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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아란도
read 4264 vote 0 2012.06.15 (22: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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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락당(獨樂堂)- 조정권

 

 

 

 독락당(獨樂堂) 대월루(對月樓)는

벼랑꼭대기에 있지만

예부터 그리로 오르는 길이 없다.

누굴까, 저 까마득한 벼랑 끝에 은거하며

내려오는 길을 부숴버린 이.

 

                                                                             <독락당의 '계정' - 사진출처: http://theplace2012.tistory.com/52>

                                                                 

                                                                    

                                                                                                              

 

 

 

'최영아의 책하고 놀자' 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의  '강신주의 철학적 시 읽기' 에서 " 독락당 " 이라는 시가 소개되었다.

독락당은 회재 이언적이 살던 집이다.

회재 이언적이 정치에서 밀려나 본가의 양동마을보다는 세심마을의 독락당에서 둘째부인과 생활하였다.

 

강신주의 시평과 강신주와 최영아와의 대화를 정리해 보았다.

 

독락당이라는 시는 시인 조정권이 독락당을 보고 느껴지는 심상을 시적세계로 확장시킨 시이다.

독락이라는 의미는 홀로 즐겁다 라는 뜻이다. 입구와 출구가 없는 곳을 공간을 설정 하였다.

그리고 대월은 달과 짝한다 라는 의미이다. 달은 고고하게 빛나는 정신성이다.

홀로 거기에 서서 달과 내가 짝이 되는 것. 입구도 출구도 없애버린 공간에서 오직 달과 짝한다. 시공간적 설정을 완성하였다.

이러한 시공간성의 설정은 고독, 정신성, 산에 올라가는 것을 의미한다. 산은 올라갈수록 황량하다. 황량할수록 정신은 더 빛난다.

조정권의 '산정묘지' 시집은 전반적인 톤이 아주 차가운 겨울, 산꼭대기 정상에서 홀로 바람에 안 밀리고 서 있는 어떤 인간을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가 놓치고 있는 어떤 인간들의  모습들이 조정권 시의 매력이다.

 

독락(獨樂) - 어떤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는데에 있어서 우리는 굉장히 우유부단하다. 그런데 어떤 길을 갔을때 뒤쪽길을 돌아보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까먹은 정신중의 하나이다. 섬세함이 문제가 아니라 (섬세함은 어떠한 것을 결정하기 전에 필요하다.) 결정했을 때 뒤를 돌아보면 안된다. 무조건 앞으로 가야될 때가 있다. 우리가 잃어버린 하나의 정신 같은 것이다.

 

여행을 즐기지 못하는 이유도 늘 돌아올 것을 걱정하기 때문이다. 안 돌아올 생각을 하고 가야하는데 항상 돌아올 것을 먼저 생각한다. 여행은 그냥 가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면 된다. 우리는 겁이 너무 많은 체로 살고 있다. 조정권 시인이 소중한 이유는 겁없는 세계를 탐구하기 때문이다.

 

조정권 시인의 시활동은 80년대 이후에 산정묘지 시집을 썼다. 그 다음 시들도 강력했다.

 

강신주가 독락당이라는 시를 소개하는 이유는,

유년시절 고2때 보충수업 안하려고 지리산을 일주일간  갔는데, 지리산 1500미터 위의 세석평전에서 밤에 텐트치고 야영을 했다.

처음으로 은하수를 봤던 곳. 정말 진짜 물처럼 ..그랬다. 그때 그 느낌이 철학의 동력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 위에서 별을 한참 보다 보니까 - 어떤 착각 같은 것일 수도 있는데 - 별에서 지리산이 내려다 보였다. 어떤 응시 - 그 느낌이 좋았다.

그리고 대학때 민주화운동이 한창진행될 때 자신은 잘 알지도 못하는데 휩쓸리고 막 밀려 다닐때 , 아주 지쳐서 그날 학교 뒤 캠퍼스에서 갔었는데 손에 조정권 시인의 시가 있었다. 독락당 대월루를 읽었더니 그때 지리산에서 보았던 은하수 느낌이 전달 되었다.

자기의 생활 - 대학생활이 내려다 보였다. 깜짝놀랐다. 자신이 까먹고 있었다. 주체적인 삶의 모습이 없고, 이게 옳다 저게 옳다 속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자신의 모습이 내려다 보였다. 이러한 이유가 이 시를 소개하는 개인적인 사욕이기도 하다.

 

이런 느낌으로 정치적인 환경, 개인의 생활 또는 인생의 격정을 살펴보자면 사람은 이해관계와 이익을 늘 따진다.

그래서 손해를 보더라도 조그만 이익이라도 얻고 손해를 줄이려고 하면서 산다. 하지만 이익과 손해라는 것을 완전히 다 끊어 버리고 한번 우뚝서서 내려다보면 우리의 일과 인생이 더 잘 보일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다. 오르기 위해 길을 만들었을 텐데 오르자마자 단호하게 그 길을 끊는 사람. 그런 정신적 높이, 흔들림 없는 것, 이러한 것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최영아 : 두 가지 입장이 있을 수 있겠다. 하나는 자신이 선구자적 입장, 또 하나는 평범한 입장 - 우리 주위에 이런 사람이 한명만이라도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강신주 : 우리 사회에서 한참 유행하는게 멘토다. 작년부터 올해까지 멘토를 찾는다. 그것은 사람들이 갈피를 못잡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이 시를 보고 이 정도 정신성이 있는 사람은 이해관계를 넘어가서 자기 자신이 홀로 당당함을 가지고 자신을 긍정하고, 독락이라는 말 그대로 사람을 상정하여 이런 사람이 옆에 선생으로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이 있어서 그렇게 될 수 있다.

