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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3601 vote 0 2009.04.23 (20:08:30)


보편원리 그리고 현대성

-21일 동영상강의입니다.-

인간들 생각은 원래 잘 바뀌지 않는다. ‘양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양식이란 이것저것 전부 얽혀 있어서, 하나를 바꾸면 결국 다 바꿔야 한다는 거다. 다 바꿀 수 없으므로 하나도 바꾸지 않으려든다.

종교가 그 예다. 종교의 교리가 과학과 충돌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지만, 그 종교의 허구성을 폭로한 과학자들도 절반은 종교를 신앙한다. 명백한 모순이 있어도 대충 얼버무리고 지나간다.

과학이 종교의 껍데기를 쳤을 뿐 본질은 건드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왜 사는가?’ 하는 문제에 과학이 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종교집단 뿐 아니라 부조리는 사회 전반에 걸쳐 광범위 하게 존재한다.

부시의 전쟁책동 하나 해결못하는 무능한 과학이다. 미국발 금융위기 하나 해결못해서 우왕좌왕 한다. 이스라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다. 자기 앞가림도 못하니 오지랖넓게 남의 문제에 나서지 못한다.

후진국에서 독재가 기승을 부려도 할 말이 없다. 스와질랜드국왕 음스와티가 처녀간택을 해도, 브루나이국왕이 하렘을 운영해도, 남아공에서 에이즈가 창궐해도 속수무책이다. 눈만 꿈벅하고 있다.

그러나 드물게 생각이 바뀌기도 한다. 18세기 계몽사상의 등장 이후 참 많은 것이 바뀌었다. 그리고 더 많은 것이 바뀌어질 것처럼 보였다. 혁명의 이름으로. 20세기는 혁명의 시대였다.

1917년 러시아혁명을 시발로 열풍처럼 몰아닥쳐 모든 것을 바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지금 혁명의 기대는 꺾어졌다. 인간은 잘 뀌지 않는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바뀔 때는 바뀐다.

중국은 신해혁명으로, 일본은 명치유신으로, 한국은 6월항쟁으로 바뀌었다. 봉건을 극복하고 마침내 근대를 받아들인 것이다. 인간은 왜 바뀌고 또 왜 바뀌지 않나? 그 꺾어지는 지점을 확인하기다.

바뀔 때와 바뀌지 않을 때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 분수령을 점검하자는 거다. 인간은 깨져야 바뀐다. 그냥 깨져서 안 되고 처절하게 깨져야 한다. 무엇이 인간을 깨지게 하나? 당신은 충분히 깨졌는가?

당신은 바뀌었는가? 당신은 근대인이라 말할 수 있는가? 18세기 인간과 21세기 인간이 확연히 다르다면 당신의 내면세계 안에서도 그러한 차이를 관통하고 넘어가는 일대사건이 일어났는가?

하나를 바꾸면 전부 바꾸어야 한다. 비행기가 음속을 돌파할 때 그러하다. 충격파를 견디려면 비행기의 모든 부품을 바꾸어야 한다. 당신 인생의 음속돌파는 언제였는가? 그런 경험없이 막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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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은 일찍 바뀌었다. 갈릴레이 이후 천동설에 기반한 고전적 세계관은 깨졌다. 지동설로 대체되었다. 일대사건이 일어난 거다. 천동설의 붕괴는 서구의 지식인 사회에 굉장한 충격을 주었다.

비행기의 음속돌파와 같은 대충격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무너져 내렸다. 서구인의 정신세계는 다시 건축되었다. 그런 식으로 깨져야 한다. 박살이 나야 한다. 그리고 오류는 시정되어야 한다.

그래야 진보가 있다. 문제는 그런 충격요법이, 일대사건이, 음속돌파가 동양에는 없었다는 점이다. 소식은 진작에 왔다. 동양에 서구의 논리학과 기하학 등 신학문이 전해진지도 대략 500년이 넘었다.

서구인이 중국에 와서 ‘새로운 거 있다. 제법 신통하다’고 500년간 말했지만 무려 500년 동안 계속 한 귀로 흘려들었다. 조선에서 일어난 최초의 거대한 충격은 구한말의 개화다. 그제서야 조금 실눈을 떴다.

500년간 계속 이야기해줬더니 겨우 알아들을락 말락이다. 그것도 총맞고 대포맞고 난 다음의 일이다. 청나라 때 중국상인들은 런던과 파리에 지점을 개설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구문물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일본은 일찍부터 서구와 왕래가 있었다. 혼자서 러시아를 여행하고 온 사람도 있고 서구를 들락날락한 사람도 있었다. 일본열도가 신대륙으로 가는 항로에 있었기 때문이다.

학자들 사이에 난학이 유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호기심 차원에 불과했다. 일본도자기와 판화 우끼요에가 서구에 전해져서 유럽에 일본붐이 크게 일어났어도 정작 일본인들은 무관심했다.

동경만에 흑선이 출현하여 에도시내에 대포알이 꽝꽝 떨어지고서야 뒤늦게 정신차렸다. 왜 일본은 무지했는가? 보편원리를 탐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근본이 깨져야 바뀌는데 근본이 없었기 때문이다.

파편화된 부스러기 생각 말고 통일적으로 조망하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 서구라면 천동설이 근본이다. 그 근본이 있었다. 그리고 깨졌다. 그래서 생각을 바꾸었다. 동양에는 깨질 그것이 없었다.

근대과학의 세 기둥은 무엇인가? 작용반작용 법칙이 짝을 짓고, 엔트로피 법칙이 방향성을 지정하고, 질량보존 법칙이 호환성을 끌어낸다. 이로서 천동설에 맞먹는 근대과학의 체계가 세팅된다.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세상이라는 것의 얼개가 어떻게 만들어져 있느냐다. 세상의 중심이 무엇인가다. 고대인은 북극성을 주목했다. 밤하늘의 별자리가 북극성을 중심으로 돈다고 생각했다.

태두라고 한다. ‘태산북두’다. 고구려 고분벽화도 북두칠성을 중심으로 28수 별자리를 배치하고 사방벽에 사신도를 배치했다. 고구려인의 세계관을 나타낸 것이다. 마땅히 그런 것이 있어야 한다.

