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라. 당신이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행복’이라고 대답하기 쉽지만 거짓되다. 행복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술꾼은 비싼 양주가 행복이고 도박꾼은 잭팟이 행복이고 경마꾼은 999가 행복이다. 단 하나로 압축되어야 한다. 그것은 존엄이다. 무엇인가? 인간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열심히 노력하여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원래 왕자로 태어나는 것이다. 알아야 한다. 왕자가 왕보다 높다는 사실을. 더 멋진 것은 지금은 평범한 백성의 신분에 지나지 않지만 사실은 원래부터 왕자로 태어난 사람임을 무리로부터 확인받는 것이다. 원래의 고귀함을 인정받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다. 그것은 타인으로부터 칭송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부로부터 납득하는 것이다. 타인에 의해 평가된다면 이미 틀렸다. 왕은 타국의 왕과 비교되고 평가되지만 왕자 혹은 공주는 평가되지도 비교되지도 않는다. 인간은 행복을 원하는게 아니다. 불행한 자나 행복을 찾을 뿐이다. 인간은 존엄을 원한다. 왜인가? 유전자의 명령에 의해 원래 그렇게 세팅되어 있다. 이유는 없다. 인간의 본 모습이 그러니까 그런 거다. 인간은 공동체적 존재다. 공동체가 먼저고 개인은 나중이다. 구조론으로 말하면 상부구조가 먼저다. 인간은 언제라도 공동체의 중심이 되고자 한다. 연어가 고향으로 회귀하듯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려 한다. 공동체에서 개인이 나왔으니 공동체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본성이 있는 것이며 그것이 존엄이다. 원래 그러니까 그것을 존중해야 한다. 부분보다 전체가 먼저고, 인식보다 행동이 먼저고, 행복보다 존엄이 먼저다. 문제는 당신이 왕자가 될 수 없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왕궁이 없기 때문이다. 왕의 아들로 태어난다고 해서 왕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세상에 왕자는 없다. 왜냐하면 이미 군주제가 폐지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왕궁은 어디에 있나? 공동체의 중심에 있다. 인간은 자궁에서 나왔으므로 자궁으로 회귀하려고 하고 왕궁에서 나왔으므로 왕궁으로 회귀하려고 한다. 문제는 그 공동체의 중심이 없다는데 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그것을 만들어야 하고 바로 그것을 장악해야 한다. 그리고 지배해야 한다. 실천해야 한다. 행동해야 한다. 원래 그렇게 되어 있다. 그것이 인간이 가슴 깊은 곳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바다. 말로는 돈을 원한다거나 혹은 출세를 원한다거나 혹은 성공을 원한다거나 하지만 그것은 열등감의 표현일 뿐이다. 돈이 없으니까 돈을 원하는 거다. 출세를 못했으니까 출세를 원하는 거다. 이런건 신기루다. 원시시대에는 돈도 없고 출세도 없고 성공도 없었다. 벌거벗고 초원을 뛰어다녔다. 그때 그시절에도 있었던 것으로 이야기해야 한다. 그것이 진짜배기다. 그때도 존엄은 있었다. 공동체의 중심은 있었다. 사람들은 돈을 벌어봤자 결국 남에게 준다. 화폐라는 것은 원래 남에게 주도록 되어 있는 물건이다. 자신이 그것을 쥐고 있는 것은 의미가 없다. 화폐는 시장에 있어야 화폐다. 지갑에 갇혔을 때 그것은 종이다. 인간이 버는 수익의 90퍼센트는 타인에게 준다. 혹은 타인을 위해 쓴다. 혹은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쓴다. 벌어들인 월급의 1/4은 국가에 주고 1/4는 집주인에게 주고 나머지는 부인과 자녀에게 준다. 순수하게 자신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만 자신의 소비다. 좋은 옷을 입어도 그것을 봐주는 것은 타인이다. 좋은 차를 몰아도 그것을 부러워 해주는 것은 타인이다. 인간은 결국 남을 위해 일하는 것이다. 인간이 불행한 이유는 남을 위해 살기 때문이다. 자신을 위해 살아야 한다. 자신이 실제로 얻는 것은 음식과 배설 밖에 없다. 그 음식 또한 제것은 아니다. 