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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2123 vote 0 2008.01.08 (22:22:45)

존재는 저울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그대에게 질문한다. 얼마나 사랑하느냐고. 답변하기 곤란하다. ‘하늘만큼 땅만큼’이라 할까. 진부하다. 하늘보다 크고 땅보다 넓은 것이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을 당신은 알고 있다.

당신이 어떤 크기의 숫자를 말해도 보다 큰 것은 존재한다. 숫자로 말했기 때문에 실패다. 비교되었으므로 실패다. 절대성의 영역에 도달하지 못하고 상대성의 영역에 머물러 있었으므로 실패다.

완전성의 경지가 있다. 비교될 수 없는 것이 있다. 상대(相對)의 대(對)를 끊어 절대의 경지에 이르러야 완전하다. 바로 그것을 말해주어야 한다. 완전한 것은 무엇일까? 완전한 사랑은 어떤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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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두 가지 속성은 보편성과 일반성이다. 어디를 가도 통하는 것이 보편성이다. 근원의 하나로 되돌아감이 일반성이다. 한국에서 하루는 24시간이다. 미국에서도 그러하고 러시아에서도 그러하다. 곧 보편성이다.

모든 인간은 하나의 아담과 이브에서 나왔다. 모든 냇물은 결국 하나의 바다로 흘러든다. 하나의 근원에서 유래하여 나왔으므로 결국 하나의 근원으로 되돌아간다. 그것이 일반성이다. 그것은 무엇일까?

세상은 구조로 되어 있다. 이 명제를 반대하는 사람은 아직 없다. 누구도 구조를 부정할 수는 없다. 찬성과 반대의 의견를 빌미로 한 개입 자체가 이미 구조적 접근이므로 구조의 부정은 곧 자기부정이 되기 때문이다.

구조는 존재 그 자체의 속성이다. 이는 물질은 에너지로 환원시켜 설명할 수 있다거나 혹은 모든 물질이 질량보존의 법칙이나 만유인력의 지배를 받는다는 견해와 같은 논리적 당위에 속한다.

‘1+1=2’처럼 명백하다. 구조는 ‘1+1’의 값이 ‘2’냐 ‘3’이냐를 논함이 아니라‘1+1=2’라는 식을 구성하는 요소들 곧 ‘1, 1, 2’ 사이에 ‘+’와 ‘=’가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주어에는 술어가 있고 전제에는 진술이 있고 문제에는 답이 있다. 이들은 항상 짝을 짓는다. 술어가 없는 주어, 진술이 없는 전제, 답이 없는 문제는 자기부정이 된다. 구조는 이와 같다. 쌍을 이루는 두 짝의 연결 그 자체가 구조다.

일찍이 인류가 논해온 바는 제시된 주어에 따르는 술어를 찾거나, 전제를 제시하고 따르는 진술을 찾거나, 문제를 제시하고 맞는 답을 찾는 것이지 문제와 답 사이의 연결형태 그 자체는 아니었다.

구조는 바로 그것을 논하므로 부정될 수 없다. 1+1의 값이 과연 2인지는 의심될 수 있어도 그 식을 이루는 +와 =는 부정될 수 없다. 긍정하든 부정하든 개입하여 이의를 들이대는 그 자체로 이미 +와 =를 성립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아니오. 나는 다르게 생각하오. 내 의견은 이렇소.’ 하고 개입하는 그 자체로 이미 +와 =를 성립시킨 것이다. 즉 구조를 긍정한 것이다. 그러한 개입사실 그 자체가 바로 구조이기 때문이다.

구조론은 전제와 진술, 문제와 답을 연결시키는 논리적 당위 그 자체다. 그러므로 구조론의 명제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혹은 의심을 갖거나 어떻게든 개입하여 의견을 제시하는 그 자체로 이미 구조다.

그러므로 구조론의 명제를 인정하고 구조론의 대의를 긍정해야 비로소 구조를 검증할 수 있다. 이는 수학이나 논리학을 부정할 수 없는 이치와 같다. 수학이나 논리학을 비판하는 그 자체로 이미 수학이고 논리학인 것이다.

