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적인 공동체의 비전은 무엇인가?
역사이래 이상적인 공동체의 비전은 여러가지로 제안되어 왔다. 에덴동산을 꿈꾸는 기독교의 이상향이 있고 요순시절을 그리워하는 유교의 이상향이 있다. 무릉도원을 꿈꾸는 도교의 이상향도 있고 극락을 꿈꾸는 불교의 이상향도 있다. 근래에 있어서는 마르크스의 이상향이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그 어떤 종교나 이념도 인류가 공유할 이상적인 공동체의 비전은 되지 못한다. 또한 특정한 종교나 이념이 이상적인 공동체의 비전이 되어서도 안된다.
문제는 커뮤니케이션에 있다. 사상가들은 공동체의 이상을 제안하면서 그 공동체의 커뮤니케이션 수단도 동시에 창안하였다. 그 창안된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도리어 타자와의 커뮤니케이션에 장애을 유발하고 있다.
그 커뮤니케이션 수단은 그 전통과, 문화와, 언어와, 문자와, 역사에서 얻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가나 사상가가 특정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강조할수록 도리어 문화권 사이에 커뮤니케이션의 장벽은 높아만 갔다.
그러므로 종교와 이념은 이상적인 공동체의 비전을 모색하는 한편으로 동시에 파괴해 왔다. 허다한 전쟁과 갈등이 종교와 이념의 이름으로 자행되어왔다.
인문학이 제시하여야 하는 세가지 답변
인문학은 바로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하여 존재한다. 인문학은 세가지 방법으로 응답한다. 하나는 이상적인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 인류가 공유하여야 할 하나의 이상과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다.
둘은 그 하나의 이상과 가치를 공유하기 위한 하나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발견하는 것이다. 셋은 그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활용할 수 있도록 인간을 계발하는 일이다. 이 셋이 완벽하게 갖추어졌을 때 이상적인 공동체의 건설은 가능하다.
작은 그릇에 큰 그릇을 담을 수 없다. 작은 이상이 큰 인류를 통일할 수 없다. 지금까지 인류가 창안한 온갖 이상과 가치가 문화권을 넘어 폭넓게 수용되지 못한 것은 그 이상이 작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큰 그릇이 제작되어야 한다. 인간은 작다. 만약 인간에게서 그것을 찾으려 한다면 결단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발명되어서 안되고 발견되어야 한다. 그것은 인간이 아닌 자연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우리는 자연을 공유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하늘과 땅을 공유하듯이, 우리가 전기나 햇볕을 공유하듯이 그것이 자연에서 찾아진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공유할 수 있다.
세가지 질문이 있다. 세가지 답변이 있다. 첫번째 질문은 이상과 가치다. 여기에 대한 답은 역사와 문명이다. 그 역사와 문명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자연이어야 한다. 곧 불멸의 진리이어야 하며 신이어야 한다.
두번째 질문은 커뮤니케이션 수단이다. 여기에 대한 답은 미(美)다. 그 미 또한 자연의 것이어야 한다. 세번째 질문은 인간의 계발이다. 여기에서의 답은 깨달음이다. 그 깨달음 또한 인위적인 발명이 아니라 자연의 것을 발견함이어야 한다.
서구정신의 본적지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서구중심 인문학은 오래전부터 한계를 노출하고 있다. 서구 인문주의는 한마디로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을 반복적으로 울궈먹는 것이다. 그 짓을 2천년간 하다보니 아이디어가 바닥나버렸다. 이제 그쪽 동네에서 신통한 소식이 들려올 가능성은 없어졌다.
서구 인문학의 최종버전은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유토피아론이다. 마르크스주의는 더 이상 업그레이드가 불가능하다. 작은 그릇에 큰 그릇을 담을 수 없다. 구조적으로 마르크스주의에서 더 진보된 버전은 나올 수 없게 되어 있다.
동양의 인문주의는 이제 시작이다. 그 저변은 광대하게 넓다. 공자와 유토피아와, 노자의 유토피아, 석가의 유토피아가 각각의 장점을 가지고 경쟁하고 있다. 동양정신은 여전히 미개척지요 원시림이다. 요소요소에 보물이 숨겨져 있다. 이제는 동양정신으로 시선을 돌려야한다.
