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당 카페 게시판에서]
매트릭스 안에 빠져서 허우적 거리는 이야기들은 의미없습니다. 걍 기각합니다. 안쳐주는 거지요. 그러므로 알맹이를 보지 말고 껍데기를 봐야 합니다. 줄거리를 따라가지 말고 그 기법을 봐야 합니다. 그 줄거리라는 것은 재미있는 사람에게는 재미있고 재미없는 사람에게는 재미없기 때문입니다.
하여간 동양사상에 있어서 약간의 조예가 있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단어를 10시간 이상 생각해 본 분들은 매트릭스가 별로 재미없을 겁니다. 뻔히 다 아는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근데 한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서구인들 입장에서는 ‘지적 충격’일 수도 있지요.
매트릭스의 재미는 기독교+불교를 섞어놓은데 있습니다. 이는 일원론(기독교)+이원론(불교)로 볼 수 있는데 가상세계가 설계자의 입장에서 보면 일원론이지만, 그 속에 들어있는 캐릭터들 입장에서 보면 이원론이거든요.
기독교는 원래 일원론인데 기독교의 깊은 경지가 그렇다는 거고 하수에 지나지 않는 대부분의 기독교신도들은 이원론의 관점에서 바라봅니다. 예컨대 부시는 흑백과 선악과 정사의 개념으로 기독교에 접근하고 있지요.
불교도 원래는 일원론인데 깨달은 사람의 입장에서 그렇고, 깨닫지 못한 다수의 입장에서 보면 순환논리의 오류에 빠져서 이원론으로 퇴행하곤 합니다. 순환논리에 빠지지 않으려면 ‘계’를 지정하는 방법을 알아야 하는데 그걸 알려주는 것이 구조론입니다. 그러므로 웬만한 선지식이 아니고는 자동으로 순환논리의 오류에 빠져들고 맙니다.
유교도 공자가 학문을 여는 단계에서는 일원론인데 맹자라는 하수가 약간 이원론 비슷하게 만들고 주자가 성리학을 정립하면서 완전히 이원론으로 조져놓았는데 우리나라에서 다시 일원론으로 되돌아가는 경향을 보입니다. 그게 퇴계와 기대승의 논쟁으로부터 시작되는데 후대로 갈수록 일원론이 됩니다. 점점 수준이 높아지는 거지요.
정리하면 사고의 틀에 있어서.
● 다원론 - 대개 무식한 소리임. 요즘 탈근대 운운하는 서양먹물들도 일종의 다원론으로 볼 수 있음. 지진아들이므로 일단 제외.
● 이원론 - 철학적 사유의 시작은 대개 이원론으로 시작이 됨. 선악, 정사, 흑백을 구분하면서부터 사유가 시작되는데 보통 하수들은 여기에 머무름. 사이비 목사들의 수준이 딱 이 경지임.
● 순환론 - 이원론에서 일원론으로 가려다가 옆길로 샌 것인데 일부 도교사상이나 일부 수준 떨어지는 불교사상이 이 그룹에 속함. 넓은 범위에서 보면 이원론의 일종임. 유교주의도 대략 이 수준임. 상대성이론이니 불확정성의 원리니 하는 최근의 유행도 크게 보면 이 수준임.
● 일원론 - 기독교나 불교나 유교나 최고경지는 일원론임, 마르크스나 뉴튼의 사고도 일원론에 가까움. 어느 시대 어떤 철학 어떤 사상이나 최고의 경지는 대개 일원론임. 그 이유는 이원론은 일원론으로 가기 위한 정거장에 불과하다는 사실 쯤은 직관적으로 알 수 있기 때문임.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세상을 보는 안목의 틀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으므로 이원론과 순환론과 일원론 사이를 왔다갔다 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결정적인 상황에서 대개 자기 수준에 맞는 결정을 내리곤 하므로 큰 범위에서 보면 그 사람의 인격 전반을 지배하는 사고의 틀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숭산의 말대꾸놀이나 유지의 섹스타령은 딱보면 이원론입니다. 논하고 자시고 할 가치도 없어요. 사고의 틀 자체가 그 수준인데 무슨 이야기를 더 하겠습니까? 예컨대 어떤 사람이 “섹스의 강박에서 해방되라”고 말하고 있다면 강박(흑) 해방(백)의 이분법이 벌써 적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사람의 이야기는 더 들어볼 가치 조차가 없는 것입니다. 척 하면 삼천리지!