 

최영아 : 80년대 그 이후로는 그런 동력을 가질만한 것이 없다. 예전에는 민주화, 그 이전에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지금은 그런 대상과 목표를 찾기가 어렵다.

 

강신주 : 물론 만만하지는 않다. 한가지 중요한 것은, 사실 멘토를 찾는 것은 중지를 해야 한다.

누구한테 기대면 - 누구한테 기대는 것은, 서 있다고 착각하는게 문제다. 그래서 그 기대있는 대상이 붕괴되었을때 후유증은 너무 크다.

휘청휘청해진다. 사람은 '저 사람을 정치적으로 지지해' 이러지만, 지지했으면 철회해버리면 되는데 사실은 지지가 아니라 기댄다.

기대니까 저 사람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생기거나 휘청하면 자기도 휘청해서 당분간 인터넷도 안보고 폐인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도 있게 된다.

그러니까 독락당이란 시를 읽었을 때 진짜 독락당에 올라가 있는 어떤 사람을 멘토로 삼는 것이 아니라 그런 당당함들, 그러한 것들에 관한 시로 읽었으면 좋겠다.

 

최영아 : 어렵다. 자기 길을 꿋꿋하게 간다는게...

 

강신주 : 한번만 하면 된다. 한번을 못해서 그렇다. 독락의 핵심이 ' 홀록 독' 자 이다. 사람들의 가장 큰 문제는 홀로 있는 것을 못 즐긴다. 독락을 못한다. 가만히 있다가 가만히 그 삶을 즐기면, 그 즐긴만큼 타인과 만났을 때 타인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

홀로 있을 때는 홀로 있어야 한다. 그런데 홀로 있는 것을 못 견디는 사람들이 있다. 어린아이다. 그래서 막 연락해서 만나려고 한다. 그냥 홀로 굳건히 있으면 된다. 홀로 내려오지 마라. 가만히 있어라. 친구에게 연락하지 말고, 친구한테 연락오면 나가보고, 먼저 연락하지 말고, 그런 어떤 태도들을 가지고 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최영아 : 대의를 앞서가는 사람의 시로도 읽히지만, 굉장히 지극히 개인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그런 시로도 읽힐 수 있겠다.

 

강신주 : 그렇게 읽힐 수 있다. 그리고 약간은 세상에 대해서 거리를 두는 어떤 느낌도 있다.

 

최영아 : 멋있다. 이 시를 정치인이나 사회지도층에게 꼭 한번 읽어주고 싶다.

 

강신주 : 이 시 괜찮다. 그런데 이 시에 따라... 어디가서 안내려왔음 좋겠다. 이런 생각은 들어요. ^^

 

최영아 : 짧은 시이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고, 큰 것을 품을 수 있는 시 같다. ^^

 

청취한 나도 : ...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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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락당에 대한 시평을 들으며 뭔가 가슴을 뚫고 가는 부분이 있었다. 위의 사진은 독락당 시를 듣고나서 문득 눈에 띈 사진이다. 홀로 올라가는 길과 내려가는 외길을 끓어버리고 독락하는 것과 사방이 길이어도 홀로 황량한 들판을 표표히 갈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산은 오를수록 황량하고, 메마른 들판은 단비가 없어서 더 황량하다. 그런데도 보여지는 것은 풍경이 되어 배경이 되어 아름답다. 그 안에 치열한 접점들은 쉽게 보여지지 않는다.

 

살다보면 이러면 어땠을까? 저러면 어땠을까? 저사람이 말이 맞나? 저사람이 말이 틀린가? 하는 생각의 핑퐁상태를 곧잘 경험하게 된다.

마음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게 된다. 그럴때 사람은 공황상태나, 생각의 백지 상태를 맞게 된다. 스스로 뭔가에 대해서 결정하거나 판단을 하지 못하게 된다. 특히 정치나 사회의 현상들에 대해서 사람은 예측을 하고 싶어하지만, 오히려 점을 치게 되는 상황도 벌어지곤 한다.

 

그러나 사람은 주어진 정보들과 보이지 않는 손을 발견하여 정확하거나 혹은 근사치에 가깝게 예측을 해야 하는 방향이 옳다.

언제나 보여지는 것들로만 판단을 하거나 그것을 신뢰하려 하기 때문에 늘 배반당한다. 즉 자기의 인식에 스스로 배반을 당한 것과 같다.

그리고나서 스스로 배반당한 것에 대하여 사회나 남을 탓하기도 한다. 그리고 세상은 스스로 판단할 시간이나 그것이 가능하도록 기회를 잘 주지 않는다. 될 수 있으면 다수의 기회를 막아 버리는 것이 한쪽으로 기회를 몰아주는 효과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을 넘어서기가 어렵다. 우리는 그것은 세상이나 혹은 사회의 장벽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려는 사람은 늘 있다. 한계에 도전하는 사람들은 늘 있다. 그것을 넘어서는 것만이 삶의 어떤 의미를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즉 스스로 방향을 발견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독락당이라는 시는 어느 부분에서는 그렇게 들렸다.

