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생명은 상호작용을 통해 진화한다. 사람도 상호작용의 밀도가 높을 때 지능이 좋아지게 마련이다. 교육을 상호작용의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즉 교사나 부모는 아이들이 어디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잘 살펴야 한다. 아이들이 어디에 어떤 식으로 반응하고 흥분하는지, 그 흥분을 어떻게 다시 친구들과 나누고 키워 가는지 살펴야 한다. 아이들이 상호작용을 통해서 긴장상태를 유지하고 경험을 창조하도록 교육환경을 넓혀가야 한다.
한 학부모가 있었다. 이제 곧 중학교로 진학해야 하는 아이를 보고 근심에 가득 차 있었다. 그의 말을 들어보니 지금까지는 무척 소신 있는 학부모로 학원도 거의 보내지 않고 아이들을 존중해주며 꽤 잘 키워왔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이를 보면 수동적이고 딱히 좋아하는 것도 없고 친구들과 관계도 무척 제한적으로 보였다. 대체 무엇이 잘못 되었을까?
아무리 아이에게 좋은 것을 많이 주었다고 해도 아이가 자신의 환경과 상호작용하지 못하면 소용없다. 특히 부모나 교사와의 상호작용은 한계가 있다. 부모나 교사와 아이의 관계는 주로 지시를 내리고 받는 관계로 흐르게 된다. 그러한 관계에서는 아이가 재빨리 관계의 룰을 파악하고서 자신이 할 수 있는 한계 안에서만 반응을 보이게 된다. 즉 더 할 수 있음에도 부모나 교사의 인정이 떨어지는 정도까지만 의욕을 내게 되는 것이다.
아이가 어렸을 때는 엄마와의 상호작용이 전부다. 부모와 상호작용이 얼마나 깊고 밀착되는가에 따라 아이가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는지 부정적으로 보는지가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아이가 자라면 점차 선생님과, 또래 그룹과의 상호작용의 밀도가 높아지게 된다. 아이는 자신의 작은 성공모델을 관계의 확장을 통해 세상에 내보낼 준비를 하게 되는 것이다.
상호작용을 통해 자신의 욕구를 건강하게 성장시키면 점차 더 커다란 소통그룹으로 나아가 자신이 직접 알지 못하는 어떤 사람들, 즉 대중이나 공동체라는 개념과 접하게 된다. 나의 노력이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가 닿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전교생 앞에서 상을 받을 때 아이는 비로소 학교를 하나의 공동체로 인식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엄마의 손에 끌려 수동적으로 대회에 나서거나 학원에서 기계적인 연습을 거친 아이는 비록 상을 받더라도 그것이 공동체와 자신을 연결시킨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깨닫지 못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가지고 공동체의 중심에 설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어야 자존감이 자란다. 어린 시절 자존감이 잘 형성된 아이는 성장함에 따라 시대와 문명의 중심에까지 이르도록 밀어붙이는 힘을 가질 것이다. 이렇게 단계의 결을 따라, 가슴 뛰는 시대의 부름을 따라 가려면 무엇보다 치열한 상호작용을 통해야 한다.
사람이 상호작용의 밀도를 높여가도록 하려면 부모나 교사는 자신의 한계를 잘 알고, 아이들이 적절한 단계에서 더 넓은 세계와 접촉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 또래와 건강하게 상호작용을 할 수 있도록 뒤로 물러서 주어야 할 때도 있다. 아이들이 나쁜 일과 험한 일을 통해 배우고 성장할 수 있도록 뒤로 물러서는 일은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아이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통해 도전할 수 있는 길을 찾도록 자극을 주는 일이 중요하다. 방향을 잘 잡으면 아이는 또래에게 인정받는 길을 찾을 것이고, 결국 더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여 공동체를 인지하고 그 가운데 서는 자신의 방법을 찾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