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의 활에 대해서 김기덕의 영화 중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영화가 ‘활’이다. 활은 솔직히 재미없다. 그런데 하루에도 열번 이상 생각난다.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왜일까? 화두를 던져주기 때문이다. 짐 자무시의 ‘천국보다 낯선’처럼 포스터 한 장으로 할말 다해버리는 그런 영화가 있다. ‘천국보다 낯선’ 역시 지루하다. 그러나 그 영화의 기본설정은 다빈치나 미켈란젤로의 걸작 이상으로 깊은 여운이 있다. 김기덕의 영화를 보고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다. 영화를 보는 방법 자체가 잘못되어 있다. 영화에서 기본 설정이 중요하다. 어떤 구도가 제시되어 있느냐가 중요할 뿐 소소한 에피소드는 무시해야 한다. 화두만 챙기면 된다. 엄밀히 말하면 김기덕의 영화들은 대부분 이야기가 없는 영화다. 포스터만 봐도 대략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있다. 물론 이야기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야기가 중요한 영화가 있고 그렇지 않은 영화가 있다. 활은 30분 짜리 소품인데 극장에서는 90분을 한다. 나머지 60분은 단편영화로는 극장에 걸 수가 없으니까 그냥 시간 때우기로 늘여놓은 것이다. 억지다. 그래서 재미없다. 그러나 30분 짜리 단편영화라 여기고 보면 훌륭하다. 이 영화가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들.. 대사도 별로 없고 그림만 있을 뿐인데 뭐가 어렵다는 말인지 사실 나도 답답하다. 그림책 보듯이 그냥 보면 되는데. 영화는 관객에게 화두를 던진다. 그 화두를 잡았느냐가 중요하다. 활은 팽팽한 긴장이다. 만약 당신이 죽어서 천국에 왔다면 그곳에서 할아버지가(왜냐하면 돌아가셨으니까 할아버지다.) 나이 어린 미녀(왜냐하면 천국이니까)와 살고 있는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그 장면을 목격한 당신은 화가 나서 천국을 법정에 고발할 셈인가? 김기덕은 단지 그 역설을 관객들에게 질문할 뿐이다. 거기서 끝이다. 더 없다. 그 질문을 당신이 받으면, 그리고 곰곰히 생각하면 성공이고 그렇지 못하면 실패다. 활은 팽팽한 긴장이다. 그것은 할아버지가 혹은 별것 아닌 당신이(관객)이 감히 천국을 탐하는 그 마음의 폭로다. 당신이 죽어서 천국에 가서 잘먹고 잘살겠다는 심보가 할아버지가 소녀를 탐하는 것과 본질에서 같은 것이며 그러한 당신의 고약한 심보가, 그 욕심이 팽팽한 삶의 긴장을 낳는다는 의미다. 별것 아닌 평범한 존재인 당신(관객)이 감히 진리를 탐하고, 감히 천국을 탐하고, 감히 깨달음을 탐하고, 감히 하느님께 기도하고, 감히 하느님이 당신의 기도를 귀담아 들어주길 바라고, 심지어는 소원을 이루어주길 바라고(무엄하게도), 감히 구원을 바라고, 감히 해탈을 바라는 그 염치없는, 그 뻔뻔한 행각이 그 자체로 할아버지가 소녀를 엿보는 심리와 같은 것이다. 김기덕은 묻는다. 야수가 미녀를 사랑한다면. 노틀담의 곱추 콰지모도가 마음 속에 에스메랄다를 품는다면. 그것은 유죄인가 무죄인가? 그것은 단지 하나의 화두일 뿐이다. 단지 질문할 뿐이다. 