하지만 독락당이라는 시는<산정묘지 시집은> -  시인 조정권의 시 세계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고도 할 수 있을 듯 하다.

유교적 건축이고, 유교적 이상세계와 이언적이 자신의 세계를 일치 시키려고 지었던 건축물을 보고, 시의 세계 속으로 확장해 들어간 조정권 시인의 시에서는 불교적 색채가 느껴진다. 유교적 이상세계의 공간 구현을 하고 거기에 지어진 건축물을 보고 지은 시에서 불교적 색채가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래서 조정권 시인의 대해 자료를 찾아 보았다. 세인들의 조정권 시인의  대한 평가는

" 1987~91년에 쓴 30편의 연작시 〈산정묘지〉는 신성한 범신주의적 세계를 보여 관념의 극치를 이루는데, 이 때문에 자족적이며 현실도피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80년대 산업사회와 물신주의 풍조를 거부하고 정신의 고양(高揚)을 위해 시를 썼으며, 동양적 정신세계에 몰두하여 형이상학적 정신주의 시라는 새 지평을 열었다. 그의 시는 동양적 정관(靜觀), 노장적·불교적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세계를 동경하고 정신주의 시의 정점을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 이러한 평가를 받고 있었다.

 

범신주의적 세계, 관념의 극치, 자족적, 현실 도피적, 물신주의 풍조 거부, 동양적 정신 세계, 형이상학적 정신주의 시, 노장적.불교적 세계 동경, 정신주의 시의 정점. 조정권 시인의 대한 평가에 집약적으로 등장하는 단어나 문장들은 모두 정신이라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이러한 정신문화는 반드시 건축이나 삶에 이상세계 구현 형식으로 삶에 반영된다. 그리고 이언적이 살았던 독락당 내에는 작은 암자도 한 채 있다고 한다. 아마도 암자라는 것은 절이라기 보다는 승려들이 오면 머물다 가는 처소의 기능이 큰 것 같다. 회재 이언적 자신은 유학자이지만 선불교와 유유자적, 무위자연적 노장적 사상 역시 배척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이미 건축물에 그러한 사상들이 모두 반영이 되어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미 삶속으로 침투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는 부분들이다. 이런 이유들로 독락당이라는 시는 회재 이언적의 사상과 조정권 시인의 심상이 오버랩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을 듯 하다. 독락당이라는 공간적 요소가 회재 이언적에게도 조정권 시인에게도 동시에 정신적 상승의 공간적 장소로 작용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듯 하다.

 

일반적인 개인들도 자신의 생각을 삶에 반영하려고 한다. 그것이 반영이 안되면 그 사람의 삶은 무미건조해진다. 즉 그 사람의 방향성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그리고 이것이 바뀌면 변절했다고 말한다. 여기서 변절이란 자신이 지향했던 가치들에 대해 부정하고, 그것을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많은 비난을 불러온다. 일관성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좋은 것에서 나쁜 것으로 변절하기는 어렵다. 눈으로 보여지는 것에서는 가장 쉬운 것처럼 보여진다. 그러나 그것은 그냥 보여지는 것만을 보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좋은 것에서 안 좋은 방향으로 간다고 보이는 것은 처음부터 방향설정이 좋지 않았다고 알야야 한다. 원래 그런 사람은 아니었어가 아니라 처음부터 생각의 방향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나쁘다고 생각되는 것에서 좋은 방향으로 가기도 어렵다. 그러나 보여지는 것에서는 쉬워 보인다. 그냥 좋은 일만 하면 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쁜 것에서 좋은 것으로 가려면 방해물이나 방해자가 많다. 걸리는 것이 많다. 그것은 처음의 방향이 좋지 않아서 해결해야 될 문제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쁜 방향에서 좋은 방향으로 가기는 너무나 어렵다.

 

이 두 가지를 비교해본다면, 좋은 방향에서 나쁜 방향으로 간다는 것은 없다. 단지 결과가 안좋게 나왔을 뿐이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안 좋은 결과도 이로운 결과가 된다. 좋은 방향이란 처음부터 방향을 맞게 설정했다는 것이다.

반면에 나쁜 방향은 중간에 좋은 결과가 나온 것처럼 보여도 결과적으로 장기적으로 안좋은 결과가 될 확률이 높다. 왜냐하면 시작의 설정에서 방향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행위에는 변절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방향이 맞았는가 안 맞았는가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처음부터 방향을 잘 맞추었는가 맞추지 않았는가 하는 것 만이 있을 뿐이다. 이럴때 일관성이 제 가치를 발한다.

 

독락당 시를 들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 주체적으로 세상속에서 자신의 삶을 내려다 본다는 것은 자신이 가야할 바를 설정한다는 것이다.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라고.