과학의 북극성은 무엇인가? 근대과학의 태산북두는 무엇인가? 근대과학의 천동설, 지동설은 무엇인가? 뉴튼역학은 무엇이고 상대성이론은 무엇인가? 그들 사이에 서열관계와 포지션 배분은 어떻게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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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사신이 강희제를 알현하고 시계를 선물로 바쳤다. 독일의 명장이 보석과 황금으로 치장하여 잘 만든 시계다. 청나라 왕이 시계를 선물받고 한다는 말이 '내 시계방을 보여줄까?'였다.

독일사신이 강희제의 시계방을 구경하니 세계 각국에서 선물된 화려한 시계들이 사방 벽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사신은 부끄러움에 몸을 떨었다. 독일시계는 너무나 초라한 시계였던 것이다.

청나라 왕의 생각은 따로 있었다. '바로 이거야! 청나라 장인들이 만든 시계지.' 서양시계를 구경한 강희제가 장인을 시켜 똑같은 것을 만들어내게 했던 것이다. 그렇다. 청나라도 시계를 제작하고 있었다.

그러면 뭐하냐 말이다. 시계 만들면 뭐해? 그 이후로 소식이 없다. 거기서 끝나버린 거다. 보편원리를 모르니 낡은 생각이 새로운 생각으로 대체되지 않는다. 그 시계 뒷쪽의 숨은 함의는 전달되지 않는다.

독일사신이 설마 시계 하나로 청나라 왕을 꼬시려 했을까? 시계를 고리로 서구 근대과학의 우월성을 설파하려 했던 것이다. 잘 되면 청나라에도 러시아의 피터대제 같은 계몽군주가 탄생할 법 했다.

강희제는 피터대제와 상당한 교분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변하지 않았다. 변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시계 따위는 청나라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는 그의 자만심 때문에. 그가 깨지지 않았기 때문에.

깨졌어야 했다. 흑선의 출현에 놀라 기겁을 한 일본인들처럼 충격을 받고 바지에 오줌을 쌌어야 했다. ‘아 내가 인생을 헛살았구나’하고 탄식했어야 했다. 그래야 인간은 변한다. 그러나 강희제는 웃었다.

그는 시계 따위 잔재주로 꼬드기려드는 서양인의 사술에 넘어가지 않았고 따라서 서구학문의 본질에 접근할 기회를 얻지 못했으며 결국 계몽군주가 되지 못했다. 근대성의 세례를 받지 못했다.

중국에서 최초의 근대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조선도 마찬가지다. 조선에도 부대마다 망원경이 두 개씩 보급되어 있었고, 안경도 널리 보급되어 있었다. 담배, 호박, 감자, 토마토, 고구마 따위도 밀려들어왔다.

그 여파로 인구도 몇 배로 늘었다. 조선은 서구의 많은 것을 받아들였다. 그러면 뭐하냐고? 원리를 모르면 말짱 헛일이다. 청은 시계를 제작했지만 단지 제작했을 뿐, 조선은 망원경을 가졌지만 단지 가졌을 뿐이다.

2009년 이 시대에 서울대 나온 한국의 지식인들이 하는 소리도 독일사신 앞에서 으시대는 강희제처럼 깝깝하다. 서구의 것을 겉만 베껴서 본질을 모른다. 원리를 모른다. 흉내는 내는데 응용을 못한다.

주제에 잘 나서 지가 다 아는 줄 안다. 외국유학 다녀와봤자 별반 달라질 것도 없다. 청나라 진상들의 런던지점 객주나 파리지점 객주들이 그렇다. 비단과 도자기를 수출하면서도 배운 것이 없다.

진짜 뭔가를 알고 아는척 하는 사람이 한국에 몇이나 있나? 거의 없다. 원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깨져야 할 세계관조차 없으니까. 서양문물이 밀려와도, 구조론이 나와도 놀라지도 않고 충격받지 않는다.

파리잡아먹은 두꺼비마냥 눈만 꿈벅꿈벅. 아직 한국인은 깨지지 않았다. 깨져야 바뀌는데 깨지지 않았다. 이걸 말하려는 거다. 깨지는건 중심이 깨지는건데 그 깨질 중심이 아예 없다. 속이 텅 비었다.

확실히 강희제는 시계를 만들줄 알고 삼성은 핸드폰을 만들줄 알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표면의 사실보다 배후에 숨은 의미를 알아야 한다. 의미를 알았거든 가치로 나아가야 한다.

가치를 알았거든 개념으로 나아가야 한다. 개념을 잡았거든 원리로 나아가야 한다. 표면의 사실만 알고 의기양양해 하는 꼴이라니 참으로 한심하지 않은가? 당신네 가소로운 한국인들 말이다.

‘2가 1보다 크다’는 사실은 누구나 안다. 구조론은 이처럼 당연한 이야기다. 2가 1보다 크니까, 이쪽의 1로 상대의 1을 교착시키고 나머지 1의 잉여를 얻어 비로소 에너지가 흐르는 경로를 지정하게 된다.

따라서 전체가 부분에, 존재가 인식에, 완전성이 불완전성에 앞선다는 거다.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다. 당연한 것에서 당연하지 않은, ‘특별한 보편원리’를 뽑아내지 못하면 알아도 아는 것이 아니다.

만유인력을 배우기도 전에 나는 ‘사과가 무겁기 때문에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알긴 뭘 알어. 그렇게 안다고 믿는 것이 무지다. 강희제가 서양문물을 좀 안다고 자만한 그 무지 말이다.

강희제 본인의 자서전에 묘사되어 있다. 서양기술 별거 아니더라고 딱 써놓았다. ‘역시 공자가 좋아좋아’ 딱 써놓았다. 그도 속으로는 서양의 신문물에 대해 두려움을 품고 있었다는 증거다.

그는 비겁자다. 알면서도 ‘지적 용기’가 없어 실행하지 못했다. 친구이자 라이벌인 피터대제가 개혁한다는 소리를 듣고 속으로 조마조마 하면서. 그의 비겁함 때문에 동양은 이후 200년간의 수치를 겪게 된다.

조선의 김홍도는 사면측량화법(소실점이론)과 명암법을 알고 있었다. 홍도의 책거리그림에는 소실점이론이 훌륭하게 적용되어 있고, 용주사 후불탱화에는 명암법이 적용되어 있다.

