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사이트에서-
한민족의 문명은 넓게 보면 중국문명의 일부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분명 중국과 구분되는 독자적인 특색이 있고 거기에서 우리민족의 정체성을 찾는 것으로 봐야 합니다.
고조선의 위치가 어디냐는 논쟁에서, 고조선이 중국 어딘가에 있었다고 주장한다면 북방 유목민의 문명에 속했다는 의견이 되므로, 북방 유목민족의 문명을 우리민족에 포함할 수 있느냐는 새로운 문제가 대두됩니다. 고로 고조선의 위치는 농업을 위주로 한 우리문명의 성격에 맞는 오늘날의 평양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낙랑논쟁에서 낙랑의 위치를 평양으로 보는 이유는, 낙랑의 문명을 우리민족의 문명과 명백히 구분되는 중국문명의 일부로 보는데, 평양에서 고구려문물과 구분되는 중국문명의 특징이 나타나는 유물들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문명은 넓게는 중국문명에 속하지만 세부적으로는 북방유목민의 문명 및 중국 황하문명과 구분되는 제 3의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고조선문명을 그 시조로 하는 것입니다. 고조선문명이 남하하여 삼한을 이루었으며 고조선>삼한>삼국으로 이어지는 문명의 흐름에서 우리민족의 자주성과 정체성을 찾는 것입니다.
고조선문명의 본질이 무엇인가는 불분명하지만 일단 벼농사를 위주로 하는 농업문명으로 보는 것이 문명이라는 것의 속성에 비추어 보편타당하며, 고조선의 멸망 후 고조선문명이 각지로 퍼져가는 과정에서, 평양의 고조선문명이 북상하여 '고조선문명+북방유목민'의 문명으로 반반씩 결합된 형태에서 고구려문화권이 성립하는 것으로 보여지며, 또 고조선문명이 그대로 남하한 데서 가야와 신라 및 마한문화권이 이루어지고, 또 한편으로 북쪽으로 올라간 고구려문명이 다시 남하하여 마한문화권과 결합한데서 백제문화권이 성립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신라의 삼국통일로 이어져 쇼규모의 단일문명권이 성립합니다.
여기서 이러한 흐름으로 가닥을 잡아가는 본질은 문명의 성격이 무엇이냐이고 문명의 성격은 주로 농사기술이나 이동기술 및 계급제도로 분별됩니다.
북방유목민의 문명은 스키타이문명에서 발견되는 특유의 야금기술과 등자 등을 활용한 기마술에 의지하는 이동기술 및 유목민 특유의 수평적 계급제도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특히 유목민 특유의 활력은 순식간에 군대식 편제로 돌변하는 몽고족의 수평적 계급제도와 관련이 있고 이는 게르만족의 종사제도와도 연결됩니다.
중국문명은 북방유목민과 달리 벼농사에 기초한 엄격한 수직적 계급구조를 가지고 있는만큼 사회적 활력이 상대적으로 약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고조선의 문명은 수직적인 계급구조의 중국문명과 수평적인 구조의 북방유목민의 문명이 반반씩 결합된 제 3의 형태라고 볼 수 있는데, 이런 흔적을 신라의 골품제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중국의 계급관념은 직업적, 숙명적인데 비해 골품제도는 게르만의 종사제도와 유사한 쌍무적, 계약적인 특징을 부분적으로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즉 남방문화권에서는 인도의 카스트제도가 그러하듯이 계급이 직업과 혈통으로 굳어져 운명적으로 정해지는 것인데 비해, 북방문화권에서는 계급이 사회계약에 의해 혹은 쌍무적인 계약에 의해 성립하는 요소가 부분적으로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면 신라의 골품제도는 인도적 남방문화권의 특징과 북방유목민의 특징이 공존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신라사회 특유의 활력은 그러한 북방 유목민적 요소에서 찾아볼 수도 있습니다.
낙랑이 어디에 위치하는가 혹은 낙랑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는 이러한 문화권 및 문명권의 계승여부에서 우선적으로 찾아져야 하는 것입니다. 즉 고조선의 문명은 삼한으로 남하하고 있는데 비해, 낙랑의 중국문명은 평양에서 고립되어 있을 뿐 더 남하하지 않고 있습니다. 왜 문명이 남하하지 않을까요? 결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결혼하지 않는가? 계급관념의 차이 때문입니다. 이건 본질적입니다.