그리고 방향이 틀렸다면 수정할 줄도 알아야 한다. 이때 방향을 수정할때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기도 한다. 방향을 틀때 방해물이 많다. 이러한 방해물을 제거되거나 해체되어야 한다. 이렇게 방향을 틀어야 할 때에도 '독락'은 필요한 것 같기도 하다. 에너지를 충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안에 내재된 동력이 없이는 방향을 틀지 못한다. 개인에게도 공동체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에너지를 충전한다는 것은 방해물을 제거하고, 불필요한 것들을 털어내는 것이다. 그 작업이 안에서 수행되어야 에너지가 모인다. 비로서 가야할 방향을 알게 된다. 드디어 결이 드러난다. 이 드러난 결대로 가야한다. 그것이 왜곡됨을 피하고 제 방향으로 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게 한다.

 

상황이 어려울수록 정신은 더욱 더 필요해진다. 정신이 치고 올라가줘야 된다. 그리고 그 정신으로 어려움을 버텨내게 된다. 상황이 좋아지면 정신보다는 문화가 필요해진다. 정신이 문화로 확산된다. 또한 혼자서는 정신이지만 공동체에서는 문화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화는 공동체 정신이 타락해 버리면 문화의 질이 떨어지기도 한다. 이럴때 다시 개인의 정신이 중요시 해진다. 홀로라도 정신과 문화라는 상호작용이 교감할려면 개인은 일대 다를 상대할 수 있는 강한개인이 되어야 한다. 이럴때 갈팡질팡하여 멘토를 찾는 습성을 버리게 된다. 물론 멘토는 필요하다. 정신적 스승은 늘 필요하다. 그러나 홀로 있을 수 있고, 자신의 척추로 홀로 서기 위해 멘토가 필요할 뿐이다. 멘토는 정거장과 같다. 머무르는 곳이 아닌 지나가야 할 과정중에 하나일 뿐이다. 기대는 것이 아니라 홀로 서기위함일 뿐이다.

 

조정권 시인의 독락당은 홀로 서는 시라고 볼 수 있을 듯 하다. 홀로 있을 수 있는 심플함. 세상과 홀로 맞설 수 있는 기개. 뒤돌아 보지 않는 강단. 황량함 속에서도 자연과 역사와 세상과의 소통으로 방향을 찾을 수 있는 열린 정신. 그동안 조정권 시인이 관념의 극치라고 평가를 받았다면, 나는 한가지 더 추가하여 홀로 있을 줄 아는, 홀로 세상과 맞설 수 있는 힘을 채우기 위한, 멘토를 구하기 위해 여행하지 말고 자신의 정신을 상승시킴으로서 스스로를 해결하는 해결자의 주체로서의 인간을 지향하는 시라고 평가하고 싶다.

 

아주 짧은 시 이지만, 그냥 시평 없이 들었다면 별 생각없이 넘어 갔을 터인데, 시평을 들으면서 시을 읽다보니 급 관심이 가는 시가 되었다.

혼자서도 이 시가 주는 시의 의미를 새겼다면 좋았을터 이지만, 그냥 무심히 시평을 듣다가 보니 가슴을 지나가는 한가지 생각을 건져낼 수 있게 되었다. 시평을 반드시 읽거나 들어야 한다고 추천하는 바는 아니지만, 모르고도 그냥 좋다면 더 좋은 일이지만, 알고 시를 다시 읽어보니 이 짧은 시 안에 그런 내용들이 집약되어 있고, 자신의 생각을 확장시킬 수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어서 시를 읽는다는 것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시는 그냥 읽고 자신의 감성이 울리는 바를 따라 가는 것이 좋지만, 때로는 시를 읽는 것에도 전제조건은 필요하고 배경지식은 있어야 할 필요성도 있구나. 라는 것에 대해 흠..그렇구나 하는 생각도 하게 하였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5]이기준

2012.06.16 (06:20:09)

^^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12.06.16 (18:10:41)

^^...
[레벨:11]큰바위

2012.06.16 (07:50:39)

산에 오르는 기쁨은 올라 본 사람만이 알지요.

고독solitude과 외로움은loneliness는 비슷 한 것 같지만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독락당의 이언적의 고독감을 시에서 느낄수만 있다면, 그거이 소통이고 감응이고 독자의 반응이겠지요.

 

그의 끄트머리 쯤 " 모르고도 그냥 좋다면 더 좋은 일이지만, 알고 시를 다시 읽어보니 이 짧은 시 안에 그런 내용들이 집약되어 있고, 자신의 생각을 확장시킬 수 있구나"하신 말씀, 감응이 됩니다.

 

그냥 읽는 것만으로도 좋은 글이 되었습니다.

 

산에 올라가 봐야지. 그런데 산이 없네!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12.06.16 (18:03:59)

오를 산은 없어도, 산에 가는거 즐기지 안않아도...올라야 할 산도 많고 내려올 산도 많고...ㅋ~^^
프로필 이미지 [레벨:15]aprilsnow

2012.06.16 (08:38:56)

뭐하러 길을 부셔?

그렇게 자신이 없나?

쓸데없는 뻘짓.

고루한 관념의 유희

정치인이나 사회지도층 먹물들에게 읽어주고 싶다고?

원래 그 사람들 이런거로 위안받기 좋아해.

 

스마트폰이 필요하면 말을 하시지.

떼나쓰고 있어.

 

 

프로필 이미지 [레벨:15]aprilsnow

2012.06.16 (08:46:07)

산에 가도 산이 없다.

달빛이 산에서만 빛난다면 있다면 그건 전구.

감히 길을 막고 물을 막지 마라.

 

물과 길은 흐르고 흘러

평야를 만나고 바다를 만난다.

