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로움의 원인은 욕망이고
욕망은 느낌 때문에 일어난다
느낌은 매순간 일어나지만
공기와 같아서 있는지 알기가 어렵다.
느낌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감각대상과 부딪칠 때 자동적으로 일어난다.
눈이 형상을 볼 때, 귀가 소리를 들을 때
코가 냄새를 맡을 때, 혀가 맛을 볼 때
신체가 접촉할 때, 마음이 생각할 때
아는 마음과 함께 느낌이 일어난다.
이러한 느낌이 일어나는지 모르면
즉시 욕망이 일어나 좋아하거나 싫어한다.
욕망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감각기관이 대상과 부딪칠 때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한다.
처음에 일어난 맨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육체적 느낌으로 바뀌어
번뇌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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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글은 위빠사나 선원에서 내보내는 글인데, 제가 이 글을 보고 가져와서 사용합니다.
괴로움의 원인은 욕망이고
욕망은 느낌 때문에 일어난다.
욕망은 특정한 어떤 것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어디에나 둘러붙는 것이다.
즉 무엇을 접하고 거기서 무엇인가를 얻고자 하는데 안될 때 생기는 감정이다.
괴로움이 느낌 때문에 일어난다고 여기지만,
그 느낌을 왜 받는가이다.
불만족을 느끼는 것인데, 그것은 어떤 상태가 결여된 것이다.
완전하지 않기에 불만족을 느낀다.
물질이든 정신이든 그것이 충족되지 않아서 불만족을 느끼는데,
불만족하다고 다 괴로움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욕망을 즉 감정을 쫒아가기 때문에 괴로워지는 것이다.
마음이 작아지기에 괴로움을 느끼는 것이다.
상승이 되지 않고 쪼그라들고 마음의 공간이 작아져서 괴로워진다.
느낌은 매순간 일어나지만
공기와 같아서 있는지 알기가 어렵다.
느낌은 사람이 무엇을 하던지 모두 느낌으로 전달 받는다.
하지만 무엇을 느끼는지 다 알고 있다.
다만 익숙한 느낌들에 대해서는 의식하지 않을 뿐이다.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지만,
다 의식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한번 의식해 놓았던 것은 계속 결정하고 의식하려면 복잡해져 꼬여 버리기 때문에
한번 결정된 것은 다시 결정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순간 일어나는 느낌도 때와 상황이 달라지면 다시 의식해야 한다.
뭔가를 다시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느낌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감각대상과 부딪칠 때 자동적으로 일어난다.
대상을 만나면 느낌은 반사적으로 1초만에 나타난다.
그 1초만에 느껴지는 것이 무엇이냐이다.
이 1초만에 기쁨 불쾌함 무덤덤함 등을 다 느끼게 된다.
눈이 형상을 볼 때, 귀가 소리를 들을 때
코가 냄새를 맡을 때, 혀가 맛을 볼 때
신체가 접촉할 때, 마음이 생각할 때
아는 마음과 함께 느낌이 일어난다.
'안이비설신의' 가 대상을 접촉하면 '아는 마음' 인 '식' 과 같이 일어난다는 것인데
이것은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식이다.
이를 풀어서 설명하면
(오온 - 색.수.상.행.식 ->존재를 구성하는 기본 법 단위)
(일체 - 12처 ->내입처(안.이.비.설.신.의),외입처(색.성.향.미.촉.법)
(18계 - 12처+ 6식(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식)
여기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의식은 이 육식을 가리킨다.
그리고 마음(정신)을 감지하는 것이 빨간 표시인 의(뇌) - 의식 이다.
이것이 깨달음에 관여한다.
느낌중에서도 깨달음과 관련된 느낌, 뇌가 반응하는 느낌은 여기에서 일어난다.
법은 대상이나 사물을 의미하는데, 미세한 것이기도 하고 구체적인 것이기도 하다. 사건일 수도 있다.
이는 곧 의와 법의 만남 즉 접촉으로 관계가 맺어진 그 자체를 의미할 수도 있다.
여기서 나타나는 것이 느낌인데, 느낌은 그 접촉된 관계의 상태를 아는 것이다.
