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 생활의 발견을 발견하라
질문 > 일상에서의 실천이 아마 가장 어려울 것으로 보이는데요. 일상에서 아는 만큼 실천을 할 수 있을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로는 그래야 한다고 외치면서 정작 스스로는 그렇게 하지 않는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스스로의 주장을 잘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 다른 이의 잘못에 딴지를 걸 수있는가요?
답변 > 홍상수감독의 영화 '생활의 발견'을 보셨습니까? 저는 아직 보지 않았지만 이번주에 볼 생각입니다. 영화평론가들의 평을 들어보기로 한다면 '일상'이라는 단어를 거듭 발견하게 됩니다. 심영섭씨의 평이라면 일상으로 시작해서 일상일상하다가 일상으로 끝을 맺죠.
일상 - 이건 언어폭력입니다. 언어파시즘이에요. 일상이라는 표현은 불가의 '색즉시공 공즉시색'과도 같습니다. 모든 것을 의미하면서 실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거지요. 일상 - 이 한마디에는 천가지 뜻이 있고 만가지 의미가 있으면서 실은 아무 뜻도 없습니다.
이런 고도의 추상적인 단어를 사용해서 얼버무린다는 것은, 평론가들이 영화를 볼줄 모른다는 증거지요. 저는 아직 홍상수영화를 제대로 이해하는 한명의 평론가를 발견하지 못한 것을 유감으로 합니다. 일상 - 이런 단어를 사용해서 안됩니다. 모호한, 추상적인 관념의 세계로 도피하지 말고 정정당당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 맞서란 말이지요.
영화를 모르는 평론가들에게 영화관람은 곧잘 철학수업으로 변해버립니다. 물론 철학으로 위장하고 있지만, 그 안에 철학이라곤 쥐뿔도 없지요. 그저 난해한 언어의 전시장일 뿐입니다. 속임수죠. 현학적인 언어를 제조하고 판매하는 전문용어상업주의입니다.
일상은 무엇일까요? 반복입니다. 반복은 무엇일까요? 순환입니다. 순환은 무엇일까요? 퍼켓입니다. 퍼켓은 정보의 전달단위죠. 모든 정보는 하나의 단선적인 라인을 매개로 하므로 입체적인 정보들은 퍼켓단위로 분할됩니다. 분할과 재조립. 그 부지런한 반복입니다.
항상 접점을 유지하고 있어야 하죠. 긴장하고 주파수를 맞추고 온라인으로 대기상태입니다. 생활의 발견은 그 접점에서의 긴장을 발견하라는 말입니다. 주파수가 맞지 않으면? 어색해지는 거죠. 홍상수는 그 어색함을 부러 노출시킵니다.
일테면 이런 겁니다. 친구를 만나면 먼저 인사를 하는 쪽이 유리합니다. 왜냐하면 인사라는 것이 일종의 질문 형태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사를 선점한 자 A - "안녕하세요?"
인사를 선점당한 자 B - "네!"
B씨는 지금 안녕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므로 "네"죠. 아! 어색해. 머리를 쭈뼛쭈뼛, - -;; 이궁 쪽팔려. 이래서는 안되죠. 사실 문제가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하고 물으면 '네'하고 응답할 수 밖에 없는데 너무 어색하잖습니까? 길에서 만나면 '어디가니?'하고 인사합니다.
인사를 선점한 A씨 - "철수야. 어디가니?"
인사를 선점당한 B씨 - "??.. 근데 내가 지금 어디가고 있지?"
이건 어색한겁니다. 가긴 어딜가남요. 그냥 골목을 쏘다니는거죠. 근데 '어디가냐?' 하고 질문하니까 황당하잖아요. 사실은 질문이 아니라 인사인데. 일단 무시해야 합니다. "아 종호냐? 오랜만이다야" 이렇게 대꾸합니다. 근데 종호녀석 말하는 뽄새 좀보소. "오랫만은 뭐가 오랜만이야. 우리 어제도 봤잖아" 이건 걍 주파수가 안맞는 겁니다. 인사를 던진건데 말대꾸로 받은거죠.
그럼 풍경 #2를 검토하도록 합시다.
인사를 선점한 사람 A- "오늘 날씨 좋죠?"