대양으로 가는 배를 만들 생각은 않고

맨날 산에 들어갈 생각을 하니....

 

기어올라가고 말고는 자유.

 

프로필 이미지 [레벨:5]이기준

2012.06.16 (14:43:05)

와우. 대차다. ㅋㅋ

이거야.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12.06.16 (18:10:16)

시나 문학은 원래 정신적 유희.
시를 그렇게 썼다고 뭐라 하는건 좀 우습지요. 그 사람 생각을 비난한 것과 같기에.
시평은 각자의 생각이나... 그 시가 지향하는 그 의미만 살피면 되니...
위의 에이프릴 스노우님의 글들은 반론평 이라기 보다는 다른 관점의 접근이다로 보면 될것 같네요. 시를 직접 다시 쓰면 해결될 문제. ^^
프로필 이미지 [레벨:15]aprilsnow

2012.06.18 (17:14:38)

ㅎㅎㅎㅎ시를 다시 쓴건데~

우수웠나보네요~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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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써놓고 주말에 바빠서 월요일에 들어와보니~

댓글이~ 우와~~~ㅎㅎㅎㅎㅎ 깜짝 놀랐네요~

단순한 얘기인데~

[레벨:15]르페

2012.06.16 (09:28:08)

문 잠그고 길 부수고 고독의 심연을 즐긴다.. 언뜻 멋지다고 생각되지만 딱 한 달 용일뿐,

삐치고 상심하고 고루해져서 영남에 갇힌 꼰대 좀비되는 것이 실상.

소통의 실패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감내해야하는 이유는,

불통의 스트레스에 비할바가 못되기 때문.

게다가 스마트폰 때문에 문 잠궈도 소용없음 ㅎㅎ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12.06.16 (18:17:56)

여기서 영남꼰대 등장은 무의미.
더불어 스마트폰 등장도 무의미.
소통할 대상이 없으니 소통의 대상을 찿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보이오.
인간은 어떠한 순간에도 소통의 고리를 끊지 않는다는 것이고, 방법을 바꾸고, 도약으로 고립을 해결하려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보이네요.

여담으로 스마트폰으로 주로 접속을 해결하다, 컴으로 접속하여 또 들어가면...벌써 컴이 아날로그 같은 향수를 느끼게 했음. 스마트폰은 소통의 도구이나 언제든 교체될 수 있는 것이지만, 망이라는 그 자체의 구조는 교체되기 어려운 것이므로... 독락의 의미는 그렇게 저는 받아 들였네요.^^
[레벨:15]르페

2012.06.16 (20:42:10)

일본의 오타쿠나 히키코모리도 고립에서 소통을 구한 결과,
일본 만화와 애니 산업이 이정도까지 성장한 것이고,
영남늙은이의 꼰대놀이도 나름대로 문화와 학문의 발전에 기여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레벨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소통으로의 진행과 불통으로의 퇴행이라는 갈림길이 나타나죠.
스마트폰은 더 나은 물건으로 교체될 수 있지만 스마트폰 교체냐 피처폰 고수냐 하는
게임에서는 당연히 스마트폰이 소통과 망의 상징이 될 수 있지요.

 

한쪽에 소통/망/스마트폰/도로/개방/개입/세력이 있고,
다른쪽에 불통/장비/피처폰/자동차/폐쇄/독락/생존이 있다는거죠.

 

한쪽만 옳다는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어느 지점에서 반드시 갈라지는 갈림길이 있다는겁니다.
문학과 예술이라고해서 진보와 보수의 갈림길이 나타나지않는다고는 보지않거든요.

물론 조정권 시인 개인에 대한 제 생각이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문화는 고립기에서 성숙해지고, 확장기에서 경쟁하는 생물체와 같다고 봅니다.
조선은 고립으로 성숙해졌지만 확장에 실패해서 꼰대로 말라죽은 케이스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금 일본이 고립되어 죽어가고 있는 것도 고립을 고집하며 개방을 거부한 댓가겠지요.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12.06.16 (21:36:02)

인간이 독락할수 있는 상태가 되면 인류의 수준이 높아진다고 보이오.
이언적과 조정권에만 빗댈 필요도 없는 얘기.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에서 독락이라고 생각되오.
소통과 불통을 넘어선 얘기.
결국 독락은 현재의 소통의 수준을 뚫어 버리겠다는 것이니, 뭔가에 비유되었다고 하여 그것을 모범삼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또한 원했던 원하지 않았던, 인간이 고립되어 버리면 가장 적극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정신을 상승 시키는 일이라 보오. 노느니 정신을 도약하는 뭐...그런거...^^
문화가 고립되어 생존전략으로 가는 것과, 사람이 고립되는 것은 좀 다르다고 보임.
명동 한복판에 있어도 , 여의도에 있어도, 청와대에 있어도, 소통의 수준이 맞지 않으면 고립이라 보이오. 그렇다고 거기에 주저앉아 불통타령 할 수 없으니 계속 앞으로 가야 하고, 도약해야 하고, 진보해야만 하는 것.
독락을 오타쿠나 꼰대에 비유하는 것은 좀 아니라고 생각되오. 비유대상이 잘못 되었다고 생각되오.
인간은 상호작용하는 존재지만, 홀로 깨닫는다고 보이오. 홀로 라는 의미를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고도 보이오.^^
[레벨:15]르페

2012.06.16 (22:28:19)

결국 개인성을 유지할 것이냐 팀플레이에 들어갈 것이냐, 선택의 문제라고 봅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라기보다 상황에 따라 적절히 대응하는 것.

