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록
read 4236 vote 0 2002.09.10 (11:32:08)

옛날에 지가 영화 제목만 보고 혹은

신문에 난 기사 한두쪼가리만 보고 포스터만 보고

흥행여부를 잘 알아맞혔는디

요즘은 국산방화도 대박영화가 많아서리 흥행을 짐작하기 어렵다.

근데 포스터나 제목만 보고 흥행할 영화를 알아맞히긴 어렵지만

딱 아닌 영화는 신통하게 짚어낼수 있었더랬다.

잘된걸 골라낼수 있으면 진짜 고수고

아닌걸 가려낼 수 있으면 중간은 된다고 봐야겠다.

(예를 들면 제목이 짝수면 흥행하고 홀수면 안되는데 세자는 완전망함)
길소뜸 애니깽 화엄경 세친구 <-이런 영화는 꼴딱망함.

각설하고 시는 모르지만

뭐 잘쓴 시가 아니라도 읽어서 술술 읽어지는 시가 있고

딱 가시걸리듯이 걸려서 더 읽을 수 없는 시가 있다.

천상병이 막걸리 먹고 주절거리듯

대충 썼는데 시인지 아닌지 모르겠으되 그래도 흥이 있으니 좋고

제법 멋을 부리고 기교를 부렸는데

상투적인 시어를 써서 조져놓은 것이 또 있는 것이다.

그런 잘못 쓴 시를 볼 때는 슬며시 화가 난다.

특히 상투적인 표현 그 중에서도

~~하나 보다 혹은 ~~만 같다. ~~인 거 같다.

이런 표현 쓴거 보면 딱 용서가 안된다.

이런 표현은 동요에 잘 등장하는 건데

의사가 불분명한

자신없는 표현이다.

의사가 불분명하고 자신 없으면 시를 써서 안된다.

그 중에서도 '고맙기만 하다' '~~정답기만 하다" 이런 표현 쓴 시를

볼 때에는 덩말이뒤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시픈 충동이 으윽(성질도 더럽쥐)

아서라 말어라.

이건 마치 드라마 허준 보다가

임현식이 맨날 "~~하네' "~~하게" 하는 어색한 말투 듣고 짱나는거 가튼거다.

시라는 것은 운이다.

운문이니까 운문의 형식이 있는 것이다.

영감을 받아서 쓰는 거다.

깨달음이 반영되어 있어야 한다.

고대 샤먼의 서사시였고

축제의 노래였으며 본래 신에게 바칠 목적으로 제조되었던 거다.

시는 신에게 바치기 위한 영적인 소통의 수단인 것이다.

고로 신명이 있어야 하고 들뜸이 있어야 하고

리듬에 의해 찾아지는 바다.

그것이 곧 운이다.

문장에 운을 불어넣으므로서 신과 소통할 수 있는 수단이 되는 것이 시다.

그것은 언어적 대칭성에 의하여 성립한다.

모든 시는

산문시든 자유시든 운문이든 단가든 사설이든 잡가든 노동요든

언어적 대칭성을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그 대칭을 깨는 파격이 있고 거기서 울림과 떨림이 얻어지는 것이다.

그러한 언어적 대칭구조를 발견할 수 없는 시는

시가 아니다.

A-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 없기를,
B-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

A-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B-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 가야겠다.

C-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위에서 A는 그의 결심을 밖으로 피력하고 있고
B는 돌이켜 자기 내면을 성찰하고 있다.
그리고 C에서 우주적인 확장을 꾀하고 있다.

A와 B는 서로 대칭된다.
밖으로 내미는 결의와 그 반대되는 자기 내면으로의 성찰
대칭형식을 두 번 반복하므로서 운을 이끌어내고

어떤 막다른 골목에 이른듯한 답답함이 일어났을 때
거기에서 통쾌한 반전 즉 우주적인 확장으로서 결말을 맺는 것이다.

