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에서 사랑으로
자유에는 '무엇으로부터 풀려나서(소극성)'의 의미 밖에 없습니다. '무엇을 한다는(적극성)'의 의미는 님이 부여하고 싶은 희망사항에 불과하구요. 물론 '자유'에 전혀 '실천'의 의미가 없다는건 아니죠. 병아리 눈물만큼 있죠. 다만 모든 것을 '자유'라는 단어 하나에 담아내려 든다면 그건 국어사전을 죽이는 행위가 된다는 거죠.
'자유'는 19세기 이데올로기입니다. 그때는 자유가 없었죠. 정말 자유가 없었더랬습니다. 기회는 적었고 경쟁은 치열했습니다. 모두에게 기회를 주려다가는 깽판이 되곤 했습니다. 원초적으로 기회를 제한해야만 했었어요. 어쩔 수 없는 그 시대의 한계였지요.
고로 '자유'가 외쳐진 것입니다. 기회를 달라 이거에요. 가장 절실한 것이 기회였으니까요.
그러나 이제는 아니에요. 이제는 자유가 넘쳐서 탈입니다. 물론 여전히 자유의 결핍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기는 있지만 이미 철지난 장사에요. 대세는 아닙니다. 이제는 저항과 해방을 외칠 때가 아니에요. 그런 구호가 먹히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가두어 놓으면 다들 밖으로 나가려고 하지만, 정작 밖으로 내놓으면 도로 안으로 들어가려 하는게 인간의 문제지요. '정녕 이 시대가 무엇을 요구하는가?' 이걸 알아채야 합니다.
이시대가 진정 필요로 하는 것은 '공감'입니다. 싱크로나이시티synchronicity죠. 동시감응,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이심전심, 하나의 방송국에 둘이 동시에 주파수를 맞추는 것입니다. 낯선 사람과 서로 마음이 통하고, 서로 인사하고, 소통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옛날에는 갇혀 있었기 때문에, 풀어주려는 쪽으로만 에너지가 작용했지만, 지금은 풀어져 있기 때문에, 서로 뭉치는 방법을 찾으려 드는 것입니다. 한국축구8강! 광화문에 모인 저 인파들이 정녕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뭉쳐야 합니다. 그러나 옛날처럼 강제로 가둬두는 방법은 아니죠. 그건 억지에요. 물과 기름은 뭉칠 수 없습니다. 뭉칠 수 없는 것은 뭉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뭉쳐야 하는 것을 뭉치게 할 수 있을까요?
풀어져 있는 것들을 가두어놓지 않고도, 스스로의 창발성에 의해 뭉쳐서, 작은 하나의 핵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건 '공감'입니다. 이제는 서로의 마음과 마음에 채널을 맞추어야 해요. 이 시대에 우리가 정녕 무엇을 고민하느냐입니다.
자유! 저항! 해방! 해탈! 평상심!의 시대는 지나갔어요. 그따위는 켸켸묵은 옛날버전이라구요. 자유? 누가 억압한데요? 하긴 억압이 전혀 없는건 아니지요. 히딩크가 애인을 데려오든 말든 왠 시비야? 아직도 이 땅에 억압은 남아있어요. 그러나 이 시대 우리들의 진짜 문제는 억압이 아닙니다.
이제는 자유를 논하고, 해방을 논하고, 해탈을 논하고, 평상심을 논할 때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방법을 논할 때입니다. 뭉치는 방법을 찾아야 해요. 마음을 여는 방법을 찾아야 해요. 그게 뭐냐지요. 광화문의 인파들을 한자리에 끌어모은게 뭐냐구요? 그 및바닥에 도대체 어떤 에너지가 흐르고 있기에 그들을 자석처럼 끌어들였을까요?
그것이 '공명'이지요. 싱크로나이시티입니다. 동시감응입니다. 하나의 방송국에 채널을 맞추는 것입니다. 누가 명령하지 안았는데도 내가 할 때 남도 한다는 것, 박자가 척척 맞아준다는 것, 규정하지 않고도 이해가 되고 용서가 된다는 것, 통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겐 그러한 원소가 있어요. 마음의 깊은 바닥에 '공감각'이 있다구요. 주위의 공기를 문득 알아채고 보이지 않는 신호를 읽어내며 누가 외치지 않았는데도, 누가 강제하지 않았는데도 자석처럼 스스로 끌려드는 힘이 있다구요.
바로 그것이 이 시대의 참된 정신이고, 우리가 외쳐야 하고, 또 발견해야 하고, 일구어내야만 하는 가치이고, 정신이고, 철학입니다. 시대가 바뀌면 철학도 바뀌는 겁니다. 언제까지 자유타령, 평상심타령 할거에요. 그건 소시적에 해보는 소리여야 합니다.
이제는 감동과, 공감과, 소통과, 이심전심과, 동시감응이 필요한 겁니다. 우리는 서로 통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함께 채널을 맞춰봅시다.