구조가 멀리 있는 것은 아니다. 주어와 술어, 전제와 진술, 질문과 답변이 짝을 지어 쌍을 이루듯 짝을 짓고 쌍을 이루는 것은 모두 구조다. 밤과 낮이 짝을 지어 하루를 이루고 하늘과 땅이 짝을 지어 지구를 이루면 이미 구조다.

시작과 끝, 원인과 결과, 앞과 뒤, 겉과 속, 위와 아래, 움직임과 멈춤, 빠름과 느림, YES와 NO, ON과 OFF, 성공과 실패, 수평과 수직, 경도와 위도, 남자와 여자, 주인과 하인, 사용자와 노동자가 이미 구조다.

마찬가지로 진리의 두 속성인 보편성과 일반성이 짝을 짓는다. 1+1=2의 식에서 =는 보편성을, +는 일반성을 나타낸다. 강의 지류가 +되어 바다를 이루니 일반성이고 한국에서 하루 24시간=미국에서도 24시간이니 보편성이다.

‘짝+짝=쌍’이다. 세상은 짝□+짝○=쌍■라는 구조 안에 온갖 숫자가 대입되며 다양한 값을 출력시키는 형태를 가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은 일반성 □,○ ≫보편성 ■다. 이를 천칭저울로 나타낼 수 있다.

[그림 1]

□   일반성   ○
------------
보편성 ■

다르게 표현할 수도 있다.

[그림 2]

짝 + 짝
------
   쌍

여기서 천칭저울의 두 날개와 받침대 사이의 선 ---는 =를 나타낸다.

모든 짝을 가지고 쌍을 이루는 것이 구조다. 밤+낮=하루, 원인+결과=인과율,  ON+OFF=스위치, 사용자+노동자=회사, 공급자+수요자=시장, 하늘+땅=지구, 여자+남자=인간, 질문+답변=문제, 전제+진술=명제로 구조를 이룬다.

관찰하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이러한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칼날+손잡이=칼, 촉+손잡이=볼펜, 낱장+표지=책, 플러스극+마이너스극=전기 등으로 구조를 가지고 있음이 드러난다.

구조는 저울이다. 저울은 제어한다. 넘치면 기울고 모자라도 기운다. 정확한 값에 도달해야만 수평을 이룬다. 그 방법으로 제어한다. 작용과 반작용 사이에서 제어한다. 모든 사물에는 보편성의 저울이 숨어 있다.

진리의 속성은 보편성과 일반성이다. 천칭저울의 두 접시가 하나의 축에 의지함이 일반성이면 하나의 축이 두 접시를 통제함이 보편성이다. 어떤 이치도 전제와 진술, 원인과 결과라는 두 저울접시의 평형구조를 반드시 가진다.

저울은 제어한다. 무엇을 제어하는가? 건축구조를 예로 들 수 있다. 수직으로 선 기둥과 수평으로 누운 대들보 사이에서 무너질 것인가 버티고 설 것인가를 결정한다. 왜 구조인가? 구조가 잘못되면 무너지기 때문이다.

수평과 수직이 만나는 건물의 주두는 저울과 같아서 언제라도 평형을 유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건물은 무너진다. 구조가 잘못되면 계는 붕괴된다. 전제와 진술 중 하나가 잘못되면 명제는 무너진다.

계는 하나의 결정 단위다. 구조는 계 안에서 결정한다. 판단한다. 작용에 대해 반작용할 것인가 수용할 것인가를 결정한다. YES와 NO를 판정한다. 그렇게 스위치가 되고, 방아쇠가 되고, 뇌관이 되고, 공이가 된다.

그것은 ‘일’이다. 구조는 하나의 ‘일의 단위’다. 하나의 계 안에는 반드시 하나의 구조가 있어서 하나의 일을 한다. 역할과 기능을 가진다. 어떤 한 가지를 결정한다. 판정을 내린다. 결과물을 생산해낸다.