인사를 빼앗긴 사람 B - "에이, 오늘 날씨가 좋긴 뭐가 좋아"
여기서 B씨는 A씨의 줄문에 '네'라고 답하면 너무 어색하니까 말대꾸를 한다는게 그만 시비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일은 우리의 일상에 흔히 겪는 일입니다. 인사가 질문형태로 되어 있기 때문에 '네'하고 응답하면 대화가 이어지지 않습니다. 대화를 이어가려면 반드시 상대방의 말에 반박을 하는 형태여야 합니다. 이것은 접점의 유지입니다.
즉 B씨는 A씨와 대화채널에서의 접점을 유지하고 있기 위하여 습관적으로 말대꾸를 한겁니다. "날씨좋죠?" "네" 이렇게 되면 거기서 대화가 끊어져버리니까요. 보통 애들이 7살만 되면 말대꾸하는 버릇이 듭니다. 어른들이 고쳐주어야 하지요. 어른이 되어서도 인생자체가 말대꾸가 되어버린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이 사회에서는 보통 냉소주의로 나타납니다. 말을 이어가기 위해서 무조건 하고 상대방의 말을 빈정대는 거죠. 매사를 부정적으로 봅니다. 사실은 상대방에게 말을 거는 방법을 몰라서, 편하게 시비하는 방법을 선택하는 겁니다. 저질 코미디언들도 이런 방법을 잘 사용합니다. 시종 동료의 흠집을 잡고 놀리고 야유하는 거죠. 그걸 코미디라고.(요즘 개그콘서트는 많이 발전해서 과거의 비아냥대기 코미디가 줄었죠)
여기까지에서 관찰된 '생활의 발견'은 인간의 모든 행동이 타인의 행동에 대한 대응형태 곧 상대방의 개입에 어떤 반응을 보이는 구조로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건 인류학적 관점에서 더 논의가 되어야 하겠지만 여기서는 줄이기로 합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어떻게 대화의 접점을 유지해가는가입니다. 상대방과의 주거니받거니의 관계를 계속 유지해가는가입니다.
남자 A "미숙아! 나 너 좋아해"
여자 B "흥! 난 너한테 관심없어"
여기서 여자 B의 퇴짜는 상대방을 자극하여 더욱 강한 대응을 유도하는 과정입니다. 즉 자신의 본심을 말하는게 아니라, 상대방의 더 적극적인 교섭을 추동하는 과정으로서의 자극이라는 점입니다. 근데 남자 A가 멍청하다면 그러한 사태를 알아채지 못하고 삐쳐서 집에가고 말겠죠. 이건 낭패가 됩니다.
또 여기서 여자B는 남자 A가 말한 말의 대사내용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방법과 분위기를 전체적으로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좋아한다는 대사내용보다는 그 말을 하는 과정에서 주변환경과의 교감을 고려하는 형식을 이어가는 겁니다. 말이 아니라 액션을 요구하는 거죠.
여자 B의 진정한 관심은 상대방의 시선과, 관심과, 분위기와 행위에 있어서 총체적인 접점의 지속적인 유지 내지 그 확대증폭인 것입니다. 즉 상황을 확대하고 싶은데 그 구체적인 액션을 상대방에게 떠넘기는 거죠.
이상에서 님의 질문요지와 다른 뚱딴지같은 답변을 왜 하는가 하고 의아해 할 수 있겠지만 제가 말씀드리려는 것은 인류학적관점에서의 접근입니다. 예를 든다면 이런 겁니다. 어떤 카페에 들어가서 자리를 찾는데 어느 자리에 앉을까는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입장한 선객이 어떤 위치에 자리하고 있는가에 따라 상대적으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앎과 실천의 문제도 역시 그러합니다. 왜 문제가 되는가? 알면 곧 행해야 한다는 말은 공자말씀에도 이미 나와있는 이야기입니다. 이건 역대의 현자들이 골백번도 더 우려먹은 이야기죠. 그걸 제가 여기서 재탕할 이유는 없는 겁니다.
어떻게 행할 것인가는 타인과의 관계, 상황과의 관계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행하지 못하는 것은 몰라서가 아니라 이미 선점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행하는 이유는 알아서가 아니라, 남이 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하는 것입니다.
