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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김동렬*
read 8602 vote 0 2012.10.21 (18:22:59)

상부구조가 있는가 없는가를 논하기 앞서 ‘있다’라는게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존재는 어떤 고정된 형태의 것이 아니다. 일정한 조건에서 일정한 반응을 보이면 어떻든 그것은 있다.

 

구조론에서 존재는 사건이다. 사건은 기승전결이다. 기승전결은 시간의 진행이다. 시간 속에 있는 것을 공간에서 찾으려 한다면 곤란하다. 흔히 우리가 무언가 있다고 여기는건 ‘입자’개념이다.

 

그것은 만져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공간상에서 찾으려 하는 태도이다. being은 만져지지 않는 것을 의미할 때가 많다. 뒤에 ‘~ing’가 붙어서 시간상에서의 현재진행형임을 나타낸다.

 

존재는 being이며 그것은 사건의 진행이다. 공간 상에서 만져지는 것도 하나의 사건이다. 그러나 모든 사건이 공간에서의 만져짐 형태로 있는 것은 아니다. 질은 대개 잘 만져지지 않는다.

 

아니 질을 만질 수 있다. 단지 만지는 방법을 모를 뿐이다. 질은 시스템이며 시스템이 반복작업을 할 때는 만져진다. 인간이 만든 시스템은 분명히 만져진다. 그러나 자연에서는 그렇지 않다.

 

질은 간단히 입자를 만나려 할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이다. 사람을 만나려면 먼저 그 가정을 방문해야 한다. 사과를 따려면 과수원으로 들어가야 한다. 학생을 만나려면 학교를 찾아야 한다.

 

그것은 분명히 있지만 잘 보이지 않는다. 집합, 그룹, 팀 형태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질은 볼 수 없을 때가 많지만 동영상으로 볼 수 있다. 태풍은 볼 수 없지만 위성사진으로 볼 수 있다.

 

위성사진이 없던 조선왕조 시대로 돌아가서 어떤 사람이 태풍의 존재를 발견했다 해도 그것을 타인에게 용이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자기장에 대해서는? 장마전선에 대해서는? 기압골은?

 

입자는 스틸컷으로 찍을 수 있다. 정지화상이다. 그러나 질은 동영상으로만 온전히 그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 모임이 질이면 회원은 입자다. 회원은 볼 수 있지만 모임은 눈으로 볼 수 없다.

 

동영상으로 촬영하면 가능하다. 모임에 회원들이 쏙쏙 모여드는 과정을 눈으로 볼 수 있다. 들판에 사자가 혼자 있으면 입자고 무리로 있으면 질이다. 그것이 무리인지 알려면 지켜봐야 한다.

 

태풍을 기상위성으로 찍어도 알 수 없다. 그냥 구름덩어리일 수도 있다. 태풍의 눈이 선명하지 않을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영상으로 보면 안다. 태풍의 두 날개가 돌아가는게 보인다.

 

질은 결합한다. 계에 에너지를 투입했을 때 원소들이 결집하여 대응하면 질이다. 예비군은 소집통지서가 날아와야 결합되어 그 존재가 모습을 드러낸다. 소집되지 않은 동안 예비군은 없는가?

 

아니다. 편제되어 있다. 소집되지 않았지만 조직이 있으면 있는 거다. 레지스탕스가 점조직의 형태로 조직이 결성되어 있다면 입자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있다.

 

독일군이 투입되면 총알이 날아온다. 에너지가 투입되면 반드시 반응을 보이고 그렇다면 그것이 있는 것이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도 바운더리가 있고 그 안에 질서가 있으면 그것은 있다.

 

◎ 질은 무언가 하나가 들어가면 하나가 나온다.
◎ 일정한 조건이 갖추어져야 비로소 질이 작동한다.

 

그 바운더리가 반드시 공간의 지점은 아닐 수 있다. 관계망 형태로 존재할 수도 있다. 질은 평소에 느슨하게 풀어져 있다가 어떤 계기가 주어질 때 일정한 조건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물론 회사조직이나 스포츠리그처럼 보다 분명한 형태를 가진 것도 있다. 그런데 밤에는 회사도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다. 떳다방처럼 떠나버린다. 직원들이 모두 퇴근했기 때문이다.

