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하나의 사상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있다. 최초에 한 사람의 스승이 나타나 하나의 화두(개념)를 던진다. 그들은 소크라테스이기도 하고, 예수이기도 하고, 공자이기도 하며, 노자이기도 하고, 석가이기도 하다.
이때 제자들이 연이어 나타나 그 던져진 화두(개념)에 논리를 부여하고 체계를 발달시킨다. 단계적으로 진화하여 마침내 하나의 학문으로 인정받게 된다. 소크라테스의 화두에 논리를 부여한 사람은 플라톤이고 플라톤의 논리에 체계를 부여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이것이 학문이 진화하는 공식이다.
주역이 뉴튼의 고전역학 보다 뛰어난 점은 고전역학에 기초한 결정론적 세계관이 상대적으로 『알갱이의 세계관』에 가까운데 비해 주역의 세계관은 더 『관계망의 세계관』에 가깝다는 점이다.
중용은 서로 다른 둘 이상의 공존상태를 다루고 있다. 그것은 음과 양, 천과 지의 개념으로 부터 출발한다. 이 둘의 우선순위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이다. 성리학에 와서 하늘과 땅, 위와 아래, 군주와 백성,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하는 2분법적 구분이 유행되었다.
이는 주역의 한계이자 유교주의의 실패이다. 초기의 성리학은 세상의 근원 하나의 알갱이로 파악한 것이다. 그러나 주역의 논리는 그 이후로도 단계적으로 발달해 왔다. 후대에 와서 상당부분 2분법적 사고를 극복하고 있다.
강희제가 주역으로 부터 배운 것
청나라의 강희제가 남긴 문집을 참고하여 보면 그는 주역을 점치는 기술 보다는 도덕적 각성의 수단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강희제가 배운 주역의 정신은 『항상 뒤집어보라. 항상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라』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경험적으로 터득된 물리적 등방성의 원리, 대칭성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다.
뉴튼은 그 경험에 논리를 부여하여 체계와 검증으로 발달시켰고 주역은 도덕적 훈화로만 받아들였다. 이 부분은 중국에서 논리학이 발달하지 못한데 원인이 있다.
강희제, 건륭제, 옹정제로 이어지는 청나라의 전성시기에 나타난 절묘한 통치술은 적을 타도하기 보다 『견제와 균형의 묘』를 살리는 주역의 가르침을 실천한 바가 된다.
중국이 다민족을 포용하면서 거대한 몸집을 유지하고 5천년의 역사를 이어간 비결이 여기에 있다. 전쟁광 부시대통령이 주역을 한줄이라도 배웠다면 일찌감치 생각을 바꿨을 것이다.
물론 주역은 낮은 단계의 인식이다. 주역의 기본 개념인 천하(天下)의 개념을 공간적 의미로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시간적 의미로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공간적 의미로 받아들일 때 음양(陰陽)은 상하관계, 남존여비로 퇴행하며 이는 전제군주의 권위주의적인 통치술로 이용된다. 반면 시간적 의미로 받아들일 때 음양의 조화는 부단한 역설과 반전을 의미하게 된다.
강희제가 주역에서 배웠다는 『항상 뒤집어 보라. 항상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라』는 가르침은 상대적으로 시간적 의미로의 해석이다. 공간에서 보면 하늘은 늘 높고 땅은 늘 낮다. 하늘과 땅의 위상이 뒤집어지는 일은 결단코 없다.
그러나 시간에서는 얼마든지 역전된다. 원인이 결과가 되고 결과는 다시 원인이 된다. 주역은 시간상에서의 변증법적 역전을 가르치고 있다. 음과 양은 시간 상에서 반전된다. 음이 양이되고 양이 음이 된다. 무궁한 조화가 거기서 일어난다.
유교주의가 상하관계를 위주로 하는 수직적 질서를 가르키면서도, 어느 면에서는 견제와 균형, 조정과 제어를 말하는 뜻은 시간성의 강조에 있다.
이 유교주의의 각별한 시간성에 특별히 주목한 유학자는 나라를 옳게 다스려 왔고 이를 깨우치지 못한 유학자는 권위주의를 강조하여 동양사의 고답적인 정체(停滯)를 낳았다.
