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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7471 vote 0 2009.05.16 (13:29:47)

예술이란 무엇인가?

‘18일 동영상강의 해설입니다’

‘art’는 ‘잇다’, ‘arm’은 ‘이음’, ‘army’는 머리에 물건을 이듯 갑옷을 몸에 ‘인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예술은 서로 다른 별개의 둘을 하나로 이어주는 것이다. 한 때의 유행어 ‘예술한다’는 표현을 기억하시는지. ‘서울, 대전, 대구, 부산 찍고’..

남녀를 이어준다는 뜻이다. 예술은 사람과 사람을 잇는 것이며, 사람과 세상을 잇는 것이다. 예술은 또 팔(arm)과 같아서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서 악수하게 하는 것이며, 낯선 대상에게로 다가가 먼저 손을 내밀게 하는 것이다.

또 예술은 무기나 갑옷과 같아서 자기 몸에 입는 것이며, 세상과의 싸움에 임하여 자신을 무장시키는 것이다. ‘의사’라는 뜻도 있다. 의사를 아티스트라 불렀던 것이다. 예술은 세상을 치료하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관계다.

관계는 바이올린의 활과 현의 관계다. 그것은 무엇인가? 포지션이다. 관계는 너와 나의 포지션을 낳는다. 그래서 나는 너의 이름을 부른다. 그럴 때 꽃은 피어나고 현은 소리를 낸다. 그 소리로 세상 가득히 채운다. 울림과 떨림으로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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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근본은 무엇인가? 미술은 작은 개념이고 보다 큰 개념이 필요하다. 조형예술 개념은 건축, 디자인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조각과 회화를 의미하는 좁은 의미에서의 미술보다는 큰 개념일 것이다. 영화, 연극, 연주 등 공연예술은 보다 큰 개념일 수 있다.

더 큰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정면으로 다루려고 하는 근본은 깨달음이다. 깨달음은 퍼포먼스 혹은 사건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조주록, 임제록 등 선사들의 선문답은 많은 일화를 담고 있다. 그것은 단순한 문답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위를 포함하는 사건 형태다. 그렇다.

그것은 퍼포먼스다. 예술은 거기서 시작되었다.

● 제 1 예술 - 퍼포먼스, 선문답, 일화, 사건.
● 제 2 예술 - 영화, 연극 등 공연예술.
● 제 3 예술 - 건축, 패션, 디자인, 창의, 조형예술
● 제 4 예술 - 조각. 회화. 사진 등 재래의 미술
● 제 5 예술 - 정보. 텍스트

구조론의 ‘질≫입자≫힘≫운동≫량’의 전개에 따라 이런 논리의 흐름을 말할 수 있다. 조형예술은 이러한 전개 전체를 통합하는 하나의 ‘이미지’로부터 시작된다. 예술의 본질은 화가가 머리 속에 품은 어떤 하나의 이미지에 있다. 이미 품었는가?

‘이미지’라는 표현을 썼지만 그려진 ‘그림’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심상’을 말하는 것이다. 위 다섯을 통일하는, 그 전체에 일관되게 흐르는, 작가의 마음 속에 품은, 비틀즈의 노래 ‘Imagine’이 말하고자 하는 그것 말이다.

예술은 그 품은 것을 풀어 펼쳐내는 과정이다. 퍼포먼스, 사건, 일화, 선문답이 가장 그 본질에 근접한 형태이며 영화, 연극 등은 덜하고 회화나 사진은 보다 낮은 것이다. 그러나 그 본래로 돌아갈 수 있는 단서는 존재해야 한다. 그것이 격이다.

격이 높은 그림은 그 단서가 있는 것이다. 격이 낮은 그림은 그 단서가 없는 것이다. 무엇인가? 그냥 종이나 캔버스에 그렸어도 그 안에 선문답과 같은 사건과 영화와 같은 공연과 건축이나 패션, 디자인 같은 조형을 가리키는 의도가 숨어있어야 한다.

이건 그림이니까 그리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더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어야 하며 그 높은 곳으로부터 연역하여 내려왔다는 흔적이 있어야 한다. 즉 이 다섯은 풀어서 설명하기 위하여 임의로 칸을 나눈 것이고 본래 하나다.