 

직원이 퇴근하고 아무도 출근하지 않았다면 회사는 사라졌는가? 올림픽과 월드컵은 4년마다 열린다. 월드컵이 열리지 않는 동안은 월드컵이 사라졌는가? 그렇다면 월드컵 예선전은 뭐지?

 

파시는 조기철에만 선다. 조기철이 아니면 파시는 없는가? 아니다. 수요가 있고 공급이 있고 서로간에 신뢰가 있다면 그것은 없어도 있다. 인력시장은 새벽에만 선다. 안 서도 시장은 있다.

 

5일장은 4일동안 없다가 5일째 있는게 아니고 4일동안 쉬다가 5일째 서는 것이다. ‘있다/없다’가 아니고 ‘서다/쉬다’가 맞다. 장은 쉬어도 장은 있다. 마트가 밤에 셔터를 내려도 마트는 있다.

 

질은 시스템이다. 우리는 반복작업을 하는 기계적인 시스템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실정은 그렇지 않다. 연평 앞바다의 파시처럼 시스템은 일정한 조건이 갖추어져야 비로소 작동한다.

 

월드컵과 올림픽의 조건은 4년이다. 조건이 갖추어지면 모습을 드러내고 조건이 안 맞으면 모습을 감춘다. 모습을 감춘 동안에도 바운더리가 있고 서로 간에 신뢰가 있으므로 그것은 있다.

 

70년 만에 한 번 찾아오는 혜성은 69년 동안 없다가 70년째 있는 것인가 아니면 70년 주기로 있는 것인가? 보이지 않아도 있다. 마음 속에도 있다. 신뢰로도 있고 약속으로도 있다.

 

반응하면 있다. 조건이 갖추어지면 반응한다. 질은 도처에 있다. 간단히 그대가 어떤 것을 만나고자 할 때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조건으로 있다. 그런데 그 조건이 숨어있을 때가 있다.

 

도시 사람이 귀농하여 펜션이라도 운영한다고 치자. 처음에는 아무 일이 없다. 그런데 장사가 좀 되어서 기반을 잡으려고 하면 방해자가 나타난다. 남의 펜션 집앞에 거름을 가져다 놓는 식이다.

 

못된 심술보가 나타나서 괴롭히는가 하는데 이거 장난이 아니다. 도처에서 태클 들어온다. 그때 눈치챈다. 마을의 관습이 있고, 공동체가 있고, 질서가 있고, 작동원리가 있다는 사실을.

 

질은 그 무형의 관습이나, 공동체나, 작동원리의 형태로 존재한다. 입자는 그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만나야 하는 대표자다. 물론 마을에 이장이 있고 지도자가 있고 어른이 있다면 다르다.

 

펜션을 하겠다고 시골 내려오면 마을 어른이나 이장이 딱 나타나서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소개를 시켜준다. 돼지라도 한 마리 잡아서 잔치라도 열라고 한다. 문제는 간단히 해결된다.

 

이건 입자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렇지 않다. 지도자도 없고, 이장도 없고, 어른도 없다. 대신 불평이 있다. 서울사람이 펜션에 드나들며 마을에 쓰레기를 버린다. 시골풍속을 어지럽힌다.

 

마을사람들이 한마디씩 욕을 하기 시작한다. 반응이 없으면 노골적으로 영업방해를 한다. 중요한 것은 지도자나 대표자가 없어도 서로간에 이해관계가 존재하면 이미 그것이 있다는 거다.

 

커뮤니티도 없고, 부녀회도 없고, 청년회도 없고, 공동체도 없고, 아무 것도 없어도 이해관계가 있으면 그것은 있다. 도시 사람이 귀향하여 펜션을 하면 괜히 아니꼽다. 이미 피해발생이다.

 

아니꼬운 것이 이미 피해발생, 사건발생이므로 이해관계가 있고, ‘A면 B다’의 메커니즘을 성립시켰으므로 있는 것이다. 공동체가 유형적으로 결성되어 있지 않아도 이미 그것은 있다.