곧 '질' 의 상태를 파악한 것과 같다.
질의 상태를 느낌으로 전달받는다. 그 느낌을 잘 파악하면 관계된 질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다.
무엇과 무엇이 만나서 그 사이에 흐르는 그것을 감지하는 것인데 이것이 느낌이다.
의는 법을 접촉하면 다양한 마음들이 일어난다.
의는 대체로 수(느낌)상(생각)행(의도)을 감지하고 마음부수들을 감지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는 마음안에서 일어나는 좋고 나쁜 것 등의 모든 감정을 감지한다는 것이다.
수.상.행은 마음의 기능과 같다. 마음부수들은 이러한 기능이 대상을 접촉한 결과 각인된 감정들이라고 생각되는데, 이러한 감정들은 기억되어 있다고 보인다. 한번 접했던 이러한 감정은 자동으로 저장되어 반복되어 사용된다고 여겨진다.
이 느낌이 일어나면 생각을 하게되고 의도가 생기게 된다. 그리고 무수한 여러 좋고나쁜 마음부수들이 연달아 일어난다.
그래서 수행에서는 느낌을 가장 경계한다.
최종적으로는 이 느낌을 느끼는 그릇인 오온(존재)의 결합을 해체하는 단계까지 간다.
색수상행식을 흩어지게 하는 것이다.
조건지어져 만난 이 오온을 정신적으로 해체하는 과정에서 수행법으로는 위빠사나가 나왔다.
집착을 여의는 것인데, 오온은 지수화풍의 4가지 요소로서 비롯된 것이어서 그 흩어진 자체로는 무아이기 때문이다.
존재는 요소가 모여서 결합하여 하나(입자)를 이루었을 때 비로소 존재로서 기능하기 때문이다.
이는 존재에 집착하는 마음을 여의기 위해서이다.
이 집착의 마음이 컨트롤되고, 종국에는 컨트롤 한다는 마음까지 사라지고 자연스러워질 때 느낌의 지배를 지배를 받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인 것 같다.
붓다가 느낌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은 각별하다.
다만 이 느낌이 선불교에서는 깨달음으로 재발견 되었다는 것도 각별하다.
붓다의 느낌을 컨트롤 방법이 선불교에서는 실제 삶에서 활용하는 방안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이 깨달음도 붓다의 연기법과 같은 것이다.연기법 하나로 모든 인과적 관계의 설명이 가능하듯이, 깨달음도 우주의 시작이었던 빅뱅을 복제한 것이어서 모든 깨달음은 하나로 수렴된다.
인간은 깨달음을 사용함으로서 문화를 이루었다.
이러한 방식이 적용이 안된 곳은 없다고 보인다.
그래서 느낌을 경계하고 잘 컨트롤하고 그 느낌에 대한 정확한 반응이 중요하지만, 역으로 느낌을 잘 개발하고 통제하면 그것이 깨달음이기도 하다.
의식안에는 다양한 마음들이 존재하고 있다. 이것과 저것이 만나서 작용(원인)하면 반작용(결과)의 마음들이 생겨난다. 그런 마음들이 기억되어 있다. 무의식도 의식안에 있다. 단지 의식하지 않고 있을 뿐인 것처럼 보이나 의식하고 있다. 단지 미처 알아채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지금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무의식적인 부분도 삶에 엄청나게 개입하고 있다. 이를 의식해야 한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이러한 느낌이 일어나는지 모르면
즉시 욕망이 일어나 좋아하거나 싫어한다.
이러한 이유는 이미 접촉하여 경험된 마음들이 저장되어 있기에 자동반사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한번 결정해버린 것을 계속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안식, 이식, 비식,설식, 신식 까지는 자동반사적으로 반응을 해도 크게 탈이 없다.
대체로 예쁘다.밉다. 듣기 좋다. 듣기 싫다. 향이 좋다. 나쁘다. 맛있다. 맛없다. 부드럽다. 부드럽지 않다. 정도여서...
