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행복은 단지 한 순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인가?
행복은 축적된다. 그 이유는 인간의 행복은 뇌기능의 미학적 본능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즉 신체감관의 쾌감과는 별도로 .. 예컨대 편집증 환자가 비뚤어져 있는 사물을 정렬시켜 놓으려 하듯이.. 인간은 불완전한 것을 보면 완성시켜 놓으려는 의지가 있으며 .. 그런 면에서 모든 인간은 행복편집증환자이다.
행복은 가정에서의 행복이든, 사회에서의 성취든.. 완성시키려는 혹은 가족이나 동료로 부터 인정받으려는 욕구에 기인한다. 그 욕구는 뇌기능에 기초한 본능이며 .. 일종의 편집증과도 같은.. 그러므로 가족을, 친구를 혹은 사회에서의 성취와 개인적인 인격적 상승의 방법으로 조금씩 완성시켜 가는 지루한 작업이다.
하루에 벽돌 한장씩 쌓아서 인간은 행복을 완성시켜 가는 것이다. 그 안에는 드라마의 기승전결이 있고 각자의 맡은 배역이 있다. 도둑은 완전한 도둑이 되기를 소망하고 소매치기는 완벽한 소매치기가 되고자 한다. 그것은 비뚤어진 행복이지만 그것이 인간이라는 행복편집증환자이다.
정원수가 정원을 가꾸듯이 인간은 행복을 가꾸어간다. 가족의 방법으로 혹은 성취의 방법으로 혹은 자기실현의 방법으로 바둑의 포석을 두듯이 .. 오늘은 오늘의 행복이 있고 내일은 내일의 행복이 있다.
내일의 행복은 오늘의 행복과는 다른 테마여야 한다. 참된 행복을 위해서는 나날이 진보하지 않된다. 부단히 자신을 개선하여 가기다. 상승하기, 향상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해서 안된다.
8. 타인을 존경한다는것은 일체의 열정을 배제한다는 것을 뜻하는가
번역의 잘못이라 보고(사실이지 나는 바깔로레아의 모든 문제가 약간씩 잘못 번역된 것이 아닌가 하는 혐의를 두고 있다).. '타인을 존경함에 있어서 사랑의 감정은 배제되어야 하는가?'로 옮김이 적당하다고 본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존경에서 사랑을 배제할 수는 없다. 존경이란 자신의 자아확립을 위한 내적인 주체적 뿌리내림에 있어 그 근거지를 확보하기다. 그것은 내 안에서 타인을 발견하기이며 동시에 타인 안에서 나를 발견하기다.
그것은 너와 내가 하나의 가족이 되어가는 절차라 할 수 있다. 존경에는 맹목적인 닮기와 다른 보완하기가 있다.
사랑은 그 존경이라는 영역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발견하고 그 자신의 역할을 전달하는 타인에 대한 보상이라 할 수 있다. 즉 인간은 ‘존경’이라는 방법으로 영토를 공유하면서 사랑이라는 역할을 나눠가지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서로간에 역할의 전달(배달)이 있는 것이며 그러한 교감을 추구하는 것이며 그 성공을 곧 행복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사랑은, 혹은 열정은 역설적으로 타인에 대한 존경심을 발견해 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즉 사랑이 궁극적으로 도달하여지는 바가 존경이라는 것이다. 즉 인간은 영역을 발견하기 이전에 먼저 역할하는 법이며, 그 역할의 성공을 통하여 자신의 실체적 존재를 입증할 토대가 되는 영역(존경)을 확인하게 되는 법이다.
결론적으로 누군가를 존경한다는 것은 누군가와 영역을 공유한다는 것이며 그러한 공유의 과정을 거쳐서 내적으로 자기 자신의 내적인 존재의 실체적 근거를 확보해가는 것이다. 열정 곧 사랑은 그 영역의 발견과정이라 하겠다.
당신이 행복하다면 그 영역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오늘 하루를 행복할 수 있다면 그 영역 안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이유는 그 영역이 당신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영역의 발견은 궁극적으로 신을 발견하여 가는 절차가 된다.
만약 당신이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당신 자신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토대로서의 어떤 지적, 사회적, 정서적, 경제적, 문화적, 실질적 영역을 확보하고 있다면 당신은 그만큼 사랑의 공간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며 그 사랑의 크기에 비례하여 그 영역 또한 부단히 넓혀져야 하는 것이며 당신의 성공의 크기는 그 영역의 크기와 비례하는 것이다.
