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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3218 vote 0 2008.10.29 (23:35:20)

깨달음

그동안 나는 인간이 깨닫지 못하는 이유가 단지 우둔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왔지만, 최근 여러 방면의 예술가들과 대화해 보고 생각을 바꾸었다. 깨달음은 절대음감과 같다. 안 되는 사람은 절대 안 된다.

되는 사람은 원래 된다. 그들은 깨달아서 태어난다. 물론 절대음감을 가진 사람이라도 악기를 접하지 못하면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듯이 깨달아서 태어난 사람도 적절히 방아쇠를 당겨주지 않으면 펼쳐내지 못한다.

아기의 언어능력은 4세 이전에 완성된다. 이후 급격히 쇠퇴한다. 마찬가지로 4세 이전 영아기에 여러 악기의 소리를 들려주는 방법으로 절대음감은 계발될 수 있다. 그 시기를 놓치면 어렵게 된다.

깨달음도 마찬가지다. 나는 4살 이전부터 확실히 느낌을 잡고 있었다. 첫돌 이전의 기억을 상당히 가지고 있는데 한 살이 되기 훨씬 전에 어떤 느낌을 가졌고 이후 그 느낌은 반복적으로 각성되었다.

절대음감이 중요한 만큼 상대음감도 중요하다. 상대음감은 5세 이후 더 늦은 시기에 교육에 의해 계발된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깨달음도 더 늦은 시기에도 상대적인 계발의 여지가 있다고 본다.

처음부터 되는 사람과 늦게라도 가르치면 되는 사람이 있다. 어느 쪽이든 4세 이전에 그 절대성의 방아쇠는 격발될 수 있고, 성년이 되기 이전에 그 상대성의 가능성은 계발될 수 있다. 그 이후로는 어려워진다.

30세를 넘은 사람이 처음 말을 배운다면 실패다. 30세를 넘은 사람이 처음 악기를 접한다면 역시 실패다. 깨달음도 마찬가지다. 초발심이 깨달음이라 했다.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너무 늦게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미학적 양식화가 중요하다. 깨달음의 문화와 그에 따른 소통법이 중요하다. 깨달음은 어떤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맞는 악기를 만들고, 그 악기로 연주하고, 그 연주로 세상과 소통하는 것이다.  

깨달음은 사고방식이다. 관점이 있다. 보는 시선이 있고 보여지는 대상이 있으며 그 사이에 절대경로와 상대경로가 있다. 어떤 눈높이로 볼것인가다.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이미 뇌구조가 세팅되었기 때문이다.

뇌 안에 길이 나 버린 것이다. 잘못 길이들어 버린 것이다. 뇌의 여러 영역들에서 각 영역들의 포지션이 지정되고 역할이 결정된 상태에서 그것을 바꾸지 못하기 때문이다. 뇌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

뇌과학의 보고에 의하면 대뇌는 구조론의 귀납적, 인식론적 원리로 작동하고 소뇌는 구조론의 연역적, 존재론적 원리로 작동한다고 한다. 언뜻 대뇌가 더 크기가 때문에 뉴런이 많을 것 같지만 다르다.

소뇌가 훨씬 더 뉴런이 많고 복잡하게 작동한다. 각별한 점은 소뇌의 작동이 존재론의 소거법을 쓴다는 점이다. 구조론은 질, 입자, 힘, 운동, 량으로 내려갈수록 범위가 좁혀진다. 하나씩 배제되는 것이다.

질에는 모든 것이 갖추어 있고 입자, 힘, 운동으로 갈수록 선택지가 줄어들어 양에서는 하나만 남는다. 소뇌는 존재론의 소거법을 쓴다. 즉 소뇌가 관장하는 근육운동에 있어서 처음에는 많은 뉴런들이 관여한다.

훈련을 거듭할수록 필요없는 뉴런들의 기능이 정지되어 최후에는 몇 개의 뉴런이 독점적으로 해당하는 근육을 관장한다. 갓난 아기의 손가락을 소뇌의 어느 부분이 통제할 지 결정되어 있지 않다.

반복훈련에 따라 적임자가 선택되며 다른 부분이 배제된다. 야구선수가 홈런을 치는 이유는 다른 부분들의 불필요한 간섭을 기술적으로 차단했기 때문이다. 존재론의 이러한 소거법 원리가 각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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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은 소실점과 같다. 보면 보인다. 그러나 지난 5천년 동안 아시아에서 그것을 보아내는데 성공한 사람은 없다. 보고도 보지 못한다. 눈 뜨고 당한다. 소실점을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림으로 설명할 수는 있다.

