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구조인가?
재래의 아카데미즘이 세잔 이래 부각된 인상주의 열풍을 온몸으로 거부한 것은 단순히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
림이 필요없는 시대의 도래를!
예술의 종말! 시인의 침묵! 기어이 그런 시대가 오고야 만다는 사실을. 그러나 결과는 반대였다.
인상주의 화풍의 등장은 죽어가던 예술의 목숨을 극적으로 연장했다. 인상주의 덕분에 예술의
종말은 늦춰졌다.
영국화단이 앤디워홀을 필두로 미국에서 일어난 새로운 기풍을 거부한 것도 이유있다. 난삽한(?)
그것을 예술의 종말을 알리는 전주곡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반대였다. 죽어가던 예술의
생명은 극적으로 연장되었다.
조금 가벼워지고 우스워지기는 했지만. 예술은 귀족의 사랑방에서 걸어나와 대중의 품 속으로
뛰어들어 살아남았다. 그렇다. 예술은 귀족의 아카데미즘에서, 부르주아의 인상주의로, 그리고
대중의 팝아트로 하향한 것이다.
무엇인가? 예술은 본래 성당 꼭대기 천정에 그려져 있었다. 저 높은 곳에 있었던 것이다. 예술은
왕에서 귀족, 귀족에서 부르주아, 부르주아에서 대중으로 한 계단씩 내려왔다. 높은 산에 깊은
골짜기 하고도 수도원 천정에 있던.
고귀하신 예술께서 산 밑으로 내려와서 대중의 품에 안긴다. 나는 말한다. 한번 더 내려와야 한
다고. 더 낮은 곳으로 끌어내려져야 한다고. 그것이 ‘현대성’이고 ‘디자인’이다. 예술은 화가의
캔버스를 탈출해야 한다.
왜 그림이 화가의 캔버스에 갇혀있어야 되지? 현대성 개념은 결국 예술을 21세기의 해석, 인류
문명의 디자인 관점으로 보는 것이며 예술을 삶과 일체화 하는 것이며, 생활양식으로 고도화하
는 것이다. 밥먹고 떵싸는 예술이어야 한다.
필자의 생각을 거스르는, 필자의 의견과 부딪히는 부분이 있다면 그 사람이 대단한 진보주의자
라도 실제로 그 심리의 밑바닥은 고루한 보수심리일 수 있다. 새로움을 받아들이는 것이 진보다.
앤디 워홀의 상업미술을
‘부르조아의 개가 된 타락한 짓거리, 자본의 노예를 자청하는 부끄러운 짓’으로 보는 진보주의자
화가도 있었을 거라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헤쳐가야 할 현대다. 시대의 도전에 맞서
응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현대가 그것을 요구한다면 받아들여야 한다. 왜 그림이 캔버스에 갇혀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왜 예술이 칼라나 소리 형태로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왜 예술이 인간에게 안정감을 주고,
기쁨을 주고, 즐거움을 주고,
뭔가를 주고 계속 주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 예술이 관객에게 뭔가를 주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시대와 싸우는 무기일 수는 없을까? 예술은 주는 것이 아니라 치는 것이다. 예술의 힘으로 우리
의 전진을 막아서는 괴물을 퇴치하고
명박산성을 격파하고 진도나가야 한다. 예술은 관객에게 달콤한 선물을 주는게 아니라 총을 들어
적을 쏘는 것이다.
● 질의 시대- 신, 이상, 완전성을 그린다.
● 입자의 시대-인간, 인상. 신의 완전성을 인간 안에서 찾는다.
● 힘의 시대- 물질, 디자인, 앤디워홀 이후 그림은 캔버스를 떠났다.
● 운동의 시대- 현대성, 모드, 공존의 탐색.
● 양의 시대-
구조론으로 보면 질≫입자≫힘≫운동≫량의 순서로 하향한다. 점점 아래로 내려간다. 아카데미
즘은 예술을 인간 위에 군림하는 신의 빛으로 여겼다. 천상의 메시지. 숭고한 이상, 신의 완전성
을 나타낸다.
그 시대에 예술은 귀족에 의해 독점되었다. 아카데미즘은 예술을 귀족이 왜 평민보다 우월한지
를 증명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귀족의 시대가 종말을 고하자 인상주의가 대두되었다. 예술의 주
소비자가 귀족, 혹은 귀족이 되고픈
상층부 부르조아 계급이었으므로 귀족시대의 종말은 곧 예술의 종말을 뜻했다. 그래서 그들은
인상주의를 거부한 것이다. 예술이 필요없는 시대로 될까봐. 그렇다. 그런 예술은 필요없다.
귀족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예술.
신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예술. 그런 예술은 18세기와 함께 죽었다. 화단의 인상주의와 음악에서
낭만주의의 등장은 부르주아 시대의 등장과 함께 했다. 그리고 20세기 대중의 시대가 도래했다.
예술은 화가의 캔버스에서 뛰쳐나와
컵이나 도자기나 의자나 TV나 라디오나 자동차로 옮겨붙었다. 디자인의 시대가 된 것이다. 더
이상 예술은 사람에 붙어있지 않게 되었다. 아카데미즘이든 인상주의든 결국 귀족과 부르주아
계급의 우월성 곧 사람에 천착해 있었던 반면,
팝 아트의 등장은 예술이 사람의 품격이 아닌 상품의 품격을 알리는 목적으로 변화된 것이다.
필자가 주장하는 것은 구조다. 구조는 심 1과 날 2에 의해 성립한다. 무엇인가? 이제 그릴만한
것은 다 그려버렸다.
꽃도 그렸고 얼굴도 그렸고 개도 그렸고 집도 산도 물도 그렸다. 그러므로 구조를 그려야 한
다. 즉 어떤 대상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그리는 것이다. 포지션을 그리는 것이다. 그것
이 질≫입자≫힘≫운동≫량의 전개에서 네번째 운동이다.
운동이 관계를 만든다. 운동해야 포지션이 얻어진다. 머무르는 것은 선배들이 다 그려버렸고 이
제는 움직임을 그려야 한다. 이렇게 한 계단씩 아래로 내려갈 때 마다, 예술은 더 가벼워지고, 더
우스워진다.
더 유쾌해지고, 더 심플해지고, 더 우리의 삶 속으로 밀접하게 침투해 들어간다. 그러한 변화를
인정해야 한다. 왜? 그것이 시대의 대세이니까. 현대성이니까. 세상이 그렇게 흘러가니까. ‘나는
화가야’ 하는 자존심을 꺾어야 한다.
예술은 본래의 놀이를 회복해야 한다. 예술이 신분을 나타내는 표지가 아니라 삶의 밀도를 높이
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구조를 말한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다 그려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움직임을 그려야 한다.
혼자 있는 것은 선배들이 다 그려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둘 이상의 관계를 그려야 한다.
움직임을 그리다.
둘 사이의 관계를 그리다.
둘 사이에 숨은 보이지 않는 긴장감을 그리다.
악사도 그렸고 꼬마도 그렸으므로 이제는 악사와 꼬마의 관계를 그려야 한다. 그것이 구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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