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록
read 5290 vote 1 2003.12.24 (16:02:12)

어떤 책을 읽는 것이 좋을까? 이런 질문을 받을 때 마다 나는 당황스럽다. 백범일지, 전태일평전, 이상의 날개, 생떽쥐뻬리의 어린 왕자,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스탕달의 적과 흑, 톨스토이 민화집. 조지 오웰의 파리와 런던에서의 영락시절 등을 거론해 보지만 이들 책이 다른 책 보다 더 우월하다는 근거는 없다.

읽어야 할 책은 많다. 어렸을 때는 한 10년동안 무인도에서 갖혀서 세상의 책이란 책은 다 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게 그럴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한 때는 하루종일 서점에 죽 치고 앉아서 얌체독서를 하기도 했지만 방랑생활을 하느라 실제로 책 읽을 시간이 거의 없는 편이었다. 책을 사 읽을 형편도 되지 않았고 이상한 거부감 때문에 도서관에 잘 가지도 않았다.

내게 있어서 책은 ‘읽는다’는 개념보다는 ‘발굴한다’는 개념에 가까웠다. 백과사전류, 전집류, 총류 코너에 있는 책이 주된 관심의 대상이었다. 문고본은 당연히 섭렵해야 한다. 그러다보니 특정한 책을 정독하기 보다는 많은 책을 짧은 시간에 대충 훑어야 했다.

내가 손을 대지 않은 책이 없다시피 하지만 제대로 읽은 책도 별로 기억나지 않는다. 방랑을 하면서 읽기 보다는 생각하기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특별히 내 주의를 끈 분야가 있다면 자연과, 환경과, 생물과, 우주에 관한 것이다. 일반인들을 위해 쉽게 쓴 학술서적이거나 사진이 많이 들어가 있는 과학상식백과류의 책들 말이다.

이런 책들은 특별히 유명하지도 않아서 이름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책 이름과 저자를 들어 책을 추천할 수는 없다. 더 큰 문제는 그런 책들을 좋아하긴 했지만 열심히 읽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읽었다기 보다는 샅샅이 뒤졌다고 보아야 한다. 그것은 지하의 유물을 탐사하는 것과 같고 보물찾기를 하는 것과 같다. 구석구석을 탐사하고 속속들이 섭렵했지만 머리 속에 속속 집어넣지는 않았다.

나는 그렇게 무언가를 열심히 수색한 것이다.

세상 어딘가에 완전한 것이 있다. 그것이 자연이든, 우주이든, 생물이든, 신이든, 과학이든 .. 그 어떤 완전한 것에서 우선 안심을 얻고, 평화를 얻고, 자신감을 얻는 것이며.. 거기서 얻은 '손해볼거 없다'는, '더 나빠질 이유는 없다'는 확신 덕분에 정치나 사회에서도 마음 놓고 전진할 수 있는 것이다.

철학이나 정치나 사회나 역사에 너무 매몰되면 오히려 중심을 잃게 된다. 확신을 잃고 자부심을 잃고 약해지는 것이다. 정치는 새옹지마다. 선이 악이 되고, 복이 화가 되고, 승자이 패자가 된다. 그러므로 거기에 매몰되어서 안된다.

북두칠성이 항상 제 자리를 지키고 있듯이, 하늘이 늘 푸르듯이, 태산이 의연하듯이, 태양이 아무리 빛을 낭비하고 있어도 그 밝음이 조금도 훼손되지 않듯이.. 자연과 우주와 진리에 대한 관심이 저를 지탱해주는 근원의 힘이 아닌가 한다.

그런 책들은 특별히 저자의 이름도 기억하기 어렵고 타이틀도 알 수 없는 무명의 책이지만.. 나는 뜻도 모르면서 수학책을 보거나.. 의미도 알지 못하면서 경제원론을 읽거나.. 내용을 기억하지도 않으면서 건축공학책을 보거나 혹은 각종 기기장치의 작동원리에 관한 설명을 해놓은.. 서점 한 귀퉁이에 먼지 뒤집어 쓰고 아무도 읽지 않은 그런 책들에서 가장 많은 것들을 얻었다.

우리가 하루에도 수십번 사용하는 ‘지퍼’는 누가 어떻게 발명했을까? 증기기관차의 압력조절 장치는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 것일까? 자이로스코프의 원리는? 자동차의 차동장치가 균형을 잡아주는 원리는? 로타리엔진이 실린더 엔진에 밀리는 이유는? 스털링엔진의 비밀은? 이런 것들 말이다.

사실 이런 책들은 타인에게 권하기 어려운 것이다. 재미라고는 없기 때문이다. 카센터를 할 사람도 아닌데 자동차의 구조와 원리에 대해 쓴 책을 권할 이유는 없다. 나 자신부터 그런 책을 열심히 찾기는 했지만 열심히 읽었다기 보다는 부지런히 뒤적였다는 것이 더 적합하다.

그렇지만 그런 책들이야 말로 나의 주의를 끌었고 내용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모험가가 보물을 발굴하듯이 혹은 고고학자가 유물을 발굴하듯이 서점 한 귀퉁이에서 깨알 같은 활자로 씌어진 문고본 더미들에서 먼지 뒤집어 쓰고 그런 책들을 열심히 수색하고는 했다.

간혹 보물을 건지기도 한다. 곰팡이가 다 자란 김찬삼의 여행기나 혹은 무슨 이름 없는 누드크로키 강좌나 혹은 무슨 비행기의 역사나 .. 뜻 밖의 횡재가 되는 이런 책들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은 이루 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거기서 무엇을 배운 것은 아니다. 다만 내 관심의 분야가.. 인식의 지평이 약간 더 확대되었을 뿐이다. 아마추어 햄을 하는 사람이 미지의 사람과 교신증의 엽서를 주고 받듯이 이 세상 광대한 지식의 영역 곳곳에 내 작은 흔적을 남겨두는 기쁨이 있는 것이다.

기계장치들은 어떤 경우에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 확실한 진리들에서 어떤 환경의 변화에도 굴하지 않는 힘을 얻을 수 있었다고 본다. 정치, 철학, 사회, 역사들의 지식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거기에는 참과 거짓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 오히려 용기를 잃고 마음이 흐려질 위험이 있는 것이다.

자연과, 과학과, 기기와, 수학과, 물리와, 우주와, 생명과 신에게서 가장 많은 것을 얻었다. 그 내용을 기억하고 이해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확실한 판단기준의 존재가 나를 지켜주는 수호신의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다.

파이터가 벽을 등지고 서듯이, 나는 그러한 분명하고, 확실하고, 엄정한, 객관의 진리들에 의지하려 했던 것이다.

즐거운 크리스마스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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