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성의 과학 구조론]
'구조론'은 매우 쉽다. 필자는 사람들이 '구조론'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를 납득하지 못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구조론은 매우 어렵다. 우선 필자조차도 구조론을 용이하게 설명할 수 있는 어휘를 수집하는데 애를 먹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구조론은 세상 모든 것은 '5'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5'라는 숫자에 집착해서는 안된다. 편의상 숫자로 표현하고 있지만, 여기서 '5'는 굳이 숫자 5가 아니다. 숫자 '5'를 강조하는 것은 '질>입자>힘>운동>량'이라고 말하면 너무 번거롭기 때문이다. 더구나 사람들은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질은 무엇인가?
양은 무엇인가?
'질'과 '양'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나라에 필자를 제외하고 단 1명도 더 없을 것이다. 쉽게 가자. 그렇다면 질과 양을 합쳐서 '질량'은 무엇인가? '질'은 결합되지 않는 것을 의미하고 '양'은 쪼개지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결합되지 않는 것을 쪼개지지 않는 것으로 나타낸 것이 곧 '질량'이다. 이렇게 설명하면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사람들은 추상적인 사고에 약하다. '입자'란 무엇인가? '힘'이란 무엇인가? '운동'이란 무엇인가? 이런 개념들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지구상에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러므로 필자는 쉽게 '5'로 되어 있다고 말하지만, '5'라는 숫자에 집착해서는 구조론의 참다운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
옛날에 어떤 수학자는 말했다. '세상 모든 것은 숫자로 되어 있다.' 이 명제는 틀렸다. 그러나 세상의 존재하는 모든 것을 숫자로 나타낼 수는 있다. 숫자는 기호다. 기호로 나타낼 수 있다. 구조론의 5 역시 하나의 기호에 불과한 것이다.
또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세상 모든 것은 '시작과 끝'의 '2'로 되어있다. 여기서 시작과 끝이 중요한 것이지, '2'가 본질은 것은 아니다. 모든 개별자는 겉과 속, 안과 밖, 원인과 결과, 본질과 현상, 요소와 효과, 실체와 관계의 2로 나타낼 수 있다. 단지 나타낼 수 있을 뿐이다. 그 숫자 2에 집착해서는 안된다.
결론적으로 구조론에 의하면 세상 모든 것은 '질>입자>힘>운동>량'의 5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이는 구조론을 물리법칙에 적용했을 때이다. 구조론은 보편원리로서 적용되지 않는 분야가 없다. 이를테면 소설이나, 영화나, 음악에도 적용될 수 있다. 소설이라면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의 5구조를 대입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질>입자>힘>운동>량'의 어휘들에 집착해서도 안된다.
구조론을 참다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용되는 추상개념으로서의 어휘들보다는 구조 그 자체에 집중해야 한다. 어쨌거나 구조론이 증명하는 바 '내부에 기능을 가지고 있는 모든 독립적 존재자'는 5요소의 최소구성단위를 가진다.
"왜 하필이면 5인가? 6이나 7이면 안된다는 법이 있는가?"
숫자로 나타내기는 편리하지만 이렇게 오해를 유발한다. 오해이다. 구조론은 기능을 가진 독립된 단일 구조체를 해부한다. 그것은 '닫힌 계'이다. 하나의 구성체 내부에서 기능을 가진 구성요소의 수가 5를 넘을 수 없다. 구조가 붕괴하기 때문이다.
왜 5를 넘으면 구조가 붕괴하는가? 모래위에 집을 지으면 사상누각이 된다. 그 집은 기울어지고 종내에는 무너지게 되어 있다. 구조원리상 그러하다.
'시작과 끝'은 왜 둘일까? '시작과 중간과 끝'의 3단계로 만들수도 있다. 동서남북은 넷이지만 4방, 8방, 16방, 32방이 될 수도 있고 각도로 따지면 360도가 될 수도 있고, 세분하면 무한대가 될 수도 있다. 1년은 사계절이고, 하루는 24시간이다. 혹은 밤과, 낮이다. 혹은 밤과, 아침과, 오전과, 정오와, 오후와, 저녁과, 밤과, 새벽이다. 이러한 분류구분은 줄어서 1이 될 수도 있고, 늘어서 무한정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이를 2로 혹은 4로 혹은 24로 나누는 것은 분류기준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 분류기준이 무엇인가에 따라 2가 될 수도 있고 무한대가 될 수도 있다.
구조론에서는 그 분류기준은 '기능'이다. 구조론에서 '5'라는 것은 기능을 가진 차별화된 요소의 수가 '5'라는 것이다. 여기서 요소이냐 요소가 아니냐를 구분하는 단위는 기능을 가졌느냐, 가지지 않았느냐이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이런 경우를 예로 들 수 있다.
일본의 어떤 목수가 유명한 건물을 한 채 지었다. 그 건물은 못을 단 한개만 사용하고 있는데, 그 못 하나를 뽑으면, 건물 전체가 무너지도록 설계되어 있다고 한다. 단지 못 하나만을 뽑았을 뿐인데 왜 건물전체가 무너질까? 이것이 구조다. 구조론도 이와 같다.
기능이 없는 즉, 없어도 되는 불필요한 요소를 완벽하게 제거했을 때 5가 남는다. 우리가 사용하는 물건들에는, 사실 없어도 되는 부분들이 무수하게 있다. 그 불필요한 부분을 하나하나 제거해 간다고 치자. 이제 더는 제거할 수 없는 어떤 한계에 다다를 수 있다.
여기서 부터는 어디든지, 단 하나만 제거해도 전체를 못 쓰게 된다. 기능이 정지하는 것이다. 이때 남은 것이 곧 5인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기준은 쓰느냐 못 쓰느냐 곧 '기능'이다.
자동차가 있다. 문짝이 없어도 차는 굴러간다. 트렁크가 없어도 차는 굴러간다. 의자의 시트를 제거해도 차는 굴러간다. 그러나 엔진이 없다면 그 차는 더 이상 차가 아니다. 이런 식으로 제거해도 되는 것을 완벽하게 제거하고, 더 이상 제거해서는 자동차일 수 없는 한계상황에서 남는 것이 5이다.
여기서 왜 하필이면 '기능'으로 구분하는가 하는 질문이 있을 수 있다. 그 이유는 개별자를 구분하는 기준이 곧 기능이기 때문이다. 생각하자. 폐차된 자동차와 고철은 무엇이 다른가? 휴지와 연습장은 무엇이 다른가? 쇠덩어리와 쇠망치는 무엇이 다른가? 우리는 기능을 두고 사물을 판별한다. 전봇대로 이빨을 쑤시면 곧 이쑤시개가 되는 것이다.
구조론에 의하면 어떤 하나의 사물에는 기능을 가진 구성요소의 수가 다섯 개 뿐이 없다. 왜 여섯이 아닌가? 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기능은 배달된다. A에서 B로 기능이 배달되어야 한다. 배달되지 않으면 기능이 아니다.