연경에 사신일행으로 따라가서 배워온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틀렸다. 소실점이론이 적용되어 있으면서도 전반적으로 틀렸다. 그는 조금 진보했을 뿐이다. 알기는 알았는데 제대로 안 것이 아니다.

그나마 연경에 다녀왔기 때문에 그래도 그의 그림이 제법 진보하기는 했다. 그는 더 깨졌어야 했다. 오지게 충격받았어야 했다. 강희제가 충격받지 않았듯이 홍도는 충격받지 않았다. 그의 하늘은 무너지지 않았다.

“야! 요거요거 재밌네. 요게 바로 ‘서양의 잔재주’라는 것이로군. 신통방통 하네. 요런건 배워둬야 한다니까.” 딱 요정도 수준이었다. 김홍도의 세계관은 원근법을 눈으로 보고도 전혀 깨지지 않았다.

정조임금은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만원권 지폐 뒷면 그림의 혼천시계 부속의 혼천의 그림 가운데 있는 동그란 것이 지구다. 그것이 동그란 이유는 지구가 둥글기 때문이다.

모르면 제작할 수 없는 혼천시계다. 알았는데 왜 조금도 진도 나가지 못했나? 왜 서구에서 천동설이 깨졌을 때의 거대한 충격을 조선의 지식인들은 받지 않았나? 왜? 도무지 무엇때문에?

천동설이 깨졌을 때 아리스토텔레스의 박물학과 기독교의 결합으로 정교하게 세팅된 교부철학이 깨져서 서양학자들은 놀라자빠져서 기절하고 오줌쌀 지경이었는데 조선 선비들은 왜 반응이 없었나?

서구는 지구중심 세계관이 깨져서 충격을 받은 것이다. 동양은 이렇다 할 세계관 자체가 존재하지 않으니 깨질 것도 없고 충격받을 일도 없고 달라질 일도 없었다. 하늘중심도 땅중심도 아니었다.

중심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속이 텅 비어 있었다. 옳든 그르든 일단 뭔가 중심이 있어야 하는데 그 중심이 없었다. 오늘날 강단학계의 모습도 그렇다. 알건 다 알면서도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

구조론에 충격받지 않는다. 세계관이 없으니 구조론적 세계관으로 대체되지 않는다. 놀란 표정도 짓지 않는다. '그래서 어쩌라고?' 하며 되물을 표정이다. 이런 똥덩어리들 데불고 무슨 일을 도모하겠는가?

하늘이 무너져도 눈만 꿈벅꿈벅할 작자들이 아닌가? 서구인들이라고 해서 별다른 것은 아니다. 뉴튼의 기계-절대론적 세계관은 깨졌지만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확실히 대체되지 않고 있다.

상대성-불확정성-카오스 운운하며 불안한 모색 뿐이다. 그나마 서구인들이 발전한 것은 총맞았기 때문이다. 자기네들끼리 무수한 전쟁을 벌여서 낡은 것이 항상 새로운 것에 패배하였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렇다. 목에 칼이 들어와서 살을 찢어야 겨우 정신차린다. 일본은 동경만에 출현한 흑선에 대포맞고 깨졌다. 중국은 아편전쟁에 깨지고도 정신 못차리다가 북경을 점령당해 반식민지 되고서 깨졌다.

깨져서 정신차린 결과로 신해혁명 이루었다. 조선은 병인양요, 신미양요에 연속으로 얻어맞고도 정신못차리고 눈만 꿈벅꿈벅 하다가 끝내 나라가 망하고 말았다. 서양 오랑캐 물리쳤다며 자만하다가 망했다.

경쟁이 세상을 바꾼다. 경쟁은 물리적 압박이다. 서구는 날마다 전쟁해서 그 물리적 압박으로 바뀌었다. 동양은 평화가 계속되어 압박이 없으니 바뀌지 않았다. 좀 당해봐야 한다. 당해봐야 정신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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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져야 한다. 무엇이 깨져야 하는가? 봉건성이 깨져서 근대성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그러나 보라. 오늘날 서울거리를 보무도 당당하게 걸어다니는 저 잘나빠진 군상들 중에 진짜 근대인이 몇이나 되나?

강희제처럼 아무 것도 모르는 주제에 다 아는 척 고개 빳빳이 든다.. 깨져야 한다. 당신은 깨져야 한다. 낡은 사고방식을 최신버전으로 업그레이드 해야 한다. 정말이지 현대성을 획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당신 내부의 봉건성이 깨지고 근대성을 획득해야 한다. 한국인의 95프로는 봉건인이다. 좀 아는 5프로에 의해 그럭저럭 굴러가는데 삐꺽삐꺽 소리가 나는 것이 진도 나가주지 못한다.

일본이 흑선에 깨지고 정신차렸듯이, 또 중국이 아편전쟁에 깨지고 신해혁명으로 일어섰듯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산산이 깨져야 한다. 당신이 깨져야 할 봉건인이라는 증명을 위해 이 글을 쓴다.

이야기는 ‘나’로부터 시작된다. 왜? 내가 말하기 때문이다. ‘나’에서 ‘너’로 바로가지 못한다. 너와 나 사이에 연결할 그 무엇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단 선생님의 말씀은 교탁 뒤의 흑판으로 우회하여 간다.

흑판을 거쳐 학생에게로 전달된다. 아나운서에서 방송국을 거쳐 시청자에게로 간다. 나와 너 사이에 무엇이 있나? 존재론이 있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말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존재의 고리로 하여 모든 이야기는 전개되기 때문이다. 깨져야 할 것은 세계관이다. 그 중심에 존재론이 있다. 그것은 너와 나 사이에 공통된 존재의 기반이다. 그것이 깨져야 할 천동설 역할을 한다.

그것을 깨뜨려야 근대성을 획득할 수 있다. 알아야 한다. 존재는 사건을 구성한다. 하나의 존재는 하나의 사건이다. 밑줄 치고 이 말을 기억해야 한다. 한 편의 소설도, 한 편의 그림도 사건이다.

한 번의 연주도, 하나의 사랑도, 하나의 삶도 사건이다.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깨달음이다. 교탁 뒤의 흑판이 존재론이라면 선생님과 학생이 동시에 흑판으로 눈을 돌려 비로소 소통하는 것이 깨달음이다.

