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록

지난 1월 경 모 매체에 쓴 글입니다. 심심한 분만 보세요.

인터넷의 쌍방향성이 문화권력을 해체하는가?
소설이라면 장편과 단편이 있다. 장편과 단편은 원고지 분량만 다른 것이 아니라 이야기구조에서 완전히 별개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 미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작품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다르다.

영화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장편을 각색한 영화와 단편을 각색한 영화는 별개의 형식과 미학을 가져야 한다. 오리지널 시나리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단편의 미학과 형식이 있는가 하면 장편의 미학과 형식이 있다.  

문제는 장편이든 단편이든 극장에서 상영하려면 최소 100분을 채워야 한다는 사실이다. 티켓 한 장의 값은 7천원으로 균일하다. 영화가 단편에 해당되는 소재와 형식을 가졌을 경우 완성도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상영시간 100분을 채우기에는 내러티브의 분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TV에서는 보통 50분 정도로 단편소설을 소화한다. 영화에서는 50짜리를 100분으로 늘여놓으니 재미가 없다.

영화감독들은 이러한 문제를 우회하기 위하여 편법을 사용한다. 지루하게 반복되는 액션장면을 삽입한다든가 혹은 주제와 상관없이 코메디나 멜로의 장면들을 끼워넣는다든가 하는 식이다. 당연히 작품성에서 중대한 결함이 발생한다.   

최근 한국영화가 성공하는 이유는 이 문제가 상당부분 해결되고 있기 때문이다. ‘엽기적인 그녀’ ‘동갑내기 과외하기’ 등 인터넷소설을 각색한 영화가 뜨는 이유는 인터넷작가의 작품들이 본인의 실제 체험을 바탕으로 하는 경우가 많아서 디테일에 강하기 때문이다.

김호식작가가 쓴 ‘엽기적인 그녀’의 경우 막연하고 추상적인 어떤 공간이 아니라 구체적인 장소를 적시하고 있다. 석촌호수나 부평역 등 관객들이 알고 있는 장소를 무대로 한다. 이는 종래의 시나리오들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시도이다.  

김상진감독의 ‘주유소 습격사건’은 단편에 해당하는 소재로 100분을 무리없이 소화한 예가 된다. 박정우작가와 함께 작업한 다른 영화들도 마찬가지다. 박작가는 시나리오 설계에 있어서 자기만의 고유한 노하우를 가진 작가이다.

이들 스타 작가들의 성공이 다른 작가들의 오리지널 시나리오에도 영향을 미쳐서 한국영화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감독들도 그러하다. 단편의 소재로 100분을 거뜬히 소화하는 특별한 감독이 있다. 김기덕감독의 모든 영화와 혹은 홍상수감독의 모든 영화가 그러하다. 이명세감독의 공로도 잊혀져서 안된다. 이들 특별한 감독들이 30분 짜리 단편영화의 소재로 100분을 소화하는 테크닉을 다른 감독들에게 전수하고 있다.

여기서의 문제는 스타일이다. 영화에서 스타일이 중요한 이유는 ‘스타일’이야 말로 단편의 소재로 100분을 채울 수 있는 테크닉이 되기 때문이다.

생각하면 70년대나 80년대에 흥행한 한국영화의 고전적인 스타일은 장편소설에서 그 형식과 미학을 빌어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기승전결이 있고, 감동이 있고, 권선징악의 논리가 있다. 대신 극적인 반전은 없다.

실제로 그 시대에 흥행한 영화들은 장편소설을 각색한 경우가 많았다. 단편소설을 각색하더라도 장편소설처럼 기승전결의 형식을 갖추어 개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장편의 문제는 소재고갈이다. 작품성이 받쳐주는 탄탄한 원작소설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영화가 살려면 단편의 형식과 미학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지나치게 무거운 주제의식과 억지 감동을 버리고 디테일의 잔재미과 극적인 반전으로 승부해야 한다.

최근 저예산을 투입하고도 흥행에 성공하고 있는 한국영화들이 그러하다. 단편에 해당하는 단순한 소재로도 스타일의 혁신과 디테일의 잔재미로 승부하여 100분을 무리없이 소화하고 있다. 그 기법들이 다른 작가와 감독에게 전파되어 상승효과를 일으키면서 한국영화의 전성시대를 열고 있다.

인터넷에는 인터넷의 형식과 미학이 있다
인터넷에도 영화나 소설과 마찬가지로 형식과 미학이 그 본질이 된다. 정보의 분량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종이신문의 칼럼이 원고지 10매 내외로 승부한다면, 인터넷 칼럼은 원고지 30매 이상의 물량공세로 도전한다.

종이신문은 지면의 제한 때문에 깊이있는 분석이 불가능하다. 원고지 10매로 대한민국의 운명을 바꾸려면, 조선일보 김대중주필 방식의 막가파식 글쓰기를 하는 수 밖에 없다. 원고지 10매로 잘못하는 일에 야유를 보내기는 쉽지만 잘하는 일에 격려를 보내기는 어렵다.

원고지 10매로 타인을 헐뜯기는 쉽지만 유의미한 대안을 제시하기는 어렵다.

종이신문이 단편이라면 온라인은 장편이다. 막연하게 시국을 개탄하고 위정자들에게 호통을 치는 식이 아니라, 그 이면에 감추어진 굴절되고 부패한 시스템의 고리들을 낱낱이 폭로하는 것이다.

정치분야에서 심도있는 글쓰기를 제안한 최초의 인물은 강준만으로 볼 수 있다. 그는 종이신문에 지면을 얻지 못한 대신, 단행본 한권으로 응수하는 방법을 썼다. 분량에서 압도할 뿐 아니라 정보의 질에 있어서도 종이신문을 제압할 수 있었다.