성리학과 양명학의 차이는 성(性)과 심(心)의 차이이다.
불교철학의 깊음에도 불구하고 유가가 더 동양적 전통의 핵심에 놓이는 이유는 유가가 불가를 받아들일 수 있을 뿐, 불가가 유가를 받아들이지는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희의 성리학은 일정부분 불교의 형이상학을 받아들이고 있다. 왕수인의 양명학도 마찬가지다. 반면 불교가 유교의 합리주의적 측면을 받아들여 탈종교화한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성리학과 양명학의 차이는 성(性)과 심(心)의 차이에 있다. 성(性)은 불변의 요소를 가리키고 심(心)은 가변적인 운동을 의미한다. 성은 딱딱한 알갱이를 의미하고 심은 부드러운 네트워크를 의미한다.
성은 본래 있는 것이고 마음은 상황에 따라 흘러가는 것이다. 성은 남자와 여자, 군자와 소인처럼 수직적으로 차별되는 것이고, 심은 상황에 따라 모습을 바꾸므로 그러한 구분이 적용될 수 없다.
오히려 심(心)은 그 구분을 무너뜨린다. 그러므로 심을 강조하는 양명학은 더 대중적이고 성을 강조하는 성리학은 더 권위주의적이다. 심은 어느 면에서 노자의 무위를 수용하고 있다.
유교가 성리학에서 양명학으로 발달하는 과정은 불교가 소승에서 대승으로 발달하는 패턴과 닮아있다. 또 위빠사나에서 간화선으로, 돈오점수에서 돈오돈수로 발전하는 것과도 같은 맥락이다.
석가의 위빠사나는 네가지 방법으로 구분을 짓고 있다. 달마의 간화선은 그러한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다. 돈오점수 역시 단계적인 구분짓기다. 돈오돈수는 그 구분을 부인하고 있다.
고대의 이원론이든, 이기이원론이든, 위빠사나든, 돈오점수든, 남존여비든, 음양론이든, 오행론이든, 마르크스의 계급론이든 모든 종류의 『이름붙여 구분짓기』는 공간적 구분에 의지하는 원자론으로 부터 발상법을 빌려오고 있다.
반면 기독교의 일원론이든, 율곡의 이기일원론이든, 성철의 돈오돈수이든, 뉴튼의 만유인력이든 모든 종류의 일원론은 이원론의 원자론적 발상을 부인하고 공간에서 시간으로 전환하고 있다. 관계망의 세계관이며 네트워크적인 발상법이다.
중국불교가 경전 위주의 권위주의적인 교학에서 좀 더 대중적인 참선 위주의 선불교로 발전하고 또 승려위주의 소승불교에서 대중이 참여하는 대승불교로 발전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극복하여야 할 구분하여 이름짓기
중요한 것은 불교와 유교와 마르크스주의가 공히 알갱이의 세계관에서 관계망의 세계관으로 이행하는 동일한 원리와 방향과 패턴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본질은 『대중과의 직접 소통』이다. 이유가 있다. 어떤 학문이 처음 국경과 민족과 언어라는 장벽을 넘어 전파할 때는 이를 용이하게 넘겨줄 중간집단을 필요로 한다.
곧 사(士) 계급이다. 백성과 왕을 연결하는 중간집단이 된다. 그러나 학문이 발전하여 그 국경을 넘고, 민족을 넘고, 언어를 넘었을 때 그 장벽이 해체되었을 때는 그 사(士) 계급이 불필요하게 된다. 이때 대중은 학문과의 직접 소통을 원한다.
이상적인 치안은 경찰이 필요없는 사회이다. 이상적인 의료는 의사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이다. 마찬가지로 이상적인 학문은 직업 학자가 존재하지 않는 시대이다.
21세기 현대문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이 시대의 유토피아는 대중과의 직접적인 소통가능성에서 찾아져야 한다.
요는 그러한 본질의 문제 곧 대중과의 소통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동양정신이 서구의 근대과학보다 훨씬 더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퇴계의 이기이원론과 기대승의 이기일원론
퇴계의 이기이원론은 위와 아래를 구분하여 서열을 짓는 것이다. 퇴계에 있어 이(理)는 곧 사(士)계급이요 기(氣)는 그들의 가르침을 따라야 하는 민중이다.