그림은 이미 조각이며, 패션이며, 디자인이며, 건축이며, 영화이며, 사건이다. 그래야 한다. 그 모든 과정을 관통하는 이미지 하나를 품고 있기 때문에. 이건 사건이 아니고, 조각이 아니고, 디자인이 아니고 그냥 그림이라면 실패다. 이발소 그림이다.

그런 단서 없이, 논리구조 없이, 그냥 관객들에게 행복감을 주었다면 실패다. 그건 단지 일회용 소비품에 불과하다. 근원의 완전성으로부터 연역하여 내려오는 끈의 가닥을 잡고 있지 않으면 실패다. 왜 그리느냐 하는 물음에 답할 수 없다.

왜 그리느냐? 사건은 이미 일어난 거다. 활이 바이올린을 켰으니까 현이 소리를 내는 거다. 사건이 공연을 낳고, 공연이 조형을 낳고, 조형이 그림을 낳으니 그려진 거다. 위하여가 아니라 의하여. 비틀즈가 이매진을 불렀기 때문에 지금 이 그림이 탄생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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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어떤 종합적인 이미지 하나를 가슴 속에 품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하나의 비전이다. 심어진 씨앗이다. 그것은 꽃 피어 그림이 될 수도 있고, 조각이 될 수도 있고, 영화나 연극이 될 수도 있지만 본질에서 그것은 ‘사건’이다.

일단 텍스트는 예술이 아니다. 왜냐하면 텍스트로 전할 수 없다는 ‘곤란함’에서부터 예술은 출발하니까. 텍스트로 전할 수 있다면 그냥 말로 전하면 된다. ‘나 너 좋아해!’ 하고 그대에게 고백하면 된다. 뭐가 문제란 말인가?

텍스트로 나타낼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은근하게 자신의 호의를 전달하려면? 성의를 보여야 한다. ‘퍼포먼스’는 예술의 출발점이다. 왜냐하면 원래 어떤 놈 둘이서 술먹자고 만든게 예술이니까. 그렇게 관계맺자고 만든게 예술이니까.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냥 퍼포먼스가 아니고 어떤 사건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액션이다. 구체적인 행동이어야 한다. 예컨대 여자친구에게 고백한다면.. 역시 퍼포먼스가 필요하다. 영화에 흔히 나오는 장면.. 장미 백송이 선물 이벤트.. 이건 흔한거고..

도로에 있는 전광판을 조작하여 ‘사랑해’ 하고 조작하면. 업무방해죄로 들어가는 거지만 영화에서는 말 되고. 직업적으로 하는 사람들 퍼포먼스는 대략 멍청한 짓이다. 선사의 선문답에서 말하는 일화야말로 진정한 퍼포먼스다.

선사들은 문답으로 혹은 행동으로 보여준다. 혹은 몽둥이로 때리기도 하고 혹은 귀에다 대고 고함을 지르기도 한다. 텍스트로는 전할 수 없은 이미지를 함축하여 전달하려는 것이다. 왜 퍼포먼스가 중요한가? 그 안에 있는 논리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선문답에는 ‘A가 이렇게 하면 B는 이렇게 한다’는 논리가 있다. 논리는 로댕이나 달리가 묘사한 중력이라든가, 세잔이 주목한 형태라든가, 피카소가 해체한 입체라든가, 혹은 그림의 원근법, 명암법, 색채이론 속에 숨어있다.

자코메티가 수평선으로 나타내는 아득한 시원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시간의 기억.. 시간이라는 소실점도 있더라. 혹은 연극무대 위의 포커스. 외줄타기 곡예사의 줄처럼 관객의 시선을 한 곳에 집중시키는 장치. 그것은 전체에 어떤 통일성을 주는 것이다.

로댕의 중력은 손으로 턱을 괴는데서 시작되지만 슬픔의 무게, 운명의 무게, 사랑의 무게, 모든 무게로 확장되는 것이며 역으로 그것을 중력 하나로 전부 통일하고 있다. 그리스 조각에 잘 나타나 있다. 로마의 조각에는 전혀 없다. 로마 것은 백퍼센트 짝퉁.