자동반사적이 된다는 것은 솔직한 것이기 때문에 좋다 나쁘다에 그리 크게 상관은 없지만, 때에 따라서 사용해야 한다라는 부분도 있다. 다들 아시겠지만...
그러나 의식이 자동반사적으로 된다는 것은 조금 달리 생각해야 한다.
좋은게 좋은거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는 경우들이 많고 생각을 해봐야 하는 경우들이 많기 때문이다.
신경질적이거나 화를 잘 낸다거나 금새 우울해진다거나 거칠다던가 하는 것은 의식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수행이란 엄밀히 말해 이러한 자동반사적인 마음들을 통제하는 것이다.
욕망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감각기관이 대상과 부딪칠 때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한다.
욕망은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일어나는 마음에 무엇이 덕지덕지 달라 붙는 것이다.
욕망이란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어떤 것이 엉겨붙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엉겨붙고 있는가? 온갖 떠다니고 있는 감정들이 달라 붙는다.
처음에 일어난 맨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육체적 느낌으로 바뀌어
번뇌가 생긴다.
느낌에 집착하면 괴로움이 생기는 것도 맞지만,
느낌을 잘 개발하면 정신감각이 예민해진다.
그리고 반응성이 좋아진다.
또한 이 느낌은 의식을 깨워 반응성이 높아지면
깨달음도 느낌으로 전달되기 때문에,
느낌의 영역 역시 그 느낌의 반응점을 끌어 올리는데 주안점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예민해진다는 것은 사이코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볼 수 있는 것을 정확하게 볼 수 있는 것을 의미하고,
생각할 것을 제대로 생각하게 한다. 군더더기가 제거됨을 의미한다.
즉 덕지덕지 달라붙는 온갖 자잘한 감정들을 컨트롤하고 맨 처음의 느낌이 주인으로 있는 것이다.
가려지는게 많으면 반응점은 낮아진다. 예리하지 않고 둔탁하다.
여기서 위에서 말한 '맨느낌' 이란, 그 느낌이 느껴지는 순수한 그 느낌 그자체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왜곡되지 않는 그 느낌을 그대로 느껴야 한다.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느낌은 반드시 생각이 따르게 되고 의도가 반영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행에서는 이 느낌에서 멈춰야 한다고 하기도 하고, 느낌을 말려야 한다고도 표현한다.
아마도 느낌은 오온(색수상행식)에서 보자면 수라고 보기에,
오온을 만들어 내는 지수화풍의 4대에서 살펴 보자면 '수' 는 물의 성분과 가깝다고 보기 때문에 말려야 한다는 표현이 나온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러한 이유는 느낌에서 멈출 수 있다면 의도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행위가 일어나지 않아서 의도가 실행되지 않기에 업이 쌓이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행'은 곧 업이라고 보는 이유도 이러하다.
아마도 인간의 모든 것은 쌓임을 이루어서 어떠한 것을 만들어 내는 힘이 있기에 그러한 것 같다.
좋은 느낌 거칠은 느낌 좋지도 싫지도 않은 느낌 모두 수행에서는 말려야 하는 대상일 뿐이라고 한다.
그러나 느낌 즉 촉이 좋은 사람이 있다. 감이 좋은 사람이 있다.
모두 느낌이다.
이 느낌은 반드시 배격의 대상은 아니다.
어릴때 창의적인 교육을 시키는 이유가 모두 이 느낌 때문이다. 느낌을 순수하게 잘 살려내려고 하는 행위들이다.
이 느낌이 발달하지 않으면 어떤 창조적인 것이 약해진다.
불교에서 느낌을 경계하지만 경게함은 부정의 힘이라고 볼 수도 있다.
느낌 다음이 항상 문제이기 때문이다.
모든 일은 느낌 다음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필을 받는 것도 그렇다.
필이 있어야 뭔가 관계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느낌은 그 느낌이 뭔지 잘 사유해야 한다.
느낌을 훈련되어져서 바로 반사적으로 사용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이 느낌대로 행동하다 망하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이다.
느낌을 제대로 알아채는 것도 훈련되어져야 한다.