'나는 왜 이 길을 가는가?' 남이 가지 않기 때문에 내가 가는 것입니다. 실천의 문제도 그러합니다. 내가 먼저 인사를 해야하는데, 상대방이 먼저 인사를 선점해버렸기 때문에 본의아니게 나는 말대꾸를 하게되어 버렸습니다.
정치도 그렇습니다. 한쪽이 좌를 선점해버렸기 때문에 다른쪽은 우로 밀리는 것입니다. 지역감정도 그렇습니다. 저쪽이 그런 식으로 나올 것임을 예측하기 때문에, 이쪽은 이런 식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 예단을 깨부신 것이 민주당 광주경선에서의 쾌거죠.
알면 곧 행해야 합니다. 어떻게 행할 수 있는가? 이러한 예측과, 대응과, 상호작용의 연결고리를 깨부셔야만 합니다. 만약 이 연결고리 안에 자신의 포지션을 둔다면 결코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알고도 행하지 못합니다. 상대방이 먼저 인사를 선점하는 바람에 본의아니게 말대꾸를 하게 되듯이 역할게임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버립니다.
돌아가는 판구조로부터 자기를 온전히 독립시키지 않으면 안됩니다. 어떤 조직에 발을 들이미는 순간, 내 의지는 무시되고, 그때부터 조직의 논리가 기승합니다. 게임의 법칙 속으로 말려들어갑니다. 저쪽이 먼저 A방향으로 치고나가면, 나는 거기에 대응하기 위하여 B방향으로 치고나갈 수 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혜 있는 자라면, 그 돌아가는 판에서 한 발을 빼고, 자신에게 자유를 줄 것입니다. 쉽게 게임에 가담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지막 한 순간 그 게임이 자신을 꼭 필요로 할 때 까지 기다릴 것입니다.
너무 일찍 개입해서도 안되고, 수수방관해서도 안되고, 지속적으로 접점을 유지하고 긴장관계를 지속시켜 갈 수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사교의 단절도 개인적 희생도 필요합니다.
결론적으로 앎을 행하기 위해서는 '상황과의 관계맺기'가 중요합니다. 조직이나, 게임이나, 집단의 논리에 한 번 휘말리기 시작하면, 지지자들이 환호하고, 후배들이 기대고, 선배들이 당기고, 가족들이 참견하고 나서면 실천은 불능입니다. 고로 독립해야 합니다.
조직에도, 게임에도, 집단에도 가입하지 말고, 그렇다고 수수방관해서도 안되는, 접점은 유지하되 결코 빠져들지는 않는, 적절한 긴장상태에 자신의 포지션을 두지 않으면' 결코 실천할 수 없을 것입니다. 공자 할아버지가 와도 실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몇몇 위대한 실천자들을 알고 있습니다. 당장 강준만이 그러하고' 노무현이 그러합니다. 그들이 실천할 수 있기 위해서 행하였던 '상황과의 관계맺기'에 주목하십시오. 강준만은 스스로를 고립시켰습니다. 물론 도피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언제나 출입구에 머무르며 그 안으로 뛰어들지도 않고 그 밖으로 달아나지도 않았습니다.
노무현도 그러합니다. 그의 주변은 오래도록 비워져 있었습니다. 학벌도 계보도 없습니다. 크게 비워져 있었기에 실천이 가능했던 것이며, 그 빈자리를 이번에는 지지자들의 채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인제와 이회창은 어떠냐구요? 그들의 주변은 언제나 꽉 차 있었습니다. 실천하려해도 발이 묶여 버렸습니다. 선배와, 후배와, 동문과, 가족들과, 한자리씩 기대하고 몰려드는 자들에 의해 옴쭉달싹 못하게 몸이 묶여버린 것입니다.
그대 실천하려면 주변을 크게 비워두어야 합니다. '상황과의 관계맺기'에 있어 황금률을 지켜가야 합니다. 결코 돌아가는 게임의 판 안으로 뛰어들어서 안되고, 빠져나가서 안되고, 그 언젠가 자신에게 진정한 기회가 주어질 때까지 인내하고 기다리면서 - 날카로운 키스와도 같은 긴장된 접점만을 유지하세요.