활 쏘는 사람이 활을 쏘면 종아리의 근육도 등의 근육도 발가락끝도 모두 힘주어 당기고 있다. 한국의 조각가라면 그냥 팔로만 당기게 하지만 그래서 가짜. 하나가 당기면 모두가 당긴다. 이것이 근육의 원근법이다. 근육의 소실점이다.

라오콘 상에도 잘 나타나 있다. 뱀이 몸을 비틀면 라오콘의 두 아들도 몸을 비틀고 운명도 몸을 비틀고, 슬픔도 몸을 비틀고, 머리칼도 몸을 비틀고, 역사도 몸을 비틀고, 모든 것이 몸을 비튼다. 거기에는 몸을 비트는 소실점이 있다.

하나가 가면 모두가 가고, 하나가 서면 모두가 서고, 하나가 무거우면 모두가 무겁고, 하나가 아득하면 모두가 아득하다. 그런 논리가 있어야 한다. 바이올린의 현처럼 팽팽하게 하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사건으로 비약하는 단서가 된다.

한국의 조각에는 그런 것이 없다. 하나가 가면 모두가 간다는 논리가 없다. 도대체 2천년 전 그리스 조각에도 있는 것이 왜 지금 한국의 조각에는 없을까? 그게 없으면 무얼 조각한다는 것일까? 도대체 뭘 그린다는 건지 뭘 새긴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놀랄 일은 아니다. 그리스 조각에 그 멋지게 있는 것이 로마조각에는 하나도 없다. 어쩌다 실수로 하나쯤 있을 법 한데 거의 똑같이 베꼈으면서도 하나도 없다. 왜 없을까? 또 로마는 그렇게 없고 한국에도 그렇게 없고 일본에도 없는데 왜 그리스에는 있을까?

그리스의 어떤 하나로부터 공명하여 메아리쳐서 울려퍼져서 가득 채운 것이다. 그것이 예술. 그러나 로마나 한국이나 일본에는 그 메아리가 전해지지 않아서 모조품은 많은데 원본 하나가 없다. 만개를 만들어도 모두다 짝퉁. 모두가 가짜.

반드시 논리가 있어야 하며 그 논리는 애초의 사건에서 빌어온 이미지를 품는 것으로 얻어질 수 있다. 비틀즈의 이매진처럼. 그 논리는 근본 관계에서 나온다. 그 관계는 적대적 관계, 종속적 관계, 우호적 관계, 모방관계 등 다양할 수 있다.

선문답의 일화들은 그 관계를 함축한다. 구지선사와 꼬마동자의 손가락 사건이 그렇고 임제의 할 사건과, 덕산의 방 사건이 그렇다. 그것은 관계를 드러내어 사람을 긴장하게 한다. 그렇다. 너와 나는 관계 속에 존재한다.

그 관계는 나와 너로부터 시작되지만 우리와 세계와 우주로 확장되어 신에게 가닿는다. 신이 소실점이다. 너와 나의 간절한 입맞춤이 소실점이다. 그림 전체를 장악하고 계를 통일하는, 가득채우는 극적인 입맞춤이 있어야 한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에서 하느님과 아담의 손끝이 닿을락말락 거기로부터, 그 이미지로부터, 그 사건으로부터, 그 관계로부터 가지쳐서 네트워크로 전개하여 세상을 망라한다. 그 하나의 기운이 그 천장을 가득 메우고 있다. 촛불처럼 비추고 있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예로 들 수 있다. 거기엔 기다림이 있다. 기다림이란 것은 어떤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바이올린의 현이 활을 기다리듯이. 어떤 사람을 기다리는게 아니라 그 올 사람과 기다리는 사람이 관계가 있다는 거다.

데이트 하는 여자를 기다리는 남자도 있고, 그 사람은 에스트라공이다. 물건 사러오는 손님을 기다리는 장사꾼도 있고, 그 사람은 블라디미르다. 돈 키호테를 기다리는 산초도 있고, 춘향을 기다리는 월매도 있고, 물고기를 기다리는 낚시꾼도 있다.

