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록
관용은 강자의 주도권을 전제로 하고 있다. 약자의 관용이란 있을 수 없다. 관용이야 말로 어느 면에서 가장 비타협적일 수 있다.

어느 면에서 관용은 동시에 지배를 의미할 수 있다. 누구를 용서한다는 것은 누구를 전적으로 지배한다는 것일 수 있다.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했다.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원수를 지배할 수 있어야 한다. 원수보다 힘의 우위에 서지 않고는 사랑하기가 불능이다.

불관용에는 관용이 있을 수 없다. 과거의 범죄를 관용할 수 있어도 미래의 예비된 범죄를 관용할 수는 없다. 불관용은 미래에 대응하고 있으므로 결코 관용할 수 없다.

관용은 철저한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또 기왕에 이루어진 과거의 일을 상대하여 힘의 우위에 있는 지배자가 피지배자를 포섭하는 과정에 불과하다.

진정한 사회는 관용도 불관용도 없는 평등한 사회이다. 용서할 필요도 없고 용서를 구할 필요도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

타인에 의존하지도, 타인을 지배하지도 않는 독립적인 개인들의 대등한 관계에서 우리는 관용을 넘어 사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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