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일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답을 찾으려면, '나'와 '일'을 알아야 한다.
나도 일도 그저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부모가 있다.
나나 일이나 부모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나와 일에 탄생.
신> 우주> 생명> 인류> 나, 이 다섯을 알아야 한다.
이 다섯의 중심이 한 줄로 꿰어짐을 알아야 힌다.
이 다섯이 한 줄로 울릴 때, 일이 나기 때문이다.
내 몸은 부모를 통해 태어나지만, 부모나 족보를 통해서는 '내'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인류라는 집단이 '나'라는 개체를 낳았다. 개체가 다른 개체를 낳는 과정은 일로 보면 반복이다.
'나'라는 개체를 낳은 부모라는 개체를 보는 것은 답을 찾는 시작일 뿐이다. 부모나 가문이나 민족에서 멈추면 실패다.
부모 찾기에 기본 진도는 인류다. 인류까지는 가줘야 사람이다. 대화가 된다. 사람을 만나도 할 말이 있는 것이다.
인류의 중심에 반응할 수 없다면, 대화할 수 없다면, 짐승이다. 명성과 부와 권력이 있다해도 쥐나 개나 뱀이라 불려도 마땅하다.
신> 우주> 생명> 인류> 싯다르타, 일이 났다. 불교가 나왔다.
신> 우주> 생명> 인류> 예수, 일이 났다. 기독교가 나왔다.
신> 우주> 생명> 인류> 노무현, 일이 났다. 사람사는 세상이 나왔다.
일은 할 수 '없는 것'을 하는 것이 아니다.
되어 마땅하나 , 아직도 하지 '않는 것'을 하는 것이다.
하지 않는 것을 엮어서, 할 수 없는 것을 해내는 것이 될 수 밖에 없는 일다.
신> 우주> 생명> 인류> 이도, 일이 났다. 한글이 나왔다.
신> 우주> 생명> 인류> 스티브잡스, 일이 났다. 아이폰이 나왔다.
'신> 우주> 생명> 인류> 나'를 사유하는 것이 일이다. 이 결에 맞춰 작업하는 것이 일이다.
싯다르타나, 예수나, 노무현이나, 이도나, 스티브잡스와 같이 않아도 좋다.
한 땀의 작업이나, 한 조각의 사유라도 이 결에 맞춰할 수 있다면, 아무리 소소하여도 마땅히 일이다.
신과 우주와 생명과 인류 앞에 일하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다.
아닌 건? 짓이다. 명성과 부와 권력으로, 신문과 방송과 책과 동상으로 아무리 처발라도 짓이다.
쥐 짓, 뱀 짓, 개 짓, 그네 짓, 허튼 짓이다. 사람 껍데기 하고 있어도 사람 아니다,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