너와 나 사이에 공통된 존재의 기반 곧 존재론으로 나아가는 것이 깨달음이다. 왜 깨달음인가? 깨달음이 너와 나 사이에서 소통의 수단, 곧 언어와 문자이기 때문이다. 언어를 모른다면 말할 수 없다.

대화할 수 없다. 개와 대화하지는 않는다. 개는 깨닫지 못했으니까. 개는 말을 깨치지 못했으니까. 설사 개와 대화한다 해도 개 수준 만큼만 한다. 부처님도 개와 대화할 때는 개가 된다.

무엇인가? 깨달은만큼 통한다. 당신이 깨달은만큼 나는 당신과 대화한다. 그러므로 당신은 내게 ‘깨달음에 대해 알려주오’ 라고 말하면 안 된다. ‘깨달았으니 대화합시다’ 라고 말해야 한다.

너와 내가 공유하는 공통된 존재의 기반이 있어야 소통은 가능한 것이다. 그것이 존재론이다. 존재론이 깨뜨려야 할 중심이 되는 즉 세계관을 구성하는 것이며 그 존재론에 도달하는 것이 깨달음이다.

깨달음은 완전성을 반영한다. 존재론이 깨달음의 완전성을 드러내는 구성이 사건이다. 존재는 사건이며 그 사건은 이름≫무대≫선수≫포지션≫임무라는 형태로 체계와 기능이 존재한다.

인간은 기능에 주목하지만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체계를 인식해야 한다. 곧 깨달음이다. 기능에 주목한다는 것은 ‘자동차는 타는 것’, ‘시계는 보는 것’ 하는 식으로 ‘강희제의 무지’에 빠지는 것이다.

자동차는 타면 되고, 시계는 보면 되고, 총은 쏘면 되고, 하는 식으로 파편화된 개별지식에 연연하다가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근대성이라는 근본적인 패러다임을 보지 못한 것이다.

피터대제와 달리 계몽군주가 되지 못하고 ‘시계야 청나라도 만들지.’하는 오만의 수렁에 빠진 것이다. 그는 시계를 ‘우리집에 시계있다’고 자랑하는 용도 외에 다른 용도로 사용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전체의 구성을 얽어야 한다. 먼저 나와 너가 존재한다. 둘 사이에 소통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소통하려면 둘 사이에 공유된 바 ‘공통된 존재의 기반’을 전제로 해야 한다. 그것이 존재론이다.

교사와 학생 사이에 흑판이 존재한다. 교사와 학생이 동시에 흑판을 바라보게 하는 것, 아나운서와 시청자가 동시에 방송국을 매개로 삼아 마주보는 것이 깨달음이다. 존재론을 바라보는 것이 깨달음이다.

‘너를 좋아한다’거나 ‘너만 보면 마음이 들뜬다’거나 ‘종일 너를 생각한다’거나 따위는 사랑이 아니다. 뭣도 아니다. 너와 내가 공통된 존재의 기반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 사랑이다. 그게 진짜다.

존재론은 사건 형태로 전개된다. 사건은 내부에 많은 것을 감추고 있다가 시간 상에서 하나씩 펼쳐놓는다. 그 전개를 내부에 감추고 있는 것이 자연의 완전성이다. 그 완전성을 보는 것이 깨달음이다.

나에서 깨달음≫깨달음의 완전성≫완전성을 반영한 존재론의 세계관≫존재론을 전개하여 드러나는 사건의 순서다. 사건의 전개에 따른 이름≫무대≫선수≫포지션≫임무로 하여 너에게로 통한다.

활이 화살을 쏜다. 과녁을 향해 살을 쏘는 것이다. 나는 너를 향해 언어를 쏜다. 소통의 이름으로 언어를 쏘는 것이다. 활쏘기가 깨달음이며, 그 활이 존재론이며, 그 날아가는 화살이 사건이다.

그렇게 서로는 소통된다. 그 사건의 전개에서 최종적으로 나타나는 포지션과 임무에 의해 나와 너는 대화할 수 있게 된다. 선생과 교사, 아나운서와 시청자, 너와 나는 존재론으로 얽어진 한 팀이다.

팀 안에 포지션의 분담이 있다. 그 사이에 에너지가 흐른다. 그러므로 나는 너에게 말 붙일 수 있다. 비로소 소통은 일어난다. 그것은 사건의 형태를 가진다.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공명해서 낳는다. 널리 전파된다. 나의 사건이 너의 사건을 유발한다. 너와 내가 공유하는 기반인 존재론의 안테나를 통과해 내게서 네게로 넘어간다. 너와 나의 사건이 세상 전체를 흔드는 일대사건을 유발한다.

그렇게 사건은 나의 이야기에 너의 이야기를 개입시킨다. 너와 나의 이야기가 합쳐져서 더 큰 이야기를 낳는다. 그 이야기와 이야기의 연쇄적인 고리가 눈덩이처럼 굴러서 마침내 세상을 바꾼다.

그 방법으로 나의 무대에 너를 초대한다. 나의 그림, 나의 작품, 나의 연주가 너와 상관있는 것으로 된다. 그 상관성을 사전에 세팅하여 두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게 안되면 불필요한 안내문이 들어간다.

그 바보다운 봉건의 안내문은 감동, 교훈, 주제, 재미, 흥미 따위다. 3류평론가들이 떠드는 것 말이다. 말하자면 이런 거다. 정신병자가 길에서 혼자 중얼중얼 하거나 혹은 길가는 사람을 붙잡고 말건다.

과거 지하철역 입구에서 볼 수 있었던 ‘혹시 도에 관심있습니까?’다. 이들은 서로가 공통된 존재의 기반에 올라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매우 어색해진다. 소설가 소설하기 전에 관객을 불러모아야 하는 절차다.

소설이 책으로 엮어진 것은 근래의 일이다. 제자백가 중 하나인 고대 소설가들은 길거리에서 북치고 장구치며 애들을 불러모았다. 주로 담벼락 모퉁이에 기대서서 “애들아. 일루와봐. 재미난 이야기가 있다구라.”

‘다들 일루와서 한 구라씩 듣고 가구라.’ 고대소설에는 이러한 절차 곧 사람을 불러모으는 형식이 반드시 들어간다. 그래서 재미와 흥미, 교훈과 감동, 주제의식이라는 어거지 양념으로 도배하는 것이다.