한민족의 문명은 넓게 보면 중국문명의 일부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분명 중국과 구분되는 독자적인 특색이 있고 거기에서 우리민족의 정체성을 찾는 것으로 봐야 합니다.
고조선의 위치가 어디냐는 논쟁에서, 고조선이 중국 어딘가에 있었다고 주장한다면 북방 유목민의 문명에 속했다는 의견이 되므로, 북방 유목민족의 문명을 우리민족에 포함할 수 있느냐는 새로운 문제가 대두됩니다. 고로 고조선의 위치는 농업을 위주로 한 우리문명의 성격에 맞는 오늘날의 평양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낙랑논쟁에서 낙랑의 위치를 평양으로 보는 이유는, 낙랑의 문명을 우리민족의 문명과 명백히 구분되는 중국문명의 일부로 보는데, 평양에서 고구려문물과 구분되는 중국문명의 특징이 나타나는 유물들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문명은 넓게는 중국문명에 속하지만 세부적으로는 북방유목민의 문명 및 중국 황하문명과 구분되는 제 3의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고조선문명을 그 시조로 하는 것입니다. 고조선문명이 남하하여 삼한을 이루었으며 고조선>삼한>삼국으로 이어지는 문명의 흐름에서 우리민족의 자주성과 정체성을 찾는 것입니다.
고조선문명의 본질이 무엇인가는 불분명하지만 일단 벼농사를 위주로 하는 농업문명으로 보는 것이 문명이라는 것의 속성에 비추어 보편타당하며, 고조선의 멸망 후 고조선문명이 각지로 퍼져가는 과정에서, 평양의 고조선문명이 북상하여 '고조선문명+북방유목민'의 문명으로 반반씩 결합된 형태에서 고구려문화권이 성립하는 것으로 보여지며, 또 고조선문명이 그대로 남하한 데서 가야와 신라 및 마한문화권이 이루어지고, 또 한편으로 북쪽으로 올라간 고구려문명이 다시 남하하여 마한문화권과 결합한데서 백제문화권이 성립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신라의 삼국통일로 이어져 쇼규모의 단일문명권이 성립합니다.
여기서 이러한 흐름으로 가닥을 잡아가는 본질은 문명의 성격이 무엇이냐이고 문명의 성격은 주로 농사기술이나 이동기술 및 계급제도로 분별됩니다.
북방유목민의 문명은 스키타이문명에서 발견되는 특유의 야금기술과 등자 등을 활용한 기마술에 의지하는 이동기술 및 유목민 특유의 수평적 계급제도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특히 유목민 특유의 활력은 순식간에 군대식 편제로 돌변하는 몽고족의 수평적 계급제도와 관련이 있고 이는 게르만족의 종사제도와도 연결됩니다.
중국문명은 북방유목민과 달리 벼농사에 기초한 엄격한 수직적 계급구조를 가지고 있는만큼 사회적 활력이 상대적으로 약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고조선의 문명은 수직적인 계급구조의 중국문명과 수평적인 구조의 북방유목민의 문명이 반반씩 결합된 제 3의 형태라고 볼 수 있는데, 이런 흔적을 신라의 골품제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중국의 계급관념은 직업적, 숙명적인데 비해 골품제도는 게르만의 종사제도와 유사한 쌍무적, 계약적인 특징을 부분적으로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즉 남방문화권에서는 인도의 카스트제도가 그러하듯이 계급이 직업과 혈통으로 굳어져 운명적으로 정해지는 것인데 비해, 북방문화권에서는 계급이 사회계약에 의해 혹은 쌍무적인 계약에 의해 성립하는 요소가 부분적으로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면 신라의 골품제도는 인도적 남방문화권의 특징과 북방유목민의 특징이 공존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신라사회 특유의 활력은 그러한 북방 유목민적 요소에서 찾아볼 수도 있습니다.
낙랑이 어디에 위치하는가 혹은 낙랑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는 이러한 문화권 및 문명권의 계승여부에서 우선적으로 찾아져야 하는 것입니다. 즉 고조선의 문명은 삼한으로 남하하고 있는데 비해, 낙랑의 중국문명은 평양에서 고립되어 있을 뿐 더 남하하지 않고 있습니다. 왜 문명이 남하하지 않을까요? 결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결혼하지 않는가? 계급관념의 차이 때문입니다. 이건 본질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