 

약해지면 고립되어 생존을 도모하는 것이 맞고,
강해지면 소통하여 세력을 확장하는 것이 맞소.

 

사람이나 문화나 나타나는 양상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위에서 말했다시피 오타쿠, 히키코모리, 꼰대, 독락을 함께 묶은 이유는,
어떤 상태가 옳으냐그르냐의 문제가 아닌 상황적으로 적절하냐로 이해하기 때문.

 

깨달음이란 어떤 특정한 상태의 유지가 아니라,
소통과 불통, 세력과 생존, 선비와 꼰대, 개방과 고립,
상호작용과 독락 사이의 밸런스라고 봅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12.06.17 (06:07:41)

르페님 말 맞소.
하지만 뭔가 강조하기 위한 말을 한다는 느낌도 있네요. 약간은...
해서 더 얘기하면 주장을 얘기하기 위해 얘기하는 느낌이 들어 그만해야 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남의 시 내 얘기 하다 망칠 것 같아요.
허지만...그래도 구조론 사이트 아니면 이런 얘기 못 나눈다는 것이 제게 위안이기는 합니다. 그런 부분은 고마운 것이지요^^ ㅎ~....
[레벨:15]르페

2012.06.17 (08:22:25)

이언적은 정란에 휘말려 불혹의 나이에 귀향해서 7년간 독락하다가 복직했고,

소로우도 형이 죽은 후 월든 호숫가에서 2년간 독락하며 깊은 깨달음을 얻었고,

예수도 서른살때 요한의 세례를 받고 40일간 황야에서 금식하며 마음을 다졌지요.

 

독락을 컴퓨터에 비유하자면, 리셋 혹은 포맷 같은 것이라고 생각되오.

응용프로그램은 모두 끄고, 본체와 운영체제만 남기는 공장 초기화 상태.

아란도님과 대화를 하다보니 점점 독락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오.^^;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12.06.17 (20:26:53)

저도 모두와 같이 깊이 들어가 보니 좋네요. ㅋㅋ^^

[레벨:9]길옆

2012.06.17 (06:13:31)

독락당 = 홀로 즐기는 집 = 자위행위하는 집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12.06.17 (06:26:39)

흠... 지금 눈에 띄여 댓글을 차마 그냥 지나칠수 없어서 달기는 다는데...
좀 그렇소. 꼭 한번 얼굴 봅시다. 하하... 안보고는 못넘어갈 댓글이넹. 보고 얘기 합시다.
에휴..... 저것도 이해 못하고 스트레스 작렬하는 모습을 보니... 와락 슬픔이오.^^
프로필 이미지 [레벨:7]정나

2012.06.17 (07:06:32)

독락(獨樂) 

잊고 살았었는데...

대학교 초년 여름 한달동안  전국 배낭여행을 하면서

홀로 달과 해와 짝한다는 느낌 알게 되었지요.

 

혼자서 걷는다는 게 '외롭다'가 아니라 '나의 자존감을 찾는다'는 것임을

처음은 약한자로서  길위에서 생존함이 모든 것이었지만

끝엔 강한자로 다시 출발하게 된다는 것을

 

되찾은 그 느낌으로 세상에 출사하였던 ....

 

"막히면 홀로 그 몸을 선하게 하고 열리면 아울러 천하를 선하게 한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12.06.17 (20:31:22)

달 하나

해 하나

..인 이유가 무엇인가가 와서 짝 할 수 있도록.

.. 누구나 독락의 시절은 있거나 있을 수 있는데 어떻게 보내는가 하는 것일 수도 있겠네요.^^

 

프로필 이미지 [레벨:5]이기준

2012.06.17 (09:21:42)

영원불변은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 원리와 능력(균형)을 가졌을 때 


일컫는 말입니다. 



태양은 끊임없는 내부의 핵융합으로 약 40억년 동안 영원불변하는 거죠. 닫힌 계를 하나 성립시킵니다.


절대적인 영원불변이라는 말이 훼손되었나요? 


이미 그 말의 개념을 새로 정의해야 할 순간이 왔네요. 


영원불변은 어떠한 구조, 과정, 관계, 균형에서 성립하고 그 균형의 원리가 영원불변한다는 것을요. 


사람들이 생각하던 영원불변하게 고정된 태양은 틀린 것이고 


그러나 태양은 균형 속에 있음으로 영원불변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균형에 의해 새로운 태양을 만들 수 있습니다. 




독락당을 거기서 끝난 고정된 상태, 즉 고정된 존재로 보느냐


도에 이르는 과정으로 보느냐 차이에요. 


님들 댓글이 갈라지는 지점은 거기에요. 