그러한 강준만도 지금 한국일보 등에 기고하고 있는 원고지 10매 분량의 칼럼에 있어서는 좋은 글을 내보이지 못하고 있다. 지면의 제한이 논조까지 변하게 한다. 강준만 조차도 얼마간 조선일보의 김대중을 닮아가고 있다.(이 글은 지난 1월에 쓴 글임을 유의하시길..)  

인터넷에서 심도있는 글쓰기는 딴지일보가 처음으로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디벼주마’, ‘알려주마’라는 유행어로 대변되는, 그야말로 뿌리를 뽑아 샅샅이 파헤치는 글쓰기를 선보인 것이다. 오마이뉴스와 서프라이즈의 기사 및 칼럼의 형식도 마찬가지다.

비유하자면 일종의 양질전화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정보량의 양적인 변화가 정보내용의 질적인 비약으로 이어지고 있다.

결론적으로 인터넷이 장편이라면 오프라인은 단편이다. 단편에는 단편의 미학과 형식이 있고 장편에는 장편의 미학과 형식이 있다. 이러한 본질의 파악이 중요하다.

영화가 무거운 주제의식과 깊은 감동으로 대변되는 ‘장편의 시대’에서 반전과 재치와 스릴로 무장한 ‘단편의 시대’로 넘어가고 있다면 인터넷은 그 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풍자와 야유의 시대에서 대안제시와 격려의 시대로 바뀌고 있다.

네티즌은 오프라인 문화권력에 대항하지 않고 초월한다
네티즌들의 온라인 영화평 역시 마찬가지다. 오프라인매체의 영화평은 분량이 빈약하다. 원고지 10매로 한 편의 영화를 평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씨네21은 가끔 심층보도를 하고 있다. 그러나 몇몇 특집에 한정될 뿐이다. 대부분의 영화평에 있어서는 간단히 줄거리를 소개하는 정도의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한다. 20자평도 있고 별점평도 있지만 이런 걸로는 한계가 있다.

인터넷은 다르다. 매트릭스 속편들의 경우 영화내용과 무관하게 네티즌들에 의해 한차원 더 상향된 컨텍스트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예컨대 어떤 네티즌이 프로이드의 관점에서 매트릭스시리즈를 재구성하고 있는 식이다.

실제로 영화가 프로이드의 논리에 따라 제작되었는지는 의문이지만, 네티즌은 논리적으로 완벽하게 매트릭스시리즈를 프로이드의 논법으로 재해석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이러한 작업은 실제 영화와 무관하게 읽는 재미가 있다.

영화가 극장에서 베타버전을 제공하면 네티즌이 업그레이드 버전을 내놓는 식이다.  

오프라인 글쓰기가 권력으로서 계몽의 효과를 가졌다면, 네티즌의 글쓰기는 그 자체로써 하나의 상품이 된다. 오프라인 영화평이 감독과 관객의 중간에서 매개하는 브로커의 역할을 한다면 네티즌은 독립적으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추가상품을 개발하는 식이다.

네티즌의 글이 독자적인 상품성과 생명성을 가진 하나의 작품으로 시장에서 소비되곤 하는 것이다.

인터넷의 쌍방향성은 단순히 기존권력에 대항하는 안티권력으로서 기성권력을 해체하거나 재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상품의 속성 자체를 변화시키는 전혀 새로운 것이다. 오프라인 문화권력과 인터넷 문화권력을 이항대립적 관점에서 보는 것은 곤란하다는 말이다.

인터넷은 오프라인에 맞서지 않고 그것을 초월하여 새로운 지평을 열어 제친다. 이는 세대교체도 아니고 대항권력도 아니다. 새로운 문화시장의 창출이다.

자동차가 철도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철도와 공존하면서 철도를 무력화시키는 것과 같다. 단편소설이 장편소설과 공존하듯이 둘은 공존하면서 넘어선다.

문화정보의 양질전화현상이 나타나다
평론가는 소비자 입장에서 영화를 본다. 교훈과 감동을 줄 수 있는 작품성에서 뛰어난 상품을 선별해준다. 네티즌은 생산자 입장에서 영화를 본다. 영화를 텍스트로 하여 자기만의 컨텍스트를 생산할 수 있는가이다.

관객은 극장에서 영화를 소비한다. 그러나 관람을 마친 후 친구들과의 수다떨기에서는 생산자의 입장으로 바뀐다. 극장에서 어떤 감동과 교훈을 받았는가가 아니라, 그 영화를 소재로 해서 어떻게 그 좌중을 휘어잡을 것인가의 입장에서 영화를 본다. 이건 전혀 다른 것이다.

평론가 입장에서 좋은 영화가 네티즌 입장에서는 시시한 영화가 될 수도 있다. 반대로 평론가가 혹평해 놓은 영화가 네티즌 입장에서 멋진 영화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네티즌과 평론가의 관계는 이항대립적 관계가 아니다. 테제에 대한 안티테제가 아니다. 둘은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네티즌은 기존의 권력을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무시하고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네티즌들의 쌍방향적인 참여는 온전히 바람직하기만 한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현재로서는 네티즌들이 매기는 추천수와 조회수의 방법으로만 정보의 질을 판별하고 있다. 온라인에서도 정보의 질을 판별해주는 전문적인 비평가그룹이 나와주어야 한다.

영화만 평론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네티즌의 컨텍스트도 평론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단편소설과 장편소설이 무리없이 공존하고 있듯이, 온라인과 오프라인은 각자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하며 선의의 경쟁을 벌일 것이다. 이를 변증법적 관점 혹은 이항대립적 관점에서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필자의 지론이다. (월간피플 3월호 www.zur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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