여섯 개일 경우 하나가 남으므로 그 하나에는 기능이 배달되지 않는다. 즉 어떤 사물이 여섯 개의 구성요소를 가졌을 경우, 그 중 하나의 요소는 기능이 정지된다. 사용되지 않는 것이다. 사용되지 않는 부분은 소거된다. 고로 다섯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법칙, 'A에서 B로 임의로운 전달이 있을 경우, 주는 쪽 A와 받는 쪽 B의 값은 동일해야 한다'. 즉 컴퓨터 A에서, 컴퓨터 B로 파일을 전송하려면, 주는 쪽과 받는 쪽이 동일한 프로그램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는 쪽은 MS워드인데 받는 쪽은 한글이라면, 파일의 전송은 불가능하다. 개미가 코끼리에게 건빵을 전달한다든가, 코끼리가 개미에게 비스킷을 전달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능이다.
'입력과 출력의 값은 항상 동일해야 한다'.
이는 기본적인 물리법칙이다. 구조론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왜 '5'인가? '시작과 끝'은 2다. '시작=끝'으로 에너지보존의 법칙에 의하여 양쪽의 값은 동일하다. 시작과 끝이 동일하다면, 시작과 끝으로 굳이 나눌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양자는 통일된다. 즉 시작과 끝은 합쳐져서 독림된 개별자로서의 구조체 1이다. 그런데 왜 시작과 끝의 2로 나뉘는가?
'시작과 끝'은 시간개념이다. 물리법칙의 시간성에 의해 개별자 1이, 기능의 2로 나누어지는 것이다. 만약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것도 나뉘어지지 않는다. 나누어지는 모든 것은 시간에 의존하고 있다.
질 1은 입자2로 나뉘어진다. 입자 1은 힘 2로 나뉘어진다. 힘1은 운동2로 나뉘어진다. 운동1은 량 2로 나뉘어진다. 양은 나뉘어지지 않는다. 반대로 양2는 합쳐져 운동 1이 되고, 운동 2는 합쳐져 힘 1이 되고, 힘 2는 합쳐져서 입자 1이 되고, 입자 2는 합쳐져 질 1이 된다. 질은 합쳐지지 않는다.
여기서 '나뉘어지지 않는 것'을 '양'이라 하고, '합쳐지지 않는 것'을 '질'이라 한다. 질(質)이란 바탕이라는 뜻이다. 바탕이므로 합쳐지지 않는다. 합쳐진다면 결코 바탕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양(量)은 나뉘어지지 않는다. 양(量)은 헤아린다는 뜻이다. 나눠진다면 헤아릴 수 없다.
'흙'은 헤아릴 수 없다. 자꾸만 잘게 나눠지기 때문이다. '밀가루'도 헤아릴 수 없다. 자꾸만 잘게 나눠지기 때문이다. 더 이상 나눠지지 않는 것은 원자 알갱이다. 원자는 '양'으로 표시한다. 즉 '양'은 나눠지지 않는 원자인 것이다. 반대로 질은 더 이상 합쳐지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물질은 나눠지지 않는 것과, 합쳐지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그러하다. 왜냐하면 합쳐진다면 합쳐져서 다른 것으로 변해버리기 때문이다. 그것이 다른 것으로 변해버린다면 우리는 그것을 개별자로 인정할 수가 없다. 나눠진다면 나눠져서 다른 것으로 변해버리기 때문에 판단기준이 될 수 없다.
종이는 합쳐져서 '공책'이 된다. 종이 한 장은 하나의 입자이다. 질이 아니다. 종이의 질은 목재성분이다. 종이는 나무를 갈아서 만든 펄프를 합쳐놓은 것이다. 나무와 쇠는 합쳐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질이다.
여기서 '질'은 '절대로 합쳐지지 않는다'는 개념, 그리고 '양'은 '절대로 나눠지지 않는다'는 개념을 반드시 기억하여야 한다. 그러나 질과 양의 중간에서 입자와, 힘과, 운동은 나눠지기도 하고 합쳐지기도 한다. 운동이 합쳐지면 가속도가 되고, 입자가 나눠지면 에너지가 된다. 우리는 자연의 관찰을 통해서, 입자가 합쳐지거나 나눠지며, 힘과 운동도 역시 나눠지거나 합쳐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구조론이 '5'로 완성되는 것은, 이 합쳐지거나 나눠지는 성질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질과 양에서 절대로 합쳐지거나 나눠지지 않는 성질 때문이다. 왜 6이나 7이 아니라 하필 5인가? 양은 더 이상 나눠지지 않기 때문이다. 양이 나눠진다면 6이나 7이나 8이나 9로 자꾸만 늘어날 수 있다. 무한대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양'은 결코 나눠지지 않는다. 질이 합쳐진다면 역시 무한정 증가할 수 있다. 그러나 질은 어떤 경우에도 합쳐지지 않는다. 그곳이 더 이상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한계이다.
질과 양에서 변화는 정지한다. 입자와 힘과 운동은 변화하지만 질과 양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질량보존의 법칙에 의해 양은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는다. 절대로 변화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구조론에 있어서 요소판별의 절대적인 기준이다. 마찬가지로 질은 어떤 경우에도 합쳐지지 않고, 양은 어떤 경우에도 쪼개지지 않는다. 고로 우리는 구조체의 요소의 수를 헤아릴 수 있다.
나무와 쇠가 합쳐진다면 나무와 쇠는 더 이상 질이 아니다. 지금까지 나무와 쇠를 합성하는데 성공한 과학자는 단 한 사람도 없다. 물과 불은 합쳐지지 않는다. 아직까지 물과 불을 합성하는데 성공한 과학자는 없다. 물론 뛰어난 기술자는 구리와 아연이나 주석을 합쳐서 합금을 만들곤 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그 질은 변하지 않았다. 설탕물 안에서 설탕과 물은 합쳐지지 않았으며, 소금물 안에서 소금따로, 물 따로이다. 그 합금 안에서 구리성분과 주석 혹은 아연 성분은 마치 쇠 상자에 나무토막을 넣어두듯 완전히 합쳐지지 않고, 특수한 조직양상으로 분리된 채 결합상을 나타낼 뿐이다.
왜 '질'은 합쳐지지 않는가? 합쳐지지 않는 것을 '질'로 명명했기 때문이다. 왜 '양'은 나눠지지 않는가? 나눠지지 않는 단계에서 '양'으로 명명했기 때문이다. 이 개념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질과 양의 절대로 합쳐지지 않고 절대로 나눠지지 않는 원리를 이해하는 것만으로 구조론의 반은 이해한 셈이 된다.
여기에 '폐차'가 한 대 있다. 이 폐차를 두고 자동차로 분류할 지, 고철로 분류할 지는 기능이 결정한다. 마찬가지로 '양'인가 '질'인가는 그 기능이 결정한다. 그 기능에서 합쳐지는가? 나눠지는가?의 여부를 두고 판단하는 것이다.