이는 질의 상태를 파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어떤 느낌을 받는 것에서 그 느낌이 뭔지 자신이 정확히 알아야 그 다음의 것이 제대로 방향을 잡게되기 때문이다.
느낌은 곧 반응이다.
무엇에 반응하는가가 중요하다.
그것이 느낌의 수준이다.
PS.
위의 '느낌' 에 대한 글을 반박하고자 함은 아니다. 다만 한가지에 대해서 더 생각해보고자 했을 뿐이다.오감도 느낌으로 알지만, 여섯번째도 느낌으로 안다.
왜 의도의 방향이 문제가 될까? 방향설정이 잘못되면 의도도 바르게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느끼고 나면 그 느낌에 따라서 온갖 감정들이 달라붙는다. 여기에 의도가 실린다. 기분 나쁜 것이 느껴지면 거칠은 의도가 실린다. 그러면 자동반사적으로 욕설이 나가게 된다. 혹은 누군가가 무시하면 두고보자라는 마음이 저절로 일어난다. 미운 마음을 품게되는데 이미 의도가 실려있다.
그런데 느낌은 이것이 전부일까? 느낌을 전달받고 감정이 상하거나 아니면 느낌을 전달받고 어떤 충만한 기분이 들거나에서... 마음이 갈가리 찢기는 것을 체험하기도 하고 마음이 꽉찬 듯한 환희를 경험하기도 하는데, 전자는 고통이 좀 더 직접적이고 실제상황처럼 느껴져 그 체험적 상황이 오래 지속되지만, 후자는 잠시 느끼고 그 이후로는 어떤 느낌으로만 기억되어 마음에 새겨진다.
그런데 요지는 반응했다는 것이다. 반응한 결과물이 전자와 후자다. 전자는 만남 이후 존엄이 손상된 것이다. 무엇인가와 부딪혀 자신이 깨져버린 것이다. 즉 마음이 다친 것이다. 또는 뭔가가 원활하지 않은 관계를 맺은 것이다. 후자는 만남 이후 존엄이 회복된 것이다. 무엇인가와 만나서 자신의 고유함을 되찾은 것이다. 마음이 회복된 것이다. 원활한 관계가 맺어진 것이다.
그래서 이 느낌을 잘 활용할 수 있어야 하는데, 존엄이 손상된 그 상태를 기억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고통이 클수록 인간은 벗어나고자 하고 상승하고자 한다. 자신의 존엄이 회복되는 지점까지 상승을 추구하게 된다. 도약이다. 그결과 깨닫게 되지만, 아닌 경우도 있다. 손상된 존엄이 회복되지 않으면 인간은 비참하다.
에너지 하나로 다 해결!
위의 글은 느낌이란 글을 보고 그냥 제가 분석해 본 것입니다.
올린 것은 깨지겠다고 올렸으니..ㅋㅋ 뭐..대략...^^;
간혹가다 목격하는 장면들인데,
어느곳을 보아도 에너지가 있는 곳으로 사람은 이동하고, 반응을 나타내더라는..
약간은 업되어 들뜬 느낌을 갖기도 하고...
그런데 에너지는 하나인데 사람이 활용하는 거에 따라서 다른 방식이지만 그 기운은 같더라는 것.
결과는 다르게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런데 대체로 이런 경우들은 분명 에너지가 느껴지는데 에너지가 없다 .
그럼 그 사람들이 느낀 에너지는 무엇인가?
사기든 아니든...
그래서 생각해보면...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에너지에 반응한다는 것.
자기안의 에너지와 반응하는 것인데,
그럼 역으로 상대가 접근하면 그 상대는 에너지를 보고 접근한다는 것인데,
정작 접근을 받은 대상은 그 에너지를 모르는 경우가 많음.
사용할 줄을 몰라서 일까? 아니면 자기 것이 아니어서 일까?
집단에 반응하는 것일까?
그만큼 에너지에 갈증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네요..... ^^
커피가 한 잔 있는데
마셔버리면 실패입니다.
마시면 쓰다/달다 중에 하나로 판정이 될테고
쓰면 싫다 달면 좋다 하고 욕망이 작동합니다.
