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쪽에 두개의 길이 있고, 왼쪽에 하나의 길이 있다면 인간들은 반드시 왼쪽으로 갑니다. 그것이 약하디 약한 인간.
갈림길은 불안합니다. 선택해야 하거든요. 선택의 부담에서 벗어나기. 결국 인간은 편한쪽을 선택하기 마련이며, 그 길은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 선택입니다. 자신은 스스로를 전시하고 상대방이 자신을 선택하게 하죠.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
문제는 자유가 두개의 길이냐 아니면, 하나의 길이냐입니다.
자유! 선택을 해야합니다. 선택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죠. 근데 인간은 자유를 두려워합니다. 자유가 선택하기처럼 보이거든요.
자유! 그것은 스스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자유는 선택의 포기입니다. 특히 명상운운하는 이들은 대개 자유를 선택의 포기로 이해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자유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건 가짜이죠.
그러나 진정한 경지에서 자유는 선택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두 개의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여러 사람이 가는 큰 길입니다. 모두들 그쪽으로 가죠. 다른 하나는 몇몇 사람이 가는 작은 길입니다. 작은 길은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습니다. 작은 길을 가려면 선택해야 합니다. 큰 길을 가려면 그냥 앞사람의 뒤를 따라가면 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명상은 용기있게 좁은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선택의 여지를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선택하므로서 마침내 선택의 여지를 버리기. 손에 쥔 카드를 던져버리기.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택하기 위하여 선택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도박의 패를 끝까지 쥐고 갑니다. 결국은 버립니다.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하고 그 선택권을 버립니다. 왜? 시효가 지났거든요. 유효기간이 지나버렸거든요. 값이 오르면 팔아야 하는데, 값이 오르므로 팔지 못하는 것입니다. 폭락이죠. 이제는 아무도 사지 않습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택하지 않는 길을 택하며, 대신 선택권을 손에 쥐고 가는 길을 택합니다. 그 손에 쥔 선택권은 끝내 써먹지 못합니다. 대신 희미한 하나의 가능성을 줍니다.
즉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택하는 길은 선택하지 않으며, 대신 선택권을 손에 쥐며, 실제로는 그 선택권을 써먹지 못하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어리석게도.
김영삼은 노무현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김영삼과 이회창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선택권을 손에 쥐고 있습니다. 결국은 그 선택권을 써먹지 못합니다. 이것이 대부분의 어리석은 사람들이 선택하는 길입니다.
김영삼은 노무현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김영삼은 이회창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자신을 쇼윈도에 전시하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선택하게 합니다. 상대방이 자신을 선택하면 퇴짜를 놓습니다. 또 다른 사람이 자신을 선택하면 또다시 퇴자를 놓습니다. 그렇게 김영삼은 자신의 선택권을 행사합니다.
선택권을 손에 쥐고, 선택권을 행사할 뿐, 실제로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합니다. 결국은 노무현도, 이회창도 김영삼을 버립니다. 김영삼은 버려집니다. 그것이 어리석은 인간의 자유입니다. 99퍼센트의 인간들이 말하는 언필칭 자유라는 것은 김영삼의 선택과 같습니다.
그것은 자유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유가 아닙니다. 자 님의 추구하는 바 자유라는 것이 김영삼의 자유와 다르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나요?
결국은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하고 역사에 의해 팽당합니다. 시효가 지나서 용도폐기입니다. 그리곤 결국 지구를 떠나죠. 그것이 어리석은 인간의 한계.
갈림길은 불안합니다. 선택해야 하거든요. 선택의 부담에서 벗어나기. 결국 인간은 편한쪽을 선택하기 마련이며, 그 길은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 선택입니다. 자신은 스스로를 전시하고 상대방이 자신을 선택하게 하죠.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
문제는 자유가 두개의 길이냐 아니면, 하나의 길이냐입니다.
자유! 선택을 해야합니다. 선택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죠. 근데 인간은 자유를 두려워합니다. 자유가 선택하기처럼 보이거든요.
자유! 그것은 스스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자유는 선택의 포기입니다. 특히 명상운운하는 이들은 대개 자유를 선택의 포기로 이해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자유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건 가짜이죠.
그러나 진정한 경지에서 자유는 선택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두 개의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여러 사람이 가는 큰 길입니다. 모두들 그쪽으로 가죠. 다른 하나는 몇몇 사람이 가는 작은 길입니다. 작은 길은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습니다. 작은 길을 가려면 선택해야 합니다. 큰 길을 가려면 그냥 앞사람의 뒤를 따라가면 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명상은 용기있게 좁은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선택의 여지를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선택하므로서 마침내 선택의 여지를 버리기. 손에 쥔 카드를 던져버리기.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택하기 위하여 선택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도박의 패를 끝까지 쥐고 갑니다. 결국은 버립니다.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하고 그 선택권을 버립니다. 왜? 시효가 지났거든요. 유효기간이 지나버렸거든요. 값이 오르면 팔아야 하는데, 값이 오르므로 팔지 못하는 것입니다. 폭락이죠. 이제는 아무도 사지 않습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택하지 않는 길을 택하며, 대신 선택권을 손에 쥐고 가는 길을 택합니다. 그 손에 쥔 선택권은 끝내 써먹지 못합니다. 대신 희미한 하나의 가능성을 줍니다.
즉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택하는 길은 선택하지 않으며, 대신 선택권을 손에 쥐며, 실제로는 그 선택권을 써먹지 못하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어리석게도.
김영삼은 노무현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김영삼과 이회창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선택권을 손에 쥐고 있습니다. 결국은 그 선택권을 써먹지 못합니다. 이것이 대부분의 어리석은 사람들이 선택하는 길입니다.
김영삼은 노무현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김영삼은 이회창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자신을 쇼윈도에 전시하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선택하게 합니다. 상대방이 자신을 선택하면 퇴짜를 놓습니다. 또 다른 사람이 자신을 선택하면 또다시 퇴자를 놓습니다. 그렇게 김영삼은 자신의 선택권을 행사합니다.
선택권을 손에 쥐고, 선택권을 행사할 뿐, 실제로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합니다. 결국은 노무현도, 이회창도 김영삼을 버립니다. 김영삼은 버려집니다. 그것이 어리석은 인간의 자유입니다. 99퍼센트의 인간들이 말하는 언필칭 자유라는 것은 김영삼의 선택과 같습니다.
그것은 자유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유가 아닙니다. 자 님의 추구하는 바 자유라는 것이 김영삼의 자유와 다르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나요?
결국은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하고 역사에 의해 팽당합니다. 시효가 지나서 용도폐기입니다. 그리곤 결국 지구를 떠나죠. 그것이 어리석은 인간의 한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