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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3339 vote 0 2012.10.27 (00:01:43)

 

         내 안의 완전성과 반응하라

 

    깨달음은 완전성의 깨달음이다. 완전하면? 반응한다. 어떤 주어진 상황에 반응하는 능력을 획득하는 것이 깨달음이다.

 

    좋은 음악을 듣고도 흥이 나지 않는다면? 좋은 그림을 보고도 시큰둥하다면? 좋은 영화를 보고도 도무지 왜 이 장면이 필요한지 이해가 안 된다면? 좋은 사람을 만나도 도무지 마음이 설레지 않는다면? 실패다. 그럴 때 그대의 삶은 쪼그라들고 만다. 천박해지고 만다. 반응할 수 있어야 한다. 기운찬 역사의 맥박을 느끼고 반응해야 한다. 그럴 때 그대의 삶은 풍성해진다. 거룩함이 그 가운데 있다. 모름지기 깨달을 일이다.

 

    아기가 체계적으로 배우지 않고도 거뜬히 말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이 자기 안의 언어능력과 반응하기 때문이다. 자연의 완전성과 반응함으로써 내 안의 완전성을 끌어내는 것이 깨달음이다.

 

    깨달음은 진리의 깨달음이며 그 진리는 자연에 반영되어 있을 뿐 아니라 내 안에도 갖추어져 있다. 문제는 그 둘이 만날 수 있는가이다. 부모에게서 떼어져 홀로 버려진 아이가 말을 깨치지 못하듯이 자연의 완전성으로부터 단절된 인간은 깨닫지 못한다. 그러므로 만나야 한다. 자연과 만나고 진리와 만나고 드높은 세계와 만나야 한다. 만나서 상호작용해야 한다. 비로소 반응한다.

 

    반응성은 개인간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 민감한 사람이 있고 둔감한 사람도 있다.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깨닫는다. 꼬마 싸이 황민우군처럼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그 어린 두 살 나이에 그냥 안다. 리듬을 탈줄 알고 박자를 맞출 줄 알고 흐름을 탈 줄 안다. 그러므로 당신도 가능하다. 훈련하여 잠든 그대 안의 반응성을 일깨운다면 말이다.

 

    육조 혜능은 누구에게 배우지 않았다. 수행하지 않았다. 깨닫기 전에 수행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깨달은 후에도 전혀 수행하지 않았다. 자기 안의 완전성이 자연의 완전성과 반응하여 그냥 끌어내어진 것이다. 잠금이 풀려서 툭 튀어 나온 것이다. 그것이 돈오다. 그러한 반응성은 특히 예술가에게서 특히 도드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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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종의 역사는 초조 달마로부터 시작되지만 뿌리를 더듬어보면 죽림칠현의 완적과 혜강에게서 기원함을 알 수 있다. 죽림칠현으로부터 면면히 이어온 깨달음의 전통이 달마의 가르침과 만나 자연히 반응한 것이 혜능의 돈오다. 죽림의 현자들은 권력의 서슬에도 굽히지 않는 숭고한 이상주의를 제창했다. 자연의 완전성과 반응한 것이다. 그리고 소통의 전범을 제시했다.

 

    깨달음은 첫째 진리의 완전성을 깨닫는 것이고 둘째 내 안의 완전성을 깨닫는 것이고 셋째 그 둘의 상호작용하는 스타일을 깨닫는 것이다. 내 안의 완전성이 자연에 반영되어 있는 진리의 완전성과 반응할 때 그것은 얻어진다. 아기가 엄마의 행동을 따라하듯이 그것은 저절로 툭 튀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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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은 물리적인 반응이다. 마음이 달 뜨는 것이다. 잠을 이룰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몸이 펄펄 끌어오르는 것이다. 말을 배우는 아기가 쉬지 않고 옹알이를 하듯이,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가 넘어짐을 두려워 하지 않듯이, 첫 비행에 나서는 아기새가 두려움없이 허공 중에 뛰어내리듯이, 내 안에서 격렬한 반응이 시작되면 도무지 명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의식적으로 명상하는건 가짜다. 고흐가 쉬지 않고 그리듯이, 모차르트가 쉬지 않고 연주하듯이, 꼬마 싸이 황민우군이 제 끼를 참지 못하여 신들린 듯이 춤을 추듯이, 싸이가 마침내 갈때까지 가버리듯이 그것은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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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은 화약의 폭발과도 같은 격렬한 반응이다. 자연이 눈을 뜰 때 내 안의 감수성도 눈을 뜬다. 깨달음은 그러한 반응의 직접적인 체험에 의해 가능하다. 그러므로 돈오돈수다. 그것을 체험한 자는 황민우군처럼 2살 나이에도 무엇이든 가능하며 그것을 체험하지 못한 자는 영원히 불가능하다.