이는 남자요 기는 여자다. 이는 하늘이고 기는 땅이다. 주류질서 위주의 차별과 구분이다. 그러나 동양적 결론은 최종적으로는 일원론이다.
유교도 불교도 최종적으로는 일원론으로 결론지어졌다. 또한 여기에는 명백히 이유가 있다. 어떤 것이 둘로 나뉘어지면 그 둘을 통일할 제 3의 하나가 더 필요하게 된다. 그러므로 어떤 논의든 토론을 계속 진행하여가면 결국은 일원론이 승리하게 되어있다.
그 일원의 하나는 대중이다. 궁극적으로는 대중주의가 승리하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모든 학문은 궁극적으로 소통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인터넷의 개방성이 이용자와 이용자를 직접 연결시키듯이, 대중은 직접적인 소통을 원한다. 정치, 경제, 문화, 사회를 막론하고 최종적으로는 중간에 끼어드는 브로커를 배제하고 직접 소통하기를 원한다.
상대적으로 기일원론에 가까운 기대승과 율곡의 사상은 퇴계에 비해 더 대중친화적이고 현실참여적이다. 뒤로 갈수록 이러한 경향은 더욱 노골화된다.
훗날의 화담 서경덕과 혜강 최한기에 있어서는 명백히 기일원론으로 정리된다. 유교가 애초의 정통과 이단을 가르는 2분법적 차별주의를 극복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 역시 마찬가지다. 돈오점수와 돈오돈수의 차이 역시 이원론에서 일원론으로, 공간적 구분에서 시간적 통합으로의 발전패턴을 따르고 있는데는 어김이 없다.
한국에서 성리학은 퇴계의 이기이원론으로 출발하여 율곡의 이기이원적일원론 그리고 서경덕의 최종적인 이기일원론으로 진보해 왔다. 이것이 한국 유교주의 주류의 흐름이다.
이는 차별주의에서 부분차별 그리고 통합으로의 발전이다. 요는 주류와 비주류를 통일하여 차별주의에서 대중주의로 나아가는 것이 역사가 진행하는 방향과 일치하며 더 진보적인 방향이라는 점이다.
유교도 불교도 동일하게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21세기의 대중문화 역시 클래식에서 팝으로, 차별에서 참여로 발전하고 있다. 이는 역사가 진보하는 필연적인 법칙이다.
모든 진보는 시간성의 이해와 수용이다.
유교와 불교가 공히 이러한 방향으로 발전하는 이유는 시간성의 대입 때문이다. 퇴계의 이기이원론적 입장은 작용과 수용, 지배와 피지배, 위와 아래, 남자와 여자, 천(天)과 지(地)를 공간적 개념으로 구분하여 보는 시각이다.
성리학의 성(性)리학의 성(性)은 요소이며 알갱이이고 원자이며 이는 구분되는 것이다. 즉 다른 것이다. 성리학은 처음 다름에 주목하였다. 중화와 만이, 문명과 야만, 남자와 여자, 양과 음의 다름에 주목한 것이다.
반면 율곡의 기발이승일도설은 이를 원인으로 보고 기를 결과로 보는 시각이다. 여기서 원인과 결과 사이에는 명백히 시간이 개입한다. 이 시간에 주목하여야 한다.
동일한 하나의 개체가 시간 상의 진전에 따라 위가 되기도 하고, 아래가 되기도 하며, 남자가 되기도 하고, 여자가 되기도 하며, 음이 되기도 하고 양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원인과 결과는 본질에서 같은 것이어야 한다. 원인 곧 결과다. 색즉시공이다. 공즉시색이다. 이는 다름이 아닌 같음에 주목한 바 된다.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이와 기는 결국 하나로 통합될 수 밖에 없다.
이는 모든 면에서 그러하다. 물리학에서도 마찬가지다. 심지어는 원자론에서도 마찬가지다. 산소와 수소 혹은 헬륨이나 탄소 등의 구분도 애초에는 『원초적 다름』으로 파악되었다.
그러나 이론물리학의 최종결론은 통일장이론으로 정해져 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같음에의 주목이다. 원자량의 차이에 따라 구분될 뿐 산소나 수소나 헬륨이나 그 바탕은 같음이 확인되고 있다.
