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록
read 5186 vote 0 2004.06.07 (21:03:57)

1988년..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화두를 던지고 자결한 탈옥수 지강헌 일당의 사건을 기억하시는지? 최근 무려 세 곳의 영화사에서 동시에 지강헌사건 영화화에 나섰다고 한다. 우연의 일치일까?

‘우연의 일치’는 예로 부터 많았다. 1961년에는 신상옥감독의 성춘향과 홍성기감독의 춘향전이 동시개봉 대결을 벌인 예도 있고, 근래에는 리베라 메와 싸이렌의 소방관 대결, 신장개업과 북경반점, 축제와 학생부군신위의 대결이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우연히 개봉시기가 일치했던 것이다.
그러나 과연 우연일까?

관계자들에 따르면 실화를 소재로 한 ‘실미도’가 의외로 흥행대박을 내면서 ‘실화가 먹힌다’는 판단을 영화관계자들의 뇌리에 심어주었고, 이러한 분석이 영향을 미쳐서 역시 실화였던 지강헌사건에게 관심을 돌리게 했다는 것이다.

내 생각엔 실미도도 실미도지만.. 올드보이가 또 약간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싶다. 왜냐하면 이러한 탈옥수영화는 드라마의 반전 묘미가 떨어지므로 어차피 대작으로 갈 수 밖에 없는데(대규모의 자본을 투입하여 사실감을 극대화 하므로써 내러티브의 빈곤을 만회한다) 최근 올드보이의 성공이 이 작품(지강헌사건)의 예산규모와 관계하여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는 면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실미도는 사실 돈을 무자게 투자한 모험이었고.. (거기서 일이십억 아꼈다가는 영화가 망할 판이었음.) 고로 적정투자규모로 보는 60억 내외의 투자로 200만 이상을 끌어들인다는 계획을 세울 때.. 웰메이드영화인 올드보이의 흥행성적이 상당한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으리라는 계산.

올드보이 총제작비 50억(순제작비 대략 35억 추정) 대략 50억 정도의 예산으로 200만 관객을 노리는 웰메이드-스릴러 장르가 과연 먹히는가? 여기에 역시 비슷한 개념인 살인의 추억을 보태보면.

● 실미도 - 실화가 먹힌다. 웰메이드전략. 투자규모 100억
● 살인의 추억 - 실화가 먹힌다. 웰메이드전략. 투자규모 50억
● 올드보이 - 웰메이드 + 스릴러가 먹힌다. 투자규모 50억

최근 조폭영화의 기세가 한풀 꺾였음을 감안할 때 실미도, 살인의 추억, 올드보이 등의 연이은 성공이.. (이들 영화가 대개 선이 굵은 남성영화였음을 고려할 때) .. 지강헌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사실이지 조폭영화는 의외로 저예산영화임을 알아야 한다. ..과거 유명한 조폭영화들이 대개 10억 내외의 저예산으로 찍어서 홍보비만 무지하게 썼다. 즉 영화사 입장에서는 ‘의외의 히트’였던 것이다.

10억 정도 들여서 찍은 조폭영화가 의외로 히트하자(홍보비 포함 총제작비는 대략 30억 내외) 자신감을 낸 영화사들이 30억 정도 들여서 영화를 찍으면(홍보비 포함 총예산은 5~ 60억) 200만 정도를 동원할 수 있다는 계산이 섰기 때문에 지강헌사건으로 눈을 돌린 것이다.

(스톡홀름 신드롬이 이 영화가 노리는 웰메이드전략의 웰을 보장할 것이라는 기대)

그렇다면 우리는 우연이라고 보지만 하나의 우연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필연이 필요했는지 알만한 것 아닌가?

마찬가지로 과거의 춘향전-성춘향 대결이나 리베라 메-사이렌 대결이나 축제-학생부군신위 대결이나 신장개업-북경반점 대결도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으며 그 당시 영화기획사들이 그 영화를 찍겠다고 마음을 먹게 한 어떤 계기가 그 이전에 있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의 결론.. 하나의 우연을 위해서는 너무나 많은 필연이 필요함메. 고로 우연은 있지만 그 우연 속에는 일정한 정도의 필연이 숨어있음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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