기능은 '전달'이다. 전달되지 않으면 '기능'이 아니다. 그런데 입력과 출력의 값은 항상 동일해야 한다. 기능에 의해 A에서 B로 전달되는 것이다. 그런데 '5'는 홀수다. 전달되려면 짝수여야 한다. 그러므로 구조론은 최종적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즉 일정한 구간 안에서 전달하되 질과 양에 의해 양쪽으로 차단되므로 최종적으로는 전달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질과 양에 의해 차단되지 않고 무한정 전달된다면 어떻게 될까? 빠져나가버린다. 즉 에너지가 바깥으로 완전히 새나가 버리는 것이다. 이때 기능을 상실한다. 자동차는 승객을 서울에서 부산으로 전달한다. 그런데 에너지가 새나간다면 어떻게 될까? 승객이 타는 즉시 내려버린다. 또는 부산을 통과하여 계속 달린다. 즉 구멍난 호스처럼 중간에서 새나가는 것이다.
새지 않아야 한다. 서울에서 전달된 일이 부산에서 정확히 멈추어야 한다. 부산을 통과해서 지나쳐 가버린다면? 구조론이 '5'에서 끝나는 이유는 최종적으로 힘의 전달을 차단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즉 구조는 '에너지'를 전달하지만 동시에 최종목적지에서 그 전달을 멈추는 것이다. 어디서 멈추는가? '양'에서 멈춘다. 어디서 멈추는가? 질에서 멈춘다. 고로 홀수인 '5'가 되는 것이다.
짝수의 경우를 보자. '시작과 끝'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시작은 끝이 되고, 끝은 다시 시작이 된다. 이 경우 환원된다. 즉 서울에서 부산으로 배달한 상품이 다시 서울로 돌아와버리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서울에서 부친 물건이 정확하게 부산에 떨어지게 할 수 있는가? 구조론이 홀수인 5가 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힘을 전달하되, 원래의 위치에 되돌아오지는 않고, 특정의 타깃에 정확하게 멈추게 하는 것이 구조론이다. 곧 기능이다. 반면 기능이 아닌 경우를 보자. 강물이 흐른다. A에서 B로 간다. 계속 간다. 멈추지 않는다. 이때 기능은 상실한다. 우리는 그 강물을 이용할 수 없다. 차단해야 한다. 댐을 쌓아야 한다. 강물을 멈추게 해야지만 우리는 그 강물을 이용할 수 있다. 이용할 수 없는 것은 기능이 없는 것이다.
지구는 멈추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우주공간을 항해하고 있다. 지구는 팽이처럼 돌면서 총알처럼 날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 에너지를 우리는 이용할 수 없다.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멈추지 않는 운동은 기능이 없으므로 정지해 있는 것과 같다.
멈추지 않고 통과해버리는 것을 우리는 이용할 수 없다. 기능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기능은 힘을 전달하되 특정 위치에서 멈추는 것으로 정의될 수 있다. 왜 5인가? 어떤 하나의 개체에는 전달과 멈춤의 단위가 5개 있는 것이다.
가만이 멈추어 있기만 해도 기능이 아니다. 통과해버려도 역시 기능이 아니다. 전달과 멈춤이 동시에 공존해야 한다. 중심이 있다. 중심은 에너지다. 위로 전달하는 것이 입자이고 멈추는 것이 질이다. 아래로 전달하는 것은 운동이고 멈추는 것은 양이다.
여기까지에서 기억해야할 규칙들은?
질 : 합쳐지지 않는다.
양 : 쪼개지지 않는다.
1) 독립된 단일한 하나의 구조체를 이루는 구성요소의 수는 5다.
2) 구성요소의 판별기준은 기능이다.
3) 기능은 A에서 B로 배달한다.
4) 기능이 A에서 B로 배달할 때 A와 B 양쪽의 값은 동일해야 한다.
5) 기능이 배달하는 것은 결합과 분할이다.
6) 결합은 질에서 차단되고 분할은 양에서 차단된다.
하나의 닫힌 계(독립된 구조체) 내부에서 질은 결합을 차단한다. 양은 분할을 차단한다. 질은 합쳐지지 아니하고, 양은 쪼개지지 아니한다. 질과 양은 양쪽에서 닫힌 계의 괄호 [ ]를 이룬다. [<- 질 : 양 ->]가 된다. 질과 양쪽이 위와 아래에서 안팎으로 문을 걸어 잠근다. 이로서 하나의 독립된 '계'가 성립한다.
질은 위에서 결합을 차단하므로, 반대로 아래쪽에서 내부적으로 결합을 개방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곧 입자다. 양은 아래에서 분할을 차단하므로 반대로 위쪽에서 내부적으로 분할을 개방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곧 운동이다. 가운데에서 입자의 결합과 운동의 분할을 교환하는 것이 곧 힘이다.
고로 독립된 단일 구조체로서의 '닫힌 계'의 구성요소의 수는 5가 된다.
본래는 구조체 1이며 구조체 1은 시간상에서 질과 양의 2다. 곧 질과 양은 각각 결합과 분할 및 그 차단이다. 결합하였으므로 더 이상은 결합하지 않는 것이 질이며, 아직 결합하지 않았으므로 이제 결합하는 것이 입자이고 반대로 분할하지 않았으므로 이제 분할하는 것이 운동이고 반대로 이미 분할 하였으므로 더는 분할하지 않는 것이 양이다. 중간에서 양자를 교환하는 것이 힘이다.
질 - 결합하였으므로 결합하지 않는다.
입자 - 결합하지 않았으므로 결합한다.
힘 - 결합과 분할을 교환한다.
운동 - 분할하지 않았으므로 분할한다.
량 - 분할하였으므로 분할하지 않는다.
구조체의 요소의 수는 위와 같이 5다. 왜 5인가? 본래는 닫힌 계 1이다. 닫힌 계 1은 일한다. 일은 결합과 분할이다. 곧 2다. 결합과 분할은 곧 질과 양이다. 질과 양이 동전의 양면처럼 상반된 작용을 하는 것이 입자와 운동이다. 이제 4가 되었다. 질과 양은 중간의 힘에서 교환된다. 결국 5다.
여기서 5는 질과 양이 각각 가지는 결합과 분할의 이중성을 나타내어 4를 얻고, 양자의 교환을 나타내어 1을 추가하므로 최종적으로 5에 이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5'라는 숫자에 집착해서 바라보지 않아야 한다. 본래는 구조체 1이고, 1은 동전의 양면처럼 이중성을 가졌으며 그 이중성은 결합과 분할이다. 이들은 내부적으로 결합하고 분할하면서 동시에 외부적으로 결합과 분할을 차단하므로서 닫힌 계를 독립시킨다.