이미 갑이 아닌 을이 된 경우입니다.
커피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좋지 않습니다.
다도가 왜 생겼을까를 생각해 보세요.
어린왕자에서 여우가 들려준 이야기와 같이
만나기 4시간 전부터 안절부절 못하는 것이 진짜입니다.
아직 커피를 마시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이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남녀관계도 그래요.
만나서 욕망을 교환해 버리면
다른 여자라면 어떨까? <- 백퍼센트 깨집니다.
다른 커피라면 어떨까? <- 이미 실패입니다.
그러므로 진짜는 만나기 전의 준비단계에서 갖추어진 것이며
만나더라도 그 사람의 현재가 아닌 과거와 미래를 만나는 것이 진짜입니다.
만났다 해도 그 사람의 거기까지 오게된
이전단계의 이야기를 충분히 못만났기 때문에 만남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다음 단계의 이야기를 충분히 못만났기 때문에 계속 가는 겁니다.
한 잔의 커피를 마시지 마십시오.
이미 을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진짜는 만나기 전의 준비단계에서 갖추어진 것이며
만나더라도 그 사람의 현재가 아닌 과거와 미래를 만나는 것이 진짜입니다.
만났다 해도 그 사람의 거기까지 오게된
이전단계의 이야기를 충분히 못만났기 때문에 만남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다음 단계의 이야기를 충분히 못만났기 때문에 계속 가는 겁니다.'
대체로 현재를 만나기 때문에 실패하는가 봅니다.
현재는 대체로 서로 필요한 것들을 교환하고자 함이 크므로...
그래서 뭔가 허전한 것인가?
문학의 가치를 판단하는 데는 1분도 길지요.
떠나는 이야기-0점
갇히는 이야기-노벨상
제가 돈키호테를 격찬하지만 그건 캐릭터 구현이 최초라서 그렇고
사실 돈키호테도 떠나는 이야기라서 아라비안나이트류 봉건성을 극복 못했어요.
반면 구영탄은 만화지만
떠나기는 커녕 첫장면부터 돌아옵니다.
와서 안 가요.
이상의 날개-33번지에 갇히다
김기덕의 섬-섬에 갇히다
발자크의 인간희극- 하숙집에 갇히다
헤밍웨이 노인과바다-바다에 갇히다
떠나지 못하면 걸작
반면
위고의 장발장-초반부 빼고 다 꽝
뒤마의 삼총사 - 처음부터 끝까지 꽝
이문열 쓰레기 - 오딧세이 황제 어쩌고 떠돌아다니므로 꽝
이문열 중에 그나마 일그러진 영웅이 걸작이 될뻔한건
초반부는 갇히는 이야기
막판 반전은 떠나는 이야기로 달나라 슝 안드로메다 슝
이외수의 초기작들은 갇히는 이야기입니다.
외수옹도 말년은 좋지 않아요.
커피를 마시면 백퍼센트 떠나는 이야기로 됩니다.
이번에는 아메리카노를 마셔볼까?
이번에는 무슨 커피를 마셔볼까?
커피를 마시기 전까지는 갇히는 이야기가 됩니다.
욕망 어쩌구는 떠나는 이야기에요. 0점
에너지는 갇히는 이야기입니다. - 노벨상
아 참 문학수준으로 말하면 일리아드가 높고 오딧세이는 꽝
오딧세이도 막판 집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만 백점.
한국의 고담소설은
무슨 낭자전인데 대부분 여자가 중국 송나라로 가서 남만을 토벌하고 장군이 됩니다.
떠나는 이야기이므로 꽝.
작가가 되는건 간단해요.
커피를 마시고부터 이야기 시작하면 꽝
커피를 마시기까지 이야기를 하면 노벨상.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참 좋아하는데
그나마 나은 소설 맞군요.
구영탄이 그 '불청객 시리즈 만화' 맞습니까? 늘 은하와 함께 드장하는.
우리나라 멜로영화중 대박히트를 한 '접속'이라는 영화 아시겠지만
영화 끝날때까지 한석규, 전도연은 한 번도 못 만납니다.