남을 위해 일하기 위한 칼로리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인간이 삶에서 얻을 수 있는 확실한 것은 사회적 포지션 밖에 없다. 인간은 돈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줄 수 있는 포지션을 원한다.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주는 위치에 서고자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자리가 조금이라도 공동체의 중심과 가깝기 때문이다. 바로 그곳이 왕궁이기 때문이다. 정작 돈을 손에 쥐게 되면 은행창구에 줘버리거나 가게의 점원에게 줘버린다. 들어오는 속도로 빠져나간다. 인간이 원하는 것은 존엄이며 그것은 높은 자리다. 그 자리는 공동체 내의 모든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그 자리에서 인간이 하는 일은 무언가를 남에게 주는 일이다. 바로 그 자리가 왕자의 자리다. 인간은 누구나 왕자로 태어나기를 원하지만 이미 태어났으므로 태어날 수 없다. 왕궁이 없으므로 왕자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방법은 하나 뿐이다. 첫째 왕궁을 지어야 한다. 둘째 매 순간 새로 태어나야 한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어떻게 왕궁을 지을 수 있는가? 전위에 섬으로써 가능하다. 공동체의 중심이 왕궁이다. 문제는 그 중심이 변한다는데 있다. 날아가는 화살의 무게중심은 가운데보다 약간 앞에 있다. 그곳이 전위다. 그곳이 왕궁이다. 그곳에 서야 한다. 그 중심은 변한다. 왜냐하면 중심은 환경과 상호작용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배의 중심은 키다. 키는 배의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배와 파도 사이의 가운데다. 배와 바다와 둘 사이의 관계와 그 관계의 변화와 그 변화의 중심을 찾아야 한다. 바로 그곳이 왕궁이다. 정답은 상호작용이다. 상호작용해야 하며 그 상호작용의 중심에 서야 한다. 그럴 때 당신은 왕자이다. 사람이 두 발을 교대로 앞으로 내딛으며 걸어가듯이 상호작용의 중심은 전진을 촉발한다. 가만이 제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은 상호작용이 없다. 무조건 발을 앞으로 내밀어 전진해야 상호작용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상호작용은 필연적으로 진보를 낳는다. 그것은 생물의 진화, 조직의 확대, 자본의 팽창으로 나타난다. 진화하지 않는 생물, 확장되지 않은 조직, 팽창하지 않는 자본, 진보하지 않는 역사는 왕궁이 없다. 인간은 무엇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무엇을 하기를 원한다. 된다는 것은 열등감의 보상심리에 불과하다. 한다는 것은 악기가 소리내어 연주하듯이 제 안에 들어차 있는 것을 토해낸다는 거다. 상호작용이다. 인간은 피아노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피아노인 채로 곡을 연주하기를 원한다. 자기 안의 가능성을 펼쳐내기를 원한다. 왕궁은 그 안에 있다. 왕자와 공주도 그 안에 있다. 고귀함이 그 안에 있다. 인간은 바닥에서 태어나 열심히 노력하여 신분상승을 이루어 정상에 올라가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정상에서 태어나 잠시 아랫동네를 여행하여 정상의 자리를 비웠지만 곧 제 자리로 찾아가기 원한다. 상호작용의 모든 것의 중심이다. 반응하지 않을 때 인간은 죽는다. 팔팔하게 살아있어야 한다. 인간이 도박이나 경마에 빠지는 것은 도박의 현장에서 특히 상호작용이 활발하기 때문이다. 왕궁이라고 치기 편하다. 인간이 음악에 빠지는 것은 음악이 가장 상호작용이 활발하기 때문이다. 피아니스트의 손가락과 건반의 상호작용이 매우 민첩하다. 왕궁은 그 안에 있다. 인간이 패션의 유행에 빠지는 것도 그러하다. 한국인들이 특히 정치뉴스에 민감한 것도 그러하다. 사람들이 강남에 입성하려고 노력하는 이유도 그러하다. 그곳에 활발한 상호작용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곳에 존엄이 있고 왕궁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존엄하다는 것은 어떤 일의 첫 번째 원인이 된다는 것이며, 큰 흐름의 대열에서 가장 앞서있다는 것이며 무리를 이끌고 나아간다는 것이며 첫 번째 도미노가 된다는 것이며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이다. 