보통 영화는 길이 나오면 끝나는데
그것은 외적인 사건의 내면화를 통한 반전 그리고 우주적 확장으로의 결말이라는
공식을 반영한 것이다.

유심히 보면 영화의 90프로 이상은 길에서 끝난다.
길은 다른 길로 이어지고 그것은 시간적 계속성과 공간적 확장을 뜻한다.

즉 그 사건이 관객으로 이입되어 관객 마음속의 또다른 사건으로
이어지는 데서 지평이 찾아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시 역시
길이 나와야 끝이 나오게 되는데
오늘(시간적 확장) 밤에도(공간적 확장) 별이 바람에스치운다(사건의 진행)
으로 형식화되고 있다.

모든 시가 이와 닮은 꼴이다.

A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 -시간적인 사건진행, 개인적인 영역

B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 공간적인 진행, 사회적인 영역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 사건의 반복을 통한 리듬의 강조

C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눈믈 흘리오리다 - 내면적인 성찰, 개념적인 확대

위 진달래꽃에서 A 연에서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의 앞 구절과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의 뒷구절은 의미의 내용상 대칭이 성립된다.

뿐만 아니라 A와 B 사이에도 대칭되고 있다.
A는 시간적인 사건의 진술이 되고
B는 공간적인 사건의 묘사가 되며
A는 개인적인 인식영역에서 성립하고
B는 사회적인 실천영역으로 성립한다.
여기서도 대칭구조가 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에서는 위 A B의 대칭구조의 반복구사로 하여
운이 이미 성립하였기 때문에 노래부르듯이 한번 더 후렴처럼 때려주며
소프라노로 톤을 끌어올리고 있다.

누구든지 이 부분에서 호흡이 빨라지고 고조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꽃을 밟는다는 표현은
자기 심장을 밟는다는 뜻으로 감정이입된다.
격정적인 고조가 있는 것이다.
역시 공간적 묘사와 시간적 서술을 대칭시키면서 극한으로 이끌고 있다.

자 이렇게 턱없이 고조시켜 놓은 감정을 어떻게
무난하게 소프트랜딩 시켜낼 것인가?

소프라노로 올려놓은 톤을 어떻게 가라앉힐 것인가?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밖으로 드러난 사회적 실천을
내면화, 추상화, 개념화하고 있다.

죽어도에서 감정은 극한을 넘어버렸다.
아니눈물 흘리오리다에서 이미 눈물을 흘렸고 그 눈물의 의미를
가치전도 하는 방법으로 추상화하고 있다.

이미 눈물은 눈물이 아니다.
이미 감정은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초월이다.

여기서 윤동주의 서시와 비교하면
서시 -공적영역에서 사적영역을 대비한 후 우주적인 확장을 꾀한다.
진달래꽃 -사적영역에서 공적영역을 대비한 후 내면적으로 추상화한다.

언뜻 상반되는 것 처럼 보이지만 대칭구조와
반전을 통한 의식의 지평에 있어서는 동일한 서사구조를 노출하고 있다.

운동주는 그것을 하늘로 날려보냈고
소월은 안으로 클로즈엎하여 갈무리해두었다.

그러나 의식의 지평를 통한 인식의 비약에 있어서는 동일한 구조가 된다.

두보를 시성이라 칭하는 이유는

미학적으로 가장 완결된 형태의 시를 선보였기 때문이다.

교과서라 할 만하다.

꼭 교과서적인 시를 쓸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기본은 해놓고

파격과 변형의 묘를 즐기는 바

추우탄 1(秋雨歎 基一)

빗속에 온갖 풀들 가을이라 문드러져 죽었건만
섬돌 아래 결명은 때깔 곱구나. - 공간적 서술에서 대칭을 보이고 있다.

잎이 붙어 가지에 가득하니 비취새 깃털 덮개인 듯
꽃이 피어 무수한 것은 황금 돈인 듯. - 시간적 묘사에서 대칭을 보이며 동시에
앞의 연과도 대칭하고 있다.