하나의 사상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있다. 최초에 한 사람의 스승이 나타나 하나의 화두(개념)를 던진다. 그들은 소크라테스이기도 하고, 예수이기도 하고, 공자이기도 하며, 노자이기도 하고, 석가이기도 하다.
이때 제자들이 연이어 나타나 그 던져진 화두(개념)에 논리를 부여하고 체계를 발달시킨다. 단계적으로 진화하여 마침내 하나의 학문으로 인정받게 된다. 소크라테스의 화두에 논리를 부여한 사람은 플라톤이고 플라톤의 논리에 체계를 부여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이것이 학문이 진화하는 공식이다.
주역이 뉴튼의 고전역학 보다 뛰어난 점은 고전역학에 기초한 결정론적 세계관이 상대적으로 『알갱이의 세계관』에 가까운데 비해 주역의 세계관은 더 『관계망의 세계관』에 가깝다는 점이다.
중용은 서로 다른 둘 이상의 공존상태를 다루고 있다. 그것은 음과 양, 천과 지의 개념으로 부터 출발한다. 이 둘의 우선순위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이다. 성리학에 와서 하늘과 땅, 위와 아래, 군주와 백성,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하는 2분법적 구분이 유행되었다.
이는 주역의 한계이자 유교주의의 실패이다. 초기의 성리학은 세상의 근원 하나의 알갱이로 파악한 것이다. 그러나 주역의 논리는 그 이후로도 단계적으로 발달해 왔다. 후대에 와서 상당부분 2분법적 사고를 극복하고 있다.
강희제가 주역으로 부터 배운 것
청나라의 강희제가 남긴 문집을 참고하여 보면 그는 주역을 점치는 기술 보다는 도덕적 각성의 수단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강희제가 배운 주역의 정신은 『항상 뒤집어보라. 항상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라』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경험적으로 터득된 물리적 등방성의 원리, 대칭성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다.
뉴튼은 그 경험에 논리를 부여하여 체계와 검증으로 발달시켰고 주역은 도덕적 훈화로만 받아들였다. 이 부분은 중국에서 논리학이 발달하지 못한데 원인이 있다.
강희제, 건륭제, 옹정제로 이어지는 청나라의 전성시기에 나타난 절묘한 통치술은 적을 타도하기 보다 『견제와 균형의 묘』를 살리는 주역의 가르침을 실천한 바가 된다.
중국이 다민족을 포용하면서 거대한 몸집을 유지하고 5천년의 역사를 이어간 비결이 여기에 있다. 전쟁광 부시대통령이 주역을 한줄이라도 배웠다면 일찌감치 생각을 바꿨을 것이다.
물론 주역은 낮은 단계의 인식이다. 주역의 기본 개념인 천하(天下)의 개념을 공간적 의미로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시간적 의미로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공간적 의미로 받아들일 때 음양(陰陽)은 상하관계, 남존여비로 퇴행하며 이는 전제군주의 권위주의적인 통치술로 이용된다. 반면 시간적 의미로 받아들일 때 음양의 조화는 부단한 역설과 반전을 의미하게 된다.
강희제가 주역에서 배웠다는 『항상 뒤집어 보라. 항상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라』는 가르침은 상대적으로 시간적 의미로의 해석이다. 공간에서 보면 하늘은 늘 높고 땅은 늘 낮다. 하늘과 땅의 위상이 뒤집어지는 일은 결단코 없다.
그러나 시간에서는 얼마든지 역전된다. 원인이 결과가 되고 결과는 다시 원인이 된다. 주역은 시간상에서의 변증법적 역전을 가르치고 있다. 음과 양은 시간 상에서 반전된다. 음이 양이되고 양이 음이 된다. 무궁한 조화가 거기서 일어난다.
유교주의가 상하관계를 위주로 하는 수직적 질서를 가르키면서도, 어느 면에서는 견제와 균형, 조정과 제어를 말하는 뜻은 시간성의 강조에 있다.
이 유교주의의 각별한 시간성에 특별히 주목한 유학자는 나라를 옳게 다스려 왔고 이를 깨우치지 못한 유학자는 권위주의를 강조하여 동양사의 고답적인 정체(停滯)를 낳았다.
