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은 쉽지만 막상 현실에 적용하려고 하면 갑자기 어려워진다. 이는 바운더리를 잘못 구획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오류는 언어의 혼선 때문에 일어난다. 구조론은 완벽하지만 인간의 언어는 불완전하다.
무인도에 두 남녀가 표착하였다. 둘은 아무 관계가 없다. 그렇다면 둘은 어떤 관계일까?
1) 둘은 아무 관계도 아니다.
2) 둘은 아무 관계도 아닌 관계다.
대개 이걸로 다툰다. 둘 다 맞다. 다만 문장이 어떤 맥락에 따라 쓰여지는가의 문제다. ‘내가 맞고 너는 틀리다’고 말하면 피곤한 거다. 관점이 다르며 각자 서로 다른 부분을 말하는 거다.
무인도의 두 남녀는 아무 관계도 아니지만, 아무 관계도 아닌 관계가 분명히 있다. 0은 크기가 없으나, 크기가 없는 크기가 있다. 상부구조가 있다. 다 정해져 있다.
그럼 그 상부구조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없다. 상부구조가 없는 상부구조다. 자리는 있는데 임자가 없다. 그릇은 있는데 내용물은 없다. 없어도 있는 거다.
구조론은 이런걸 명석하게 따지는 도구인데, 구조론은 완벽하지만 인간의 언어가 불완전하므로 이걸 따지면 따질수록 문장이 길어진다.
무인도의 둘은 오누이인가? 아니다. 둘은 부부인가? 아니다. 그럼 무엇인가? 그 무엇도 아니다. 그러나 호랑이가 나타나면 즉시 관계가 조립된다. 한 사람은 싸우고 한 사람은 숨는다. 둘은 협력관계가 된다.
이때 없던 관계가 돌연히 생겨난 것일까? 아니다. 있던 관계가 발견된 것이다. 그럼 그 있던 관계가 무엇이냐고? 아무 관계도 아닌 관계였다. 그런데 이때 없던 관계가 돌연히 생겨났다고 말해도 틀린건 아니다.
◎ 숨어있던 관계가 호랑이에 의해 발견되었다.
◎ 없던 관계가 호랑이에 의해 갑자기 생겨났다.
둘 다 맞다. 이거 구분해야 하지만 인간의 언어로는 한계가 있다. 그런데 이런거 자꾸 따지면 궤변실력만 늘어난다. 스톱! 실상 궤변이란 사실을 속이는게 아니라 언어를 왜곡하는 것이다.
상부구조는 있다. 그것은 바뀌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 상부구조도 바뀔 수 있고 그것을 재질서화 하는 문제를 구조론은 중요하게 다룬다.
남자나 혹은 여자로 태어났다면 어쩔 수 없다. 남자는 여자될 수 없고, 여자는 남자될 수 없다. 그러나 하리수는 해냈다. 싸우지 말라. 남자는 여자될 수 없다는 말도 맞고, 남자도 여자될 수 있다는 말도 맞다. 맥락에 따라 판단하라.
구조론은 남자가 여자되는 문제를 주로 논한다. 바꿀 수 없는 상부구조를 바꾸는 문제를 주요 의제로 삼는다. 그런데 현장에서 그 상부구조를 잘 못 바꾸는 사람이 여자다. 말하자면 존재규정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오히려 그 상부구조를 잘 바꾸는 사람이 여자다. 잘못된 존재규정을 잘 하는 사람이 여자이면서, 동시에 상부구조를 능숙하게 재조립하는 사람이 여자다. 이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남자는 회사에 가면 윗사람에게 아부하고 집에 오면 식구들 앞에서 언성높이고 이런 이중적인 행동을 한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적당히 대처하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존재규정이 약하다.
그러나 남자는 스타일이 없다. 존재규정이 없으므로 상부구조의 재조립이 없는 것이다. 문어가 되어 있고 낙지가 되어 있다. 남자는 뼈가 없다. 여자는 스타일이 있다. 스타일이 뼈다.