깨달음도 마찬가지다.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려서 설명할 수 있다. 그림을 곁들여 설명한 것이 구조론이다. 깨달음은 소실점과 마찬가지로 여러 구성소가 어떤 하나에 전부 물려있음을 보는 것이다.

회화에서는 리얼리즘이 강조된다. 리얼리즘이 말하는 사실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볼 것인가다. 사실을 실제로 일어난 사건으로 본다면 좁은 것이다. 리얼리티는 과학이다. 과학만큼 명백한 사실은 없다.

쿠르베는 보지 못했다는 이유로 천사를 그리지 않았지만, 사람의 마음 속에는 상상 속의 천사가 있다. 그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쿠르베의 사건이 사실의 전부는 아니다. 그는 사건과 사실을 혼동하고 있다.

서구가 소실점을 발견했지만 쿠르베 이전의 고전명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제각각 다른 데를 보고 있다. 시선이 한 점에 모아지지 않는다. 시선에는 소실점이 없다. 그것은 만화와도 같다.

모든 그림 속의 등장인물들이 각자 자기 이야기를 떠벌인다. 한 폭에 그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하루 동안, 혹은 몇 년 사이에 일어난 많은 사건들을 이어붙여 억지로 한 폭에 담아낸 것이다.

19세기 이전 서구의 그림들 다수는 만화다. 시각의 소실점은 있어도 이야기의 소실점은 없다. 마찬가지로 동양의 산수화는 지도에 가깝다. 그림은 보는 것인데 보여주려 하지 않고 말하려고 한다. 이상하다.

소실점은 구도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뜰앞의 잣나무가 소실점이고, 끽다거가 소실점이다. 내러티브에 의한 소실점이 있고 플롯에 의한 소실점이 있고 테마에 의한 소실점이 있고 스타일에 의한 소실점이 있다.

한 점에 압축할 수 있는 통일성이 있어야 한다. 하나의 벼리를 당기면 여러 갈피들이 전부 끌려오는 그것이 있어야 한다. 소실점은 과학성이다. 과학은 사실이다. 과학은 리얼리즘이다.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그리지 않았다 하더라도, 김기덕식 판타지라 하더라도 그 안에 숨은 과학성이 있으면 그것은 리얼리즘의 역사 안에서 호흡하고 있는 것이다. 과학성이 있느냐가 중요하다.

어떤 사람이 내연기관의 원리를 발견했다면, 뒤에 온 사람이 자동차를 발명할 것이고, 그 뒤에 온 사람이 자동차를 생산할 것이고, 그 다음 온 사람이 자동차를 판매할 것이고, 마지막에 온 사람이 자동차를 소유할 것이다.

여기서 자동차를 발명한, 자동차를 제조한, 자동차를 판매한, 자동차를 소유한 사건들은 모두 그 자동차의 원리를 발견한 그 하나의 사건에 맞물려 있다. 전부 연동되어 있다. 사슬처럼 이어져 있다.

무엇인가? 최초 자동차 원리의 발견이 소실점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것이 과학성이다. 그것이 있는 것이 리얼리티가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하나로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조주가 뜰앞의 잣나무를 말했기 때문에 내가 뜰앞의 잣나무를 쓴다. 먼저 온 혜능이 거울이 없다고 말했기 때문에, 뒤에 온 경허가 무애행을 시범하여 보인 것이고, 나중 온 내가 구조론을 쓴다. 전부 연결된다.

조주, 경허의 콧구멍 없는 소가 구조론이다. 뜰앞의 잣나무가 구조론이고, 끽다거가 구조론이다. 전부 한 점에 물려 있다. 하나를 당기면 전부 따라오고 하나의 빗장을 풀면 한꺼번에 활짝 펼쳐진다.  

소실점은 만유를 집약한 하나다. 그림이든 음악이든 소설이든 반드시 그것이 있어야 한다. 그 소실점 안에 만유를 집약해 넣었기 때문에 거기서 하나씩 빼서 쓰기만 해도 뭔가 크게 이루어진다.

