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은 원래 인문학이다. 인문학의 요체는 인간의 존엄성을 추구하는 데 있다. 존엄성은 완전성에서 유도된다. 완전한 인격성에의 도달이 그 하나의 목표가 된다.
종교에서 말하는 천국이나 극락은 사이비한 것이다. 참된 것은 인격모델로서의 삶의 태도이다. 예수나 석가가 말한 어떤 이상향이 추구하는 바 우리의 삶의 목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나, 석가나, 공자나, 소크라테스가 도달한 인격이 우리의 목표인 것이다.
보통은 행복을 판매한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 사회의 목표라는 식이다. 이는 인류의 불행을 반영한 즉 잘못된 태도이다.
행복은 사회적인 비교우위의 개념이다. 절대평가가 아닌 상대평가이다. 그러나 인간의 가치는 사회가 아닌 개인의 차원에서 결정된다. 행복한 돼지보다는 불행한 소크라테스가 낫다. 여기에는 비교우위가 없다. 절대평가의 영역이다.
인간은 비참한 존재이다. 인간은 비참을 극복하므로써 존엄에 도달하고자 한다. 인격적 완전으로 하여 그 존엄에 가닿을 수 있다. 사회 혹은 개인이 추구하는 바는 각자의 고유성에 기반한 최대 완전성에의 도달이어야 한다.
그것은 타자와 비교되지 않는 즉 자기만의 고유한 가치에의 도달을 의미한다. 곧 가장 자기다운 것이 가장 완전한 것이다.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는 완전한 자기자신에 도달하기다. 자기 자신의 고유한 본성이 가장 잘 나타나는 상태에의 도달을 의미한다.
문제는 그 ‘완전함’이 과연 있는가이다. ‘완전한 삶’은 가능한가이다. ‘완전한 인격’은 도달 가능한 목표인가이다. 그 완전성이 바깥에 있는가 아니면 내부에 있는가이다.
● 인간은 비참한 존재이다.
● 존엄으로 하여 비참을 극복할 수 있다.
● 인간의 존엄은 인격적 완전성에서 찾아질 수 있다.
● 완전한 인격에의 도달이 삶의 목표가 될 수 있다.
● 그렇다면 그 완전성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샤르트르는 ‘체 게바라’를 20세기 가장 완전한 인간이라고 추켜세웠다. 그러나 네가 알고 내가 알듯이, 샤르트르가 체 게바라를 헌사하는 것은 그가 죽었기 때문이다. 그가 살아남아 지금도 쿠바를 통치하고 있다면 체 게바라 역시 뭇 독재자들과 같은 평판을 받았을 것이다. 이건 분명하다.
예컨대.. 인디언 라코타족의 족장 ‘앉은 황소’가 인디언의 전통에 따라 수도한 끝에 그 어떤 고결한 인격에 도달했다손 치고 그것이 과연 인정해줄만한 가치가 있는가이다.(앉은황소 시팅 불은 한때 백인추종자들까지 거느렸다.)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 곧 문명의 발전과 역사의 진보와 동떨어진 별개의 가치가 존재하는가이다. 정답을 말하면 ‘그렇지 않다’이다. 그 개인의 완전성은 그 전체로 부터 온전히 독립적일 수 없다. 즉 무인도에 고립된 로빈슨씨의 완전성은 의미없는 것이다.(물론 전혀 가치없다는 것은 아니다.)
완전한 인격은 완전한 것과 공명하는 것이다. 완전한 것은 신의 창조한 바 되는 문명과 역사와 사회이다. 개인의 인격적 완전성이 사회나 공동체 혹은 역사와 온전히 동떨어진 채 별개로 있을 수는 없다. 마땅히 공명함이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도 논쟁이 있는데 도교의 무(無)는 상대적으로 개인적인 완전성을 의미하고 불교의 공(空)은 더 사회적인 완전성을 의미한다.
선(禪)가에서 추구하는 평정심도 마찬가지다. 본질에서 어떤 인격적 완전성을 의미한다. 곽암선사가 그린 심우도(尋牛圖)의 마지막은 도교의 무(無)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공(空)으로 완성된다. 곧 입전수수(入廛垂手)의 경지다. 저자거리로 돌아가 손을 드리운다.
정리하자면 인간의 추구하는 바가
● 행복의 단계.. 사회적인 비교우위의 개념.
● 개인적 성취의 단계.. 도교적, 현실도피적, 개인적 인격성의 성취.
● 사회적 성취의 단계.. 완전한 신과 공명하는 즉 사회적 인격성의 성취.
이렇게 있는데 동서고금의 최고 두뇌들이 지난 수천년 동안 줄기차게 토론한 결과 세번째가 최고라고 결론이 확실하게 나 있는 것이다.
