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록
행복은 도달 가능한 목표일 수 있다. 단 훈련되어야 한다. 행복을 믿는 자 만이 행복할 수 있다. 행복에 투자한 자 만이 행복할 수 있다. 행복을 가려낼 수 있는 안목을 가진 자 만이 행복할 수 있다. 행복을 훈련한 자 만이 행복할 수 있다. 행복을 위하여 주위의 환경을 조성한 자 만이 행복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행하다. 그 이유들 중의 하나는 방해자들 때문이다. 첫번째 방해자는 자기 자신이다. 그들은 자기 정체성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하지 않았다. 자기다운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에게 맞는 옷의 치수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들은 막상 행복이 자기 자신에게 다가왔을 때 겁먹고 주저하며 뒷걸음질 치고 만다. 행복을 두려워 하고 행복으로 부터 도피하고자 한다. 그들은 자기다움, 자기정체성에 대해 알지 못하므로 막상 행복의 여신이 그들을 향해 미소지었을 때, 자신이 선망하는 다른 사람의 옷의 치수를 말하는 실수를 범하고 만다.

그들은 자신의 치수에 맞지 않는 옷을 선물받고 화를 내곤 한다. 불행이다. 그러므로 행복은 훈련되어야 한다. 첫번째 방해자인 자기자신을 개량하지 않으면 안된다. 자기 자신에 대해 알고있어야 한다. 자기 삶의 주제 정도는 정해놓고 있어야 한다. 어떤 것이 자기다운 것인지 알고있어야 한다. 부단한 자기상승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지혜로와야 한다. 행복의 단기적인 목표들은 정해져 있어야 한다. 그 목표들은 자기다움을 충족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현실적으로 도달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그 획득한 성과들은 주위의 참견하기 좋아하는 사람들로 부터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사전작업을 통하여 자기 주위에 좋은 평가자들을 지정해두지 않으면 안된다. 최소한 자기 자신으로 부터는 인정될, 평가될 바탕이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그러한 기초하에 그 평가자들과 우호적인 관계맺기에 성공해야 한다.

행복의 두번째 방해자는 그 ‘평가자’를 자처하는 주위의 ‘참견자’이다. 그들은 가족의 자격으로, 혹은 친구의 자격으로 함부로 개입하여 평가의 칼날을 휘두르곤 한다.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불행해져 봤자 자기 탓이다. 좋은 자기 자신을 가지지 못한, 혹은 좋은 자기목표를 가지지 못한, 혹은 좋은 자기다움을 그 자기정체성(자아)을 확립해놓지 못한 사람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더욱 좋은 평가자들을 확보해두지 못한, 그 평가자들과 우호적인 관계맺기에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행복의 세번째 방해자는 운명이다. 그들은 질병의 방법으로, 혹은 불운의 방법으로, 혹은 기타의 여러가지 방법으로 불시에 노크하곤 한다. 그들은 무례하며 또 무자비하다. 그들은 용서를 모르며 타협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운명에 대해서도 대비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방법은 사전에 행복의 확률을 높여두는 것이다. 절대적인 방법은 없다. 믿을 수 있는 것은 확률 뿐이다. 행복해질 확률을 높이는 방향으로 움직여 가기다. 불행의 확률을 줄이려면 일단 담배부터 끊는 것이 좋다. 물론 금연이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단 실천하기 쉬운 한가지 사례는 될 수 있다.

행복은 우연이 찾아오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이미 찾아온 행복이라는 손님을 내치는 실수를 범하곤 한다. 한 장의 복권이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지만 긁지 않는 복권이 당첨되는 일은 절대로 없다.

행복의 확률을 높이는 방법은 그 작은 우연의 확률을 조금씩 저축하는 것이다.

좋은 친구를 사귄다든가, 운동을 열심히 한다든가, 지식을 넓힌다든가, 세상사에 흥미를 가져본다든가 하는 일은 일단 행복의 확률을 높이는데 기여한다. 단 꾸준히 하지 않으면 안된다. 대부분의 행복은 사전에 대비된 특정한 경로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우연히 몇가지 경로가 섞이면서 상승효과를 일으키는 형태로 내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즉 당신이 준비한 열가지 행복의 경로가 있다면.. 건강, 사교, 취미, 학습, 예절 등.. 그 중 어떤 하나가 행복의 이름으로 당신을 방문하여, 당신에게 횡재를 던져주는 일은 잘 없지만 .. 그대의 노력이 어떤 결실을 맺을 때, 그 준비된 건강과 사교와 취미와 학습과 예의가 그 효과를 열배로 배가하는 효과는 분명히 있다.