김기덕이 시나리오를 쓰면 장훈이 영화를 대박내는 것도 그런 연쇄고리다. 김기덕이 집약했기 때문에 장훈이 풀어내는 것이고, 석가가 인연을 말했기 때문에 내가 그 압축을 풀어서 구조론을 만든 것이다.

거기에 체계가 있고 흐름이 있다. 질서가 있다. 작품 안에도 있고 사회에도 있다. 세상은 온통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마땅히 뇌 안에서도 그 일치와 연동의 연쇄고리가 구축되어 있어야 한다.  

깨달음이다. 안 되는 사람은 절대로 안 된다. 안되지만 반응성은 있는 사람이 있다. 절대음감이 있는 사람은 연주자의 논리에 호흡을 맞춘다. 그것이 없어도 반응성이 있는 사람은 감정의 흐름으로 반응한다.

연주자의 관점과 청중의 관점은 다르다. 연주자는 연주행위 그 자체의 강약과 장단과 고저를 따라 흘러가는 내밀한 논리에서 긴장을 얻는다. 청중은 거기에 반응하는 내 마음의 흐름에서 긴장을 얻는다.

깨달음도 마찬가지다. 절대음감이나 상대음감이 있는 사람은 연주자의 관점을 획득할 것이다. 그것이 없어도 반응성이 있는 사람은 자기 감정의 논리에서 그 상대되는 짝을 찾아 반응할 것이다.

그들은 깨달음의 문화, 깨달음의 삶의 형태에서 그 문자향과 그 서권기를 맛볼 것이다. 결론적으로 깨달음에도 4세 이전의 절대영역과 성인 이전의 상대영역이 있으며 이와 무관하게 반응성의 영역이 있다.

그것도 없어서 이것도 저것도 전혀 안 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절대영역도 상대영역도 없고 반응성도 없다. 그들은 좋은 연주자가 되지 못할 뿐 아니라 좋은 청중도 되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도 4세 이전에, 혹은 성인 이전에 좋은 깨달음의 문화와 그 삶의 형태를 맛보았다면 달라졌을지 모른다. 뇌 안에 있는 깨달음의 영역이 자극받아 기능이 일찍 발현되었을지 모른다.  

중요한 것은 깨달음이 존재론이므로 소거법을 쓴다는데 있다. 학습은 인식론이므로 반대다. 존재론은 처음부터 소실점이 세팅되어 있어야 한다. 전부 한 점에 물려 있어야 하나씩 배제하여 흐름을 이어갈 수 있다.

야구선수가 투수가 공을 치는 데도 절대성의 방법과 상대성의 방법이 있다. 절대성의 방법은 반복훈련에 따라 근육이 스스로 방망이를 휘두른다. 150키로 이상의 속도로 날아오는 공은 이 방법으로만 칠 수 있다.

상대성의 방법은 이른바 ‘받쳐놓고 친다’는 것이다. 특정 코스의 공을 노리고 그 코스가 아닌 공은 전부 파울볼로 걷어내고 그 코스로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주로 나이든 선수들이 큰 경기에서 이 방법을 쓴다.

고참들이 큰 경기에 강한 이유는 이 방법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깨달음에도 이런 것이 있다. 원래 아는 절대성의 깨달음이 있고 누군가가 기준을 제시해 주면 그 기준에 맞추어서 아는 상대성의 깨달음이 있다.

절대경로도 상대경로도 아니지만 깨달음의 문화 안에서 반응성이 좋은 사람이 있다. 어느 쪽이든 뇌를 세팅하는 문제이므로 일찍 시작해야 한다. 나는 어떤 그림이나 장면을 보면 그 그림의 긴장도를 읽는다.

그것을 전혀 읽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 사람에게 끽다거의 긴장도를 설명하기란 용이하지 않다. 이현세 그림과 허영만 그림의 차이와 같다.

이현세 그림은 아무리 잘 그려도 긴장도가 제로에 가깝다. 허영만 그림은 대충 그려도 긴장도가 높다. 긴장도가 높다는 것은 그림 속 눈이나 코의 각도가 살짝 바뀔 때 이에 연동되어 바뀌는 수준이 높다는 것이다.

긴장도가 낮으면 모든 여자의 얼굴표정이 같아서 머리칼 색깔로 주인공을 구분하며 모든 남자의 얼굴형태가 같아서 그것을 구분하기 위한 대머리와 안경잡이 모자 쓴 자 등의 장치와 설정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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