그렇다. 인간은 관계 속에 있는 것이다. 그들은 고도를 기다리지만 고도를 거꾸로 하면 도그다. 개를 기다리든 신을 기다리든 중요한 것은 기다리는 대상이 아니라 관계다. A가 이렇게 하면 B는 이렇게 한다는 논리구조 그 자체다.

연극을 보는 관객들 중에 그걸 포착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 관계의 의미를 알아채는 사람이 있을까? 어쨌든 극은 관객들에게 영감을 던진다. 선문답을 그대로 극장에 걸어놓은 거다. 퍼포먼스는 더 많은 관계를 끌어내는 거다.

이미지는 그 관계의 씨앗이다. 그것을 풀어내면 영화가 되고, 연극이 되고, 조각이 되고, 디자인이 되고, 패션이 되고, 그림이 된다. 모든 패션은, 디자인은, 유행은 관계를 나타낸다. 여인이 짧은 치마에 하이힐을 신은 것은 세상과의 관계를 나타낸다.

남자가 양복에 넥타이를 맨 것은 관계의 접점을 개방하고 있음을 뜻한다. 그것은 나와 너의 관계이고 세상과의 관계이고, 우주와의 관계이고, 신과의 관계다. 방아쇠가 공이를 치면, 공이가 뇌관을 치면, 뇌관이 장약을 치면, 장약이 총알을 치면, 네 마음에 명중한다.

누구든 속에 그 총알같은, 타겟을 겨냥한, 이미지 하나를 씨앗으로 품으며 그 이미지라는 씨앗이 자라나서 고개를 내밀면 관계의 촉수가 되고, 우리는 그것을 옷이나, 넥타이나, 신발이나, 화장이나, 머리모양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홍상수 영화는 그런 관계의 어설픔을 드러낸다. 기다림이나 혹은 관계의 일치 혹은 의도적인 불일치를 드러낸다. 이런건 재미가 있다.거기에 재채기가 나올 거 같은 간질간질함이 있다. 짜장면을 시키면 짬뽕을 주고, 편의점에서 담배를 달라면 뱀을 주고 그런 재미가 있다.

사오정이라면 그런 관계를 부각한다. 우리는 익숙한 관계 속에 있기 때문에 그걸 당연시하여 관계 속에 있음을 망각하지만, 홍상수 영화의 주인공인 사오정처럼 관계의 촉수가 닫힌 인물은 그런 관계를 극적으로 노출시킨다.

한 박자 느리거나 혹은 한 박자 빠른 것도 있을 수 있다. 의도적인 불협화음을 통한 비틀기. 우리는 얼마나 많은 미묘한 관계의 신호들 속에 살고 있다는 말인가? 신호등은 네거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도처에 있다. 패션으로 디자인으로 화장으로 있다.

살바도르 달리라면 그런걸 만들었을 거다. 의도적인 신호의 불일치와 의외의 신통한 일치. 안달루시아의 개에서 달자르기와 눈자르기의 일치, 겨털과 턱수염의 일치, 죽은 당나귀와 피아노와 끌려오는 신부는 그런 일치불일치 관계를 나타낸다.

예술은 우리가 거대한 관계망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시키는게 중요하다. 그 관계망의 소실점, 그것이 태양이든, 신이든, 진리든, 역사든, 아름다움이든, 그것이 존재하여 있음을 부각시킨다. 너와 나를 중매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그 관계를 그려놓은 서원아집도다. 왕안석이 법으로 해결하려 한 것을 소동파는 관계로 해결하려 했던 것이다. 그것이 선비집단의 이데올로기로 되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좌파와 수구는 법과 폭력으로 해결하려 하고 우리는 관계로 사랑으로 해결하려 한다.

그 관계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각인시킨 사건이 죽림칠현의 고주망태 음주사건. 혜강의 백안시 사건. 광릉산 탄주사건. 이후 이천년간 동양예술은 그 하나의 사건을 다양하게 변주하였다. 추사와 초의와 다산이 그렇게 재현하였듯이.