성리학과 양명학의 차이는 성(性)과 심(心)의 차이이다.
불교철학의 깊음에도 불구하고 유가가 더 동양적 전통의 핵심에 놓이는 이유는 유가가 불가를 받아들일 수 있을 뿐, 불가가 유가를 받아들이지는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희의 성리학은 일정부분 불교의 형이상학을 받아들이고 있다. 왕수인의 양명학도 마찬가지다. 반면 불교가 유교의 합리주의적 측면을 받아들여 탈종교화한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성리학과 양명학의 차이는 성(性)과 심(心)의 차이에 있다. 성(性)은 불변의 요소를 가리키고 심(心)은 가변적인 운동을 의미한다. 성은 딱딱한 알갱이를 의미하고 심은 부드러운 네트워크를 의미한다.
성은 본래 있는 것이고 마음은 상황에 따라 흘러가는 것이다. 성은 남자와 여자, 군자와 소인처럼 수직적으로 차별되는 것이고, 심은 상황에 따라 모습을 바꾸므로 그러한 구분이 적용될 수 없다.
오히려 심(心)은 그 구분을 무너뜨린다. 그러므로 심을 강조하는 양명학은 더 대중적이고 성을 강조하는 성리학은 더 권위주의적이다. 심은 어느 면에서 노자의 무위를 수용하고 있다.
유교가 성리학에서 양명학으로 발달하는 과정은 불교가 소승에서 대승으로 발달하는 패턴과 닮아있다. 또 위빠사나에서 간화선으로, 돈오점수에서 돈오돈수로 발전하는 것과도 같은 맥락이다.
석가의 위빠사나는 네가지 방법으로 구분을 짓고 있다. 달마의 간화선은 그러한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다. 돈오점수 역시 단계적인 구분짓기다. 돈오돈수는 그 구분을 부인하고 있다.
고대의 이원론이든, 이기이원론이든, 위빠사나든, 돈오점수든, 남존여비든, 음양론이든, 오행론이든, 마르크스의 계급론이든 모든 종류의 『이름붙여 구분짓기』는 공간적 구분에 의지하는 원자론으로 부터 발상법을 빌려오고 있다.
반면 기독교의 일원론이든, 율곡의 이기일원론이든, 성철의 돈오돈수이든, 뉴튼의 만유인력이든 모든 종류의 일원론은 이원론의 원자론적 발상을 부인하고 공간에서 시간으로 전환하고 있다. 관계망의 세계관이며 네트워크적인 발상법이다.
중국불교가 경전 위주의 권위주의적인 교학에서 좀 더 대중적인 참선 위주의 선불교로 발전하고 또 승려위주의 소승불교에서 대중이 참여하는 대승불교로 발전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극복하여야 할 구분하여 이름짓기
중요한 것은 불교와 유교와 마르크스주의가 공히 알갱이의 세계관에서 관계망의 세계관으로 이행하는 동일한 원리와 방향과 패턴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본질은 『대중과의 직접 소통』이다. 이유가 있다. 어떤 학문이 처음 국경과 민족과 언어라는 장벽을 넘어 전파할 때는 이를 용이하게 넘겨줄 중간집단을 필요로 한다.
곧 사(士) 계급이다. 백성과 왕을 연결하는 중간집단이 된다. 그러나 학문이 발전하여 그 국경을 넘고, 민족을 넘고, 언어를 넘었을 때 그 장벽이 해체되었을 때는 그 사(士) 계급이 불필요하게 된다. 이때 대중은 학문과의 직접 소통을 원한다.
이상적인 치안은 경찰이 필요없는 사회이다. 이상적인 의료는 의사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이다. 마찬가지로 이상적인 학문은 직업 학자가 존재하지 않는 시대이다.
21세기 현대문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이 시대의 유토피아는 대중과의 직접적인 소통가능성에서 찾아져야 한다.
요는 그러한 본질의 문제 곧 대중과의 소통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동양정신이 서구의 근대과학보다 훨씬 더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퇴계의 이기이원론과 기대승의 이기일원론
퇴계의 이기이원론은 위와 아래를 구분하여 서열을 짓는 것이다. 퇴계에 있어 이(理)는 곧 사(士)계급이요 기(氣)는 그들의 가르침을 따라야 하는 민중이다.
