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맞을까? 맞는 사람에게 원인이 있을까?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 착각이다. 오해다. 끝이다. 실패다. 망한다.
왜 맞을까? 때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맞는 것에 관하여는 "어떻게"만 남는다. 어떻게 맞아야 잘 맞는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 또한 먼저 왜 때릴까에 대해 아는 것이 있어야 한다.
왜 때릴까? 근본 원인은 하나다. 좁기 때문이다. 막혔기 때문이다. 답답하고 두려워하게 된 탓이다. 이 좁아짐을 갇히지 않고 활로를 타개한 것이 인류의 진보다. 인간은 활개치고 살 공간이 필요하다. 공간이 충분하다면 다른 인간을 때릴 이유가 없다. 폭력은 조직화되지 못한다. 공간이 좁아지면, 좁은 것이 확실해지면 때리기가 시작된다. 죽이기도 일상화 된다. 규범화되고 법이 된다. 때리고 죽여서 좁아짐에 대응한다. 나만 살고 보는 것이다.
왜 때리는가? 때리는 쪽도 이유를 모른다. 가해자는 곧 피해 예비군일 뿐이다. 근본 원인은 하나다. 지구가 닫혀 있기 때문이다. 때리고 죽이기는 지구에 갇혀 존재를 이어가는 생명체에 공동 운명이다. 닫힌 공간에서 한 생명체의 번성은 곧 멸종에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때리고 죽일 천적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천적이 없는 경우 동일종이 천적이 된다. 그렇다. 인간에 천적은 인간이다.
왜 때리는 것일까? 인간이 성공했기 때문이다. 인간이 아니고는 인간을 때리거나 죽일 수 있는 다른 생명체가 없기 때문이다. 가해자 역시 이 굴레를 벗지 못한 생명일 뿐이다. 비슷 비슷한 유인원 중 팀플에 눈 뜬 한 짐승에 무리일 뿐이다. 생명은 먹이사슬을 만들고, 인간은 폭력사슬을 만든 것이다. 폭력을 서열을 만들어 공간을 창출하는 것이다.
폭력은 서열 만들기다. 다만, 법적 보호를 받는 서열 만들기는 폭력이라 하지 않는다. 공권력이라 불린다. 국가 공동체의 공적 서열만들기가 부당하면 법외 폭력의 영향력이 커진다. 야튼 서열만들기는 닫힌공간 안에서 공간을 나누는 효과를 만든다. 한 덩이를 둘, 일진과 이진으로 나누어 일진이 이진을 때리면 이진이 차지하는 물리적 심리적 공간이 줄어든다. 그 축소된 공간만큼 일진에 숨통이 트이는 것이다. 만약 일진과 이진과 삼진으로 나누면 안정성 높아진다. 일진 주도로 삼진을 때려 착취하면 이진은 착취당하지 않는 것만으로 심리적 공간이 확대된 상태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진보는 폭력에 의존하지 않는 공간 만들기다. 인간은 생존방식 바꿨다. 사냥에서 농경으로, 농경에서 산업화로, 산업화를 넘어 다음방식을 찾고 있는 것이다. 이건 순간에 해치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러한 진보를 일로 발견하고, 이 일을 성공시킬 발명이 발명으로 꼬리를 물고 이어져야 한다. 아이디어엔진이 상용화되어 돌아가야 한다. 진보를 일상화해야 한다. 할 수 있지만 하지 않고 있는 것들을 끊임없이 재조합하여 활로를 열어야 한다.
"왜 맞을까?"는 몰라도 "맞는 사람에게도 뭔가 이유가 있지 않을까?"라는 질문은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왜 맞을까?"에 대한 정답은 하나다 때리기 때문이다.
어떻게 맞는 것이 잘 맞는 것인가?는 생각해 볼 만한 질문이다. 잘 맞는 것은 가능하며, 잘 맞는 법이 있고, 배우고 익힐 수 있기 때문이다. 잘 맞는 것은 성공할 가치가 있는 일이다.
맞는 것이 부끄럽지 않아야 폭력을 넘어 설 수 있다. 잘 맞는 사람들은 단결하라!
맞소.
공간에 에너지가 투입되면 재질서화가 일어나오.
문제는 질서요.
에너지와 공간은 일정한 비례로 계속 증가해야 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