그 관계의 단서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독자의 상상에 맡기는게 예술의 짜릿함이다. 고도는 신이 아니고 개가 아니다. 그냥 하나의 단서일 뿐이다. 그 관계의 절묘함을 즐기는게 선문답의 퍼포먼스들. 그 관계의 간질함으로 인간을 긴장시키는 놀이가 고도를 기다리며.

애플의 사과처럼 한 입만 깨물어먹고 나머지는 독자들이 먹게 하는 거다. 그냥 퍼포먼스가 아니라 사제관계, 친구관계, 적대관계, 종속관계 등 다양한 관계가 존재하며, 그 관계가 포지션을 낳고 임무를 낳으므로 그 안에 긴장이 있는 거다.

예술은 긴장. 긴장 위에 파격. 그럴 때 소리가 난다. 그렇게 낳는다. 낳으므로 긴장한다. 요리사와 손님의 관계. 손님이 욕하면 요리사는 몰래 요리에 침을 뱉는다. 그러므로 긴장하라. 그리고 작가와 독자,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 연주자와 객석.

그 관계의 긴장을 드러내는 즐거움을 알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칼라와 명암과 원근과 밀도, 중력, 시간, 강약, 고저, 장단, 리듬, 슬픔, 운명들도 그런 어떤 계를 통일시킬 수 있는 관계들. 색깔의 어울림이나 음의 앙상블이나 다 그런 것.

그런 관계의 속깊은 이해를 통해서 그 관계의 끈을 잡고 한 걸음씩 추적하여, 마침내 근원적인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그 관계의 최종적인 주인, 소실점, 포커스로서의 진리와 역사와 문명과 진보와 신의 완전성을 만나게 된다.

보이지 않는 끈을 보는 것. 퍼포먼스는 소통에 관한 이야기다. 관계가 포지션을 낳고 포지션은 임무를 낳는다. 우리가 포지션 안으로 들어가면 소통은 이미 성공, 포지션과 임무를 얻지 못하면 종일 떠들어도 소통은 실패다.

극장에서 무엇을 볼 것인가? 한국 관객들은 그 관계의 의미를 모른다. 퍼포먼스 한다면서 백남준이 신발을 벗었다 놨다 하니까 '에이 돈아깝다 내가 저거보러 왔나' 하고 욕하고 가더라. 백남준이 장을 여니까 자기들이 거기에 모였다는 자체가 재미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백남준이 테레비를 가지고 지구를 어떻게 묶었나 하는 본질은 못보고, 텔레비전 안에 그림이 번쩍번쩍 하는게 저게 뭔가 하고 눈알이 빠지도록 들여다보고 있으니 목이나 아플 뿐. 얼마나 바본가. 백남준이 얼마나 속으로 웃었을까?

사람 많이 있는데 사람들 우르르 몰려가는게 그게 퍼포먼스다. 월드컵 길거리 응원도 대단한 퍼포먼스고 촛불도 그렇다. 그건 하나의 이미지다. 이미지가 세상을 바꾼다. 그 이미지를 품어라. 그 이미지의 씨앗에 물과 거름과 햇빛과 자유의 공기를 주라.

그런 관계, 관계가 만드는 긴장, 긴장의 아슬아슬함, 거기서 파격, 파격의 재미, 파격이 내는 소리. 긴장이 바이올린 현이라면 파격은 현을 켜는 활. 파격이라는 활로 긴장이라는 현을 켜는데 그 긴장을 긴장시키도록 줄을 잡아당기고 있는 것은 백남준과 200명 관객의 팽팽한 눈싸움.

백남준이 괜히 신발을 벗었다 놨다 하니까 거기서 뱀이라도 나오는줄 알고 관객이 침을 꼴깍 삼키고 있다는거. 그렇게 침을 꼴깍 삼키며 보고 있는 것이 바이올린의 현을 당기는 긴장이라는 것을 모른다. 그 방법으로 자신이 퍼포먼스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모른다.