즉 당신에 의해 준비된 ‘개미당에의 참여’가 그대를 행복하게 할 일은 아마 그대의 일생을 통털어 한번도 일어나지 않겠지만 그대가 노력하여 마침내 어떤 결실을 이루었을 때 당신의 참여가 그 결실한 성과를 열배의 성취감으로 부풀려 되돌려줄 수는 있다는 말이다.


12. 신이 없다면 모든것이 가능한가?
신은 완전성을 의미한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며 언제라도 완전을 지향한다. 그 언저리에서 인간의 행동반경이 한계지워진다. 신을 부인한다는 것은 그 인간의 한계를 부인하는 거다. 그 결과로 인간은 약간의 희미한 가능성을 얻는다.

그러나 이는 본질에서 잘못된 태도이다.

왜냐하면 ‘완전성’ 그 자체를 부인하면 애초에 이 게임이 시작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경우 그대는 허무의 바다에 빠져 익사하게 된다. 그렇다면 정답은 무엇인가? 그 애초의 완전성 그 자체를 철두철미하게 추구하는 것이다. 즉 ‘완전한 완전’이 필요하다. 동양의 지혜가 일찌기 그 답을 제시하고 있다.

기독교의 단선적 세계관에서 ‘완전’은 너무 협소하다. 그 완전의 협소함에 의해 인간의 자유는 제한된다. 그것은 ‘완전’을 어떤 규격화된 것, 고착된 틀에 매인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니체는 그 협소한 완전의 틀, 구원의 틀을 깨부시고 인간에게 자유를 주기 위하여 신의 죽음을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오판에 불과하다.

동양의 지혜에 의하면 완전은 매우 평정하다. 완전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완전은 규격화되지 않는다. 완전은 살아서 움직인다. 완전은 기계적인 틀이 아니다. 오히려 완전은 무한한 가능성이다.

즉 니체가 본 신과 동양의 지혜가 본 신은 그 바탕이 다른 것이다.

서구인들은 ‘완전’을 주장하면서 완전성 그 자체를 탐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매우 작은 목표를 세웠던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적인 의미에서의 구원이다. 그것이 그들의 도달가능한 최종목표가 되었던 것이다.

틀렸다. 그들은 인식의 비약(깨달음)을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완전은 자유인의 완전이 아니라 노예의 완전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신의 지시하는 바 완전성을 노예의 구속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동양정신에 의하면 완전은 곧 해방이다. 완전은 해탈이다. 완전은 격을 타파하고 격에서 벗어나, 격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완전이어야 모든 것이 가능하다. 동양에서는 신이 있어야 모든 것이 가능하다.

정리하자. 길은 둘 뿐이다. 완전의 길과 허무의 길이 있다. 만약 그대가 허무를 선택한다면 그대는 일단 이 게임에서 탈락한다. 그러므로 그대는 어떤 경우에라도 ‘완전’을 선택해야 한다. 문제는 그 ‘완전’이 무엇인가이다.

서구정신에 있어서의 완전은 노예의 것이며, 동양정신의 완전은 주인의 것이다. 서구의 완전은 주어진 임무 하에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며, 동양의 완전은 빈 터를 개척하여 스스로 임무를 부여하고 ‘가치 창조의 1사이클’을 완성하는 것이다.

인간은 비참한 존재이며 구원되어야 한다. 인간의 비참은 허무에서 왔으므로 허무를 극복하는 의미를 통하여 구원될 수 있다. 의미는 가치창조의 1사이클의 작용에 의하여 성립한다. 가치창조는 완전성에의 도달에 의해 가능하다.

그 완전성을 담보하는 것이 곧 신이다. 우리는 앞에는 허무라는 강이 하나 놓여 있다. 신은 커다란 배 한척을 가지고 있다. 신의 배에 승객으로 동승하므로서 그 강을 건널 수 있다는 발상이 서구의 개념이다.

신으로 부터 한 척의 배를 빌어, 온전히 신으로 부터 독립하므로서 신과 대등한 위치에서 신과 수평적으로 교감할 때, 인간 자신이 주체가 되는 가치 창조의 1사이클을 완성해낼 때, 기어이 저 허무의 강을 건너가는데 성공할 때 비로소 인간은 완전해질 수 있다는 것이 동양의 깨달음이다.

결론적으로 서구의 노예적 가치관인 기독교의 세계관과 기독교의 신을 극복하고 동양정신의 대안을 찾아 새로운 지평을 열어제친 상태에서 진정한 완전을 인정해야 하며, 그 완전성에서 ‘자유의 가능성’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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