여기서 '닫힌 계'의 개념에 주목해야 한다. 닫힌 계는 외부와 구분되는 독립성을 의미한다. 질과 양이 결합과 분할을 차단하므로서, 바깥쪽으로 문을 걸어잠근다. 이로서 독립된 계가 형성된다. 곧 닫힌계이다. 이 닫힌 계 안에서 내부적으로 결합하고 분할하며 이를 교환하는 것으로서 하나의 구조가 성립하는 것이다. 만약 이 다섯가지 요소 중 하나가 부족하면 구조는 붕괴한다. 하나가 남으면 그 부분은 기능하지 않으므로 소거된다.
하나의 소립자도 하나의 물건도 하나의 조직도 이러한 기능에 의하여, 비로소 그 존재가 성립되는 것이다. 반대로 열린계에서는 다르게 나타난다. 이 점은 지극히 미묘하므로 흔히 착각을 유발 할 수 있다.
'열린 계'에서 질은 결합한다. 그러나 이 결합은 내부적인 융합이 아니다. 즉 차단된 한도 바깥과의 교섭이며 실제로는 결합이 아니라 무지개처럼 공존이다. 말하자면 질이 다른 외부와 결합한 경우 기능적으로 분리되어 별개로 독립된 채 이웃하여 공존한다.
망치가 있다. 망치는 도구이다. 도구는 사람의 손과 결합하고서야 비로소 기능한다. 그러나 이때 도구와 사람은 구분된다. 별도의 존재이다. 망치는 망치이고 사람은 사람이다. 둘은 섞이지 않는다. 고로 이는 일에서 물리적으로 결합이지만 진정한 융합이 아니다. 절대로 결합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양은 외부와 분할한다. 그러나 이 분할은 정반대의 의미이다. 즉 쪼개지는 것이 아니라 차별화되어 구분되는 것이다. 금을 긋고, 간격을 띄우고, 격리된 채 분할하는 것이다. 이는 침투이다.
'열린 계'에서 외부적으로 질은 결합하고 입자는 독립하고 힘은 교섭하고 운동은 전달하고 량은 침투한다. 반대로 닫힌 계에서 질은 외부와의 결합을 차단하고, 입자는 내부적으로 견고하게 결합하고, 힘은 분할과 결합을 교환하고, 운동은 분할하고, 양은 분할을 차단한다.
'닫힌 계'이냐 '열린 계'이냐를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단일한 하나의 개별자이냐 여러 가지가 뒤섞인 복합체이냐다. 하나의 구조는 하나의 '닫힌 계'를 중심으로 판별된다.
하나의 도구가 있다. 도구는 연필이다. 열린계는 연필과 사람의 손과의 관계이다. 연필의 질은 사람의 손과 결합한다. 즉 손에 쥐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융합된 것은 아니다. 분리된 채 결합되어 있다. 연필의 양은 사람의 손과 연필을 분할한다. 양에 의해 손과 연필 사이에는 차단된 것이다. 입자는 연필을 손에서 독립시킨다. 힘은 연필과 손을 교섭한다. 운동은 손에서 연필로 일을 전달한다. 양은 손에서 연필로 연필에서 종이로 침투한다.
이러한 '닫힌 계'와 '열린 계'의 차이를 통해 구조체를 이해할 수 있다. 사물들은 열린계로 뒤섞여 있다. 연필 뒤에는 지우개가 붙어있다. 이 지우개는 없어도 된다. 지우개가 붙지 않아도 연필은 독립적으로 기능을 가진다. 이 지우개를 분리하고 보는 것이 '닫힌 계'이다.
닫힌 계냐 열린 계냐는 간단히 내부냐 외부냐로 판단할 수 있다. 외부를 향한 작용은 무조건 열린 계이다. 내부를 향한 작용은 무조건 닫힌 계이다.
열린 계에서 질은 외부와 결합하고, 입자는 외부와 독립하고, 힘은 외부와 교섭하고, 운동은 외부로 전달하고, 양은 외부에 침투한다. 반대로 닫힌 계에서 질은 내부적으로 결합을 차단하고, 입자는 내부적으로 독립을 차단하고, 힘은 내부적으로 교섭을 차단하고, 운동은 내부적으로 전달을 차단하고, 양은 내부적으로 침투를 차단한다.
하나의 건물에 비유할 수 있다. 건물의 질은 그 건물의 울타리 곧 담장이다. 담장은 내부를 차단하고 외부를 수용한다. 건물의 벽은 입자다. 입자는 외부로부터 건물을 독립시키고 내부로부터 독립을 차단한다. 즉 내부의 뭔가가 건물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차단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구조체는 다섯가지 기능을 가지며 이 다섯가지 기능은 실은 한가지 기능에 대한 다섯가지 관점이며 그 내용은 분할과 결합이다. 즉 구조는 분할과 결합을 통해서 무언가를 전달한다. 그 전달이 곧 일이며 일은 기능이다. 일하지 않으면 기능이 아니며 기능이 아니면 구조가 아니다. 구조가 일을 하는 것은 교환 때문이다. 교환은 힘이며 힘은 에너지다. 에너지는 교환이다. 그 교환은 분할과 결합의 교환이다.
위치에너지가 있다. 댐에서 물을 낙하시킨다. 여기서 교환이 일어난다. 즉 위에서 분할하고 아래에서 결합하는 것이다. 이 결합과 분할의 교환을 우리는 에너지라고 말하는 것이다. 곧 힘이다. 힘이 작용하는 모든 것은 결합과 분할과 교환이 있다.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세가지 주요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1) 결합
2) 분할
3) 교환
여기서 1)의 결합은 닫힌계의 외부와 내부에 각각 다르게 대응하므로 질과 입자의 2로 나눠지며 2) 분할도 역시 닫힌 계의 외부와 내부에 각각 다르게 대응하므로 운동과 양의 2로 나뉘어진다. 여기에 교환의 1을 더하여 구조체는 5로 완성된다.
우리는 어떤 사물을 판단할 때 그 단일한 사물 안에서 결합기능과 분할기능을 판별할 수 있다. 그 결합과 분할은 각각 내부와 외부를 향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또 양자를 교환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으며 그 교환을 통해 무언가를 전달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며 그 전달을 우리는 일로 명명한다.
자동차는 승객을 전달한다. 컵은 커피를 전달한다. 야구공은 투수의 힘을 타자의 방망이에게로 전달한다. 지구는 이 행성을 은하계의 가장자리로 전달하고 있다. 모든 구조체는 결국 무언가를 전달하고 있다.
그 전달은 항상 결합과 분할의 교환형태로 성립하며 이 일은 내부와 외부를 향하여 일어나고 있다. 이를 판단하여 우리는 구조체의 작용을 정확하게 분석할 수 있다.
내 컴퓨터에서 홍길동의 컴퓨터로 파일을 전달한다. 먼저 컴퓨터가 파일을 결합한다. 다음 패킷단위로 분할한다. 다음 교환한다. 이러한 결합과 분할과 교환에 의해 정보가 전달된다. 에너지의 작용도 역시 그러하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결합과 분할과 교환으로 하여 그 존재가 증명되는 것이다.