이는 남자요 기는 여자다. 이는 하늘이고 기는 땅이다. 주류질서 위주의 차별과 구분이다. 그러나 동양적 결론은 최종적으로는 일원론이다.
유교도 불교도 최종적으로는 일원론으로 결론지어졌다. 또한 여기에는 명백히 이유가 있다. 어떤 것이 둘로 나뉘어지면 그 둘을 통일할 제 3의 하나가 더 필요하게 된다. 그러므로 어떤 논의든 토론을 계속 진행하여가면 결국은 일원론이 승리하게 되어있다.
그 일원의 하나는 대중이다. 궁극적으로는 대중주의가 승리하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모든 학문은 궁극적으로 소통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인터넷의 개방성이 이용자와 이용자를 직접 연결시키듯이, 대중은 직접적인 소통을 원한다. 정치, 경제, 문화, 사회를 막론하고 최종적으로는 중간에 끼어드는 브로커를 배제하고 직접 소통하기를 원한다.
상대적으로 기일원론에 가까운 기대승과 율곡의 사상은 퇴계에 비해 더 대중친화적이고 현실참여적이다. 뒤로 갈수록 이러한 경향은 더욱 노골화된다.
훗날의 화담 서경덕과 혜강 최한기에 있어서는 명백히 기일원론으로 정리된다. 유교가 애초의 정통과 이단을 가르는 2분법적 차별주의를 극복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 역시 마찬가지다. 돈오점수와 돈오돈수의 차이 역시 이원론에서 일원론으로, 공간적 구분에서 시간적 통합으로의 발전패턴을 따르고 있는데는 어김이 없다.
한국에서 성리학은 퇴계의 이기이원론으로 출발하여 율곡의 이기이원적일원론 그리고 서경덕의 최종적인 이기일원론으로 진보해 왔다. 이것이 한국 유교주의 주류의 흐름이다.
이는 차별주의에서 부분차별 그리고 통합으로의 발전이다. 요는 주류와 비주류를 통일하여 차별주의에서 대중주의로 나아가는 것이 역사가 진행하는 방향과 일치하며 더 진보적인 방향이라는 점이다.
유교도 불교도 동일하게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21세기의 대중문화 역시 클래식에서 팝으로, 차별에서 참여로 발전하고 있다. 이는 역사가 진보하는 필연적인 법칙이다.
모든 진보는 시간성의 이해와 수용이다.
유교와 불교가 공히 이러한 방향으로 발전하는 이유는 시간성의 대입 때문이다. 퇴계의 이기이원론적 입장은 작용과 수용, 지배와 피지배, 위와 아래, 남자와 여자, 천(天)과 지(地)를 공간적 개념으로 구분하여 보는 시각이다.
성리학의 성(性)리학의 성(性)은 요소이며 알갱이이고 원자이며 이는 구분되는 것이다. 즉 다른 것이다. 성리학은 처음 다름에 주목하였다. 중화와 만이, 문명과 야만, 남자와 여자, 양과 음의 다름에 주목한 것이다.
반면 율곡의 기발이승일도설은 이를 원인으로 보고 기를 결과로 보는 시각이다. 여기서 원인과 결과 사이에는 명백히 시간이 개입한다. 이 시간에 주목하여야 한다.
동일한 하나의 개체가 시간 상의 진전에 따라 위가 되기도 하고, 아래가 되기도 하며, 남자가 되기도 하고, 여자가 되기도 하며, 음이 되기도 하고 양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원인과 결과는 본질에서 같은 것이어야 한다. 원인 곧 결과다. 색즉시공이다. 공즉시색이다. 이는 다름이 아닌 같음에 주목한 바 된다.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이와 기는 결국 하나로 통합될 수 밖에 없다.
이는 모든 면에서 그러하다. 물리학에서도 마찬가지다. 심지어는 원자론에서도 마찬가지다. 산소와 수소 혹은 헬륨이나 탄소 등의 구분도 애초에는 『원초적 다름』으로 파악되었다.
그러나 이론물리학의 최종결론은 통일장이론으로 정해져 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같음에의 주목이다. 원자량의 차이에 따라 구분될 뿐 산소나 수소나 헬륨이나 그 바탕은 같음이 확인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