그러므로 정답은 일원론인데 정답을 알고 있다고 해서 누구나 응용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과정을 거쳐서 그 일원에 도착하는가입니다. 옛 고수들이 정답은 알려주면서도 그 정답에 도달하는 과정은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선생이 바람풍 해도 제자들은 바담풍 하는 풍속이 수천년 이어져온 거지요.
어떤 논리이든 이원적인 툴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일원으로 가는 과정에서 하나의 정거장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을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이원은 공간으로 보는 관점이고 일원은 인과로 보는 관점입니다.
● 이원론 - 귀족들은 팔이 가늘고 힘도 없는데 머리만 좋으므로 정신노동을 해야하고 상놈들은 팔뚝이 굵으므로 육체노동을 해야한다.
● 일원론 - 귀족들은 일을 안하고 놀기만 하니 팔이 가늘어졌고 상놈들은 열심히 일을 해서 팔뚝이 굵어졌다. 원래는 다 똑같다.
여기서 원인과 결과로 보는 관점이 일원론입니다. 원인과 결과 사이에는 시간이 흐릅니다. 유교의 이기이원론이니 이기일원론이니 하는 것들도 다 이거에요. 결론은 원인과 결과 그리고 시간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원인과 결과로 보는 관점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계’의 설정을 잘해야 합니다. 집합이냐 원소냐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하는 건데 공간을 보지 말고 시간을 봐야 약간 보입니다. 근데 인간들이 죽어보자고 공간만 쳐다보므로 안보이는 겁니다.
다시 매트릭스로 돌아가서 매트릭스 1편은 기독교적 이원론 곧 흑백, 정사, 선악을 극복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어요. 기계와 인간을 대비시키고 기계는 악, 인간은 선으로 설정했는데 졸라 하수들의 방식입니다. 동양적 관점을 양념으로 끼워넣기는 했지만 그 정수에는 다다르지 못하고 순전히 껍데기뿐입니다.
매트릭스 2편은 보다가 잤기 때문에 뭐라고 말하기 어렵지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헐리우드의 전통적 방식인 우리편(선) 대 나쁜놈(악)이 한판 붙어서 우리편은 이기고 나쁜놈은 죽는다는 이원론을 극복하려고 노력한 점이 상당하다고 합니다. 근데 영화 그 자체도 이야기를 풀어가다가 중간에 끝이 나버렸다고 하니 3편을 봐야 평론을 할 수 있겠지요.
어쨌든 이원론을 극복하고 일원론으로 귀일하기 위해서는 대단히 정교한 테크닉이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건 미학적인 일관성을 담보하는 방법인데 다양한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목표를 지니고 각자 자기 자신의 위치에서 각자 자기자신의 미학적 완성(자기다움)으로 나아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하모니가 이루어져서 공동체의 단일한 목적이 달성되는 결과가 도출되었다는 결론이 나와야 합니다. 이건 졸라 고수들만 할 수 있는 방법이재요.
근데 제목만 놓고 본다면 매트릭스 레볼루션..레볼루션은 마르크스의 논리인데 마르크스의 논리가 원래 예수의 논리이고 예수의 논리가 원래 일원론이므로 일원론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영화가 순환론의 미로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걸로 보여지는데 과연 그 미로에서 탈출구를 찾아서 최종적으로 일원에 도달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왜? 졸라 정교한 테크닉이 구사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작은 그릇에 큰 그릇을 담을 수는 없습니다. 근데 하수들이 보면 순환론이 이원론보다 커보이고 이원론이 일원론보다 커보입니다. 고로 고수들만이 일원론의 그릇 안에 이원론과 순환론을 담아낼 수 있습니다. 어지간한 고수가 아니고는 퍼질러놓고 오사마리가 안된다는 야그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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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예수의 일원론 ..
