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록
read 4557 vote 0 2004.06.13 (11:12:04)

옛날에는 0이 없어도 셈을 했습니다. 서구에서도 0은 근래에 와서 일반화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무(無)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도 사실을 100프로 완벽하게 나타낼 수 있습니다. 즉 ‘없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도 우리는 충분히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단 문장이 길어지고 표현에 애를 먹겠죠.

그런데 덜 발달된 언어를 가진 일부 종족은, 일상적인 의사소통에 있어서도 상당히 애를 먹습니다. 반대로 의사소통의 편의를 위하여 무분별하게 추상적인 개념을 남발하면 의사소통은 될지 몰라도, 거짓된 말을 일삼게 됩니다.

장님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장님에게 뜨거운 물을 찬물이라고 거짓말을 하면 어떻게 될까요? 장님에게 거짓말은 곧 죽음이며 죽음에 가까운 위험입니다.

미개인들도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미개인들에게 거짓말은 곧 실패입니다. 끔찍한 실패이지요. 언어가 덜 발달되어 있는 그들은 의사소통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북미인디언들은 백인 할아버지(대통령)가 거짓말을 해서 천벌을 받을 대망신을 자초하는 경우를 상상할 수 없었다. 약속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한다는 것이 인디언들의 상식. 결국 약속을 믿다가 토지를 약탈당하고 말았다.)

-일본인들은 욕을 하지 않습니다. 욕하다가 사무라이에게 걸리면 칼 맞아 죽으니깐.-

즉 우리들은 의사소통의 편의를 위하여 허구적인 개념, 불분명한 개념을 너무 남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존재는 시스템이며 중심이 있고 주변이 있습니다. 우리는 주변의 어휘와 중심의 어휘를 구분하지 못합니다. 주종이 뒤섞여서 혼선을 빚고 있는 것입니다.

점은 독립적인 개체가 아닙니다. ‘이다/아니다’ 차원에서 구분이 가능하므로 역할이 존재하는 즉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를 이해해야 합니다.

즉 모든 존재자는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는 아는바 없다 할 때의 그 바입니다. 바로 할 때의 바이기도 합니다.

점은 바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있습니다. 그러나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딸려있습니다. 점 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막연하게 있다고 믿는 대부분이 그러합니다.

여기서 명목상의 존재와 실질적인 존재가 문제로 되는데 엄격하게 따지면 실질적인 존재는 거의 없습니다. 즉 우리가 실질적인 존재로 믿고 있는 것들도 대부분 곰곰이 따져보면 명목 상의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명목이 존재하면 곧 존재한다고 말을 해도 됩니다. 점은 명목이 존재합니다. 역할이 존재하고 ‘바’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점이 존재하느냐 아니냐를 논하기 보다는 실질적인 존재가 무엇이냐를 논하는 것이 빠릅니다.(왜냐하면 우리가 존재한다고 철썩같이 믿고 있는 대부분이 실제로는 명목 상의 존재이므로)

“凡所有相 皆是虛妄(범소유상 개시허망)”

즉 우리가 명명하는 것은 어떤 실질적인 존재자에 명명하는 것이 아니라 명목에다 명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명목=명’이죠. 근데 명목은 중복됩니다. 즉 동일한 것을 ‘있다’고도 ‘없지않다’고도 말할 수 있는데 이 때문에 혼선이 일어나는 거죠.

결론적으로 무는 명목상의 존재이며, 유에 의해 중복되는 것이며, 유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동원되는, 빌려쓰는 개념이며, 본질에서 허구이며.. 의사소통의 편의를 위한 하나의 약속이며, 우리가 ‘유’에 대해 이야기 할 때 그 유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며, 유와 별개로 무가 있다고 믿으면 중복된다는 것입니다.

● 소득이 0인 사람
● 빚이 1억인 사람..이 있다면 어느 쪽이 부자일까요?

물론 빚이 1억인 사람이 부자이죠. 빚이 1억이라면 연이율 10프로로 계산했을 때 월 천만원인데 .. 최소한 월 천만원 이상의 소득을 올리고 있는 사람이라는 증거이죠.(그렇지 않을수도 있으나 파산했다는 증거가 없으므로 평균하면 대개 빚을 갚고 있거나 빚을 유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무는 곧 유를 나타낼 때가 더 많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꾸어야 합니다.

● 빚이 1억인 사람 (×)
● 월 천만원씩 은행에 납부하고 있는 사람.(○)




생각노니 ‘우리는 얼마나 존재를 오해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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