'구조론'은 매우 쉽다. 필자는 사람들이 '구조론'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를 납득하지 못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구조론은 매우 어렵다. 우선 필자조차도 구조론을 용이하게 설명할 수 있는 어휘를 수집하는데 애를 먹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구조론은 세상 모든 것은 '5'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5'라는 숫자에 집착해서는 안된다. 편의상 숫자로 표현하고 있지만, 여기서 '5'는 굳이 숫자 5가 아니다. 숫자 '5'를 강조하는 것은 '질>입자>힘>운동>량'이라고 말하면 너무 번거롭기 때문이다. 더구나 사람들은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질은 무엇인가?
양은 무엇인가?
'질'과 '양'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나라에 필자를 제외하고 단 1명도 더 없을 것이다. 쉽게 가자. 그렇다면 질과 양을 합쳐서 '질량'은 무엇인가? '질'은 결합되지 않는 것을 의미하고 '양'은 쪼개지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결합되지 않는 것을 쪼개지지 않는 것으로 나타낸 것이 곧 '질량'이다. 이렇게 설명하면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사람들은 추상적인 사고에 약하다. '입자'란 무엇인가? '힘'이란 무엇인가? '운동'이란 무엇인가? 이런 개념들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지구상에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러므로 필자는 쉽게 '5'로 되어 있다고 말하지만, '5'라는 숫자에 집착해서는 구조론의 참다운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
옛날에 어떤 수학자는 말했다. '세상 모든 것은 숫자로 되어 있다.' 이 명제는 틀렸다. 그러나 세상의 존재하는 모든 것을 숫자로 나타낼 수는 있다. 숫자는 기호다. 기호로 나타낼 수 있다. 구조론의 5 역시 하나의 기호에 불과한 것이다.
또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세상 모든 것은 '시작과 끝'의 '2'로 되어있다. 여기서 시작과 끝이 중요한 것이지, '2'가 본질은 것은 아니다. 모든 개별자는 겉과 속, 안과 밖, 원인과 결과, 본질과 현상, 요소와 효과, 실체와 관계의 2로 나타낼 수 있다. 단지 나타낼 수 있을 뿐이다. 그 숫자 2에 집착해서는 안된다.
결론적으로 구조론에 의하면 세상 모든 것은 '질>입자>힘>운동>량'의 5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이는 구조론을 물리법칙에 적용했을 때이다. 구조론은 보편원리로서 적용되지 않는 분야가 없다. 이를테면 소설이나, 영화나, 음악에도 적용될 수 있다. 소설이라면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의 5구조를 대입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질>입자>힘>운동>량'의 어휘들에 집착해서도 안된다.
구조론을 참다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용되는 추상개념으로서의 어휘들보다는 구조 그 자체에 집중해야 한다. 어쨌거나 구조론이 증명하는 바 '내부에 기능을 가지고 있는 모든 독립적 존재자'는 5요소의 최소구성단위를 가진다.
"왜 하필이면 5인가? 6이나 7이면 안된다는 법이 있는가?"
숫자로 나타내기는 편리하지만 이렇게 오해를 유발한다. 오해이다. 구조론은 기능을 가진 독립된 단일 구조체를 해부한다. 그것은 '닫힌 계'이다. 하나의 구성체 내부에서 기능을 가진 구성요소의 수가 5를 넘을 수 없다. 구조가 붕괴하기 때문이다.
왜 5를 넘으면 구조가 붕괴하는가? 모래위에 집을 지으면 사상누각이 된다. 그 집은 기울어지고 종내에는 무너지게 되어 있다. 구조원리상 그러하다.
'시작과 끝'은 왜 둘일까? '시작과 중간과 끝'의 3단계로 만들수도 있다. 동서남북은 넷이지만 4방, 8방, 16방, 32방이 될 수도 있고 각도로 따지면 360도가 될 수도 있고, 세분하면 무한대가 될 수도 있다. 1년은 사계절이고, 하루는 24시간이다. 혹은 밤과, 낮이다. 혹은 밤과, 아침과, 오전과, 정오와, 오후와, 저녁과, 밤과, 새벽이다. 이러한 분류구분은 줄어서 1이 될 수도 있고, 늘어서 무한정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이를 2로 혹은 4로 혹은 24로 나누는 것은 분류기준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 분류기준이 무엇인가에 따라 2가 될 수도 있고 무한대가 될 수도 있다.
구조론에서는 그 분류기준은 '기능'이다. 구조론에서 '5'라는 것은 기능을 가진 차별화된 요소의 수가 '5'라는 것이다. 여기서 요소이냐 요소가 아니냐를 구분하는 단위는 기능을 가졌느냐, 가지지 않았느냐이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이런 경우를 예로 들 수 있다.
일본의 어떤 목수가 유명한 건물을 한 채 지었다. 그 건물은 못을 단 한개만 사용하고 있는데, 그 못 하나를 뽑으면, 건물 전체가 무너지도록 설계되어 있다고 한다. 단지 못 하나만을 뽑았을 뿐인데 왜 건물전체가 무너질까? 이것이 구조다. 구조론도 이와 같다.
기능이 없는 즉, 없어도 되는 불필요한 요소를 완벽하게 제거했을 때 5가 남는다. 우리가 사용하는 물건들에는, 사실 없어도 되는 부분들이 무수하게 있다. 그 불필요한 부분을 하나하나 제거해 간다고 치자. 이제 더는 제거할 수 없는 어떤 한계에 다다를 수 있다.
여기서 부터는 어디든지, 단 하나만 제거해도 전체를 못 쓰게 된다. 기능이 정지하는 것이다. 이때 남은 것이 곧 5인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기준은 쓰느냐 못 쓰느냐 곧 '기능'이다.
자동차가 있다. 문짝이 없어도 차는 굴러간다. 트렁크가 없어도 차는 굴러간다. 의자의 시트를 제거해도 차는 굴러간다. 그러나 엔진이 없다면 그 차는 더 이상 차가 아니다. 이런 식으로 제거해도 되는 것을 완벽하게 제거하고, 더 이상 제거해서는 자동차일 수 없는 한계상황에서 남는 것이 5이다.
여기서 왜 하필이면 '기능'으로 구분하는가 하는 질문이 있을 수 있다. 그 이유는 개별자를 구분하는 기준이 곧 기능이기 때문이다. 생각하자. 폐차된 자동차와 고철은 무엇이 다른가? 휴지와 연습장은 무엇이 다른가? 쇠덩어리와 쇠망치는 무엇이 다른가? 우리는 기능을 두고 사물을 판별한다. 전봇대로 이빨을 쑤시면 곧 이쑤시개가 되는 것이다.
구조론에 의하면 어떤 하나의 사물에는 기능을 가진 구성요소의 수가 다섯 개 뿐이 없다. 왜 여섯이 아닌가? 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기능은 배달된다. A에서 B로 기능이 배달되어야 한다. 배달되지 않으면 기능이 아니다.