찬바람 쓸쓸히 네게 거세게 불어대니
후에는 홀로 서 있기가 어려울까 걱정이라. -외면적 상황에서 내면적 수용으로
대칭구조를 반복해 리듬을 주므로 감정을 고조하고 있다.

당 위의 서생은 공연스레 흰 머리,
바람을 대하여 세 번 향기를 맡고서는 운다네. -주관적인 감정에서
객관적인 상황인식으로 감정처리를 하는 동시에 개념화에 성공하고 있다.

雨中百草秋爛死 階下決明顔色鮮 著葉滿枝翠羽蓋 開花無數黃金錢
凉風蕭蕭吹汝急 恐汝後時難獨立 堂上書生空白頭 臨風三嗅馨香泣

이러한 시의 구조에서 기본적인 대칭선은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진술
외면적이고 사회적인 묘사
위 양자의 대칭과 반복을 통한 감정의 고조
추상화, 개념화, 객관화, 우주적 확장을 통한 감정처리의 순으로 완결하고 있다.

이러한 대칭과 반복과 감정고조와 객관화를 통한 감정처리가
없으면 시라고 할 수 없다.

물론 이러한 패턴은 근대시에서 종종 무시되거나 파격된다.
그러나 기본이 되는 상태에서의 파격과
기본이 안된 상태에서의 변형은 그 맛에서 드러나버리는 것이다.

이게 과연 시가 되는가 되지 않는가부터 먼저 판단해야 한다.
차라리 수필로 쓰는게 더 낫다 싶으면 수필이어야 한다.

시로서 가장 아름다울 때 시일 수 있는 것이다.
아무거나 다 시일 수 있지만

아무거나 다 시가 아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정현종 <섬>

여기서는 파격과 변형이다. 위의 반복도 대칭도 고조도 감정처리도 없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갖출 것은 다 갖추고 있다.

사람들 사이에(개인적 주관적 영역이면서 사회적 영역)
섬이 있다, (객관적 영역이면서 공간적 영역)
그 섬에 가고 싶다.(시간적 영역이면서 감정고조)

여기서는 감정처리 곧 결말이 앞에 나온다. 감정의 고조 즉 반전이 뒤에 나온다.
형식을 파괴하고 있다.

그러나 기본적인 대칭구조의 틀은 깨지 않으면서
그래도 남는 여운의 뒷맛이 약간의 아쉬움을 주기도 하지만
충분히 매끄럽다.

이 시는 미완성의 시 처럼 되어 있어
반드시 있어야 할 지평이 관객의 몫으로 남는다.

즉 바다의 섬(생략된)과 사람사이의 섬이 대칭을 이루면서
섬의 의미가 개념화, 추상화, 객관화 하는 과정을 거치는데서
우주적인 지평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산문시도 좋다.
파격도 좋다.
변형이어도 상관없다.
어쩌랴~!
그러나 암시로 남겨놓던 관객의 몫으로 남겨놓던
어딘가에 있어야 하지 그것이 원초적으로 없어서는 시가 아니다.

영화가 끝나면 길이 나오고
글 위에서 스토리는 이어지며 그 이어지는 부분은 관객의 몫이다.

관객은 감정이입을 느끼면서
올라가는 자막과 함께 고조된 반전감을 순치시킨다.

시 역시 마찬가지다.
그 섬에 가고 싶다. 관객은 올라가는 엔드 자막을 눈으로 쫓으면서
그 어딘가의 길로 하염없이 가는 것이다.
고조된 감정을 순화하면서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섬, 고립과 단절과 억압의 감정을 그렇게 처리한다.
지평이다.

이게 없으면 소설이 소설되지 않고 시가 시되지 않으며 극은 끝나지 않는다.
하여 또 가야만 한다.

바우생각 - 의견은 다를 수 있으나 시의 맛은 누구라도 같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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