서구정신은 기본적으로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다. 마르크스가 아무리 『종교는 아편이다』 하고 떠들어도, 모세의 출애굽기가 마르크스의 혁명이론에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있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미국의 부시대통령이 아무리 『정의의 전쟁』을 외쳐도 그 정의는 『이에는 이 눈에는 눈』 하는 기독교적인 세계관 아래에서의 정의에 불과하다. 문제는 기독교의 단선적인 세계관이다. 창세에서 말세까지 일직선으로 늘어놓는 그 사고방식이 서구 지식인들의 뇌리에 뿌리깊게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역시 그러한 발상법에 감염되어 있다. 좌파와 우파를 막론하고 종교인과 무신론자를 막론하고, 서구의 근대적 지식인들 중에서 기독교적인 발상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동양학에서 오리엔탈리즘의 퇴행
문제는 방법론이다. 동양학이 부진을 면치 못하는 데는 두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오리엔탈리즘의 병폐 때문이다. 서양인의 입맛에 맞는 동양학을 하는 것이다.
최근 서점가에 인도바람이 불자 『인도인은 모두들 행복하다』는 식의 현실과 괴리된 OEM 주문자상표부착식 이상주의를 날조해내는 것이 바로 오리엔탈리즘이다.
서구의 단선적 세계관이 문제라면서 동양은 이곳에 대척점을 세워 반대로 불교의 윤회설에 기초한 순환론적 세계관으로 대결해야 한다는 식의 어리석음 역시 오리엔탈리즘의 퇴행이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식의 기독교논리가 저급하다면, 서구의 단선적 논리에 불교의 순환적 논리로 맞서는 태도 역시 저급하다.
서구가 합리주의라고 해서 우리는 신비주의로 응수해서 안된다. 신비주의가 합리주의에 식상한 일부 서구인의 입맛을 돋궈주는 양념으로는 쓸모있을 지 모르나, 이런 식으로는 진보가 없다.
서구와 반대로만 가면 저절로 동양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서구와의 공통점을 찾아야 한다. 진리의 보편성에 기초하는 것이어야 한다.
근거없는 한의학의 과학만들기
동양학이 부진한 또 하나의 이유는 서구 근대과학과의 충돌 때문이다. 근대과학은 한마디로 『논리와 체계 그리고 검증』이다. 근대과학의 방법론을 수용한다면서 허황된 미신에다 억지로 논리와 체계를 꾸며넣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음양오행이론으로 한의학의 논리를 세우고, 김봉한의 경락(經絡)연구로 침구술의 체계를 세우고, 오무라 요시아끼가 주장한 『O링 테스트』로 이제마의 사상의설을 검증하겠다는 식의 맹랑한 시도들이다.
분명히 말하면 한의학은 논리와 체계와 검증이 불가능한 경험방이다. 한의학이 의료의 보조수단으로 사용할 수는 있으나 결코 학문체계로서의 근대과학은 될 수 없다.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
서구의 방법론에 꿰맞추기 위해 억지논리, 억지체계, 억지검증을 시도해서 안된다. 우리가 고대의 음양오행이니, 주역이나, 사상의설에서 발상법을 빌릴 수는 있으나, 적어도 이론과 체계 차원에서 논의될 성질의 것은 아니다. 논리와 체계의 차원에서는 마땅히 폐기해야 한다.
주역의 정신으로 돌아가라.
동양사상의 뿌리는 주역에서 찾아야 한다. 석가의 인연법은 유의미하나 어느 면에서 종교화 되었다. 논리와 체계 그리고 검증을 중요시 하는 근대과학의 의미에서 볼 때 불교주의는 맥이 끊기고 사망한 것이다.
반면 유교주의는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어서 단계적으로 업그레이드 되어왔다. 전통이 계승되고 부실하나마 어느정도 체계가 유지된 것이다.
주역의 정수는 『중용의 도』에 있다. 중용은 운전자의 제어를 의미한다. 즉 알갱이의 세계관, 말씀의 세계관, 기계결정론의 세계관이 아니라, 그에 대응되는 생명의 세계관, 관계망의 세계관, 시스템과 패러다임의 세계관에 가까운 발상법이라 할 수 있다.
고전물리학의 핵심원리는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으로 증명되는 『물리적 등방성, 대칭성』의 원리이다. 주역의 기본 원리 또한 등방성의 원리, 대칭의 원리, 균형의 원리, 조화의 원리이다.
작용과 반작용의 물리법칙은 자연이 스스로의 내재한 논리에 따라 미학적 자기완결성을 찾아가는 원리이다. 그 원인은 물리적 등방성, 대칭성에 있다. 곧 자연은 등방성과 대칭성을 통하여 하나의 개체로서 스스로 완성되려고 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으며, 만유인력은 그 완성된 형태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뉴튼의 고전역학과 주역이 강조하는 중용사싱의 차이는 체계와 검증에 있다. 고전역학은 체계를 갖추고 있고 검증가능하다. 주역은 체계가 부실하고 검증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논리를 가능케 한 발상은 동일한 근원을 가지고 있다.