여섯 개일 경우 하나가 남으므로 그 하나에는 기능이 배달되지 않는다. 즉 어떤 사물이 여섯 개의 구성요소를 가졌을 경우, 그 중 하나의 요소는 기능이 정지된다. 사용되지 않는 것이다. 사용되지 않는 부분은 소거된다. 고로 다섯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법칙, 'A에서 B로 임의로운 전달이 있을 경우, 주는 쪽 A와 받는 쪽 B의 값은 동일해야 한다'. 즉 컴퓨터 A에서, 컴퓨터 B로 파일을 전송하려면, 주는 쪽과 받는 쪽이 동일한 프로그램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는 쪽은 MS워드인데 받는 쪽은 한글이라면, 파일의 전송은 불가능하다. 개미가 코끼리에게 건빵을 전달한다든가, 코끼리가 개미에게 비스킷을 전달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능이다.
'입력과 출력의 값은 항상 동일해야 한다'.
이는 기본적인 물리법칙이다. 구조론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왜 '5'인가? '시작과 끝'은 2다. '시작=끝'으로 에너지보존의 법칙에 의하여 양쪽의 값은 동일하다. 시작과 끝이 동일하다면, 시작과 끝으로 굳이 나눌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양자는 통일된다. 즉 시작과 끝은 합쳐져서 독림된 개별자로서의 구조체 1이다. 그런데 왜 시작과 끝의 2로 나뉘는가?
'시작과 끝'은 시간개념이다. 물리법칙의 시간성에 의해 개별자 1이, 기능의 2로 나누어지는 것이다. 만약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것도 나뉘어지지 않는다. 나누어지는 모든 것은 시간에 의존하고 있다.
질 1은 입자2로 나뉘어진다. 입자 1은 힘 2로 나뉘어진다. 힘1은 운동2로 나뉘어진다. 운동1은 량 2로 나뉘어진다. 양은 나뉘어지지 않는다. 반대로 양2는 합쳐져 운동 1이 되고, 운동 2는 합쳐져 힘 1이 되고, 힘 2는 합쳐져서 입자 1이 되고, 입자 2는 합쳐져 질 1이 된다. 질은 합쳐지지 않는다.
여기서 '나뉘어지지 않는 것'을 '양'이라 하고, '합쳐지지 않는 것'을 '질'이라 한다. 질(質)이란 바탕이라는 뜻이다. 바탕이므로 합쳐지지 않는다. 합쳐진다면 결코 바탕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양(量)은 나뉘어지지 않는다. 양(量)은 헤아린다는 뜻이다. 나눠진다면 헤아릴 수 없다.
'흙'은 헤아릴 수 없다. 자꾸만 잘게 나눠지기 때문이다. '밀가루'도 헤아릴 수 없다. 자꾸만 잘게 나눠지기 때문이다. 더 이상 나눠지지 않는 것은 원자 알갱이다. 원자는 '양'으로 표시한다. 즉 '양'은 나눠지지 않는 원자인 것이다. 반대로 질은 더 이상 합쳐지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물질은 나눠지지 않는 것과, 합쳐지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그러하다. 왜냐하면 합쳐진다면 합쳐져서 다른 것으로 변해버리기 때문이다. 그것이 다른 것으로 변해버린다면 우리는 그것을 개별자로 인정할 수가 없다. 나눠진다면 나눠져서 다른 것으로 변해버리기 때문에 판단기준이 될 수 없다.
종이는 합쳐져서 '공책'이 된다. 종이 한 장은 하나의 입자이다. 질이 아니다. 종이의 질은 목재성분이다. 종이는 나무를 갈아서 만든 펄프를 합쳐놓은 것이다. 나무와 쇠는 합쳐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질이다.
여기서 '질'은 '절대로 합쳐지지 않는다'는 개념, 그리고 '양'은 '절대로 나눠지지 않는다'는 개념을 반드시 기억하여야 한다. 그러나 질과 양의 중간에서 입자와, 힘과, 운동은 나눠지기도 하고 합쳐지기도 한다. 운동이 합쳐지면 가속도가 되고, 입자가 나눠지면 에너지가 된다. 우리는 자연의 관찰을 통해서, 입자가 합쳐지거나 나눠지며, 힘과 운동도 역시 나눠지거나 합쳐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구조론이 '5'로 완성되는 것은, 이 합쳐지거나 나눠지는 성질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질과 양에서 절대로 합쳐지거나 나눠지지 않는 성질 때문이다. 왜 6이나 7이 아니라 하필 5인가? 양은 더 이상 나눠지지 않기 때문이다. 양이 나눠진다면 6이나 7이나 8이나 9로 자꾸만 늘어날 수 있다. 무한대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양'은 결코 나눠지지 않는다. 질이 합쳐진다면 역시 무한정 증가할 수 있다. 그러나 질은 어떤 경우에도 합쳐지지 않는다. 그곳이 더 이상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한계이다.
질과 양에서 변화는 정지한다. 입자와 힘과 운동은 변화하지만 질과 양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질량보존의 법칙에 의해 양은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는다. 절대로 변화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구조론에 있어서 요소판별의 절대적인 기준이다. 마찬가지로 질은 어떤 경우에도 합쳐지지 않고, 양은 어떤 경우에도 쪼개지지 않는다. 고로 우리는 구조체의 요소의 수를 헤아릴 수 있다.
나무와 쇠가 합쳐진다면 나무와 쇠는 더 이상 질이 아니다. 지금까지 나무와 쇠를 합성하는데 성공한 과학자는 단 한 사람도 없다. 물과 불은 합쳐지지 않는다. 아직까지 물과 불을 합성하는데 성공한 과학자는 없다. 물론 뛰어난 기술자는 구리와 아연이나 주석을 합쳐서 합금을 만들곤 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그 질은 변하지 않았다. 설탕물 안에서 설탕과 물은 합쳐지지 않았으며, 소금물 안에서 소금따로, 물 따로이다. 그 합금 안에서 구리성분과 주석 혹은 아연 성분은 마치 쇠 상자에 나무토막을 넣어두듯 완전히 합쳐지지 않고, 특수한 조직양상으로 분리된 채 결합상을 나타낼 뿐이다.
왜 '질'은 합쳐지지 않는가? 합쳐지지 않는 것을 '질'로 명명했기 때문이다. 왜 '양'은 나눠지지 않는가? 나눠지지 않는 단계에서 '양'으로 명명했기 때문이다. 이 개념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질과 양의 절대로 합쳐지지 않고 절대로 나눠지지 않는 원리를 이해하는 것만으로 구조론의 반은 이해한 셈이 된다.
여기에 '폐차'가 한 대 있다. 이 폐차를 두고 자동차로 분류할 지, 고철로 분류할 지는 기능이 결정한다. 마찬가지로 '양'인가 '질'인가는 그 기능이 결정한다. 그 기능에서 합쳐지는가? 나눠지는가?의 여부를 두고 판단하는 것이다.
