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진리를 추구한다는 깨달음을 추구한다는 곳을 몇몇 군데 찾아다닌적이 있다.
당시의 나는 어렸고 누구든 만나고 싶었다. 그 사람이 진짜라면 내 안의 진짜도 움직일 것이라 믿었다.
그래서 만났다. 무언가 내 안의 것을 움직이게 하는 말을 한 사람, 혹은 글을 쓴 사람은 일단 만났다.
그렇게 찾아간 곳은 보통 명상, 진리, 깨달음, 영성 뭐 이런 것들을 언급하는 곳이었다.
일단 사람들은 보통 진리, 깨달음 뭐 이런 것에 대해 이야기를 아예 꺼내지도 않기 때문에, 당시의 나는 그런 주제에 대해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그래서 거리와 관계없이 찾아갔다. 목이 말랐기 때문이다. 그런 만남이 그리웠고 또 반가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진리를, 깨달음을 말하는 이를 찾아가 만나 보면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개인을 만나러 간 것인데, 그 자리엔 이미 '공동체'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 혹은 그녀를 만나기 전에 먼저 거쳐야하는 관문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공동체'였다. 누군가 '진리'를 '깨달음'을 전파한다고 알려진 곳에는 그 사람을 중심으로 하나의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누구든 새로온 자는 그 문을 통과해야 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 문은 보였다. 만져졌다. 느껴졌다. 심지어 냄새도 맡을 수 있었다.
그렇게 통과한 문으로 들어가 본 공동체 속에서 나는 길게 머무르지 못했다. 당시의 나는 일초만에 참과 거짓을 분간할 만한 통찰력도 없었고 가진 것이라곤 열정과 기대, 그리고 확신 뿐이었다. 마치 소리굽쇠처럼 어디선가 진리라는 굽쇠가 울린다면 내 안의 굽쇠도 그에 반응하여 함께 울릴 것이 기대와 확신, 그에 따라 천리길도 마다하지 않는 열정 말이다. 하지만, 내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불행히도, 내가 맡은 냄새는 진리의 은은한 향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젖냄새'였다. 방금전까지 물고 있던, 그렇지만 사라진 엄마 젖을 찾는 아이들의 입에서 나는 냄새 말이다.
명창의 소리에 북으로 추임새를 넣는 흥겨운 장면은 좀처럼 연출되지 않았다.
대신, '사랑해요 000, 영원히, 포에버!', 아이돌의 공연에서 볼법한 구호들이 귓가를 맴돌았다.
부처님의 설법에 염화미소로 답하는 흐뭇한 전등의 장면은 보이지 않았다.
역시 우리 엄마가 짱이야, 또는 역시 우리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멋있어! 하는 아이들의 반짝이는 눈망울이 보였다.
'대부분'의 경우, 그 공동체는 진리와 깨달음의 공동체가 아니었다.
그곳은 엄마 혹은 아빠, 그리고 아이들이 뭉친 유사-가족 공동체였다.
진짜 가족은 아니지만 진짜 가족보다 더 가족같은 곳.
그곳에선 정신분석에서 역동dynamic이라 불리는 부모-아이의 상황극이 한참 상영중이었다.
동일한 시나리오지만 대본은 각자가 쓴, 모두가 함께 연출하고 연기하는 그런 상황극 말이다.
물론 사람들은 대본에 자신의 역할을 부모 혹은 아이라고 적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에 스승 혹은 제자, 구루 혹은 추종자, 선생님 혹은 학생 뭐 이런 이름들을 갖다 붙였다.
하지만, 역할은 바뀌지 않았다. 스승 혹은 구루 혹은 선생님은 부모 역할, 제자 혹은 추종자 혹은 학생은 아이 역할.
일단 상황극에 참여한 이들은 예외없이 퇴행regression했다.
그들의 나이, 성별, 학력과 무관하게 그들은 어린아이가 되었다.
그들은 아이가 되어 스승이라는 이름의 부모 품에 안겨 응석을 부리고 있었다.
