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록
[거듭 이문열을 때리지 않으면 안된다]

'바스티유'는 무너졌지만 '앙시앙 레짐'의 환상은 건재하다. 조선일보에
실린 이문열의 글은 헤집어 비판하고 싶지가 않다. 결론 부분만 약간
고친하면 그대로도 훌륭하다.

이문열이 역사의 반동이래서 한국문학사가 그를 배척할 이유는 없다.
단지 그의 정치적 영향력, 정치적 지분만큼 추궁될 뿐이다. 물론 추궁
되는 만큼 그의 문학 역시 일정부분 감가상각을 피할 수는 없다.

그는 직업정치인이 아니다. 그러면서 훌륭한 정치인이다. 근대 지성들
의 정치적 참여를 높이 평가하는 만큼 우리 그의 반동을 징치하는 것
또한 정당하다.

언제나 그렇듯이 문학은 고유한 문학의 영역을 인정받으면서도 얼마간
정치와 불과분의 관계를 맺게 된다. 우리는 그 곁다리 걸친 부분만큼
만 매질할 뿐이다.

어쩌면 그것은 그의 의사가 아닌지도 모른다. 그는 순수하게 문인으로
남고 싶은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문학은 얼마간 정치이며 그것은
역사 위에서 결과로 증명되고 누구도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그는 페미니즘을 알지 못하고 더군다나 페미니즘을 위하여 그 글을 쓰
지 않았을 수 있다. 그러나 면책사유는 되지 못한다. 그는 의식하지 못
한체 주적의 역할을 훌륭히 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주적의 타켓에서 벗어나고 싶은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의
행동은 오히려 타켓으로서 훌륭했다. 그는 인류의 진보를 위하여 한국
문학의 진보를 위하여 페미니즘의 승리를 위하여 훌륭한 타켓이다.

그의 말대로 그에겐 커다란 영광이 된다. 삼국지연의의 조조는 단순한
역사인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래도록 훌륭한 타켓이 되어
왔다. 우리는 여전히 타켓을 필요로 한다.

조조는 수천년 수십억 동아시아인의 의식속에 악의 화신으로 전형화될
만큼 대단한 악당이 아니다. 그러나 역사는 주적을 필요로 했고 조조
또한 겁내지 않았다.

이문열은 겁내지 않고 있다. 그는 스스로 조조가 되기로 한 모양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할 일은 부지런히 때리는 거 뿐.

이문열의 변명은 '조조도 알고보면 불쌍한 사람이다'는 정도의 참고가
된다. 누구도 공평한가 정확한가를 따져 조조를 때리지 않는다. 유교주
의를 위해 조조는 훌륭한 반면선생이었으며 중요한 것은 조조가 필요
했다는 것이다.

이 시대에 반면선생으로서의 이문열이 필요하다. 그 스스로도 짐짓 사
양하지 않고 있다. 이문열이라는 주적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은 얼마든
지 다행하다.

이문열 - 역사가 그대에게 그러한 소임을 맡겼던가 보지. 그대 악역을
멋지게 연기해 내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어 보이는군.

(김동렬·퇴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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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이문열] ‘아가’에 관한 논의를 보며

대의에 있어서도 역사발전에 기여한 바 있어서도 프랑스 대혁명은 혁
명의 대표성을 획득할 만큼 흔들림 없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데도
샤토브리앙은 그 반혁명군이 되어 가망 없는 싸움을 벌이다가 끝내는
신대륙으로 망명하였고, 길고 고단한 망명에서 돌아온 뒤에도 무너져
내린 ‘앙시앙 레짐(구체제)’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 못했다. 하지만
그 환상이 빚어낸 문학은 아름다웠으며, 누구도 그의 정치적 의식의
지진을 이유로 그를 프랑스 문학사에서 지워버리려고는 하지 않는다.

어제 졸작 ‘아가’에 대한 황종현 교수의 평을 읽으며 먼저 그 성실
한 읽기와 정확한 해석에 대해 오랜만에 감동에 가까운 고마움을 느꼈
다. 특히 공동체의 이상에 관한 황교수의 부연은 행간에 숨겨두었던
열망을 들켜버린 듯한 부끄러움마저 일게 했다. 하지만 ‘사라진 낙
원’과 ‘현대성의 경험에 대한 결연한 적대’에 이르러서는 내가 오
랫동안 받아온 정치적 ‘지진’의 혐의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느낌으
로 참담한 심경이 되었다.

‘사라진 낙원’도 ‘현대성에 대한 적대’도 작가의 것이 아니라 주
인공의 것임은 작품 곳곳에서 직접적으로 진술되어 있다. 거기다가 또
주인공의 육체적 정신적 특수성은 이런 논의의 보편화를 차단하는 효
과를 가질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어떤 소설이론으로 보면 그런 장치
는 무의미해지고, 작가는 주인공의 의식을 그 자신의 것으로 떠맡을 수밖에 없다.

서두에 샤토브리앙의 얘기를 꺼낸 것은 바로 그럴 때에, 곧 소설의 주
인공이 바로 작가란 논의에 어쩔 수 없이 동의해야할 때 마지막으로
의지하기 위한 사례로서였다. 다시 말해, 소설 작품에 대해 평가하는데
작가의 사회 의식이 그 중요한 기준이 될 수는 있지만, 어떤 경우에도
그게 소설적 구조와 그 구조를 감싸고 있는 미학적 장치 및 기교에 대
한 논의를 우선할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황교수의 지적을 아프게 받
아들이면서도 한편으로는 한 가닥 서운한 느낌이 있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다음 다른 일간지를 통해 일기 시작한 ‘아가’에 관한 논의를 보
면서 미리 말해두고 싶은게 하나 더 있다. 언제부터 우리문학이 작품
평가의 중요한 잣대로 페미니즘을 채택하였는지 모르지만, 솔직히 그
온당함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다. 특히 개인적인 체험으로는 정체도 정
확하게 파악 안되는 그 페미니즘이란 것이 새로운 이데올로기적 억압
같은 느낌마저 든다.

거기다가 더욱 고약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 잣대의 남용이다. 입장에
따라 페미니즘을 문학평가의 중요한 잣대로 쓸 수도 있지만, 그럴 때
도 그 적용은 공평하고 정확해야 한다. 엄격하게 말해 페미니즘적 시
각으로 볼 수 없는 작품은 하나도 없다. 소설이 사람의 얘기를 하고
있는 한 사람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여성을 언급하지 않고 비껴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고정된 관점으로 작품을 보면 아무래
도 사시화의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다.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이해할 수 있는 것만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페미니즘이 적용되고 있는 걸 보면 공평하지도 않고 정확
하지도 않은 듯 느껴진다. 부정적으로든 긍정적으로든 페미니즘적 관
점에서 쓰여진 책들은 수없이 많다. 그런데 그 잣대의 적용은 극히 소
수만 선별한다. 그것도 경험해본 입장에서 느끼기에는 기본적으로 텍
스트의 이해조차 되지 않은 게 태반이었다.

운동을 활성화시키는 데 가장 효과적인 것은 강력한 주적의 존재이다.
대단찮은 작가 아무개가 한국 페미니즘 운동의 주적으로 선정되었다면
그것도 나름으로는 영광스러운 것이겠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제발 바
라건데 그 영광을 사양하고 싶다. 나는 페미니즘을 알지 못하고, 더구
나 그걸 위해서 이 작품을 쓰지는 않았다.

(이문열·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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