 

    나는 깨달음을 누구에게 배우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눈 감고 가부좌하여 명상하지는 않았다. 명상해서 깨닫는 것이 아니고, 깨달았기에 깊은 명상의 들뜬 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하겠더라. 빠져나오지 못하므로 그 안에서 오래도록 머무르는 것이 명상이다. 깨달음의 즐거움에 비하면 잡다한 세상사는 도무지 눈에 들어오지도 않으니까.

 

    무엇에 반응하는가? 완전성에 반응한다. 그것은 계 안의 조형적 질서다. 질서의 기본은 대칭이다. 고저와 장단과 강약과 완급이 대칭을 이루고 충돌할 때의 긴장에 의해 내 안의 감성은 격렬하게 반응한다. 그럴 때 뇌는 최고도의 긴장상태에 들어간다. 왜 긴장하는가?

 

    대칭구조 안에서 서로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왜 영향력을 행사하는가? 서로 토대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관계다. 깨달음은 관계를 깨닫는 것이며, 관계는 토대의 공유에 의해 성립한다.

 

    토대의 공유는 둘이서 한 배를 타는 것이다. 한 배를 탔을 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이기려 해봤자 실패한다. 그 배를 운행하려면 최소 두 사람의 역할분담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공동운명체다. 그래서 서로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무엇을 공유하는가? 공간을 공유한다. 하늘과 땅과 집과 거리를 공유한다. 그리고 또 우리는 무엇을 공유하는가? 시간을 공유한다. 그것이 현대성이다. 공간의 공유에 대해서는 쉽게 알 수 있다. 하늘과 땅과 산과 바다와 도시와 거리과 집에 대해서는 누구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시간의 공유는 알아채지 못한다. 우리는 이 계절을 공유한다. 우리는 이 아침을 공유한다. 우리는 이 아침에 차려진 부엌의 식탁을 공유한다. 그 시간은 정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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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과 땅의 공유는 오래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아도 된다. 동해물이 마르지 않고 백두산이 닳지 않는다. 그러나 시간의 공유는 찰나에 일어난다. 그러므로 돈오돈수다. 남녀가 후끈 달아올랐더라도 식으면 그만이다. 그 한 순간에 기회를 잡아채지 못하면 영원히 떠나버리는 수 있다.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현대성이다.

 

    깨달음은 현대성의 깨달음이며 그것은 대칭의 구조가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하는 부분이며 그것은 어떤 시간제한이 있을 때, 유통기한이 정해져 있을 때, 그 촉박한 시일의 재촉에 의해, 계에 강력한 밀도가 걸리는 것이며 그때 인간은 긴장하게 되고 그럴 때 첨예하게 되고 거기서 분명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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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공간의 대칭을 잘 알고 대비한다. 흑과 백, 선과 악, 강자와 약자, 음과 양,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 여당과 야당의 대립은 공간의 대칭이다. 각자 영역을 나누어서 서로 감시한다. 함부로 금을 넘어가지는 않는다. 반면 사건의 기승전결은 시간의 진행이다.

 

    우리는 공간에서 흑과 백으로, 선과 악으로, 강자와 약자로, 부자와 빈자로, 음과 양으로, 좌파와 우파로, 진보와 보수, 여당과 야당으로 나누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면서 짐짓 여유를 부리지만 시간에서는 기승전결이 급격한 전개에 재촉당한다.