북이라면 북소리가 나야하고 종이라면 종소리가 나야 한다. 울림과 떨림으로 확인되어야 한다. 달팽이가 껍질 속으로 숨는 식의 현실도피적인 태도는 아니다. 사회적인 실천으로 증명되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인간 내부에 숨어 있는 완전성을 밖으로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 즉 완전한 것과 공명할 수 있으면 그것이 곧 완전이다. 그러므로 참된 의미에서의 완전은 ‘공명’ 그 자체이다. 서로 다른 여러가지 가치가 공명하여 하모니를 이루는 것이다.
신은 완전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완전한 것에 신이라는 이름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전체도 완전하다. 인류문명의 진보, 역사의 발전은 개인의 작업이 아니라 인류전체의 공동작업이므로 완전하다.
여기서의 완전은 물론 시공을 초월한 즉 통시적인 의미에서의 완전성이다. 특정한 시대를 잘라내고 발췌하여 말한다면 전혀 완전하지 않다. 즉 21세기의 현대문명은 전혀 완전하지 않다. 그러나 문명은 진보한다. 그 진보의 끝을 감안해서 총체적인 의미로 본다면 완전하다.
결론적으로 시간이냐 공간이냐 혹은 시공을 합쳐서 총체적이고 통시적인 의미에서의 완전성이냐다.
● 작동이 정지한 것 중에 완전한 것은 없다.
● 모든 것은 내버려두면 저절로 작동을 정지한다.
● 완전을 가장하려면 그 순간에 정지시켜야 한다. 곧 죽여야 한다.
그러므로 체 게바라는 살해된다. 완전의 한 전범을 창출하려는 사회의 집단적 의지에 의해. 즉 그들 무리가 일제히 달려들어 예수를 십자가에 달아 매었듯이 그 완전성을 시험하려는 사회의 집단적 의지에 의해 체 게바라는 살해된 것이다.
(시간을 정지시키는 방법으로 반대증거를 은폐하기.. 중세 마녀재판의 방법, 곧 죽이되 죽으면 마녀가 아니고 죽지 않으면 마녀라는 증거가 된다.)
그러므로 정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상은 불완전한 것이며 완전은 인간이 그 정상에 다가섬으로 하여 그 정상의 부족분을 인간이 채워주는 방식으로 그 한 순간에 빛나는 완전성이 성립할 뿐이다. 인간이 그 정상을 떠난다.
정상은 도로 불완전해진 채 인간의 방문을 기다린다.
시간이 정지한 상태에서
● 결론적으로 정상은 있다.
● 그 정상은 여백을 가지고 있다.
● 인간이 그 여백을 채워줄 때 정상은 비로소 완전해진다.
● 그러므로 정상에서는 누구도 그 정상을 보지 못한다.
또한 울림과 떨림이 있어야 한다.
종교에서 말하는 천국이나 극락은 사이비한 것이다. 참된 것은 인격모델로서의 삶의 태도이다. 예수나 석가가 말한 어떤 이상향이 추구하는 바 우리의 삶의 목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나, 석가나, 공자나, 소크라테스가 도달한 인격이 우리의 목표인 것이다.
보통은 행복을 판매한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 사회의 목표라는 식이다. 이는 인류의 불행을 반영한 즉 잘못된 태도이다.
행복은 사회적인 비교우위의 개념이다. 절대평가가 아닌 상대평가이다. 그러나 인간의 가치는 사회가 아닌 개인의 차원에서 결정된다. 행복한 돼지보다는 불행한 소크라테스가 낫다. 여기에는 비교우위가 없다. 절대평가의 영역이다.
인간은 비참한 존재이다. 인간은 비참을 극복하므로써 존엄에 도달하고자 한다. 인격적 완전으로 하여 그 존엄에 가닿을 수 있다. 사회 혹은 개인이 추구하는 바는 각자의 고유성에 기반한 최대 완전성에의 도달이어야 한다.
그것은 타자와 비교되지 않는 즉 자기만의 고유한 가치에의 도달을 의미한다. 곧 가장 자기다운 것이 가장 완전한 것이다.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는 완전한 자기자신에 도달하기다. 자기 자신의 고유한 본성이 가장 잘 나타나는 상태에의 도달을 의미한다.
문제는 그 ‘완전함’이 과연 있는가이다. ‘완전한 삶’은 가능한가이다. ‘완전한 인격’은 도달 가능한 목표인가이다. 그 완전성이 바깥에 있는가 아니면 내부에 있는가이다.
● 인간은 비참한 존재이다.
● 존엄으로 하여 비참을 극복할 수 있다.
● 인간의 존엄은 인격적 완전성에서 찾아질 수 있다.
● 완전한 인격에의 도달이 삶의 목표가 될 수 있다.
● 그렇다면 그 완전성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샤르트르는 ‘체 게바라’를 20세기 가장 완전한 인간이라고 추켜세웠다. 그러나 네가 알고 내가 알듯이, 샤르트르가 체 게바라를 헌사하는 것은 그가 죽었기 때문이다. 그가 살아남아 지금도 쿠바를 통치하고 있다면 체 게바라 역시 뭇 독재자들과 같은 평판을 받았을 것이다. 이건 분명하다.