기능은 '전달'이다. 전달되지 않으면 '기능'이 아니다. 그런데 입력과 출력의 값은 항상 동일해야 한다. 기능에 의해 A에서 B로 전달되는 것이다. 그런데 '5'는 홀수다. 전달되려면 짝수여야 한다. 그러므로 구조론은 최종적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즉 일정한 구간 안에서 전달하되 질과 양에 의해 양쪽으로 차단되므로 최종적으로는 전달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질과 양에 의해 차단되지 않고 무한정 전달된다면 어떻게 될까? 빠져나가버린다. 즉 에너지가 바깥으로 완전히 새나가 버리는 것이다. 이때 기능을 상실한다. 자동차는 승객을 서울에서 부산으로 전달한다. 그런데 에너지가 새나간다면 어떻게 될까? 승객이 타는 즉시 내려버린다. 또는 부산을 통과하여 계속 달린다. 즉 구멍난 호스처럼 중간에서 새나가는 것이다.
새지 않아야 한다. 서울에서 전달된 일이 부산에서 정확히 멈추어야 한다. 부산을 통과해서 지나쳐 가버린다면? 구조론이 '5'에서 끝나는 이유는 최종적으로 힘의 전달을 차단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즉 구조는 '에너지'를 전달하지만 동시에 최종목적지에서 그 전달을 멈추는 것이다. 어디서 멈추는가? '양'에서 멈춘다. 어디서 멈추는가? 질에서 멈춘다. 고로 홀수인 '5'가 되는 것이다.
짝수의 경우를 보자. '시작과 끝'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시작은 끝이 되고, 끝은 다시 시작이 된다. 이 경우 환원된다. 즉 서울에서 부산으로 배달한 상품이 다시 서울로 돌아와버리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서울에서 부친 물건이 정확하게 부산에 떨어지게 할 수 있는가? 구조론이 홀수인 5가 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힘을 전달하되, 원래의 위치에 되돌아오지는 않고, 특정의 타깃에 정확하게 멈추게 하는 것이 구조론이다. 곧 기능이다. 반면 기능이 아닌 경우를 보자. 강물이 흐른다. A에서 B로 간다. 계속 간다. 멈추지 않는다. 이때 기능은 상실한다. 우리는 그 강물을 이용할 수 없다. 차단해야 한다. 댐을 쌓아야 한다. 강물을 멈추게 해야지만 우리는 그 강물을 이용할 수 있다. 이용할 수 없는 것은 기능이 없는 것이다.
지구는 멈추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우주공간을 항해하고 있다. 지구는 팽이처럼 돌면서 총알처럼 날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 에너지를 우리는 이용할 수 없다.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멈추지 않는 운동은 기능이 없으므로 정지해 있는 것과 같다.
멈추지 않고 통과해버리는 것을 우리는 이용할 수 없다. 기능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기능은 힘을 전달하되 특정 위치에서 멈추는 것으로 정의될 수 있다. 왜 5인가? 어떤 하나의 개체에는 전달과 멈춤의 단위가 5개 있는 것이다.
가만이 멈추어 있기만 해도 기능이 아니다. 통과해버려도 역시 기능이 아니다. 전달과 멈춤이 동시에 공존해야 한다. 중심이 있다. 중심은 에너지다. 위로 전달하는 것이 입자이고 멈추는 것이 질이다. 아래로 전달하는 것은 운동이고 멈추는 것은 양이다.
여기까지에서 기억해야할 규칙들은?
질 : 합쳐지지 않는다.
양 : 쪼개지지 않는다.
1) 독립된 단일한 하나의 구조체를 이루는 구성요소의 수는 5다.
2) 구성요소의 판별기준은 기능이다.
3) 기능은 A에서 B로 배달한다.
4) 기능이 A에서 B로 배달할 때 A와 B 양쪽의 값은 동일해야 한다.
5) 기능이 배달하는 것은 결합과 분할이다.
6) 결합은 질에서 차단되고 분할은 양에서 차단된다.
하나의 닫힌 계(독립된 구조체) 내부에서 질은 결합을 차단한다. 양은 분할을 차단한다. 질은 합쳐지지 아니하고, 양은 쪼개지지 아니한다. 질과 양은 양쪽에서 닫힌 계의 괄호 [ ]를 이룬다. [<- 질 : 양 ->]가 된다. 질과 양쪽이 위와 아래에서 안팎으로 문을 걸어 잠근다. 이로서 하나의 독립된 '계'가 성립한다.
질은 위에서 결합을 차단하므로, 반대로 아래쪽에서 내부적으로 결합을 개방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곧 입자다. 양은 아래에서 분할을 차단하므로 반대로 위쪽에서 내부적으로 분할을 개방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곧 운동이다. 가운데에서 입자의 결합과 운동의 분할을 교환하는 것이 곧 힘이다.
고로 독립된 단일 구조체로서의 '닫힌 계'의 구성요소의 수는 5가 된다.
본래는 구조체 1이며 구조체 1은 시간상에서 질과 양의 2다. 곧 질과 양은 각각 결합과 분할 및 그 차단이다. 결합하였으므로 더 이상은 결합하지 않는 것이 질이며, 아직 결합하지 않았으므로 이제 결합하는 것이 입자이고 반대로 분할하지 않았으므로 이제 분할하는 것이 운동이고 반대로 이미 분할 하였으므로 더는 분할하지 않는 것이 양이다. 중간에서 양자를 교환하는 것이 힘이다.
질 - 결합하였으므로 결합하지 않는다.
입자 - 결합하지 않았으므로 결합한다.
힘 - 결합과 분할을 교환한다.
운동 - 분할하지 않았으므로 분할한다.
량 - 분할하였으므로 분할하지 않는다.
구조체의 요소의 수는 위와 같이 5다. 왜 5인가? 본래는 닫힌 계 1이다. 닫힌 계 1은 일한다. 일은 결합과 분할이다. 곧 2다. 결합과 분할은 곧 질과 양이다. 질과 양이 동전의 양면처럼 상반된 작용을 하는 것이 입자와 운동이다. 이제 4가 되었다. 질과 양은 중간의 힘에서 교환된다. 결국 5다.
여기서 5는 질과 양이 각각 가지는 결합과 분할의 이중성을 나타내어 4를 얻고, 양자의 교환을 나타내어 1을 추가하므로 최종적으로 5에 이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5'라는 숫자에 집착해서 바라보지 않아야 한다. 본래는 구조체 1이고, 1은 동전의 양면처럼 이중성을 가졌으며 그 이중성은 결합과 분할이다. 이들은 내부적으로 결합하고 분할하면서 동시에 외부적으로 결합과 분할을 차단하므로서 닫힌 계를 독립시킨다.