진짜라면 그런 군더더기가 빠져야 한다. ‘맛있으니까 먹어보시라’가 아니다. 이미 식탁에 앉아있는 상태에서 이야기가 시작되어야 한다. 공통된 존재의 기반이 사전에 세팅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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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조되어야 할 현대성은 리얼리즘, 비판, 르포, 시스템(공동작업), 집단지능(문명과 양식)으로 요약될 수 있다. 리얼리즘은 그냥 '사실'이 아니다. '팩트'만 들이댄다고 해서 그것이 사실은 아니다.

설사 그것이 사실이라 해도 단지 사실일 뿐 예술은 아니다. 예술이 사실을 강조하는 이유는 '사건'을 구성하기 위한 것이다. 주목해야할 현대성은 '사건'이라는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사실을 '사건화' 한다. 내게로 가져온다는 거다. 작가의 생각을 독자와 상관있는 것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사실이 사건을 구성하려면 의미≫가치≫개념≫원리로 지평이 확대되어야 한다.

사건은 2차원 평면이 아니라 3차원 입체공간+시간상의 진행에 따른 '트렌드'를 나타내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에서 끝나지 말고 사실의 배후에서 의미를, 의미의 배후에서 가치를 발견해야 한다.

가치의 배후에서 개념을, 최종적으로 보편원리에 가닿아야 한다. 그러므로 리얼리즘은 필연적으로 비판, 르포의 형식을 띨 수 밖에 없다. 사실은 그냥 보여주면 되지만 사건은 공간상에서 구성되기 때문이다.

사건은 공간상에서 입체적으로 구성되고 외부에서 에너지를 공급받아 시간상에서 진행되는 역동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근대 리얼리즘 문학의 태두라 할 발자크의 인간희극을 예로 들 수 있다.

발자크는 파리 사교계의 적나라한 모습을 비판적으로 보고한다. 왜 왕정을 지지하는 '보수주의자' 발자크의 문학이 근대성을 띠는가? 근대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공동작업인 것이다.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며 소설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집단지능이라는 시스템 안에서 숨 쉬기 때문에 '근대'다. 그냥 '난 이게 좋다.' <- 이건 예술도 뭣도 아니다. 누가 물어봤냐고?

그렇다. 중요한건 이거다. '누가 물어봤냐고?' 누가 물어본 것에 대하여 비판하고 보고해야 한다. 파리 사교계의 모습을 '누가 물어봤기 때문에' 발자크는 '파리 사교계 까보니 이렇더라' 보고하는 것이다.

그 이전의 소설은 ‘누가 물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마치 누가 물어본 것처럼 변명하는 절차가 반드시 들어간다. 그래서 소설은 필연적으로 전기문학이 된다. 예컨대 장발장이면 장발장전이다.

홍길동전, 춘향전, 박씨부인전에 맞먹는 위고의 장발장전이다. 근대소설이 아니다. 햄릿전, 맥베드전, 리어왕전도 근대소설 아니다. 헐리우드의 배트맨전, 슈퍼맨전, 람보맨전도 마찬가지다.

고대소설은 ‘너와 나 사이에 공통된 존재의 기반’이라는 문학의 시스템이 없기 때문에 혼자서 다해야 한다. 춘추전국시대 소설가 아저씨가 모퉁이 담벼락에 기대서서 행인을 불러모으듯이 말이다.

‘사건이 났대요. 사건이 났어요. 자 손님들 이리와서 앉아보시라니깐요. 지나가는 신사숙녀분들, 선남자야 선녀자야, 아저씨 아가씨 발길 멈추고 이야기 한번 들어보시라니깐요. 자 일단 한번 앉아봐.’

공연히 지나가는 행인들 붙잡고 말 거는 것이다. 그러나 행인은 발길을 멈추지 않는다. 지나쳐가는 행인의 발길을 멈추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주가가 폭락했는디유!’ 먹히지 않는다.

그 사람은 주식투자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롯데가 또졌는디유’ 먹히지 않는다. 그 사람은 프로야구팬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통하는 수법은 무엇이겠는가?

‘전쟁났는디유!’ 이거 먹힌다. 왜냐하면 전쟁은 공통된 존재의 기반을 흔들기 때문이다. 전쟁났다는데 발걸음 멈추지 않을 사람 있겠는가? 그래서 수구꼴통들은 날이면 날마다 애국을 팔고 전쟁을 판다.

정신병자가 길거리에서 아무나 붙잡고 말 걸어서 먹히는 유일한 방법이 그거다. 인터넷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좌빨이 나라 전복음모를 꾸미고 있는디유!’ 그들의 전매특허 수법 말이다.

미국에서는 이 수법도 먹히지 않는다. 어느 미국인이 ‘좌빨운운’ 하는 딴거지 수법에 넘어가겠는가? 미국에서 먹히는 수법은 하나 뿐이다. “외계인이 쳐들어 왔는디유. 악당이 지구를 파괴하는 디유.”

‘그렇다면 슈퍼맨, 배트맨, 람보맨, 헐크맨, 엑스맨, 총출동해야 되지 않겠습니까유?’ 이것이 헐리우드 영화다. 그들이 길가는 무관심한 행인에게 억지로 말걸어서 먹히는 유일한 방법이 그거 하나다.

좌파들은 나름대로 노하우가 있다. 그들은 주로 환경문제로 말을 건다. 예전에는 노동, 자본, 착취 이런 레파토리로 재미를 봤는데 안먹히니까 요즘은 고어가 재미봤다는 지구 온난화시리즈를 들고 나온다.

좌파든 우파든 지나가는 행인에게 억지 말걸기 위하여 ‘공통된 존재의 기반을 흔들어 댄다’는 본질은 같다. 모퉁이 담벼락 아래의 소설가 아저씨가 행인들에게 말걸던 2천년 전의 그 수법 그대로 말이다.

무엇인가? 고대소설에서 강조하는 감동, 재미, 교훈, 흥미, 주제의식 따위 개에게나 줘버려야 할 것들. ‘내 그림은 좋아요. 이뻐요. 아름다워요.’ 이런 수작들은 공통된 존재의 기반이 없는 시대의 불쌍한 포즈다.