예컨대.. 인디언 라코타족의 족장 ‘앉은 황소’가 인디언의 전통에 따라 수도한 끝에 그 어떤 고결한 인격에 도달했다손 치고 그것이 과연 인정해줄만한 가치가 있는가이다.(앉은황소 시팅 불은 한때 백인추종자들까지 거느렸다.)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 곧 문명의 발전과 역사의 진보와 동떨어진 별개의 가치가 존재하는가이다. 정답을 말하면 ‘그렇지 않다’이다. 그 개인의 완전성은 그 전체로 부터 온전히 독립적일 수 없다. 즉 무인도에 고립된 로빈슨씨의 완전성은 의미없는 것이다.(물론 전혀 가치없다는 것은 아니다.)
완전한 인격은 완전한 것과 공명하는 것이다. 완전한 것은 신의 창조한 바 되는 문명과 역사와 사회이다. 개인의 인격적 완전성이 사회나 공동체 혹은 역사와 온전히 동떨어진 채 별개로 있을 수는 없다. 마땅히 공명함이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도 논쟁이 있는데 도교의 무(無)는 상대적으로 개인적인 완전성을 의미하고 불교의 공(空)은 더 사회적인 완전성을 의미한다.
선(禪)가에서 추구하는 평정심도 마찬가지다. 본질에서 어떤 인격적 완전성을 의미한다. 곽암선사가 그린 심우도(尋牛圖)의 마지막은 도교의 무(無)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공(空)으로 완성된다. 곧 입전수수(入廛垂手)의 경지다. 저자거리로 돌아가 손을 드리운다.
정리하자면 인간의 추구하는 바가
● 행복의 단계.. 사회적인 비교우위의 개념.
● 개인적 성취의 단계.. 도교적, 현실도피적, 개인적 인격성의 성취.
● 사회적 성취의 단계.. 완전한 신과 공명하는 즉 사회적 인격성의 성취.
이렇게 있는데 동서고금의 최고 두뇌들이 지난 수천년 동안 줄기차게 토론한 결과 세번째가 최고라고 결론이 확실하게 나 있는 것이다.
북이라면 북소리가 나야하고 종이라면 종소리가 나야 한다. 울림과 떨림으로 확인되어야 한다. 달팽이가 껍질 속으로 숨는 식의 현실도피적인 태도는 아니다. 사회적인 실천으로 증명되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인간 내부에 숨어 있는 완전성을 밖으로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 즉 완전한 것과 공명할 수 있으면 그것이 곧 완전이다. 그러므로 참된 의미에서의 완전은 ‘공명’ 그 자체이다. 서로 다른 여러가지 가치가 공명하여 하모니를 이루는 것이다.
신은 완전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완전한 것에 신이라는 이름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전체도 완전하다. 인류문명의 진보, 역사의 발전은 개인의 작업이 아니라 인류전체의 공동작업이므로 완전하다.
여기서의 완전은 물론 시공을 초월한 즉 통시적인 의미에서의 완전성이다. 특정한 시대를 잘라내고 발췌하여 말한다면 전혀 완전하지 않다. 즉 21세기의 현대문명은 전혀 완전하지 않다. 그러나 문명은 진보한다. 그 진보의 끝을 감안해서 총체적인 의미로 본다면 완전하다.
결론적으로 시간이냐 공간이냐 혹은 시공을 합쳐서 총체적이고 통시적인 의미에서의 완전성이냐다.
● 작동이 정지한 것 중에 완전한 것은 없다.
● 모든 것은 내버려두면 저절로 작동을 정지한다.
● 완전을 가장하려면 그 순간에 정지시켜야 한다. 곧 죽여야 한다.
그러므로 체 게바라는 살해된다. 완전의 한 전범을 창출하려는 사회의 집단적 의지에 의해. 즉 그들 무리가 일제히 달려들어 예수를 십자가에 달아 매었듯이 그 완전성을 시험하려는 사회의 집단적 의지에 의해 체 게바라는 살해된 것이다.
(시간을 정지시키는 방법으로 반대증거를 은폐하기.. 중세 마녀재판의 방법, 곧 죽이되 죽으면 마녀가 아니고 죽지 않으면 마녀라는 증거가 된다.)
그러므로 정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상은 불완전한 것이며 완전은 인간이 그 정상에 다가섬으로 하여 그 정상의 부족분을 인간이 채워주는 방식으로 그 한 순간에 빛나는 완전성이 성립할 뿐이다. 인간이 그 정상을 떠난다.
정상은 도로 불완전해진 채 인간의 방문을 기다린다.
시간이 정지한 상태에서
● 결론적으로 정상은 있다.
● 그 정상은 여백을 가지고 있다.
● 인간이 그 여백을 채워줄 때 정상은 비로소 완전해진다.
● 그러므로 정상에서는 누구도 그 정상을 보지 못한다.
또한 울림과 떨림이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