여기서 일원론, 이원론들은 흔히 논쟁되고 있는 관념으로서의 이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의 틀을 의미합니다. 예컨대 일원론을 믿는 사람들도 실제로는 대부분 이원론의 방법으로 사고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일원론의 틀로 사고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매사를 인과논리의 관점에서 보는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에서 예수를 시험하는 무리들의 이야기가 여러번 나오는데 그때마다 예수는 말재주를 피워 슬기롭게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일원론적 사고의 틀을 가지고 있는자 만이 할 수 있는 대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리들은 예수에게 흑과 백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하지요. 예수가 흑을 선택하면 백으로 공격하고 백을 선택하면 흑으로 공격할 심산입니다. 예수는 흑도 백도 아닌 제 3의 선택을 하는데 그 제 3 안에는 흑과 백이 다 들어있기 때문에 응수가 불능입니다.
여기서 응수한다..곧 말대꾸한다..곧 상대방이 어떤 형태로든 반박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면 그건 선문답에서 깨지는 겁니다. 선문답에서 이기려면 상대방이 응수할 수 없는, 어떤 형태로도 반박할 수 없는 답을 제시해야 하고, 그것은 흑과 백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흑도 백도 아니면서 흑과 백이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시간의 함수 뿐입니다. 즉 인과로 보면 그 내부에 흑과 백이 다 있으면서 흑도 백도 회색도 아닌 제 3의 것이지요. 공간의 모순을 시간의 순서로 해결하는 것입니다. 모든 충돌은 공간에서 일어나고 모든 해법은 시간 곧 순서에서 얻어집니다.
매트릭스 안에 빠져서 허우적 거리는 이야기들은 의미없습니다. 걍 기각합니다. 안쳐주는 거지요. 그러므로 알맹이를 보지 말고 껍데기를 봐야 합니다. 줄거리를 따라가지 말고 그 기법을 봐야 합니다. 그 줄거리라는 것은 재미있는 사람에게는 재미있고 재미없는 사람에게는 재미없기 때문입니다.
하여간 동양사상에 있어서 약간의 조예가 있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단어를 10시간 이상 생각해 본 분들은 매트릭스가 별로 재미없을 겁니다. 뻔히 다 아는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근데 한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서구인들 입장에서는 ‘지적 충격’일 수도 있지요.
매트릭스의 재미는 기독교+불교를 섞어놓은데 있습니다. 이는 일원론(기독교)+이원론(불교)로 볼 수 있는데 가상세계가 설계자의 입장에서 보면 일원론이지만, 그 속에 들어있는 캐릭터들 입장에서 보면 이원론이거든요.
기독교는 원래 일원론인데 기독교의 깊은 경지가 그렇다는 거고 하수에 지나지 않는 대부분의 기독교신도들은 이원론의 관점에서 바라봅니다. 예컨대 부시는 흑백과 선악과 정사의 개념으로 기독교에 접근하고 있지요.
불교도 원래는 일원론인데 깨달은 사람의 입장에서 그렇고, 깨닫지 못한 다수의 입장에서 보면 순환논리의 오류에 빠져서 이원론으로 퇴행하곤 합니다. 순환논리에 빠지지 않으려면 ‘계’를 지정하는 방법을 알아야 하는데 그걸 알려주는 것이 구조론입니다. 그러므로 웬만한 선지식이 아니고는 자동으로 순환논리의 오류에 빠져들고 맙니다.
