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은 쉬운 것인가? 백남준이 ‘예술은 사기다’ 하면 모두들 좋아한다. 환호작약이다. 기자들은 신이 나서 타이틀을 뽑고 군상들은 포장마차에서 술안주 삼아 시끌벅적하게 떠들어 댄다. 그러면서 그 예술을 발로 차버린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은 발로 찬다. 친한 친구를 한 수 깔아보듯이. 예수가 고향에서 버림받듯이. 그들은 친해지기를 원하며 발로 찬다. 그렇다. 그들은 진작부터 예술을 걷어차 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속이 근질근질 했던 것이다. 그래서 백남준의 발언에 환호한 것이다. 확실히 예술은 사기일 수 있다. 고흐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 지구 60억 인류 중에 천 명쯤 될까? 백 명쯤일 수도 있고 더 적을 수도 있다. 고흐가 높이 평가되는 이유는 더 좋은 것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지 군중들이 진가를 이해해서가 아니다. 백남준이 높이 평가되는 이유는 이후 그를 능가할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백남준이 활동했던 동 시대의 인간들 대다수는 그를 사기꾼으로 보았다. 한 때의 유행으로 보았고 까십거리로 보았고 치기로 보았다. ‘저질 개구라쇼도 외국에서는 먹히는군! 며칠 반짝하다 말겠지.’ 하는 표정이었다. 그를 능가하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그는 지금 거목이 되어 있지만 그를 이해하는 사람은 여전히 한국인 중에 없다. 하기사 백남준 자신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했을 테니까. 이명박이 왕창 깨지는 것을 보고 뒤늦게 노무현의 진가를 이해하듯이. 백남준을 능가하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 현실에 굴복할 뿐. 그 현실을 소극적으로 받아들일 뿐. 여전히 한국인들은 적극적으로 다가서지 않고 있다. 군중들이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예술은 사기일 수 있다. 겉멋이나 흉내내는 이에게 예술은 사기다. 깨달음도 마찬가지다. 당신이 깨닫지 못하는 한 비싼 수업료를 지불한 당신에게 깨달음은 사기다. ‘깨달음은 사기다’ 라고 말해주기를 그들은 원한다. 그래야 친근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깨달음을 말하는 이들은 점점 라즈니쉬가 되어간다. 점점 숭산이 되어간다. 점점 사기꾼이 되어간다. 그들은 성철을 원하지 않는다. 호통을 칠 것만 같기 때문이다. 친구가 되어주기를 원한다. 함께 웃고 떠들기를 원한다. 그러다가 발로 찬다. 더 멋진 것을 찾아 미련없이 떠난다. 그렇게 소비하기를 원한다. 누구나 깨달을 수 있다고 친근하게 말해주기를 원한다. 간단히 깨달을 수 있다고 대답해주면 좋아한다. 그리고 발로 차버린다. 누구나 얻을 수 있는 것은 돈이 되어주지를 않기 때문이다. 이미 깨닫고 있다고 말해주기를 더욱 원한다. 이미 완성되어 있다고 말해주기를 원한다. 열광하고 환호한다. 그리고 발로 차버린다. 이미 깨달았으니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이비들은 계단을 만든다. 선각이니 뭐니 하는 중간계를 설정한다. 심지어 교회에도 장로라는 것이 있고 권사니 집사니 하는 것이 있다. 그래야만 집금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관문을 세우고 출입을 제한하며 통행세를 받는다. 소수에게 특권을 부여하고 특권세를 받는다. 그래야만 돈이 돌아서 시스템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진실을 말하면 이 방법을 쓰는 집단은 모두 사기다. 그것이 상품이기 때문에 사기다. 당신이 댓가를 지불하고 1회용의 상품으로 소비하기 때문에 예술은 사기다. 당신이 깨달음을 상품으로 소비하는 한 깨달음은 사기다. 돼지에게 주어지면 당연히 돼지가 된다. 깨달음은 길이다. 많은 사람이 그 길을 가면 진실이 되고 아무도 그 길을 가지 않으면 사기가 된다. 진실한 것은 낳음이다. 길이 길을 낳기 때문에 진실하다. 길 끝에서 또다른 길이 생겨나기 때문에 사기가 아니다. 깨달음이 1회용으로 소비되면 사기고 더 많은 무수한 새로운 깨달음을 낳으면 사기가 아니다. 구조론은 어렵다. 어려워야 한다. 더 많은 길들을 낳기 위해서다. 낳음은 어렵다. 당연히 진통이 따른다. 낳아서 사회에 기여해야 한다. 사회를 흔들어놓지 않으면 안 된다. 사회에 큰 충격을 던지고 큰 의문을 던지고 큰 가능성을 던져야 한다. 결국 사회를 온통 바꿔놓지 않으면 안 된다. 어렵다. 누구나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누구나 그 길을 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길은 누군가에 의해 개척된 길이다. 그리고 당신의 길은 언제라도 그 누군가가 개척해놓은 길 끝에서 시작된다. 깨달음은 사기다. 결국은 고독하게 혼자서 자신의 길을 개척해야 하기 때문이다. 누구의 가르침도 당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남이 개척해 놓은 길의 줄 뒤에 선다면 사기다. 그 길이 당신의 길이 아니기 때문에 사기다. 깨달음은 어렵다. 