질문 > 일상에서의 실천이 아마 가장 어려울 것으로 보이는데요. 일상에서 아는 만큼 실천을 할 수 있을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로는 그래야 한다고 외치면서 정작 스스로는 그렇게 하지 않는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스스로의 주장을 잘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 다른 이의 잘못에 딴지를 걸 수있는가요?
답변 > 홍상수감독의 영화 '생활의 발견'을 보셨습니까? 저는 아직 보지 않았지만 이번주에 볼 생각입니다. 영화평론가들의 평을 들어보기로 한다면 '일상'이라는 단어를 거듭 발견하게 됩니다. 심영섭씨의 평이라면 일상으로 시작해서 일상일상하다가 일상으로 끝을 맺죠.
일상 - 이건 언어폭력입니다. 언어파시즘이에요. 일상이라는 표현은 불가의 '색즉시공 공즉시색'과도 같습니다. 모든 것을 의미하면서 실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거지요. 일상 - 이 한마디에는 천가지 뜻이 있고 만가지 의미가 있으면서 실은 아무 뜻도 없습니다.
이런 고도의 추상적인 단어를 사용해서 얼버무린다는 것은, 평론가들이 영화를 볼줄 모른다는 증거지요. 저는 아직 홍상수영화를 제대로 이해하는 한명의 평론가를 발견하지 못한 것을 유감으로 합니다. 일상 - 이런 단어를 사용해서 안됩니다. 모호한, 추상적인 관념의 세계로 도피하지 말고 정정당당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 맞서란 말이지요.
영화를 모르는 평론가들에게 영화관람은 곧잘 철학수업으로 변해버립니다. 물론 철학으로 위장하고 있지만, 그 안에 철학이라곤 쥐뿔도 없지요. 그저 난해한 언어의 전시장일 뿐입니다. 속임수죠. 현학적인 언어를 제조하고 판매하는 전문용어상업주의입니다.
일상은 무엇일까요? 반복입니다. 반복은 무엇일까요? 순환입니다. 순환은 무엇일까요? 퍼켓입니다. 퍼켓은 정보의 전달단위죠. 모든 정보는 하나의 단선적인 라인을 매개로 하므로 입체적인 정보들은 퍼켓단위로 분할됩니다. 분할과 재조립. 그 부지런한 반복입니다.
항상 접점을 유지하고 있어야 하죠. 긴장하고 주파수를 맞추고 온라인으로 대기상태입니다. 생활의 발견은 그 접점에서의 긴장을 발견하라는 말입니다. 주파수가 맞지 않으면? 어색해지는 거죠. 홍상수는 그 어색함을 부러 노출시킵니다.
일테면 이런 겁니다. 친구를 만나면 먼저 인사를 하는 쪽이 유리합니다. 왜냐하면 인사라는 것이 일종의 질문 형태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사를 선점한 자 A - "안녕하세요?"
인사를 선점당한 자 B - "네!"
B씨는 지금 안녕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므로 "네"죠. 아! 어색해. 머리를 쭈뼛쭈뼛, - -;; 이궁 쪽팔려. 이래서는 안되죠. 사실 문제가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하고 물으면 '네'하고 응답할 수 밖에 없는데 너무 어색하잖습니까? 길에서 만나면 '어디가니?'하고 인사합니다.
인사를 선점한 A씨 - "철수야. 어디가니?"
인사를 선점당한 B씨 - "??.. 근데 내가 지금 어디가고 있지?"
이건 어색한겁니다. 가긴 어딜가남요. 그냥 골목을 쏘다니는거죠. 근데 '어디가냐?' 하고 질문하니까 황당하잖아요. 사실은 질문이 아니라 인사인데. 일단 무시해야 합니다. "아 종호냐? 오랜만이다야" 이렇게 대꾸합니다. 근데 종호녀석 말하는 뽄새 좀보소. "오랫만은 뭐가 오랜만이야. 우리 어제도 봤잖아" 이건 걍 주파수가 안맞는 겁니다. 인사를 던진건데 말대꾸로 받은거죠.
그럼 풍경 #2를 검토하도록 합시다.
인사를 선점한 사람 A- "오늘 날씨 좋죠?"
