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록
read 13943 vote 0 2008.04.14 (20:35:22)

너는 그곳에 있고 나는 이곳에 있다. 차표 한 장으로 너를 만날 수 있지만 나는 아주 먼 길을 돌아서 너를 만나야 했다. 너와의 만남이 일대사건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너를 만나는 순간 천둥은 치고 잎새는 떨고 바람은 불고 새들은 날아오르고 파도는 치고 물결은 일고 서광은 비치고 꽃들은 피어나고 우주는 흔들려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이야기들을 준비했어야 했다.

온라인 접속 한 번으로 전화 한 통화로 편지 한 통으로 너에게 말을 걸 수 있지만 그래서는 너의 진심과 인사할 수 없다. 너를 웃게 할 수 없다. 너를 순수하게 할 수 없다. 정화할 수 없다. 세상끝까지 가 보고 와서 이제 그 어떤 미련도 남아있지 않다는 표정이라야 너는 편안해진다. 본래의 너로 돌아온다. 그럴 때 너는 빛난다. 너와의 대화에서 어색함을 피하기 위해 제 3자의 이야기를 해서 너와의 만남에서 너를 소외시켜 너를 관객으로 만들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곳에 있고 너는 그곳에 있다. 내가 까치발을 디딘다면 담장너머로 너와 눈이 마주칠 것이다. 내가 종이비행기를 접어서 날린다면 너의 창가로 날아들 것이다. 내가 한 걸음 더 높이 산 꼭대기로 올라선다면 마침내 정상에 다다른다면 너를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지구 궤도를 선회하는 우주선 속에 있다면 너가 보일 것이다. 나는 좀 더 키가 자랐어야 했다.

세월은 가고 그루터기만 남았는데 옛날 옛적에 여기서 그렇고 그런 일이 있었다면 누가 믿겠나.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는 한 인간의 여정을 이야기한다. ‘계시’와 ‘표지’가 그 여행을 이끈다. ‘우림’이 그 빛으로 천사처럼 ‘툼밈’이 그 완전성으로 수호신처럼 산티아고의 여행을 돕는다. 궤도 위를 가는 열차처럼 딱딱 맞아떨어진다. 필요한 때 조력자가 나타나서 운명적인 가르침을 던져준다. 어떤 이끌림을 받은듯 그리로 향하게 된다. 어릴적 꿈 속에서 보았던 그곳을 향해 조심스레 살펴서 얻은 표지가 이끄는대로 발걸음을 내딛어 마침내 너를 만나게 된다. 한 인간의 삶은 너를 만나기 위한 여행이다. 운명의 만남을 완성하기 위한 연금술이다.

누구나 한번 쯤은 그렇게 생각한다. 자신이 인생에서 만난 사람은 모두 운명적인 만남이었고 자신이 겪은 일은 모두 신이 자신을 단련시키기 위한 치밀한 계획이었고 내 인생의 모든 사건들이 소설처럼 사전에 설계된 행로였을지도 모른다고.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 모든 것이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러므로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러므로 계시를 기억하지 않는 사람은 그러므로 조심스레 표지를 헤아리지 않는 사람은 우림의 밝음을 따르지 않고 툼밈의 완전성을 좇지 않는 사람은 결코 너를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 순간에 천둥은 치지 않고 그 순간에 꽃은 피어나지 않고 그 순간에 새들은 노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무 것도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만남의 순간을 천만 번은 생각해 두었어야 했는데 천만 번 마음 속으로 그 순간을 연습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대비했어야 했는데 그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침내 너를 만났을 때 네가 웃는다면 내 얼굴에 그것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지금 마주친 이 사람이 계시의 그 사람인가? 과연 표지가 이 사람을 가리키고 있는가? 과연 이곳이 운명의 필연의 예정의 약속의 그 장소인가? 과연 지금이 그때인가? 그렇게 가슴 설레이어 하며 얼굴에 그 마음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무지개를 처음 본 소년처럼 그 얼굴이 발그레하게 상기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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