관객은 백남준이 뭘 해야한다고 생각하지만, 정치비판이나 환경캠페인 따위나 권선징악이나 감동 따위를 해야한다고 믿지만, 실은 시선을 한 곳으로 모으는 것이 핵심이며, 거기에 돈내고 와서 본 사람들이 백남준의 행위를 ‘고도를 기다리며’ 있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관객들은 백남준이라는 고도를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었던 것이다. 왜 그걸 보지 못하는걸까? 존케이지가 초대한 4분 33초동안도 그렇다. 소리를 내는 것은 팽팽하게 당겨진 현, 4분 33초 동안 침을 꼴깍 삼키며 고도를 기다렸던 그 팽팽한 긴장이 소리를 토하는 현.

이후 그 현들이 소리를 토해서 한동안 세상이 시끄러웠다고 하더라. 각설하고 어느 네티즌이 자기 블로그에 올린 글을 인용하자.

[고도를 기다리며] 사무엘 베케트

매일 같은 장소에서
'고도'를 기다리는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
'고도'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잘 알 수 없지만
'고도'가 두 사람에게 절대적인 희망이라는 것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고도를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할 때면
그들은 서로 질문하고 말하고 욕하는
행위로서 지루함을 달랜다.
그 말들이 터무니 없고 무의미할 지라도
그들은 그것을 알지도 못 할 뿐더러
말을 한다는 그 자체로 그들이 살아있다는 증거가 된다.
고도는 매일 같은 소년을 보내서 이야기 한다.
블라디미르 : 고도가 보낸거지?
소년 : 네
블라디미르 : 오늘 밤에는 못 오겠다는 얘기겠지?
소년 : 네
블라디미르 : 하지만 내일은 온다는거고?
소년 : 네
블라디미르 : 내일은 틀림없겠지?
소년 : 네

바보같은 해석이다. 사무엘 베케트가 속으로 조낸 웃었을 거. ‘절대적인 희망이래 ㅋㅋ’ 절대적인 희망 그런게 어딨냐? 멍청하긴. 고도는 도그다. 그들은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피아노 현과 건번의 관계처럼 관계 속에 있는 거다.

피아노의 현은 연주자가 두들겨 줄 때까지 기다릴 수 밖에 없다. 팽팽하게 대기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조율사가 와서 조여버린다. 소년은 그 조율사다. 원근법의 소실점이나 명암법의 조명처럼 포커스가 있어야 한다는 거다.

고도가 그 자리에 있기 때문에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그 자리에 있다. 고도와 블라디미르 에스트라공이 원근법의 소실점과 그림 안의 건물들처럼 배치되어 있는 거다. 무엇인가? 작가의 보는 위치가 바뀌면 포커스가 바뀌고 소실점도 바뀌고 다 바뀌는 거다.

무대 위에 포커스가 주인공을 비추고 있다. 이때 포커스가 옆으로 살짝 이동해 버리면? 무대 위의 배우도 살짝 이동해야 한다. 그 포커스를 담당하는 조명기사가 살바도르 달리처럼 짖굳은 장난꾸러기라면? 포커스는 이리저리 왔다갔다 한다.

배우는 이리저리 뛰어다녀야 한다. 그걸 즐기는 거다. 즐겁지 아니한가?

고도는 소실점 역할이다. 포커스 역할이다. 그렇게 꽉 짜여진 느낌을 얻게 한다. 그래서 김기덕 활이 고도를 연주하는 거다. 그대 이 글을 읽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을 위하여. 그런 논리구조가 있어야 한다. 그런 팽팽한 긴장감이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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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는 ‘잇다’, ‘arm’은 ‘이음’. 그러므로 예술은 서로 다른 별개의 둘을 하나로 이어주는 것이다. 소실점이 잇고, 포커스가 잇고, 형태가 잇고, 고도가 잇고, 너와 나를 잇고, 세상을 잇고, 우주를 잇고, 진리를 잇고, 신에게로 잇는다.

이어질 때 꽃은 피고 현은 소리를 낸다. 찬란한 빛을 낸다. 그대는 말하게 된다. 너의 것이 나의 것이 되고, 나의 것이 너의 것이 되고, 마침내 우리의 것이 되고, 모두의 것이 되고, 하나가 되고, 세상이 되고 천하가 된다. 가득 채워내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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