그런데 영화 제일 마지막 장면에 딱 만나요. 그런데 말 한마디도 없이
거기서 영화가 딱 끝나 버립니다. 접속은 분명 남녀의 멜러물이지만
만나는 과정까지를 계속 전개하다가 막상 어렵사리 만나니 딱 끝납니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일리아드 아니면 오디세이인데
일리아드는 만점 오디세이는 꽝점..
물론 이건 문학성이 그렇다는 거고
일리아드의 진짜 주인공은 헥토르.. 완전한 인간상
이유는 이 이야기를 퍼뜨린 이탈리아인들이 몰락한 트로이에서 탈출한 자들이기 때문인 영향도 있음.
일리아드는 불완전한 인간 아킬레스가 완전한 인간 헥토르를 만나 어떻게 부서지는가 하는 거.
아킬레스는 전쟁에 관심도 없고 피할 수 있으면 피하려고 하는데
꼬여서 전쟁에 말려들게 되고, 또 꼬여서 헥토르와 조우하게 되는데
문재인의 운명처럼 다 운명인 거죠.
친구의 죽음.. !
여기서 문학성이라는 것은 불완전한 동성애자(?) 아킬레스가
갈팡질팡 좌충우돌 번뇌망상 우왕좌왕 하다가
완전한 인간 헥토르를 만나
알 수 없는 어떤 사랑 혹은 끌림에 빠지게 되는데
뭐 그것은 전사의 피 혹은 끼라고 할 수 있는 거죠.
불완전한 자가 완전한 자를 만났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불완전한 노무현이 완전한 김대중을 만나 어떻게 변신하는가
대부분 문학은 같은 이야기입니다.
자기 내부의 어떤 잠재한 에너지가 폭발하게 된다는 거.
에너지의 폭발..
이게 문학의 결론입니다.
욕망 어쩌구는 에너지가 없는 자들의 한심한 소리일 뿐.
아킬레스와 헥토르의 조우는 에너지의 자기장 안에서 필연적인 거죠.
갇히다.
며칠전 길을 걷다가...
차들 지나가고 사람들 걸어가고...
문득 내가 이곳에 갇혔다라는 느낌을 받았는데...
아무도 이 세계를 빠져나갈 수 없다라는...
뭔가 짜여진 세계에 툭 던져진 느낌.
그런데 내가 갇혔다라고 느낀 그 느낌이 동렬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갇힘과 같은 것인지..아닌지는...
장문의 글인데
대략 허튼 소리입니다.
그게 다 에너지가 부족한 거에요.
다섯 살 꼬마는 하루 종일 지치지도 않고 잘 뛰어 놉니다.
몸에 기운이 넘치기 때문입니다.
욕망 같은건 없습니다.
애들은 호르몬 작용이 활발해서 기본적으로 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욕망이니 감각이니 하는 것은 어떤 대상을 만나서 접촉하는 것인데
사랑에 빠진 남녀는 만나기 전부터 이미 설레임 속에 업되어 있고
진리를 찾아가는 학자는 만나기 전에 이미 에너지 만땅 충전되어 있고
사업을 하는 사업가는 아침에 눈을 뜨기도 전에 설레임을 안고(정주영)
무슨 접촉을 하고 자시고 이전에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욕망도 없고 괴로움도 없는 것입니다.
아이는 만땅으로 충전된 에너지에 의해 마음껏 뛰노는 것이며
사랑하는 남녀는 만땅으로 충전된 에너지에 의해 쫄쫄 굶어도 즐거운 것이며
진리를 깨달은 학자는 만땅으로 충전된 에너지에 의해 책을 7권 밖에 못 팔아도 행복한 것이며(소로)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은 일어나기 전에 심지어 꿈 속에서도 행복한 것입니다.
욕망이 어떻고 하면 다 에너지가 없다는 반증이고
그건 이미 상당히 잘못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남녀는 만나지 못하여 사랑에 빠지지도 않았고
아이는 엄마를 잃어버렸고
학자는 이론이 틀려버렸고
사업가는 사기당했고
다 망해서 그런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