9. 죽음은 인간에게서 일체의 존재의미를 박탈해 가는가?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 죽음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직 ‘삶’이 있을 뿐이며 우리가 ‘죽음’이라 부르는 것은 ‘삶’ 안에서의 어떤 ‘사건’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라도 죽음의 의미는 삶의 의미의 일부가 된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삶은 과연 유의미한가’가 되어야 한다.
삶은 유의미한가? 여기서 의미는? 의미는 가치의 배달을 말한다. 사건 a가 사건 b에 영향을 미친다면 a사건에서 b사건으로 무언가 옮겨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의미다. 그러한 옮겨가기를 위해서는 ‘완전성’이라는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즉 a가 99로 100의 완전에 도달하지 못하면 무의미한 것이며 a가 100의 완전에 도달하면 무언가가 b로 배달되는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의미’라고 일컫는 것이다. 그것은 스승에게서 제자에게로, 부모에게서 자손에게로, 꽃에서 열매에게로 배달되는 것이다. 무엇이? 가치가!
죽음은 그 가치의 100프로 완성에 기여한다. 죽음은 그 99와 100사이에 숨어있다. 우리가 죽음을 고통스러워 하는 것은, 100에 미달하는 99의 버려짐을 아파하는 것이다. 또 우리가 장례를 엄수하여 죽음 앞에 경건하는 것은 그 100의 완성으로 하여 배달받을 무언가를 희구하고 또 약속하는 것이다.
우리는 늘 죽음 앞에 선다. 우리는 늘 99와 100사이에 선다. 그 100에 도달하지 못하는 99의 폐기를 일러 비참이라 하고, 그 100에 도달한 즉 가치의 배달을 남기므로써 구원이라 한다. 죽음은 비극과 희극을 구분한다. 가치없는 것을 폐기하고 가치있는 것을 선택한다. 그러므로 두려운 것이다.
결론적으로 삶은 99의 비참 속에서 1의 희미한 구원의 희망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것이다.
행복은 축적된다. 그 이유는 인간의 행복은 뇌기능의 미학적 본능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즉 신체감관의 쾌감과는 별도로 .. 예컨대 편집증 환자가 비뚤어져 있는 사물을 정렬시켜 놓으려 하듯이.. 인간은 불완전한 것을 보면 완성시켜 놓으려는 의지가 있으며 .. 그런 면에서 모든 인간은 행복편집증환자이다.
행복은 가정에서의 행복이든, 사회에서의 성취든.. 완성시키려는 혹은 가족이나 동료로 부터 인정받으려는 욕구에 기인한다. 그 욕구는 뇌기능에 기초한 본능이며 .. 일종의 편집증과도 같은.. 그러므로 가족을, 친구를 혹은 사회에서의 성취와 개인적인 인격적 상승의 방법으로 조금씩 완성시켜 가는 지루한 작업이다.
하루에 벽돌 한장씩 쌓아서 인간은 행복을 완성시켜 가는 것이다. 그 안에는 드라마의 기승전결이 있고 각자의 맡은 배역이 있다. 도둑은 완전한 도둑이 되기를 소망하고 소매치기는 완벽한 소매치기가 되고자 한다. 그것은 비뚤어진 행복이지만 그것이 인간이라는 행복편집증환자이다.
정원수가 정원을 가꾸듯이 인간은 행복을 가꾸어간다. 가족의 방법으로 혹은 성취의 방법으로 혹은 자기실현의 방법으로 바둑의 포석을 두듯이 .. 오늘은 오늘의 행복이 있고 내일은 내일의 행복이 있다.
내일의 행복은 오늘의 행복과는 다른 테마여야 한다. 참된 행복을 위해서는 나날이 진보하지 않된다. 부단히 자신을 개선하여 가기다. 상승하기, 향상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해서 안된다.