역사이래 이상적인 공동체의 비전은 여러가지로 제안되어 왔다. 에덴동산을 꿈꾸는 기독교의 이상향이 있고 요순시절을 그리워하는 유교의 이상향이 있다. 무릉도원을 꿈꾸는 도교의 이상향도 있고 극락을 꿈꾸는 불교의 이상향도 있다. 근래에 있어서는 마르크스의 이상향이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그 어떤 종교나 이념도 인류가 공유할 이상적인 공동체의 비전은 되지 못한다. 또한 특정한 종교나 이념이 이상적인 공동체의 비전이 되어서도 안된다.
문제는 커뮤니케이션에 있다. 사상가들은 공동체의 이상을 제안하면서 그 공동체의 커뮤니케이션 수단도 동시에 창안하였다. 그 창안된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도리어 타자와의 커뮤니케이션에 장애을 유발하고 있다.
그 커뮤니케이션 수단은 그 전통과, 문화와, 언어와, 문자와, 역사에서 얻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가나 사상가가 특정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강조할수록 도리어 문화권 사이에 커뮤니케이션의 장벽은 높아만 갔다.
그러므로 종교와 이념은 이상적인 공동체의 비전을 모색하는 한편으로 동시에 파괴해 왔다. 허다한 전쟁과 갈등이 종교와 이념의 이름으로 자행되어왔다.
인문학이 제시하여야 하는 세가지 답변
인문학은 바로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하여 존재한다. 인문학은 세가지 방법으로 응답한다. 하나는 이상적인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 인류가 공유하여야 할 하나의 이상과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다.
둘은 그 하나의 이상과 가치를 공유하기 위한 하나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발견하는 것이다. 셋은 그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활용할 수 있도록 인간을 계발하는 일이다. 이 셋이 완벽하게 갖추어졌을 때 이상적인 공동체의 건설은 가능하다.
작은 그릇에 큰 그릇을 담을 수 없다. 작은 이상이 큰 인류를 통일할 수 없다. 지금까지 인류가 창안한 온갖 이상과 가치가 문화권을 넘어 폭넓게 수용되지 못한 것은 그 이상이 작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큰 그릇이 제작되어야 한다. 인간은 작다. 만약 인간에게서 그것을 찾으려 한다면 결단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발명되어서 안되고 발견되어야 한다. 그것은 인간이 아닌 자연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우리는 자연을 공유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하늘과 땅을 공유하듯이, 우리가 전기나 햇볕을 공유하듯이 그것이 자연에서 찾아진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공유할 수 있다.
세가지 질문이 있다. 세가지 답변이 있다. 첫번째 질문은 이상과 가치다. 여기에 대한 답은 역사와 문명이다. 그 역사와 문명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자연이어야 한다. 곧 불멸의 진리이어야 하며 신이어야 한다.
두번째 질문은 커뮤니케이션 수단이다. 여기에 대한 답은 미(美)다. 그 미 또한 자연의 것이어야 한다. 세번째 질문은 인간의 계발이다. 여기에서의 답은 깨달음이다. 그 깨달음 또한 인위적인 발명이 아니라 자연의 것을 발견함이어야 한다.
서구정신의 본적지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서구중심 인문학은 오래전부터 한계를 노출하고 있다. 서구 인문주의는 한마디로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을 반복적으로 울궈먹는 것이다. 그 짓을 2천년간 하다보니 아이디어가 바닥나버렸다. 이제 그쪽 동네에서 신통한 소식이 들려올 가능성은 없어졌다.
서구 인문학의 최종버전은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유토피아론이다. 마르크스주의는 더 이상 업그레이드가 불가능하다. 작은 그릇에 큰 그릇을 담을 수 없다. 구조적으로 마르크스주의에서 더 진보된 버전은 나올 수 없게 되어 있다.
동양의 인문주의는 이제 시작이다. 그 저변은 광대하게 넓다. 공자와 유토피아와, 노자의 유토피아, 석가의 유토피아가 각각의 장점을 가지고 경쟁하고 있다. 동양정신은 여전히 미개척지요 원시림이다. 요소요소에 보물이 숨겨져 있다. 이제는 동양정신으로 시선을 돌려야한다.