근대문학, 근대예술, 근대성은 그러한 존재의 기반이 충분히 세팅되어 있다는 전제로 출발한다. 이 경우 소설 안에 왜 독자가 이 소설을 읽어야 하는지 설명하는 안내문이 들어가지 않는다.

‘일단 한번 들어보시라니깐요. 이 소설이 참 몸에 좋걸랑요.’ 이런거 없다. '현대성'이란 사건의 형태를 가진다. 사건화되어 있기 때문에 '억지 사건화로 독자가 이야기에 말려들게 하는 과정'을 생략한다.

바로 본론으로 치고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안내해서 안 된다. 감동, 교훈, 가르침, 주제의식, 계몽, 훈화말씀 다 빼야 한다. 위인전을 탈피해야 한다. 발자크의 인간희극이 대표적인 예다.

뚜렷한 주인공의 활약상 없이 2000명이라는 다양한 등장인물을 등장시켜 파리보고서를 낸다. '이것이 파리다'하고 보여준 것이다. 파리 사교계라는 공통된 존재의 기반이 있기에 가능하다.

루신의 아큐정전도 비슷하다. '이것이 중국인이다' 하고 ‘중국인 보고서’를 낸 것이다. 거기에는 장발장식 영웅 일대기가 없다. 다만 중국인의 이중적인 심리를 담담하게 보고할 뿐이다.

중국인의 위선, 져놓고 이겼다고 우기는 정신승리법에 대한 비판과 보고가 핵심이다. 그것이 진정한 리얼리즘이다. 아큐정전은 傳(전)이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전을 넘어선 인간내면 보고서다.

넌픽션이 아닌 픽션이지만 어떤 다큐보다도 리얼하다. 비판과 보고가 리얼리즘이다. 비판은 비난이 아니라 세세히 파헤침이다. 기름빼고 양념빼고 교훈빼고 감동빼고 사건에서 발 빼고 객관적으로 기술하기다.

입으로는 리얼리즘을 외쳐도 좌파들은 기본적으로 이게 안 되기 때문에 리얼리스트가 아니다. 좌파들은 반드시 환경문제 바탕에 깔고 감동으로 양념넣고, 교훈으로 설탕치고, 계몽으로 조미료 넣는다.

리얼리즘을 표방해도 근대문학이 아니라 고전문학이기 때문에 원초적으로 안쳐주는 것이다. 위고의 장발장처럼 말이다. 위고는 좌파, 발자크는 우파인데도 오히려 발자크가 리얼리즘 원칙에 충실하다.

발자크의 과장되고 야단스런 문체는 하드보일드한 현대소설의 문체에 비하여 고전적이지만 소설의 본질이라 할 이야기는 현대적이다. 반대로 춘원 이광수의 무정은 현대문체로 썼어도 고전소설이다.

한국에서 근대소설은 이상의 날개가 출발점이다. 최초의 심리보고서다. 수호지를 예로 들수 있다. 김성탄의 언급대로 70회본까지가 진짜고 뒷부분의 충의수호지는 가짜다. 70회까지는 송나라 문화의 종합보고서다.

‘이것이 송나라다.’ 이런거 있다. 이후로는 갑자기 유교주의를 들이댄다. 조정에 충성하고 어쩌고 하며 고리오영감이 장발장으로 변해간다. 유치해지는 것이다. 장발장은 전형적인 19세기 어린이 동화다.

정리하면 문학과 예술이 리얼리즘, 비판, 보고의 형식을 갖추면서 감동, 재미, 교훈, 주제라는 어거지 안내문을 뺄 때 근대성을 획득한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말 거는 절차를 뺄 때 근대성을 획득한다.

이유는 공통된 존재의 기반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예컨대 기차여행을 하는 사람이 옆자리에 앉은 사람에게 말건다면 자연스럽다. 기차칸이라는 공통된 존재의 기반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차칸이라는 공통된 기반 없이, 괜히 지나가는 사람에게 말걸려니 헐리우드 식으로 ‘외계인이 침략했다’거나 수구또라이들처럼 ‘좌빨이 나라망치네’ 하거나 좌파들마냥 ‘환경재앙 괴물봐라’고 소리를 지른다.

길거리에서 떠드는 정신병자 되는 거다. 그 정신병자에게 해줄 말은 ‘누가 물어봤냐고?’ 이 한마디다. 현대성은 그런 안내문을 뺀다. 왜 안내문을 빼는가? 누가 물어봤기 때문이다. 공통된 존재의 기반이 그것이다.

무엇인가? 우리는 ‘존재론’이라는 나무에 올려태워져 있는 것이다. 이 가지에는 내가 앉았고 저 가지에는 당신이 앉았다. 그렇게 서로의 포지션이 나누어졌다. 시소와 같다. 내가 오르면 당신은 내린다.

당신이 오르면 나는 내린다. 시소를 탄 두 사람은 ‘공통된 존재의 기반’ 안에 자기 포지션을 두고 있으므로 말걸지 않아도 말건 셈이다. 포지션이 있고 임무가 주어져 있으므로 자연히 소통된다.

시소를 탄 두 사람은 마치 사랑에 빠진 두 남녀처럼, 말하지 않아도 이미 말하고 있다. 눈빛만 움직여도 소통은 일어난다. 왜인가? 내가 보는 곳을 그대가 보고 그대가 보는 곳을 내가 보기 때문이다.

‘위하여’가 아니라 ‘의하여’다. 위하여는 주제, 감동, 교훈, 재미, 흥미를 위하여다. 또 외계괴물 퇴치, 좌빨준동 퇴치, 환경재앙 퇴치 등의 어거지 말거는 명분이다. 다 봉건시대의 불필요한 군더더기다.

그걸 빼야 한다. 왜 내가 소설을 쓰는지 말하지 말아야 한다. 고전소설 곧 춘향전, 흥부전, 심청전은 주로 권선징악이라는 타이틀로 말을 건다. '이건 말이죠, 악을 징치하고 선을 권장하기 위하여죠.'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면 무조건 가짜다. 구조론은 ‘의하여’다. 공통된 존재의 기반에 ‘의하여’다. 그것이 존재론이고 그것을 알아채는 것이 깨달음이다. 알겠는가? 너와 나는 이미 시소를 타고 있다.