8. 타인을 존경한다는것은 일체의 열정을 배제한다는 것을 뜻하는가
번역의 잘못이라 보고(사실이지 나는 바깔로레아의 모든 문제가 약간씩 잘못 번역된 것이 아닌가 하는 혐의를 두고 있다).. '타인을 존경함에 있어서 사랑의 감정은 배제되어야 하는가?'로 옮김이 적당하다고 본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존경에서 사랑을 배제할 수는 없다. 존경이란 자신의 자아확립을 위한 내적인 주체적 뿌리내림에 있어 그 근거지를 확보하기다. 그것은 내 안에서 타인을 발견하기이며 동시에 타인 안에서 나를 발견하기다.
그것은 너와 내가 하나의 가족이 되어가는 절차라 할 수 있다. 존경에는 맹목적인 닮기와 다른 보완하기가 있다.
사랑은 그 존경이라는 영역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발견하고 그 자신의 역할을 전달하는 타인에 대한 보상이라 할 수 있다. 즉 인간은 ‘존경’이라는 방법으로 영토를 공유하면서 사랑이라는 역할을 나눠가지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서로간에 역할의 전달(배달)이 있는 것이며 그러한 교감을 추구하는 것이며 그 성공을 곧 행복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사랑은, 혹은 열정은 역설적으로 타인에 대한 존경심을 발견해 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즉 사랑이 궁극적으로 도달하여지는 바가 존경이라는 것이다. 즉 인간은 영역을 발견하기 이전에 먼저 역할하는 법이며, 그 역할의 성공을 통하여 자신의 실체적 존재를 입증할 토대가 되는 영역(존경)을 확인하게 되는 법이다.
결론적으로 누군가를 존경한다는 것은 누군가와 영역을 공유한다는 것이며 그러한 공유의 과정을 거쳐서 내적으로 자기 자신의 내적인 존재의 실체적 근거를 확보해가는 것이다. 열정 곧 사랑은 그 영역의 발견과정이라 하겠다.
당신이 행복하다면 그 영역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오늘 하루를 행복할 수 있다면 그 영역 안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이유는 그 영역이 당신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영역의 발견은 궁극적으로 신을 발견하여 가는 절차가 된다.
만약 당신이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당신 자신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토대로서의 어떤 지적, 사회적, 정서적, 경제적, 문화적, 실질적 영역을 확보하고 있다면 당신은 그만큼 사랑의 공간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며 그 사랑의 크기에 비례하여 그 영역 또한 부단히 넓혀져야 하는 것이며 당신의 성공의 크기는 그 영역의 크기와 비례하는 것이다.
9. 죽음은 인간에게서 일체의 존재의미를 박탈해 가는가?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 죽음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직 ‘삶’이 있을 뿐이며 우리가 ‘죽음’이라 부르는 것은 ‘삶’ 안에서의 어떤 ‘사건’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라도 죽음의 의미는 삶의 의미의 일부가 된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삶은 과연 유의미한가’가 되어야 한다.
삶은 유의미한가? 여기서 의미는? 의미는 가치의 배달을 말한다. 사건 a가 사건 b에 영향을 미친다면 a사건에서 b사건으로 무언가 옮겨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의미다. 그러한 옮겨가기를 위해서는 ‘완전성’이라는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즉 a가 99로 100의 완전에 도달하지 못하면 무의미한 것이며 a가 100의 완전에 도달하면 무언가가 b로 배달되는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의미’라고 일컫는 것이다. 그것은 스승에게서 제자에게로, 부모에게서 자손에게로, 꽃에서 열매에게로 배달되는 것이다. 무엇이? 가치가!
죽음은 그 가치의 100프로 완성에 기여한다. 죽음은 그 99와 100사이에 숨어있다. 우리가 죽음을 고통스러워 하는 것은, 100에 미달하는 99의 버려짐을 아파하는 것이다. 또 우리가 장례를 엄수하여 죽음 앞에 경건하는 것은 그 100의 완성으로 하여 배달받을 무언가를 희구하고 또 약속하는 것이다.
우리는 늘 죽음 앞에 선다. 우리는 늘 99와 100사이에 선다. 그 100에 도달하지 못하는 99의 폐기를 일러 비참이라 하고, 그 100에 도달한 즉 가치의 배달을 남기므로써 구원이라 한다. 죽음은 비극과 희극을 구분한다. 가치없는 것을 폐기하고 가치있는 것을 선택한다. 그러므로 두려운 것이다.
결론적으로 삶은 99의 비참 속에서 1의 희미한 구원의 희망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