독락당이 길을 없애고 어느 곳에 고립된 곳으로 고정되면 그 지점에서 독락당은 틀린 것이고 (가짜가 됨)


독락당이 성립되는 원리와 그 균형이 님의 마음속에 복제되어 들어왔다면


'밈'울 복제했다면 (진화생물학적인 말)


님이 독락당을 훔쳤다면 (우리식으로 한 말) 


님이 어디에 있던 독락당이 성립되겠죠. (진짜가 됨)




이 세상은 가만히 그대로인데 


사람들이 그것을 자신의 인식속에 고정된 존재로 받아들이기에 가짜가 됩니다. (김동렬님이 말하는 '인식론'의 함정. 저는 이걸 인간의 '존재규정패턴'이라고 부름)


그러나 우리가 우리식으로 그것을 훔치면 진짜가 됩니다. 


왜냐면 우리는 구조를 끌어내어 훔치니까요.


우리는 그렇게 이 세상을 마음속에 담아요. 


전부를. 여여하게.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12.06.17 (20:42:05)

독락의 의미를 좀 더 확장하여..혹은 본래의 의미를...

왜? 독락을 모두 왜곡되게 받아 들였을까...?

이 부분에서 조금 당황했음. 뭐라 하는 것은 아님. 단지 내가 당황했다라는 얘기임.

독락에서 부처를 보고, 예수를 보고, 소로우를 보고, 노무현을 볼 수도 있고, 진보를 볼 수도 있고, 방향성을 볼 수도 있지만,

독락에서 폐쇄적인 문화와 고립된 인간, 갇혀 있는 인간, 그저 은둔하는 나약한 인간을 볼 수도 있고, 벙커에 갇혀사는 이명박을 볼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모두 그동안 인식의 왜곡 탓이라고 생각됨.

거기서 더 나아간다 라는 것 보다는 그냥 그 상태에만 머물러서 한정지어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그것은 주입된 생각이라는 것도...

 

대체로 성인들을 예로 들어 보자면...그 시대의 현실에서 자신과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보아야 함.

그래서 정신적 상승으로 치고 올라가서 새로운 소통방식을 찾아낸 것임.

그리고 확산 시킨 것임. 소통양식을 소통의 언어를 , 소통의 도구를 만들어 낸 것과 같음.

그리 따지면 구조론도 마찬가지임.

그래서 다 알아듣고 이해할거라 생각했었음.

그런데 아니어서 오히려 내가 당황해버렸음.

 

뭐..예를 들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

프로필 이미지 [레벨:5]이기준

2012.06.17 (20:44:32)

그래도 저기 위에 본문에 인용된 글을 보다 보면 인터뷰 같은 걸 하면서 최영아 라는 사람이 한 말에 '80년대 이후 우리 사회가 모실 것이 없어서' 독락정을 존재로 받아들이고 모시려고 하는 뉘앙스 얘기가 있어요. 그런 존재규정적인 얘기를 다른 회원들이 알아 본 거에요. 


다른 회원들이 그걸 알아보고 가짜니까 깨버리려고 한 것은 다들 보는 눈이 있다는 거죠. 


다 이유가 있어서 나온 얘기에요.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12.06.17 (21:16:02)

최영아는 진행자이니만 이 코너에서는 보조적 이라고 보아야 하지요.

그러므로 최영아의 얘기는 자신이 읽고 느끼는 것을 일반적 경우에 맞추어서 (물론 그것이 본인의 수준일 수도 있으나... ) 얘기하고 있는 경향이 있지요. 대체적으로 시를 읽고 느끼는 그런 느낌들을 얘기하고 있다고 보여요.

하지만 시란 더 깊게 치고 들어가야 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시평을 듣다보면 또는 읽다 보면 시란 부드러움과 갼결함 속에서 예리함을 감추고 있기 때문에 성속을 넘나들고 있고(다른 시들의 시평은 더욱 더 그러함), 그러기 때문에 진행자인 최영아는 약간은 어색함을 가지고 진행을 한다고 생각하는데, 강신주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시란 이런 것이다.라는 시평을 하고 있다고 여겨졌어요. 최영아의 얘기를 전적으로 부정하지도 않지만 긍정하지도 않고 있지요. 그리고 독락의 의미를 전달하려 하고 있지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하는 것에서도 독락의 의미를 자신의 철학의 시작이라고 얘기하고 있지요. 그런데 최영아의 얘기에 무게를 실어서 듣거나 읽는다는 것은 관심 두어야 할 것에서 조금은 비켜간 것이기도 하지요.

물론 직접 듣고 그런 감을 잡는 것과 타인이 그것을 옮겨서 중간중간 생략을 하고 옯겼기 때문에 그런 느낌들이 살아 나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무엇을 볼 것인가? 어디에 반응하는가는 전적으로 자신들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라디오 프로그램 중에서 시를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은 없었는데 생겨서 듣다보니 괜찮았어요. 그래서 옮겨본 것입니다. 그리고 라디오..팟캐스트로 듣는 것도 다 나꼼수가 시작해서... 익숙해져서 올 팟케스트 앱을 다운 받아 듣게 된 것이지요. ㅋ~

프로필 이미지 [레벨:5]이기준

2012.06.17 (21:17:42)

맞는 말이에요. 제 얘기도 '무엇을 볼 지는 각자 알아서 선택하라' 이렇게 정리하고 싶었습니다. 



강신주에 대해서 덧붙이자면

전에 강신주가 하는 강연을 봤는데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 사람은 시에 내면을 담아내야 한다는 말을 잘 이해하고 있더군요. (어떻게 하는지 방법은 못가르쳐 주더라도)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12.06.17 (21:23:04)

ㅎ~ 안 가르쳐 주어도 전달된다고 보여요.