여기서 '닫힌 계'의 개념에 주목해야 한다. 닫힌 계는 외부와 구분되는 독립성을 의미한다. 질과 양이 결합과 분할을 차단하므로서, 바깥쪽으로 문을 걸어잠근다. 이로서 독립된 계가 형성된다. 곧 닫힌계이다. 이 닫힌 계 안에서 내부적으로 결합하고 분할하며 이를 교환하는 것으로서 하나의 구조가 성립하는 것이다. 만약 이 다섯가지 요소 중 하나가 부족하면 구조는 붕괴한다. 하나가 남으면 그 부분은 기능하지 않으므로 소거된다.
하나의 소립자도 하나의 물건도 하나의 조직도 이러한 기능에 의하여, 비로소 그 존재가 성립되는 것이다. 반대로 열린계에서는 다르게 나타난다. 이 점은 지극히 미묘하므로 흔히 착각을 유발 할 수 있다.
'열린 계'에서 질은 결합한다. 그러나 이 결합은 내부적인 융합이 아니다. 즉 차단된 한도 바깥과의 교섭이며 실제로는 결합이 아니라 무지개처럼 공존이다. 말하자면 질이 다른 외부와 결합한 경우 기능적으로 분리되어 별개로 독립된 채 이웃하여 공존한다.
망치가 있다. 망치는 도구이다. 도구는 사람의 손과 결합하고서야 비로소 기능한다. 그러나 이때 도구와 사람은 구분된다. 별도의 존재이다. 망치는 망치이고 사람은 사람이다. 둘은 섞이지 않는다. 고로 이는 일에서 물리적으로 결합이지만 진정한 융합이 아니다. 절대로 결합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양은 외부와 분할한다. 그러나 이 분할은 정반대의 의미이다. 즉 쪼개지는 것이 아니라 차별화되어 구분되는 것이다. 금을 긋고, 간격을 띄우고, 격리된 채 분할하는 것이다. 이는 침투이다.
'열린 계'에서 외부적으로 질은 결합하고 입자는 독립하고 힘은 교섭하고 운동은 전달하고 량은 침투한다. 반대로 닫힌 계에서 질은 외부와의 결합을 차단하고, 입자는 내부적으로 견고하게 결합하고, 힘은 분할과 결합을 교환하고, 운동은 분할하고, 양은 분할을 차단한다.
'닫힌 계'이냐 '열린 계'이냐를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단일한 하나의 개별자이냐 여러 가지가 뒤섞인 복합체이냐다. 하나의 구조는 하나의 '닫힌 계'를 중심으로 판별된다.
하나의 도구가 있다. 도구는 연필이다. 열린계는 연필과 사람의 손과의 관계이다. 연필의 질은 사람의 손과 결합한다. 즉 손에 쥐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융합된 것은 아니다. 분리된 채 결합되어 있다. 연필의 양은 사람의 손과 연필을 분할한다. 양에 의해 손과 연필 사이에는 차단된 것이다. 입자는 연필을 손에서 독립시킨다. 힘은 연필과 손을 교섭한다. 운동은 손에서 연필로 일을 전달한다. 양은 손에서 연필로 연필에서 종이로 침투한다.
이러한 '닫힌 계'와 '열린 계'의 차이를 통해 구조체를 이해할 수 있다. 사물들은 열린계로 뒤섞여 있다. 연필 뒤에는 지우개가 붙어있다. 이 지우개는 없어도 된다. 지우개가 붙지 않아도 연필은 독립적으로 기능을 가진다. 이 지우개를 분리하고 보는 것이 '닫힌 계'이다.
닫힌 계냐 열린 계냐는 간단히 내부냐 외부냐로 판단할 수 있다. 외부를 향한 작용은 무조건 열린 계이다. 내부를 향한 작용은 무조건 닫힌 계이다.
열린 계에서 질은 외부와 결합하고, 입자는 외부와 독립하고, 힘은 외부와 교섭하고, 운동은 외부로 전달하고, 양은 외부에 침투한다. 반대로 닫힌 계에서 질은 내부적으로 결합을 차단하고, 입자는 내부적으로 독립을 차단하고, 힘은 내부적으로 교섭을 차단하고, 운동은 내부적으로 전달을 차단하고, 양은 내부적으로 침투를 차단한다.
하나의 건물에 비유할 수 있다. 건물의 질은 그 건물의 울타리 곧 담장이다. 담장은 내부를 차단하고 외부를 수용한다. 건물의 벽은 입자다. 입자는 외부로부터 건물을 독립시키고 내부로부터 독립을 차단한다. 즉 내부의 뭔가가 건물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차단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구조체는 다섯가지 기능을 가지며 이 다섯가지 기능은 실은 한가지 기능에 대한 다섯가지 관점이며 그 내용은 분할과 결합이다. 즉 구조는 분할과 결합을 통해서 무언가를 전달한다. 그 전달이 곧 일이며 일은 기능이다. 일하지 않으면 기능이 아니며 기능이 아니면 구조가 아니다. 구조가 일을 하는 것은 교환 때문이다. 교환은 힘이며 힘은 에너지다. 에너지는 교환이다. 그 교환은 분할과 결합의 교환이다.
위치에너지가 있다. 댐에서 물을 낙하시킨다. 여기서 교환이 일어난다. 즉 위에서 분할하고 아래에서 결합하는 것이다. 이 결합과 분할의 교환을 우리는 에너지라고 말하는 것이다. 곧 힘이다. 힘이 작용하는 모든 것은 결합과 분할과 교환이 있다.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세가지 주요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1) 결합
2) 분할
3) 교환
여기서 1)의 결합은 닫힌계의 외부와 내부에 각각 다르게 대응하므로 질과 입자의 2로 나눠지며 2) 분할도 역시 닫힌 계의 외부와 내부에 각각 다르게 대응하므로 운동과 양의 2로 나뉘어진다. 여기에 교환의 1을 더하여 구조체는 5로 완성된다.
우리는 어떤 사물을 판단할 때 그 단일한 사물 안에서 결합기능과 분할기능을 판별할 수 있다. 그 결합과 분할은 각각 내부와 외부를 향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또 양자를 교환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으며 그 교환을 통해 무언가를 전달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며 그 전달을 우리는 일로 명명한다.
자동차는 승객을 전달한다. 컵은 커피를 전달한다. 야구공은 투수의 힘을 타자의 방망이에게로 전달한다. 지구는 이 행성을 은하계의 가장자리로 전달하고 있다. 모든 구조체는 결국 무언가를 전달하고 있다.
그 전달은 항상 결합과 분할의 교환형태로 성립하며 이 일은 내부와 외부를 향하여 일어나고 있다. 이를 판단하여 우리는 구조체의 작용을 정확하게 분석할 수 있다.
내 컴퓨터에서 홍길동의 컴퓨터로 파일을 전달한다. 먼저 컴퓨터가 파일을 결합한다. 다음 패킷단위로 분할한다. 다음 교환한다. 이러한 결합과 분할과 교환에 의해 정보가 전달된다. 에너지의 작용도 역시 그러하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결합과 분할과 교환으로 하여 그 존재가 증명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