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록
read 3985 vote 0 2002.09.10 (11:56:23)

사람이 살지 않는 외진 곳을 찾아갔더니, 거기서 어떤 낯선 사람 있어 만났다면 비록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반가울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과 당신은 어떤 공유하는 하나의 코드가 있기 때문이다. 그 외진 곳을 찾아왔다는 점에서 그와 당신은 일치다. 일단 채널이 맞은 것이다. 그렇다면 대화할 수 있다.

시장바닥에서 대화할 수 없다. 일단 그곳을 빠져나와야 한다. 극점에 서야 한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곳에서, 진정한 소통이 있을 수 있다. 눈꼽만큼의 빈틈이라도 있다면, 어리석은 인간은 그 빈틈들을 일일이 다 확인해 보고 난 다음에, 마지막 하나 남은 진실을 돌아볼 것이다. 그것이 약하디 약한 인간이다. 고로 차단하지 않으면 안된다.

명상할 수 있다는 것은 이심전심이 된다는 말이다. 이심전심이 되지 않는다면 그 어떤 대단한 경력을 가진 자라도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우리가 명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겨우 그 정도에 불과하다.

60억개의 내가 있다. 너는 나의 다른 표정에 불과하다. 네가 어떤 짓을 하든, 네가 화를 내든가, 웃든가, 졸든가, 자든가, 삐치든가, 토라지든가, 싸움을 걸어오든가 간에 그건 나의 다른 표정에 불과하다. 나는 나의 다양한 다른 표정들에 일일이 대응하지 않는다.

산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자신에게 주어진 다양한 선택의 여지를 하나씩 줄여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극점에 서는 것이다. 하나씩 하나씩 가능성을 배제해가는 것이다. 버리는 것이다. 포기하는 것이다. 차단하는 것이다. 최후에 남는 하나의 코드를 위하여.

명상한다는 것은 결국 그 무한한 가능성들을 일거에 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통은 아끼고 아끼다가 등떠밀려 마지못해 하나씩 하나씩만 버린다. 하나씩 자신에게 주어진 꿈을, 가능성을, 기회를, 확률을 제거해 나간다.

히딩크를 기초를 강조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족집게 과외 선생이다. 알고보니 한국은 기본이 되어 있었다. 기초를 강조하던 일본바둑은 망했고 실전을 강조하던 한국바둑이 흥했다. 기초는 중요하지 않다. 요는 확실한 정답을 알고 있느냐이다.

우리는 뭔가 다양한, 가능성과 기회와 확률이 있을 것을 믿고, 기초를 강조하며 이것저것 시험해보다가 기회를 낭비해 버린다. 시간은 흘러가버린다. 모든 것을 다 움켜쥐고 있으려다가 시간이라는 심판자에 의해 결국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정답은 하나뿐, 60억개의 가능성이 있지만, 네게 배당된 것은 단 하나뿐, 되도록 빨리 버리라. 빨리 버리는 자가 모두를 얻을 것이다.

명상 - 자신에게 필요하지 않은 것을 제거하는 기술, 쉬울 것 같지만 참으로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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