 

    아찔한 반전이 일어난다. 그만 뒤죽박죽이 되고 만다. 남의 영역을 침범하게 되고 만다. 다툼은 일어나고야 만다. 쪽박은 깨지고야 만다. 민감하지 않을 수 없다. 반응하지 않을 수 없다.

 

    돈오돈수는 주어진 상황 안에서 조형적 질서를 깨닫는다. 그리고 그 세계에 온전히 반응한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의 모습이 그대로 하나의 퍼포먼스이고, 그대로 하나의 플래시몹이고, 그대로 하나의 정겨운 그림이고, 그대로 하나의 행위예술이고, 그 자체로 이미 완전함을 깨닫는 것이다. 그 안에 순수성과, 활동성과, 대칭성과, 방향성과, 창조성이 작동하고 있음을 알아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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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시선은 무의식적으로 공간의 지점을 따라갈 뿐 시간의 기승전결을 따라가지 못하므로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공간에서 교착되는 것이 시간에서 순서지어짐으로써 문제는 해결된다.

 

    입구가 하나인데 들어갈 사람이 둘이면 공간에서 서로 교착되어 밀고 당기며 해결보지 못하지만 시간에서 선착순으로 해결된다. 그 과정에서 에너지의 집적이 있다. 예술가들은 공간의 대립을 시간의 리듬과 하모니와 고저와 장단과 강약으로 풀어낸다. 예술가들은 자연의 완전성과 내 안의 이상주의를 일치시킴으로써 그것을 얻어낸다. 그래서 멋지다. 막혔던 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이다. 뻥 뚫리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상황을 독립시켜 본다

 

    싸이가 유튜브에서 5억뷰를 올렸더라도 시간이 한 참 걸리고서야 보상은 얻어지는 법이다. 싸이가 1천억을 벌고 혹은 1조원의 시장을 창출하더라도 그것은 나중의 것이다. 당장은 빈털터리다. 사람들의 주의는 그 시간의 흐름을 따라간다. 틀렸다. 지금 이 순간을 포착해야 한다.

 

    지금 이 순간에 그대가 그 공간 안에서 그 상황의 플래시몹에 참여하고 있으며 그 자체로 완전함을 깨달을 일이다. 기승전결의 기에 섬으로써 이미 완전한 것이다. 미래의 가능성을 얻었을 때 이미 완전하다. 그것이 깨달아야 할 관계다.

 

    사람은 의미를 추구한다. 의미는 시간의 끝자락에 붙는다. 기승전결의 결이다. 반면 깨달아야 할 관계는 기승전결의 기다. 입구에 들어섰을 때 이미 완전하다는 것이다. 출구에서 획득되는 의미는 대개 돈으로 결론지어진다. 싸이가 돈을 벌어올 것이기 때문에 대단하다는 식이다.

 

    그러나 그대가 반응한 것은 돈 때문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대가 강남스타일에 반응했다는 사실 그 자체다. 돈타령은 그대가 할 말이 궁해서 끌어댄 가짜다. 당신은 본래 싸이의 돈에 관심이 없었다. 당신은 반응한 것이다. 그 자체로 완전하다. 꾸며대지 말라. 설명하지 말라.

 

    ‘끽다거’ 하면 거기에 무슨 의미가 따라붙는 것이 아니고 당신이 거기에 반응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기승전결의 결로 획득되는 의미가 아니라 기로 성립되는 관계가 완전하다.

 

    그러므로 병안의 새를 꺼내려들지 말라. 당신은 이미 거기에 반응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당신은 그것을 어디에든 써먹을 테니까 말이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이해못했다고 한탄하지 말라. 어쨌든 당신은 반응했다. 당신은 반응함으로써 지금 김기덕 타임라인 안에 존재한다. 당신은 그 현장에 있다. 연결되어 있다. 공명하고 있다. 마저 깨달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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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깨달음은 지금 이 순간 너와 내가 기승전결 구조 안에서 관계맺기로 인하여 매끄럽게 작동하고 있음을 알아채는 것이며 그 구조 안에서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음표와 음표들이 상호작용하는 것이다.