인사를 빼앗긴 사람 B - "에이, 오늘 날씨가 좋긴 뭐가 좋아"
여기서 B씨는 A씨의 줄문에 '네'라고 답하면 너무 어색하니까 말대꾸를 한다는게 그만 시비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일은 우리의 일상에 흔히 겪는 일입니다. 인사가 질문형태로 되어 있기 때문에 '네'하고 응답하면 대화가 이어지지 않습니다. 대화를 이어가려면 반드시 상대방의 말에 반박을 하는 형태여야 합니다. 이것은 접점의 유지입니다.
즉 B씨는 A씨와 대화채널에서의 접점을 유지하고 있기 위하여 습관적으로 말대꾸를 한겁니다. "날씨좋죠?" "네" 이렇게 되면 거기서 대화가 끊어져버리니까요. 보통 애들이 7살만 되면 말대꾸하는 버릇이 듭니다. 어른들이 고쳐주어야 하지요. 어른이 되어서도 인생자체가 말대꾸가 되어버린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이 사회에서는 보통 냉소주의로 나타납니다. 말을 이어가기 위해서 무조건 하고 상대방의 말을 빈정대는 거죠. 매사를 부정적으로 봅니다. 사실은 상대방에게 말을 거는 방법을 몰라서, 편하게 시비하는 방법을 선택하는 겁니다. 저질 코미디언들도 이런 방법을 잘 사용합니다. 시종 동료의 흠집을 잡고 놀리고 야유하는 거죠. 그걸 코미디라고.(요즘 개그콘서트는 많이 발전해서 과거의 비아냥대기 코미디가 줄었죠)
여기까지에서 관찰된 '생활의 발견'은 인간의 모든 행동이 타인의 행동에 대한 대응형태 곧 상대방의 개입에 어떤 반응을 보이는 구조로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건 인류학적 관점에서 더 논의가 되어야 하겠지만 여기서는 줄이기로 합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어떻게 대화의 접점을 유지해가는가입니다. 상대방과의 주거니받거니의 관계를 계속 유지해가는가입니다.
남자 A "미숙아! 나 너 좋아해"
여자 B "흥! 난 너한테 관심없어"
여기서 여자 B의 퇴짜는 상대방을 자극하여 더욱 강한 대응을 유도하는 과정입니다. 즉 자신의 본심을 말하는게 아니라, 상대방의 더 적극적인 교섭을 추동하는 과정으로서의 자극이라는 점입니다. 근데 남자 A가 멍청하다면 그러한 사태를 알아채지 못하고 삐쳐서 집에가고 말겠죠. 이건 낭패가 됩니다.
또 여기서 여자B는 남자 A가 말한 말의 대사내용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방법과 분위기를 전체적으로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좋아한다는 대사내용보다는 그 말을 하는 과정에서 주변환경과의 교감을 고려하는 형식을 이어가는 겁니다. 말이 아니라 액션을 요구하는 거죠.
여자 B의 진정한 관심은 상대방의 시선과, 관심과, 분위기와 행위에 있어서 총체적인 접점의 지속적인 유지 내지 그 확대증폭인 것입니다. 즉 상황을 확대하고 싶은데 그 구체적인 액션을 상대방에게 떠넘기는 거죠.
이상에서 님의 질문요지와 다른 뚱딴지같은 답변을 왜 하는가 하고 의아해 할 수 있겠지만 제가 말씀드리려는 것은 인류학적관점에서의 접근입니다. 예를 든다면 이런 겁니다. 어떤 카페에 들어가서 자리를 찾는데 어느 자리에 앉을까는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입장한 선객이 어떤 위치에 자리하고 있는가에 따라 상대적으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앎과 실천의 문제도 역시 그러합니다. 왜 문제가 되는가? 알면 곧 행해야 한다는 말은 공자말씀에도 이미 나와있는 이야기입니다. 이건 역대의 현자들이 골백번도 더 우려먹은 이야기죠. 그걸 제가 여기서 재탕할 이유는 없는 겁니다.
어떻게 행할 것인가는 타인과의 관계, 상황과의 관계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행하지 못하는 것은 몰라서가 아니라 이미 선점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행하는 이유는 알아서가 아니라, 남이 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하는 것입니다.