누군가가 가시덤불을 헤집고 처음으로 길을 개척해야 하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다단계 가입처럼 쉽다. 누군가의 밑에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아무도 내 밑으로 들어오려 하지 않기 때문에 다단계는 매우 어렵다. 깨달음은 지극히 쉬운 것이다. 남이 개척한 길을 가기만 하면 된다. 버스처럼 승객이 되어 타고 있으면 된다. 운전사가 정류장까지 알아서 모셔준다. 그러나 진짜가 아니다. 자신의 자동차를 직접 운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깨달음은 결국 종교를 대체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누군가가 대신 구원해 준다는 종교가 가짜이기 때문에 자신이 스스로 구원한다는 깨달음이 필요한 것이다. 언젠가는 종교가 사라지고 모두가 깨달을 날이 온다. 그리고 깨달음은 공동체의 문화로 정착될 것이다. 깨달음이 예술이나 종교 혹은 사랑과 마찬가지로 문화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문화에는 양식이 있다. 반드시 지켜야 할 표준이 있다. 코드가 있다. 사랑에는 데이트가 있고 종교에는 예배가 있고 예술에는 스타일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문제가 된다. 다양하되 산만하지 않아야 하고 정상에 이르되 거기서 고립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예술은, 모든 종교는, 모든 가치는, 모든 사랑은, 모든 깨달음은 A와 B가 만나는 문제에 답하고 있다. 만나서 소통하는 문제다. 소통의 길을 열어가는 문제다. 소통의 안테나를 만들고 그 주파수의 표준을 정하는 문제다. 만약 당신이 모든 슬픔을 끊고 모든 번뇌를 끊고 자유로워지면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가? 천만에. 그대 안의 백 퍼센트를 끌어내기 전 까지는 진짜가 아니다. 그것은 사랑을 통해 이루어지며 사랑은 만남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개인이 번뇌를 끊고 평상심에 이르렀다는 소승적 태도는 의미가 없다. 누구나 깨달을 수 있다는 말은 누구나 평상심에 이를 수 있다는 정도의 의미에 불과하다.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 예술의 종교의 가치의 사랑의 깨달음의 궁극적 의미는 소통에 있으며 소통은 혼자서가 아니라 함께이기 때문에 지극히 어려운 것이다. 그것은 길을 가는 것이며 그 길은 누군가의 첫 발자국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단지 평상심에 이르기만 하면 된다는 소승적 태도는 종교가 천국만 가면 된다든가, 가치가 돈만 벌면 된다든가, 사랑이 결혼만 하면 된다든가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진실되지 않다. 그것은 짝사랑에 불과하다. 그것은 삶의 룰을 정하는 문제이고 문화의 양식을 정하는 문제이고 예술의 스타일을 완성하는 문제이고 사랑의 데이트코스를 정하는 문제이고 나와 세상과의 접점을 어떻게 완성할 것인가의 문제다. 중국에 가본 사람은 중국의 거리에서 쉽게 한국인을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 옷차림이 다르기 때문이다. 패션감각의 수준이 다르다. 눈에 확 띈다. 중요한 것은 그 간극이 쉽게 좁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얼마전만 해도 한국 남자들은 흰 양말을 신었다. 양말의 색깔이 바지 색깔과 어울려야 한다는 생각을 해 본 사람이 한국인 중에 없었다. 지금도 뉴욕이나 파리 사람들은 한국인의 패션수준을 후지게 볼 것이다. 하룻만에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중국이나 베트남의 패션수준이 하룻만에 한국을 따라잡을 수 있다고 믿는 만큼이나 황당하다. 하기사 하룻만에 따라잡는 사람도 있다. 감각이 좋으면 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따라잡는다 해도 그것이 누구에게 배우고 모방해서 가능한 것이지 완전히 단절된 상태에서는 백년이 지나도 어렵다는 것이다. 베트남이 고립된 채로 백년안에 한국인의 패션감각을 따라잡는다? 영원히 불가다. 하룻만에 따라잡는 사람도 있지만 혼자서는 안 되기 때문에 불가다. 한 사람이 새로운 유행을 만들면 모든 사람이 그 유행을 따라하기 때문에 도리어 진도는 나가주지 않는다. 선진국에서는 그렇지 않은데 말이다. 따라해서도 안 되고 따라하지 않아도 안 되기 때문에 그것은 매우 어렵다. 깨달음은 소통이다. 누군가가 소통의 표준을 만들어야 하지만 모두가 그 표준을 따라하기 때문에 진정한 소통의 표준은 완성되지 않는다. 한 사람이 골키퍼를 맡으면 모두가 흉내내어 골키퍼가 되려하기 때문에 안 된다. 깨달음은 모두가 자신의 개성에 맞는 독창적인 의상을 완성하는 것이며 그것은 매우 쉽지만 혼자 하면 튀어서 안 되고 함께 하면 모방되어서 안 된다. 깨달음은 낳음이다. 나의 변화로 너의 변화를 낳는다. 너와 나의 변화로 세상의 변화를 끌어낸다. 그런데 다르다. 나는 나답고 너는 너답다. 그 가운데 자연스러움이 있고 품격이 있다. 변화의 방향성이 있다. www.drkimz.com.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