여자는 스타일이 있을 뿐 아니라 잘 바꾼다.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로 스타일을 바꾼다. 여자는 핸드백 숫자만큼 상부구조를 재조립해낸다. 구두 숫자만큼 구조를 재조립하는 능력이 여자에게 있다.
심지어 하루 안에도 아침, 점심, 저녁에 따라 상부구조를 재조립한다. 반면 남자는 잔소리 안 하면 팬티도 안 갈아입는다. 누가 옆에서 안챙겨주면 점점 거지가 되어간다. 스타일? 없다.
박근혜는 자신을 공주로 존재규정했다. 그러한 존재규정 때문에 제 손으로는 햄버거도 못 먹는다. 비서가 나이프와 포크를 가져다줘야 겨우 햄버거를 먹을 수 있다. 문제는 박근혜 자신이 자신을 그렇게 규정했다는 사실을 자각하느냐다.
◎ 박근혜 – 나는 태어날때부터 공주였는데 어쩌라구요?
자신은 태어날때부터 원래 공주였으며 이 포지션을 절대로 바꿀 수 없다고 믿는 것이 문제다. 바꾸면 된다. 그것이 구조의 재질서화이며 리셋이며 거듭남이다. 문제는 포지션 자체가 아예 없는 경우다.
이건 더 고약한 경우다. 이런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 남이 규정해주면 규정해주는대로 행세한다. ‘넌 노예야 알겠어?’ ‘아 나는 노예입니다.’ 이런 자들이 가난한 시골 수구꼴통이다.
강남의 부자 수구꼴통은 전략적으로 자신을 존재규정한다. 자신은 귀족이라고 우긴다. 근데 새누리떼 찍는 무뇌 경상도 등신들은 남들이 ‘너는 노예야!’ 하니까 ‘예 나는 노예입니다.’ 하는 거다.
여자는 사회에 의해 존재규정되는 측면이 강하다. 처녀, 노처녀, 과부, 이혼녀, 미혼모, 주부.. 이런 나쁜 규정들이 따라다닌다. 그러나 이는 여자가 스스로 만든게 아니고 사회가 만든 거다. 사회를 바꾸어야 한다.
물론 여자가 스스로 자신을 그러한 규정에 가두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이는 대개 여자의 문제가 아니라 후진국의 문제이며, 가난하고 못배운데다 품격있는 좋은 일자리가 부족해서다.
존재규정이 나쁜 것이 아니라 환경변화에 맞추어 그것을 재조립할 수 있으며 재조립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존재를 바꿀 수 있고 또 바꾸어야 한다. 관계를 바꾸면 존재가 바뀐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한번 스타일을 만들면 그것을 평생 우려먹는다. 그러한 스타일도 일종의 존재규정이다. 그런데 그 스타일을 못 만들면 아예 작가가 못 된다. 존재규정해야 비로소 작가가 되는 것이다.
이문열이 꼴통짓을 하는 이유는 꼴통짓을 해야만 작가 지위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의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이문열은 ‘나는 꼴통이야’ 하는 존재규정을 통해 겨우 작가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이문열에게 그것을 버리라는 것은 죽어라는 말과 같다. 죽을때까지 거기서 못 벗어난다.
주변을 살펴보면 ‘나는 꼴통이야’ 캐릭터로 재미 보는 사람이 상당히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게 이익이 되므로 그런 짓을 하는 거다. 물론 그런 식으로는 진정한 지도자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소그룹에서 발언권 얻기에는 유리하다.
자신을 꼴통으로 인식시켜 두면 여러 가지로 편해진다. 그 경우 작은 이익을 얻으려다가 큰 흐름을 놓치는 거다. 물론 큰 지도자가 될 생각이 없다면 완장차고 그런 짓을 해도 무방하다. 인촌이도 흥국이도 다들 그렇게 하고 있다.
스타일을 자신이 만들면 상부구조의 재조립을 통한 거듭남이자 깨달음이고, 한번 고착된 스타일에서 못 벗어나면 존재규정이다.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양면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원효스님이 1500년 전에 화쟁론을 주장한 것은 처음으로 관점의 존재를 발견했기 때문이며 인간이 대개 이러한 언어의 부조리 때문에 싸운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사실이 아니라 언어가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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