 

    시간은 무한히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마디가 있다. 봄여름가을 다음에 겨울로 끝난다. 봄의 파종은 가을의 추수로 끝난다. 아침의 출근은 저녁의 퇴근으로 끝난다. 소년의 탄생은 노년의 죽음으로 끝난다. 그러한 시간의 종결구조 안에 완전성이 있다. 당신의 반응할 타이밍이 그 안에 있다. 그래서 절박하다. 그래서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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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식은 식기 전에 먹어야 한다. 완전성은 당장 그대를 재촉한다. 지금 당장 일어서라고. 지금 당장 주는 잔을 받으라고. 지금 당장 부르는 노래에 박자를 맞추라고. 그것이 현대성의 의미다. 공간은 무한하나 시간은 유한하다. 시간은 무한하나 시간의 완전성은 유한하다. 음식이 식으면 모든 것은 사라진다. 연인의 달아오른 마음도 차갑게 식고 만다.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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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 안에 질서가 있다. 상황 안에 악기의 현이 있다. 상호작용이 있다. 지금 반응하라. 지금 응답하라. 지금 연주하라. 시인은 시로 반응하고, 화가는 스케치로 반응하고, 악사는 즉흥연주로 반응한다. 그것이 돈오돈수다. 그러한 준비의 갖춤이 스타일이다. 현을 팽팽하게 당겨놓는 것, 언제든 격발할 수 있는 상태로 장전해 두는 것, 내 안의 이상주의 날을 예리하게 세워 놓는 것 말이다.

 

    주어진 상황 안에서 숨은 조형적 질서를 찾아 그 상황을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 바라보고 거기에 순간적으로 반응하는 능력을 획득하는 것이 깨달음이다. ‘끽다거’ 라고 하면 차를 마시라는 말이 아니고, 그 자체로 이미 완성되어 있다는 말이다. 무엇이 완성되었나? 관계가 완성되었다. 그래서 설레이고 그래서 흥이나고 그래서 유쾌하다는 말이다. 그렇게 반응해야 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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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밥을 지어도 그러하고 농사를 지어도 그러하다. 뜸이 들었을 때 솥뚜껑을 열어야 한다. 곡식이 익었을 때 추수를 해야 한다. 딱 맞아떨어지는 한 순간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 안에 황금률은 존재한다. 공간은 무한한 변수가 있으나 시간은 오직 지금이 타이밍이다. 공간은 다양성이 있으나 시간은 찍어주는 정답이 있다. 찰나를 놓치면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 그래서 돈오돈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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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찰나의 지점을 임의로 조절할 수 있다. 악사는 리듬에 태워 조절하고, 시인은 운율에 태워 조절하고, 화가는 명암에 태워 조절하고, 감독은 극본에 태워 조절하고, PD는 편집에 태워 조절하고, 감독은 작전에 태워 조절하고, 스포츠맨은 호흡에 태워 조절하고, 장인은 결에 태워 조절하고, 자연은 계절에 태워 조절하고, 문명은 진보에 태워 그것을 조절한다.

 

    그것을 최종단계에서 인간이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기 때문에 완전하다. 그래서 소통된다. 그렇게 반응한다. 그러므로 창의할 수 있다. 깨달음은 그것을 얻게 한다. 깨달음에 의해 우리의 삶은 풍성해진다. 그 지점이 조절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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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 이미지 [레벨:9]무득

2012.10.29 (09:50:27)

기회를 잃어다고 두려워 말라.

이 글을 읽은 그대는 이미 기회를 얻은 것이다. 아직 결結이 완성되지 않았을 뿐이다.

결結이 없다고 얻은 기회를 버리는 어리석은 인간이 되지 말지어다.

漸修者 雖悟本性 與佛無殊하나 無始習氣 難卒頓除故 依悟而修하여 漸熏功成하여 長養聖胎하니 久久成聖일새 故云漸修也 比如孩子 初生之日 諸根 具足호미 與他無異컨마는 然其力 未充하여 頗經歲月하여야 方始成人듯하니라(수심결 1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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