발자크의 인간희극이 그렇다. 이미 독자들은 파리 사교계 안으로 들어와 있는 거다. 이상의 날개나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는 감동과 교훈과 재미가 없다. 그걸 재미있게 읽었다고 말하는 인간도 있지만 구라다.

날개는 재미없다. 노인과 바다도 재미없다. 두 인간보고서는 사전에 독자들을 사건속으로 끌어들여 놓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무엇인가? 작가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독자 자신의 이야기를 끌어내는 것이다.

필자는 이상의 날개를 수도 없이 우려먹는다. ‘날개’에 재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날개가 있기 때문이다. 이상은 내게 ‘소스’를 던져주었을 뿐이고 나는 거기에 살을 덧붙여서 온갖 요리를 만들어낸다.

근대소설은 공통된 존재의 기반 안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읽고 재미와 감동을 받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이 아니라.. 작가는 독자에게 주는 것이 없어야 한다.

뭔가 작가에게 받아내겠다는 생각이 비루하다. 장사꾼 거래냐? 재미도 받고, 흥미도 받고, 교훈도 받고, 감동도 받고 이런 초딩들과는 대화하지 말아야 한다. 받는게 아니라 내 안에서 끌어내기다.

내 안의 산티아고노인과, 내 안의 거대한 돗새치를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헤밍웨이는 화두를 던졌을 뿐, 그 화두를 밑천삼아 내 안에서 거듭 굴려서 거대한 존재의 세계를 만들어내야 한다.

왜 그것이 가능한가? 인류문명이라는 집단지능의 장 안에서 기능하기 때문이다. 너와 나의 존재가 시스템 안에서 확실한 자기 포지션을 가지고 자기가 탐구한 것을 인류에게 보고하는 것이어야 한다.

시소처럼. 시소는 확실히 포지션이 정해져 있다. ‘A면 B다’ 하는 공식이 정해져 있다. 이미 인류문명이라는 팀은 결성되어 있고 집단지능이라는 그라운드는 펼쳐져 있고 너와 나라는 선수는 시합장에 나와 있다.

헤밍웨이는 단지 공 하나 던져줄 뿐이다. 바로 게임은 시작된다. 헤밍웨이가 시소의 저쪽에 올라타고 위로 솟구쳤기 때문에 독자는 그 반대편의 포지션을 얻어 아래로 내려온다. 다시 올라가며 반복한다.

그렇게 인류의 공동작업이므로 '누가 물어봤냐고?'에 신경쓸 필요가 없다. 교훈주고, 감동주고, 눈물주고, 콧물주고, 환경보호, 애국애족, 권선징악, 외계괴물 퇴치하며 애쓸 필요가 없다.

단지 내게로 패스된 공을 드리블하여 너에게로 패스하면 그만이다. 수호지 안에는 무수한 포지션들이 지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수호지는 고대소설 형식이라도 본질이 근대소설이다.

급시우 송강이 무한도전의 유반장이면, 흑선풍 이규는 노홍철이고, 화화승 노지심은 식신 정준하다. 이런 식의 포지션이 지정되어 있어야 근대소설이다. 이미 사건 안에 들어와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리얼리즘은 비판과 보고서다. 예술이 현대성을 획득함은 자연과 인간과 사회와 삶에 관한 관측보고서 쓰기다. 그 보고는 문예사조라는, 시대정신이라는, 집단지능이라는 시스템의 존재 안에서 작동한다.

그러므로 공연히 지나가는 사람 붙들고 어색하게 말붙이는 자들의 흥미, 교훈, 감동, 재미, 주제라는 군더더기가 들어가지 않아서 좋다. ‘난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겠어.’ 뭘 주려고 하면 가짜다.

'자 흥미가 왔습니다. 재미가 왔어요. 감동도 끼워주고, 교훈은 덤으로 주고, 주제의식은 기본 서비스로 깔아줍니다. 자 하나씩 골라 골라.' 이런 봉건시대의 길거리 약장수 수법을 탈피해야 한다.

좌파의 환경고발, 우파의 좌빨퇴치, 헐리우드의 외계괴물 퇴치를 극복해야 한다. 자신의 존재이유를 설명하고 자기존재를 정당화하려는 삐에로의 슬픈 몸짓을 극복해야 한다. 언제까지 그 수준에서 놀텐가?

작가가 찾아야 할 것은 너와 나 사이에 공통된 존재의 기반이다. 홍상수 영화가 그런 점을 잘 포착한다. 그 공유된 기반을 흔들어 버렸을 때의 어색함과 낯간지러움을 관객이 알아채게 한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남녀가 어떻게든 엮이려면 사람을 해치려는 괴물이 나타나야 하는데. 괴물에 의해 남녀가 공통된 기반을 공유하게 되어, 이야기는 시작되는 건데 그 괴물이 없을 때의 난처함 말이다.

같은 기차를 타고 여행하며 옆좌석 손님과 대화하기는 자연스럽다. 그 자연스러움 안에서 우리는 그 공통된 기반의 고마움을 잊어버린다. 바로 그것을 포착하여 드러내는 것이 현대성이다.

김기덕 영화도 그런 거다. 고립된 섬이라는 공유된 기반이다. 섬은 하나의 시소다. 여자와 남자는 섬이라는 시소를 탄다. 이쪽이 오르면 저쪽은 내린다. 저쪽이 오르면 이쪽은 내린다. 그렇게 둘은 밀접한다.

그 섬이 파괴될 때, 시소는 뽀개지고, 포지션은 무너지고, 임무는 사라진다. 임무가 사라지면 사람은 죽는다. 포지션을 잃으면 임무는 죽는다. 우리가 함부로 믿는 공유된 기반의 불안정함을 포착하라.

혹자는 사랑이라는 빌미로, 혹자는 돈이라는 수단으로, 혹자는 욕망이라는 흉기로 그 공유의 기반을 흔들어버린다. 그럴 때 인간이 위태롭다. 인간이 무너진다. 인간이 붕괴되는 지점을 포착하라.

그러한 ‘한 배에 올라태우기’를 가능케 하는 것이 구조다. 작품 안에 ‘A가 이렇게 하면 B는 이렇게 한다 ’하는 방정식이 들어간다. 시소가 들어간다. 문학에서는 캐릭터의 형태로 주로 나타난다.