그리고 스승 역할을 맡은 사람들은 결국,
부모 역할에 흠뻑 빠져 사람들의 응석을 받아주고 그들의 어린시절 채워지지 않은 미해결된 욕구들에 응답하느라 정신 없어졌다. 우는 아이 달래느라 이런 저런 말씀의 사탕을 안겨줘야 했다. 한 아이에게 신경 쓰면 다른 아이가 왜 나한테는 신경쓰지 않느냐며 울고 보채기 일쑤였다.
이 상황극의 끝은 공동체의 붕괴였다.
애당초 유사-가족 공동체는 구조적으로 지속될 수 없는 공동체였다.
사람들은 결국 스승이 자신의 부모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상황극이 막바지에 이르면 사람들은 스승이라는 존재가 자신의 정서적 애착의 욕구를, 안전의 욕구를, 소속의 욕구를 온전히 채워줄 수 없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스승 역시 자신이 제자들의 부모가 될 수 없음을, 그들의 거대한 컴플렉스를 해결해줄 수 없음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기를 계속하면 통일교, 인민사원같은 거대한 사이비 종교집단이 되는거고,
보통은 다들 연기하다 제뿔에 나가떨어져 공동체가 와해되는 수순을 밟는다.
근데, 예외는 있었다.
아예 처음부터 이런 유사-가족 공동체의 형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야말로 진짜였다. 그들은 처음부터 부모 역할을 거부하였다.
그들은 우는 아이가 있으면 젖을 주는게 아니라 너는 일단 가서 엄마젖부터 먹고오라고 내쫓는다.
그들은 진리와 깨달음을 연주하는 곳에서 자기 악기를 가져와 참여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자꾸 음이 틀렸네 연주가 엉망이네 하면서 관객노릇 고집하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무대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들은 완전하고, 통하였고, 낳았고, 채웠으며 허무를 극복했기 때문에, 허무를 채우려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곁을 내주지 않았다.
그들이 원한 그림은 서원아집도였지, 온갖 종류의 컴플렉스로 굶주린 아귀들이 서로 엉켜붙은 지옥도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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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나에게 필요했던건 처음부터 스승이 아니었다. 부모도 아니었다.
나는 내 안에 끓고 있던, 빛나고 있던, 충만해있던 ( )를 나눌 친구가 필요했던 것이었다.
진정 만나고 싶은 것은, 사귀고 싶은 것은 바로 역사였고, 자연이었고, 진리였으며, 신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사귐은 혼자서도 충분했지만, 함께하는 것이야말로 완전한 것이었다.
프리마돈나의 독무도 아름답지만, 독무에 화답하는 또 다른 독무도, 혹은 군무도 지극히 아름다운 것이었다.
피아노의 독주로도 충분하지만, 바이올린과 비올라, 첼로가 곁들여지면 아름다운 피아노 4중주가 연주된다.
진리의 길 위에서,
누군가 자신의 기대를 채워주길 바란다면
누군가 자신의 욕망에 부응해주길 원한다면,
누군가 자신의 컴플렉스를 해결해줄거라 기대한다면,
당신은 결국 실패하고, 좌절하고, 환멸에 빠질 것이다.
두 종류의 동기가 있다. 하나는 완전성이며 하나는 불완전성이다. 완전성은 내 안에 가치판단의 시소가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그 시소를 가동하여 내 안의 것을 밖으로 표현하려는 것이다. 반면 불완전성은 시소가 나의 바깥에 있고, 상부구조에 있고, 공동체에 있어서 그 시소에 매달려 엉기려는 것이다.
-김동렬, 이기는 법, 151쪽-
그러므로, 만약 당신이 머무는 길 위에서 가상의 엄마아빠, 그리고 아이들로 이루어진 유사-가족 공동체를 만난다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떠나시라. 마치 자석처럼 그곳으로 끌린다면, 정신차려라. 당신 안의 컴플렉스가 지금 당신을 거대한 수렁으로 몰아넣고 있으니 말이다.
깨달음의 길 위에서 엄마, 아빠를 찾아선 곤란하다.
중국인.. 저 인도넘 되게 말 많네. 그래서 나더러 어쩌라구?
인도인.. 아 그게 당신 안에 다 있다니까.
중국인.. 그럼 됐네. 내 안에 다 있는데 뭐하러 골치아프게 그딴거 외고다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