유교도 공자가 학문을 여는 단계에서는 일원론인데 맹자라는 하수가 약간 이원론 비슷하게 만들고 주자가 성리학을 정립하면서 완전히 이원론으로 조져놓았는데 우리나라에서 다시 일원론으로 되돌아가는 경향을 보입니다. 그게 퇴계와 기대승의 논쟁으로부터 시작되는데 후대로 갈수록 일원론이 됩니다. 점점 수준이 높아지는 거지요.
정리하면 사고의 틀에 있어서.
● 다원론 - 대개 무식한 소리임. 요즘 탈근대 운운하는 서양먹물들도 일종의 다원론으로 볼 수 있음. 지진아들이므로 일단 제외.
● 이원론 - 철학적 사유의 시작은 대개 이원론으로 시작이 됨. 선악, 정사, 흑백을 구분하면서부터 사유가 시작되는데 보통 하수들은 여기에 머무름. 사이비 목사들의 수준이 딱 이 경지임.
● 순환론 - 이원론에서 일원론으로 가려다가 옆길로 샌 것인데 일부 도교사상이나 일부 수준 떨어지는 불교사상이 이 그룹에 속함. 넓은 범위에서 보면 이원론의 일종임. 유교주의도 대략 이 수준임. 상대성이론이니 불확정성의 원리니 하는 최근의 유행도 크게 보면 이 수준임.
● 일원론 - 기독교나 불교나 유교나 최고경지는 일원론임, 마르크스나 뉴튼의 사고도 일원론에 가까움. 어느 시대 어떤 철학 어떤 사상이나 최고의 경지는 대개 일원론임. 그 이유는 이원론은 일원론으로 가기 위한 정거장에 불과하다는 사실 쯤은 직관적으로 알 수 있기 때문임.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세상을 보는 안목의 틀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으므로 이원론과 순환론과 일원론 사이를 왔다갔다 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결정적인 상황에서 대개 자기 수준에 맞는 결정을 내리곤 하므로 큰 범위에서 보면 그 사람의 인격 전반을 지배하는 사고의 틀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숭산의 말대꾸놀이나 유지의 섹스타령은 딱보면 이원론입니다. 논하고 자시고 할 가치도 없어요. 사고의 틀 자체가 그 수준인데 무슨 이야기를 더 하겠습니까? 예컨대 어떤 사람이 “섹스의 강박에서 해방되라”고 말하고 있다면 강박(흑) 해방(백)의 이분법이 벌써 적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사람의 이야기는 더 들어볼 가치 조차가 없는 것입니다. 척 하면 삼천리지!
그러므로 정답은 일원론인데 정답을 알고 있다고 해서 누구나 응용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과정을 거쳐서 그 일원에 도착하는가입니다. 옛 고수들이 정답은 알려주면서도 그 정답에 도달하는 과정은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선생이 바람풍 해도 제자들은 바담풍 하는 풍속이 수천년 이어져온 거지요.
어떤 논리이든 이원적인 툴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일원으로 가는 과정에서 하나의 정거장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을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이원은 공간으로 보는 관점이고 일원은 인과로 보는 관점입니다.
● 이원론 - 귀족들은 팔이 가늘고 힘도 없는데 머리만 좋으므로 정신노동을 해야하고 상놈들은 팔뚝이 굵으므로 육체노동을 해야한다.
● 일원론 - 귀족들은 일을 안하고 놀기만 하니 팔이 가늘어졌고 상놈들은 열심히 일을 해서 팔뚝이 굵어졌다. 원래는 다 똑같다.
여기서 원인과 결과로 보는 관점이 일원론입니다. 원인과 결과 사이에는 시간이 흐릅니다. 유교의 이기이원론이니 이기일원론이니 하는 것들도 다 이거에요. 결론은 원인과 결과 그리고 시간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원인과 결과로 보는 관점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계’의 설정을 잘해야 합니다. 집합이냐 원소냐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하는 건데 공간을 보지 말고 시간을 봐야 약간 보입니다. 근데 인간들이 죽어보자고 공간만 쳐다보므로 안보이는 겁니다.