둔감한 자, 상호작용하지 않는 자, 보수적인 자, 안티를 하는 자, 선수가 아닌 심판이 되겠다는 자, 타인과 비교하는 자, 열등감의 보상을 바라는 자, 남에게 인정받으려는 자, 고립으로 만족하는 자는 존엄이 없다. 인간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신과 밀접하게 소통하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것이 자기로부터 시작되고 모든 정보가 자기를 통과해 가며 모든 무대가 자신을 위해 연출되고 모든 결정을 자기가 내리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인간의 뇌가 원래 그렇게 세팅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그 원리에 의해 진화해 왔기 때문이다. 유전자에 그렇게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노력하여 어떻게 되는 것은 참된 깨달음이 아니다. 원래 깨달아서 태어나는 것이 진짜다. 이미 태어나 버렸으므로 원래 깨달아서 태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새로 태어나는 수 밖에 없다. 그 방법은 계속해서 새로운 곡을 연주하는 방법 밖에 없다. 새로운 유행이 만들어지고, 새로운 음악이 태어나고, 새로운 회화가 창조되고, 새로운 스타일이 완성되고, 새로운 시스템이 구축될 때 인간은 새로 태어나며 그 중심에 설 때 인간은 공주 혹은 왕자로 태어난다. 그럴 때 인간의 뇌는 마약과도 같은 쾌락물질을 분비한다. 그리고 인간은 거기에 중독된다. 이미 중독되어 있다. 아기때 재롱을 부려 가족의 주인공이 되었듯이 죽을때까지 인간은 거기서 벗어나지 못한다. 태어날 때 인간은 모두의 관심을 받고 주인공이 되며 평생 거기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 길을 가는 수 밖에 없다. 그것을 실천할 때 인간은 자부심을 얻는다. 세상을 만들어 가는 주인공이 된다는 자부심이다. 그것은 완전성이다. 미추를 가려보는 눈을 얻었을 때 얻는 자신감이다. 엄마품의 아기가 아무런 두려움을 느끼지 않듯이 세상이 만만해 보이는 거다. 그것은 호연지기다. 정상에서 전모를 보는 시선을 얻는다. 자신이 능동적으로 사건의 출발점을 찍을 수 있다. 그럴 때 마음은 태산처럼 의연하다. 왜냐하면 어떤 경우에도 대응할 카드가 마련되기 때문이다. 방향성이 있으면 성공하든 실패하든 결과가 한쪽으로 모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좌절하는 것은 성공하거나 실패해서가 아니라 그 결과가 흩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그 흩어진 것을 주워모으는데 에너지가 손실되기 때문이다. 결과가 한 쪽으로 모인다면 성공하든 실패하든 상관없다. 열 번 찍어서 넘어가지 않으면 열한 번 찍으면 된다. 나무는 쓰러지지 않았어도 데미지는 누적되어 카운트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방향성이다. 방향을 얻을 때 파도를 타는 서퍼처럼 마음은 태연하다. 전위에 서야 전체가 가는 방향성을 얻을 수 있고, 결과를 한 쪽으로 모을 수 있다. 진보에 서야 하고, 첨단에 서야 하고, 정상에 서야 하고, 가장 민감한 곳에 자리잡아야 하고 격렬하게 상호작용해야 한다. 그곳이 왕궁이고 그곳에 서는 자가 공주이고 왕자이고 주인공이다. 왕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자로 태어나는 것이다. 매 순간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매 순간 우주를 새로 설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유전자가 그렇게 명령하기 때문이다. 에너지의 결이 그렇게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가 그러한 임무를 주기 때문이다. 인류가 그렇게 진화해 왔기 때문이다. 자연은 그렇게 이룩되었다. 한 숟갈의 밥으로도 만족할 수 있지만 배고플 때 까지다. 인간이 진정으로 만족하는 것은 세상의 중심과, 그 중심의 진보와 매순간 격렬히 반응하고 새로운 상호작용을 끌어하는 것이다. 세상을 연주하는 것이다.
http://gujoron.com ∑ |
우주라는 무대를 세팅한 것도 우리.
그 속에서 노는 것도 우리.
우리는 갑중의 갑.
우리는 신이다.
존엄의 출발은 여기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