자유에는 '무엇으로부터 풀려나서(소극성)'의 의미 밖에 없습니다. '무엇을 한다는(적극성)'의 의미는 님이 부여하고 싶은 희망사항에 불과하구요. 물론 '자유'에 전혀 '실천'의 의미가 없다는건 아니죠. 병아리 눈물만큼 있죠. 다만 모든 것을 '자유'라는 단어 하나에 담아내려 든다면 그건 국어사전을 죽이는 행위가 된다는 거죠.
'자유'는 19세기 이데올로기입니다. 그때는 자유가 없었죠. 정말 자유가 없었더랬습니다. 기회는 적었고 경쟁은 치열했습니다. 모두에게 기회를 주려다가는 깽판이 되곤 했습니다. 원초적으로 기회를 제한해야만 했었어요. 어쩔 수 없는 그 시대의 한계였지요.
고로 '자유'가 외쳐진 것입니다. 기회를 달라 이거에요. 가장 절실한 것이 기회였으니까요.
그러나 이제는 아니에요. 이제는 자유가 넘쳐서 탈입니다. 물론 여전히 자유의 결핍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기는 있지만 이미 철지난 장사에요. 대세는 아닙니다. 이제는 저항과 해방을 외칠 때가 아니에요. 그런 구호가 먹히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가두어 놓으면 다들 밖으로 나가려고 하지만, 정작 밖으로 내놓으면 도로 안으로 들어가려 하는게 인간의 문제지요. '정녕 이 시대가 무엇을 요구하는가?' 이걸 알아채야 합니다.
이시대가 진정 필요로 하는 것은 '공감'입니다. 싱크로나이시티synchronicity죠. 동시감응,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이심전심, 하나의 방송국에 둘이 동시에 주파수를 맞추는 것입니다. 낯선 사람과 서로 마음이 통하고, 서로 인사하고, 소통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옛날에는 갇혀 있었기 때문에, 풀어주려는 쪽으로만 에너지가 작용했지만, 지금은 풀어져 있기 때문에, 서로 뭉치는 방법을 찾으려 드는 것입니다. 한국축구8강! 광화문에 모인 저 인파들이 정녕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뭉쳐야 합니다. 그러나 옛날처럼 강제로 가둬두는 방법은 아니죠. 그건 억지에요. 물과 기름은 뭉칠 수 없습니다. 뭉칠 수 없는 것은 뭉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뭉쳐야 하는 것을 뭉치게 할 수 있을까요?
풀어져 있는 것들을 가두어놓지 않고도, 스스로의 창발성에 의해 뭉쳐서, 작은 하나의 핵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건 '공감'입니다. 이제는 서로의 마음과 마음에 채널을 맞추어야 해요. 이 시대에 우리가 정녕 무엇을 고민하느냐입니다.
자유! 저항! 해방! 해탈! 평상심!의 시대는 지나갔어요. 그따위는 켸켸묵은 옛날버전이라구요. 자유? 누가 억압한데요? 하긴 억압이 전혀 없는건 아니지요. 히딩크가 애인을 데려오든 말든 왠 시비야? 아직도 이 땅에 억압은 남아있어요. 그러나 이 시대 우리들의 진짜 문제는 억압이 아닙니다.
이제는 자유를 논하고, 해방을 논하고, 해탈을 논하고, 평상심을 논할 때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방법을 논할 때입니다. 뭉치는 방법을 찾아야 해요. 마음을 여는 방법을 찾아야 해요. 그게 뭐냐지요. 광화문의 인파들을 한자리에 끌어모은게 뭐냐구요? 그 및바닥에 도대체 어떤 에너지가 흐르고 있기에 그들을 자석처럼 끌어들였을까요?
그것이 '공명'이지요. 싱크로나이시티입니다. 동시감응입니다. 하나의 방송국에 채널을 맞추는 것입니다. 누가 명령하지 안았는데도 내가 할 때 남도 한다는 것, 박자가 척척 맞아준다는 것, 규정하지 않고도 이해가 되고 용서가 된다는 것, 통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겐 그러한 원소가 있어요. 마음의 깊은 바닥에 '공감각'이 있다구요. 주위의 공기를 문득 알아채고 보이지 않는 신호를 읽어내며 누가 외치지 않았는데도, 누가 강제하지 않았는데도 자석처럼 스스로 끌려드는 힘이 있다구요.
바로 그것이 이 시대의 참된 정신이고, 우리가 외쳐야 하고, 또 발견해야 하고, 일구어내야만 하는 가치이고, 정신이고, 철학입니다. 시대가 바뀌면 철학도 바뀌는 겁니다. 언제까지 자유타령, 평상심타령 할거에요. 그건 소시적에 해보는 소리여야 합니다.
이제는 감동과, 공감과, 소통과, 이심전심과, 동시감응이 필요한 겁니다. 우리는 서로 통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함께 채널을 맞춰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