'나는 왜 이 길을 가는가?' 남이 가지 않기 때문에 내가 가는 것입니다. 실천의 문제도 그러합니다. 내가 먼저 인사를 해야하는데, 상대방이 먼저 인사를 선점해버렸기 때문에 본의아니게 나는 말대꾸를 하게되어 버렸습니다.
정치도 그렇습니다. 한쪽이 좌를 선점해버렸기 때문에 다른쪽은 우로 밀리는 것입니다. 지역감정도 그렇습니다. 저쪽이 그런 식으로 나올 것임을 예측하기 때문에, 이쪽은 이런 식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 예단을 깨부신 것이 민주당 광주경선에서의 쾌거죠.
알면 곧 행해야 합니다. 어떻게 행할 수 있는가? 이러한 예측과, 대응과, 상호작용의 연결고리를 깨부셔야만 합니다. 만약 이 연결고리 안에 자신의 포지션을 둔다면 결코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알고도 행하지 못합니다. 상대방이 먼저 인사를 선점하는 바람에 본의아니게 말대꾸를 하게 되듯이 역할게임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버립니다.
돌아가는 판구조로부터 자기를 온전히 독립시키지 않으면 안됩니다. 어떤 조직에 발을 들이미는 순간, 내 의지는 무시되고, 그때부터 조직의 논리가 기승합니다. 게임의 법칙 속으로 말려들어갑니다. 저쪽이 먼저 A방향으로 치고나가면, 나는 거기에 대응하기 위하여 B방향으로 치고나갈 수 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혜 있는 자라면, 그 돌아가는 판에서 한 발을 빼고, 자신에게 자유를 줄 것입니다. 쉽게 게임에 가담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지막 한 순간 그 게임이 자신을 꼭 필요로 할 때 까지 기다릴 것입니다.
너무 일찍 개입해서도 안되고, 수수방관해서도 안되고, 지속적으로 접점을 유지하고 긴장관계를 지속시켜 갈 수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사교의 단절도 개인적 희생도 필요합니다.
결론적으로 앎을 행하기 위해서는 '상황과의 관계맺기'가 중요합니다. 조직이나, 게임이나, 집단의 논리에 한 번 휘말리기 시작하면, 지지자들이 환호하고, 후배들이 기대고, 선배들이 당기고, 가족들이 참견하고 나서면 실천은 불능입니다. 고로 독립해야 합니다.
조직에도, 게임에도, 집단에도 가입하지 말고, 그렇다고 수수방관해서도 안되는, 접점은 유지하되 결코 빠져들지는 않는, 적절한 긴장상태에 자신의 포지션을 두지 않으면' 결코 실천할 수 없을 것입니다. 공자 할아버지가 와도 실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몇몇 위대한 실천자들을 알고 있습니다. 당장 강준만이 그러하고' 노무현이 그러합니다. 그들이 실천할 수 있기 위해서 행하였던 '상황과의 관계맺기'에 주목하십시오. 강준만은 스스로를 고립시켰습니다. 물론 도피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언제나 출입구에 머무르며 그 안으로 뛰어들지도 않고 그 밖으로 달아나지도 않았습니다.
노무현도 그러합니다. 그의 주변은 오래도록 비워져 있었습니다. 학벌도 계보도 없습니다. 크게 비워져 있었기에 실천이 가능했던 것이며, 그 빈자리를 이번에는 지지자들의 채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인제와 이회창은 어떠냐구요? 그들의 주변은 언제나 꽉 차 있었습니다. 실천하려해도 발이 묶여 버렸습니다. 선배와, 후배와, 동문과, 가족들과, 한자리씩 기대하고 몰려드는 자들에 의해 옴쭉달싹 못하게 몸이 묶여버린 것입니다.
그대 실천하려면 주변을 크게 비워두어야 합니다. '상황과의 관계맺기'에 있어 황금률을 지켜가야 합니다. 결코 돌아가는 게임의 판 안으로 뛰어들어서 안되고, 빠져나가서 안되고, 그 언젠가 자신에게 진정한 기회가 주어질 때까지 인내하고 기다리면서 - 날카로운 키스와도 같은 긴장된 접점만을 유지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