다시 매트릭스로 돌아가서 매트릭스 1편은 기독교적 이원론 곧 흑백, 정사, 선악을 극복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어요. 기계와 인간을 대비시키고 기계는 악, 인간은 선으로 설정했는데 졸라 하수들의 방식입니다. 동양적 관점을 양념으로 끼워넣기는 했지만 그 정수에는 다다르지 못하고 순전히 껍데기뿐입니다.
매트릭스 2편은 보다가 잤기 때문에 뭐라고 말하기 어렵지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헐리우드의 전통적 방식인 우리편(선) 대 나쁜놈(악)이 한판 붙어서 우리편은 이기고 나쁜놈은 죽는다는 이원론을 극복하려고 노력한 점이 상당하다고 합니다. 근데 영화 그 자체도 이야기를 풀어가다가 중간에 끝이 나버렸다고 하니 3편을 봐야 평론을 할 수 있겠지요.
어쨌든 이원론을 극복하고 일원론으로 귀일하기 위해서는 대단히 정교한 테크닉이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건 미학적인 일관성을 담보하는 방법인데 다양한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목표를 지니고 각자 자기 자신의 위치에서 각자 자기자신의 미학적 완성(자기다움)으로 나아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하모니가 이루어져서 공동체의 단일한 목적이 달성되는 결과가 도출되었다는 결론이 나와야 합니다. 이건 졸라 고수들만 할 수 있는 방법이재요.
근데 제목만 놓고 본다면 매트릭스 레볼루션..레볼루션은 마르크스의 논리인데 마르크스의 논리가 원래 예수의 논리이고 예수의 논리가 원래 일원론이므로 일원론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영화가 순환론의 미로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걸로 보여지는데 과연 그 미로에서 탈출구를 찾아서 최종적으로 일원에 도달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왜? 졸라 정교한 테크닉이 구사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작은 그릇에 큰 그릇을 담을 수는 없습니다. 근데 하수들이 보면 순환론이 이원론보다 커보이고 이원론이 일원론보다 커보입니다. 고로 고수들만이 일원론의 그릇 안에 이원론과 순환론을 담아낼 수 있습니다. 어지간한 고수가 아니고는 퍼질러놓고 오사마리가 안된다는 야그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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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예수의 일원론 ..
여기서 일원론, 이원론들은 흔히 논쟁되고 있는 관념으로서의 이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의 틀을 의미합니다. 예컨대 일원론을 믿는 사람들도 실제로는 대부분 이원론의 방법으로 사고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일원론의 틀로 사고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매사를 인과논리의 관점에서 보는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에서 예수를 시험하는 무리들의 이야기가 여러번 나오는데 그때마다 예수는 말재주를 피워 슬기롭게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일원론적 사고의 틀을 가지고 있는자 만이 할 수 있는 대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리들은 예수에게 흑과 백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하지요. 예수가 흑을 선택하면 백으로 공격하고 백을 선택하면 흑으로 공격할 심산입니다. 예수는 흑도 백도 아닌 제 3의 선택을 하는데 그 제 3 안에는 흑과 백이 다 들어있기 때문에 응수가 불능입니다.
여기서 응수한다..곧 말대꾸한다..곧 상대방이 어떤 형태로든 반박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면 그건 선문답에서 깨지는 겁니다. 선문답에서 이기려면 상대방이 응수할 수 없는, 어떤 형태로도 반박할 수 없는 답을 제시해야 하고, 그것은 흑과 백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흑도 백도 아니면서 흑과 백이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시간의 함수 뿐입니다. 즉 인과로 보면 그 내부에 흑과 백이 다 있으면서 흑도 백도 회색도 아닌 제 3의 것이지요. 공간의 모순을 시간의 순서로 해결하는 것입니다. 모든 충돌은 공간에서 일어나고 모든 해법은 시간 곧 순서에서 얻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