자신이 시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 시원하게 풀어 버리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느껴졌어요.

그 다음은 각자의 몫...^^

프로필 이미지 [레벨:5]이기준

2012.06.17 (21:26:06)

음,


제가 들은 건 강신주가 하는 시 만드는 방법론 강의였거든요. 그래서 한 말입니다. 


님이 들은 것과 달랐어요. 


저는 덕분에 훔친게 좀 있지만요.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12.06.17 (21:40:14)

시평과 시를 짓는 법에 대해 배우는 것은 다른 접근이라고 생각해요.

시평만 들어도 훔칠 것들은 많아서 저도 한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대화들에서도 훔칠 것들은 널렸지요. 주워만 가면 끝...

그리고 댓글 감사해요. 이리 반응을 보여주시니 저도 제 속에 있는 것들을 끄집어 낼 수 있었으니까요.

모두에게 감사해요.^^

[레벨:6]폴라리스

2012.06.17 (10:19:10)

사진속 독락당도 그렇고 조정권의 시도 그렇고... 참 좋소.  사람들과 이리 저리 얽혀서 정신이 소란스러운데.... 마음한켠에 저런 독락당을 지어놓고 싶소.  獨樂의 시간을 통해 진정 세상과 共樂할 수 있는 여여함을 얻을 수 있을 듯 하오. 정신의 유희라 해도 좋은데... 유희면 어떻소?  내가 좋으면 그만이지.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12.06.17 (20:43:20)

우리의 이런 대화들도 일종의 정신적 유희겠지요.

그리고 다른 곳에서 나누지 못하는 대화를 시도한다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충만이라고 생각되네요.^^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12.06.17 (23:40:25)

이왕 생각난 김에 추가 하자면...

인간은 소통할 수 있는 도구가 내장된 자체 시스템 기능이라고 생각되네요.

정신이라는 소통 도구가 있어서 바깥과 상호작용을 통하여 교감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이 정신을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라고 보입니다.

이 도구를 사용하여 도약도 할 수 있고, 뭔가 필요한 것을 조달할 수 있기도 하구요.

이 도구의 연장선으로서 손에 칼을 쥐면 칼이 무기가 되고, 펜을 쥐면 펜이 무기가 되고, 붓을 가지면 붓이 무기가 되고, 스마트 폰을 가지면 스마트 폰이 무기가 되겠지요.

이 모든 것은 소통도구인 정신의 연장선이라고 보입니다. 즉 도구가 도구를 조달하는 셈이라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가장 사용하기 어렵기도 하지만, 가장 손쉽게 활용할 수 있는 소통도구는 정신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자기것이므로 자기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하고, 통제할 수도 있어야 할 것이구요.

깨달음이란 이러한 소통도구인 정신을 잘 사용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해보게 됩니다.

독락은 곧 소통도구를 잘 정비하는 일이 되는 것으로 비유할 수도 있겠네요.

사람이 극한 상황에 몰렸다 친다면... 혹은 어떠한 교감을 해야 될 대상이 지극해져 버리면... 문득 교감을 하게 된다고 보입니다. 어떤 이치 즉 구조를 보게 되는 것이겠지요.

그것이 느낌이나 아! 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도 있지만, 이미 그것은 스스로 체험되어 버리는 것이기에 각인이 되는 것이고, 그것을 통하여 도약을 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소통의 층위가 달라져 버리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구조론에서 늘상 얘기하듯이 ..어떤 슬픔 같은 것을 느낄 수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낙차 때문이라고 어딘가에 표현되어 있던 기억이 나네요. 그래서 오히려 그 슬픔이 진보를 하게 한다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머물러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그냥..이런 생각이 들어서 옮겨봅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12.06.18 (00:24:42)

독락당은 존엄을 노래하오.

 

정상에서는 정상을 볼 수 없소.

다른 정상에서만 그 정상을 볼 수 있소.

 

구름바다 위로 우뚝한 덕유산 정상의 모습은

오직 지리산 정상에서만 보이고 다른 어디서도 보이지 않소.

 

에베레스트를 밑에서 올려다보며 찍은 사진은 있어도

정상의 모습을 찍은 사진은 없소.

 

그래서 독락인 것이오.

 

[레벨:6]폴라리스

2012.06.18 (10:41:51)

시와  사진이 좋아서 내 페북에 퍼가오 ^^

프로필 이미지 [레벨:15]aprilsnow

2012.06.18 (17:10:35)

회재 이언적 - 퇴계 - 영남학파 남인 - 독재권력과 그에 따른 꼰대들의 문화예술권력

(이건 21세기의 현실이오.) 

 

본래의 '독락'이란 뜻과 달리 그것은 면면히 이어지는 하나의 권력이 되었소.

'저들의 독락'은 갈림길에서 다른 곳으로 가버렸소.

본질을 잃어버린 권력에 대해 사망선고가 필요하오.

 

'독락'이라기 보다 '깨달음'이 적절하오.

방법은 각자의 선택.

 

물론 고독과 존엄의 시간은 필요하오.

'독락'이란 것 자체는 참으로 좋은 시간이오. 동감이오.

그 자체로 의미있지 않고 전모를 보는 호연지기와 깨달음이 수반되어야 의미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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