것이고, 앞으로는 완전성, 진리, 아름다움, 멋, 이런 에너지가 있는 단어들에 빨대를 꽂는 종교 혹은 영성이 대세가 될 겁니다.
그런 면에서 구조론은 이미 종교 아닌 종교가 된 면도 있습니다. 우리가 어디에 빨대를 꽂아야 할 지를 말해주고 있죠. 중요한 것은 어디에 도착하느냐가 아니라 어디에서 출발하냐이고, 이미 출발할 때 부터 목적지까지 한 번에 정해진다는 것이 구조론입니다. 이미 신의 완전성이라는 활이 인간을 쏘았고 우리는 이미 그 힘에 의해 날아가고 있습니다.
어디까지?
그건 갈데까지 가보면 알겠죠.
신이라는 명사수가 과연 얼마나 힘을 실었을 지,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