서구정신은 기본적으로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다. 마르크스가 아무리 『종교는 아편이다』 하고 떠들어도, 모세의 출애굽기가 마르크스의 혁명이론에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있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미국의 부시대통령이 아무리 『정의의 전쟁』을 외쳐도 그 정의는 『이에는 이 눈에는 눈』 하는 기독교적인 세계관 아래에서의 정의에 불과하다. 문제는 기독교의 단선적인 세계관이다. 창세에서 말세까지 일직선으로 늘어놓는 그 사고방식이 서구 지식인들의 뇌리에 뿌리깊게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역시 그러한 발상법에 감염되어 있다. 좌파와 우파를 막론하고 종교인과 무신론자를 막론하고, 서구의 근대적 지식인들 중에서 기독교적인 발상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동양학에서 오리엔탈리즘의 퇴행
문제는 방법론이다. 동양학이 부진을 면치 못하는 데는 두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오리엔탈리즘의 병폐 때문이다. 서양인의 입맛에 맞는 동양학을 하는 것이다.
최근 서점가에 인도바람이 불자 『인도인은 모두들 행복하다』는 식의 현실과 괴리된 OEM 주문자상표부착식 이상주의를 날조해내는 것이 바로 오리엔탈리즘이다.
서구의 단선적 세계관이 문제라면서 동양은 이곳에 대척점을 세워 반대로 불교의 윤회설에 기초한 순환론적 세계관으로 대결해야 한다는 식의 어리석음 역시 오리엔탈리즘의 퇴행이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식의 기독교논리가 저급하다면, 서구의 단선적 논리에 불교의 순환적 논리로 맞서는 태도 역시 저급하다.
서구가 합리주의라고 해서 우리는 신비주의로 응수해서 안된다. 신비주의가 합리주의에 식상한 일부 서구인의 입맛을 돋궈주는 양념으로는 쓸모있을 지 모르나, 이런 식으로는 진보가 없다.
서구와 반대로만 가면 저절로 동양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서구와의 공통점을 찾아야 한다. 진리의 보편성에 기초하는 것이어야 한다.
근거없는 한의학의 과학만들기
동양학이 부진한 또 하나의 이유는 서구 근대과학과의 충돌 때문이다. 근대과학은 한마디로 『논리와 체계 그리고 검증』이다. 근대과학의 방법론을 수용한다면서 허황된 미신에다 억지로 논리와 체계를 꾸며넣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음양오행이론으로 한의학의 논리를 세우고, 김봉한의 경락(經絡)연구로 침구술의 체계를 세우고, 오무라 요시아끼가 주장한 『O링 테스트』로 이제마의 사상의설을 검증하겠다는 식의 맹랑한 시도들이다.
분명히 말하면 한의학은 논리와 체계와 검증이 불가능한 경험방이다. 한의학이 의료의 보조수단으로 사용할 수는 있으나 결코 학문체계로서의 근대과학은 될 수 없다.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
서구의 방법론에 꿰맞추기 위해 억지논리, 억지체계, 억지검증을 시도해서 안된다. 우리가 고대의 음양오행이니, 주역이나, 사상의설에서 발상법을 빌릴 수는 있으나, 적어도 이론과 체계 차원에서 논의될 성질의 것은 아니다. 논리와 체계의 차원에서는 마땅히 폐기해야 한다.
주역의 정신으로 돌아가라.
동양사상의 뿌리는 주역에서 찾아야 한다. 석가의 인연법은 유의미하나 어느 면에서 종교화 되었다. 논리와 체계 그리고 검증을 중요시 하는 근대과학의 의미에서 볼 때 불교주의는 맥이 끊기고 사망한 것이다.
반면 유교주의는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어서 단계적으로 업그레이드 되어왔다. 전통이 계승되고 부실하나마 어느정도 체계가 유지된 것이다.
주역의 정수는 『중용의 도』에 있다. 중용은 운전자의 제어를 의미한다. 즉 알갱이의 세계관, 말씀의 세계관, 기계결정론의 세계관이 아니라, 그에 대응되는 생명의 세계관, 관계망의 세계관, 시스템과 패러다임의 세계관에 가까운 발상법이라 할 수 있다.
고전물리학의 핵심원리는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으로 증명되는 『물리적 등방성, 대칭성』의 원리이다. 주역의 기본 원리 또한 등방성의 원리, 대칭의 원리, 균형의 원리, 조화의 원리이다.
작용과 반작용의 물리법칙은 자연이 스스로의 내재한 논리에 따라 미학적 자기완결성을 찾아가는 원리이다. 그 원인은 물리적 등방성, 대칭성에 있다. 곧 자연은 등방성과 대칭성을 통하여 하나의 개체로서 스스로 완성되려고 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으며, 만유인력은 그 완성된 형태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뉴튼의 고전역학과 주역이 강조하는 중용사싱의 차이는 체계와 검증에 있다. 고전역학은 체계를 갖추고 있고 검증가능하다. 주역은 체계가 부실하고 검증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논리를 가능케 한 발상은 동일한 근원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