문학의 목적은 다분히 새로운 캐릭터 선보이기다. 그림에도 음악에도 그것이 있어야 한다. 그냥 듣기 좋은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밑줄 쫙쫙 그어놓은 자기논리가 있어야 한다.

둘 이상의 존재가 하나의 기반을 공유하며 다양한 전개를 끌어낸다. 그럴 때 작품은 사건으로 승화한다. 평면에서 입체로 비약한다. 그 사건의 진행구조 안에서 작가와 관객은 한 배를 탄다.

주인공 남녀가 이미 한 배를 탔으므로, 그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서 작가와 관객이 한 배를 타게 된다. 그 방법으로 작가는 관객을 드라마 안으로 끌어들인다. 작가와 독자가 작품을 공유한다.

널리 전파되어 인류전체가 한 배를 타게 된다. 그 점을 드러낸다. 이 경지에서 작가가 독자에게 전달하려는 재미, 흥미, 감동, 교훈, 주제는 불필요해진다. 왜냐하면 독자가 자기 안에서 그것을 찾아내기 때문이다.

홍상수 영화의 관객은 영화 안에서 재미를 발견하지 않는다. 재미는 원래 없다. 그것을 자기 방식으로 소화하는데서 제 2의 부가가치가 발생한다. 또다른 형태의 고차원적인 재미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독자는 가만있고 작가가 일방적으로 재미를 주입하는 시대는 지났다. 독자의 능동적인 참여를 끌어내기다. 작품이 ‘A면 B다’의 방정식 구조를 가질 때, 작가가 독자 A에게 한 이야기를 독자A가 독자B에게 한다.

전파된다. 증폭된다. 공명한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존재론의 보편성이다.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작품이 사건의 형태를 갖추는 개방형 구조를 가질 때 독자는 스스로 재미를 만들어낸다.

그것이 가능케 하는 것이 보고서 형식이다. 홍상수 영화 주인공들의 많은 얼빵한 표정들 중에는 여러분의 모습도 있다. 수호지의 많은 캐릭터들 중에는 여러분의 캐릭터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춘향전이나 배트맨전 안에는 여러분의 포지션이 없다. 그 차이다. 현대성이란 작가와 독자가 한 배를 타는 것, 하나의 기반을 공유하는 것,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보편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존재론이라는 ‘전체적인 그림’을 가질 때 가능하다. 그 그림이 있어야 하고 그 그림이 깨져야 한다. 그 그림이 업그레이드 되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그대가 좀 깨지길 바란다.

깨질 그 무엇이 그대의 내부에 온전히 갖추어져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깨져서 거듭나기 바란다. 현대성을 이해하기 바란다. 존재론을 세팅하여 세계관을 정립하기 바란다. 소통되기 바란다.

http://gujoron.com


프로필 이미지 [레벨:24]꼬치가리

2009.04.24 (20:28:19)

긴 글 단숨에 읽었습니다.
깨져야 한다. 깨져도 철저히 깨져야 한다.
그러나 깨질려면 깨질 뭔가를 단단히 갖추고 있어 한다.

현대성을 이해하고 싶습니다.
존재론을 제대로 익혀 우선 확고한 세계관을 정립해야 겠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두루 나누어 읽고 또 읽어보겠습니다.

090424_PURPLE.jpg

첨부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09.04.25 (01:09:17)


현대성은 간단히 '좀 아는 사람들끼리' 하는 이야기입니다.
무언의 약속들이 세팅되어 있다는 전제를 깔고 들어가는 이야기죠.

음악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연주할 때는 온갖 묘기를 보여주려 듭니다.
청중을 울고 울리려 하죠.

들었다 놓았다 하는 거지요.
그러나 음악 고수들끼리 모여있다면 '묘기'를 보여줄 수 없죠.

이쪽에서 착 하면 저쪽에서 척 하고 장단을 맞춰나오기 때문에
저쪽의 대응을 의식하고 신중하게 해야하는 거지요.

알 거 다 아는 사람들끼리 하는게 현대성입니다.
고수들끼리만 모여있을 때의 대화는 음악이든 바둑이든 그림이든 같지요.

이쪽에서 한 마디 하면 반드시 저쪽에서 가지를 치죠.
뭔가 장단이 척척척 맞아들어가기 때문에 저절로 자신이 가야하는 방향이 결정되는 거지요.

이쪽에서 덩더꿍 하면 저쪽에서 쿵더꿍하고 맞춰주며 나오기 때문에
그 구조 안에서 내가 가야하는 방향이 저절로 선명해집니다.

현대인의 패션이나 문학이나 디자인이나 다 그런게 있다는 거지요.
물론 김봉남 형은 그런거 없이 그냥 지 하고 싶은거 하지만.

그러니까 인류의 공동작업이라는 거지요.
혼자 해도 저쪽을 의식하고 하기 때문에 결국 공동작업이 됩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14]곱슬이

2009.04.25 (09:44:27)

한참 머리햇갈리게 하던 것이 스르르 녹아졌소.  새삼 감사하오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09.04.25 (10:12:13)


현대성은 각자 자기 안에 품어있는 것을 끌어내는 것이오.
여기서 디자인을 이야기 하는 것도 그 때문이오.

디자인은 각자의 몸에 붙어 있소. 미술관 벽 높은 곳에 걸린 캔버스에 붙어 있지 않고.
내 몸에 붙어 있는 것, 내 삶에 따라다니는 것, 나의 아침저녁에 달라지는 것을 이야기 하자는 것이오.

우리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서로가 공유하는 토대의 존재를 긍정하고
그 안에서 포지션 게임을 벌이면 그것은 저절로 명백해지오.

한 사람이 팀을 짜면, 다음 사람이 그라운드를 발굴하고, 다음 사람이 선수를 소집하고
다음 사람이 공격수와 수비수를 나누고, 다음 사람이 공을 차는 식으로

뭔가 착착착 손발이 맞아지며 진도 나가는게 있소.
현대의 패션트렌드도 그런 식으로 변해가는 흐름이 있소.

그냥 청바지가 유행하고 스키니진이 유행하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팀과 그라운드가 확정되고 선수들이 쏟아지니까 그런 시대가 되어 그런 몸짓들이 나타난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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