 

눈에 보이는 그 어떤 조직도, 팀도, 단체도, 그룹도, 다 없다해도 상호작용의 메커니즘이 있으면 있다. 아무도 피해보지 않았다 해도 상대가 방해할 수 있다면 이미 그것은 있다.

 

날 받아서 돼지잡아야 한다. 마을사람들에게 아무런 피해가 없어도 방해할 수 있으면 반드시 방해한다. 방해하면 비로소 이해관계가 드러난다. 메커니즘이 드러난다. 이미 그것은 있는 것이다.

 

그것을 포착하는 눈을 가져야 한다. 생명도 이와 같다. 인간도 엄밀하게 보면 꽤 많은 기생충들과 바이러스들과 공생하고 있으며 그 사이에 복잡한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다.

 

엄밀히 보면 한 명의 인간은 한 명의 생명체가 아니라 하나의 그룹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진화는 개체 단위가 아닌 그룹단위 공동체 단위, 상호작용단위, 생태계 단위로 존재하는 것이다.

 

존재에 대해 열린 생각을 가져야 한다. 어떤 것에 작용할 때 반작용이 있으면 입자다. 그 반작용은 마을의 대표자나 이장이나, 부녀회장이나, 청년회장이나, 촌장이나 어른의 이름으로 나타난다.

 

그 대표자가 없으면 어떤 표적에 도달할 때 자신이 어떤 경로를 거쳐왔는지 모른다. 즉 입자에 도달하기 전에 무엇을 거쳤는지 모르는 것이다. 홍길동을 만나려면 홍길동 가정을 거쳐야 한다.

 

그런데 홍길동 가족이 모두 자리를 비우고 없으면 그 가정의 존재를 포착하지 못한다. 그때 그 질은 뒤늦게 나타나서 뒤통수를 치기도 한다. 질은 사건으로 존재하며 시간이 걸린다.

 

질은 일정한 정도의 긴장, 일정한 크기의 에너지, 일정한 정도의 단계를 거쳐야 분명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물론 인간이 만든 인위적인 조직은 처음부터 모습을 드러낸다. 회장이 있다.

 

그러나 자연의 질은 회장이 없다. 반장도 없다. 대표자도 없다. 긴장의 강도가 고도화 되어 어떤 임계를 넘었을 때 갑자기 나타나서 뒤통수를 친다. 이때 백인은 그 사람을 붙잡고 ‘당신이 추장이야?’ 하고 묻는다.

 

그런데 원래 인디언은 추장이 없다. 추장은 그때그때 순간적으로 결정될 뿐이다. 그것은 있는 듯 없는 듯 있으며 없다. 추장을 찾지말라. 그 추장의 자궁을 찾아라. 대표자는 없어도 질은 있다.

 

입자는 안 보여도 질이 있으면 질이 어느 순간에 입자를 만들어낸다. 백인과의 갈등이 추장을 만든다. 추장은 그 현장에서 생성된 것이다. 물론 문명사회에는 추장이 24시간 존재한다.

 

그러나 이는 인간들이 조직을 그렇게 만들어서 그러할 뿐 자연의 법칙은 다르다. 자연의 그것은 없는 듯이 있다.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시약으로 염색해 보면 선명하게 보이기도 한다.

 

일정한 조건이 갖추어져야 비로소 그것이 분명하게 보이지만 구조를 꿰뚫어보는 눈을 얻으면 그 조건과 상관없이 그것을 볼 수 있다. 보이지 않는 상부구조를 볼 수 있다. 보인다.

 

질은 에너지가 투입되어 작동할 때 시스템이며 그렇지 않을 때는 일정한 조건에서 작동하는 메커니즘이며 그것은 선다 혹은 연다고 표현한다. 장이 섰다거나 장을 열었다고 한다.

 

존엄이나 자유나 사랑이나 성취나 행복이나 다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서지 않거나 열지 않았을 수도 있다. 존엄이 서고, 자유를 열고, 사랑이 서고, 성취를 열고, 행복을 세워야 한다.

 

계에 밀도를 걸어주면 그것이 선다. 흥분한 그것처럼 벌떡 일어선다. 긴장과 에너지를 연결하고 전원의 스위치를 눌러주면 작동을 시작한다. 우리는 그것을 끊임없이 일으켜 세우고 또 열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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