이를 실제로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로 착각해서 안 된다. 착각하기 때문에 당신(일부 관객)은 김기덕의 영화를 보고 화를 내는 것이다. 우습게도 말이다. 노틀담의 곱추가 에스메랄다와 결혼하는 일은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김기덕은 바다 한가운데의 어떤 낚싯배라고 설정한다. 잘 살펴보면 그곳이 지상에는 없는 곳, 곧 천국임을 알 수 있다. 지상의 세계가 아닌 천상의 어떤 세계인 것이다. 깨달음의 세계이기도 하다. 비유다. 콰지모도가 감히 무례하게 에스메랄다와의 결혼을 꿈꿔도 되느냐를 논하며 입에 침을 튀기고 분노하는 관객은 100대 맞고 열두대 더 맞아야 한다. 김기덕은 말한다. 콰지모도가 에스메랄다를 엿볼 때 그 팽팽한 심리의 긴장이 인간을 선선한 깨어있음으로 인도한다고. 김기덕은 그러한 가르침을 던질 뿐이다. 화두를 화두로 받아들여야지 실제상황과 혼동하면 미치는 거다. 현실에서 콰지모도가 에스메랄다에게 청혼했다가는 에스메랄다 오빠에게 뒈지게 맞아서 다리몽둥이가 부러지고 말 것이다. 그렇지만 콰지모도의 마음 속에 스며드는 사랑의 감정을 부인할 필요는 없다. 그러한 감정을 가지는 것은 콰지모도의 자유다. 사랑=결혼이라고 생각하는 초딩들은 절대로 이해 못하겠지만. 결혼을 떠나서 사랑은 사랑 그 자체로 충분히 가치있는 거다. 활은 너무나 쉬운 영화인데 그걸 이해하는 사람이 우리나라에 열 손가락 안팎이라면 돌아버리는 거다. 그런 사람들이 감히 고흐의 그림은 이해한다고 비싼 돈 내고 전시회를 찾을거 아닌가. 분명히 말한다. 고흐 당시에도 고흐를 이해한 사람은 매우 드물었다. 마찬가지로 고흐는 알겠는데 김기덕은 모르겠다는 사람은 전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알기는 개뿔. 고흐를 아는 사람은 저절로 김기덕을 안다. 김기덕을 모르는 사람은 절대로 고흐를 모른다. 그것은 애초에 가능하지 않다. 고흐 역시 당신의 가슴에 화살 한 방을 날릴 뿐이다. 이외수의 칼을 연상할 수도 있다. 당신 가슴에 깊은 상처 하나 박아두고 떠난다. 당신 마음 속의 잔잔한 호수에 거친 파문 하나 일으킨다. 더 이상 말 없다. 그 다음의 전개에 대해서는 당신이 답해야 한다. 사족을 붙이자면 영화 마지막에 허공에 활을 쏘고 이런건 이 영화가 깨달음의 세계를 비유하고 있음을 구태여 설명하는 것인데 그 부분은 확실히 사족이었다. 떼어버려도 무방하다. 바다 위에 고립된 작은 배 속에 할아버지와 소녀가 단 둘이 살고 있는데 그곳이 바로 이상향이더라는 설정에서 이야기는 사실상 끝났다. 더 이상의 전개는 괜한 이야기다. 그곳은 이상향이다. 이상향은 원래 좀 이상하다. 소녀는 ‘완전성’을 의미하고 할아버지는 ‘불완전성’을 의미한다.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한 하느님과 동거하고 있으니 어찌 놀랍지 않은가? 만약 당신이 우연히 길에서 하느님을 만나서 악수했다면 그 사건은 할아버지가 소녀와 결혼한 사건 만큼 황당한 일이다. 당신이 뭔데 감히 하느님과 악수해? 그 장면을 목격한 많은 사람들은 별것 아닌 주제에 감히 앞으로 나서서 하느님과 악수한 당신을 죽이고 싶을 것. 영화를 보면서 할아버지의 귀여운 행각에 분노하는-우습게도 말이다- 당신(일부관객) 자신의 어처구니 없는, 치기 가득한.. 본능의 반응에 깜짝 놀라야 할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