구조는 결정한다. 구조가 어떻게 결정하는가에 따라 만유는 붕괴하거나 혹은 유지하거나 혹은 진보한다. 구조의 저울은 평형이탈하거나 혹은 평형을 유지하거나 혹은 평형회복의 밸런스를 찾아간다.

어떤 조직이든 시스템이든 부대든 회사든 가정이든 개인이든 존재는 결정의 연속이다. 무엇을 결정하는가? 작용에 대해서 반작용의 값을 결정한다. 천칭저울의 평형이탈과 평형회복을 결정하는 것이다.

비반복, 반복
불연속, 연속
비가역, 가역
비분할, 분할
비순환, 순환

의 다섯가지를 결정한다. 천칭저울이 눈금을 결정하듯 결정한다. 반복성과 연속성, 가역성과 분할성 그리고 순환성에 있어서 YES와 NO를 결정한다. 1바이트의 반도체가 0과 1을 결정하듯이 결정한다.

하나의 작용에 대해서는 3가지의 대응이 있다. 반도체도 마찬가지다. +와 - 그리고 중성의 3극을 가진다. 중성은 외부에서의 작용을 그대로 전달하고 +와 -는 수용과 반작용의 값을 결정한다.

● 평형유지 - 정보의 전달(전기적으로 중성)
● 평형회복 - 정보의 입력(전기적으로 마이너스)
● 평형이탈 - 정보의 출력(전기적으로 플러스)

자동차라도 힘을 생산하는 엔진의 마이너스, 힘을 소모하는 바퀴의 플러스 그리고 그 사이에서 힘을 전달하는 동력전달장치의 중성으로 되어 있다. 시계라도 힘을 생산하는 태엽, 소비하는 바늘 그리고 전달하는 톱니바퀴로 되어 있다.

아날로그 구조와 디지털 구조가 있다. 모든 존재는 내부에 작용 반작용의 저울을 가진다. 저울이 시계나 컴퓨터나 자동차나 조속기나 천칭처럼 내부에 숨은 것이 디지털 구조면 칼이나 송곳처럼 밖으로 드러난 것이 아날로그 구조다.

젓가락이 막대모양인 이유는 손가락이 막대모양이기 때문이다. 숟가락의 날이 둥근 이유는 그 날과 닿는 입술이 둥글기 때문이다. 컵의 입구가 둥근 이유는 컵과 닿는 입술이 둥글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 구조다.

젓가락과 손가락이 작용 반작용의 천칭을 이룬다. 숟가락과 입술이 작용 반작용의 천칭을 이룬다. 컵과 입술이 작용 반작용의 천칭을 이룬다. 이때 저울의 절반은 바깥에 있다. 그것이 아날로그 구조다.

시계의 핵심은 진자다. 진자는 작은 천칭이다. 하나의 추가 이쪽에서 저쪽으로 왕복하면서 천칭의 두 접시를 성립시킨다. 보이지 않지만 추가 오른쪽으로 갈때 왼쪽으로 되돌리는 반작용의 힘이 저축된다.

자동차 엔진도 마찬가지다. 가솔린의 폭발력이 피스톤을 밀어내면서 동시에 가스를 흡입하여 반작용의 힘을 저축한다. 그 사이에 밸런스가 있다. 이때 천칭저울의 두 접시는 엔진 속에 감추어져 있다. 이는 디지털 구조다.

칼이나 망치나 송곳이나 연필이나 돌멩이나 해시계는 그 기능의 절반이 바깥에 있다. 천칭의 두 접시중 하나는 칼이 자르려는 무우에 있고 망치가 치려는 못머리에 있고 송곳이 찌르려는 가죽에 있고 연필이 쓰려는 종이에 있다.

돌멩이의 중력을 성립시키는 절반은 지구에 있다. 해시계의 기능을 성립시키는 햇볕은 태양에 있다. 해시계 안에는 나머지 절반만 있다. 해시계는 태양아래 있을 때에 한하여 햇빝의 작용에 그림자로 반작용하여 천칭저울인 것이다.

칼은 그 잘라질 대상이 있을 때에 저울을 성립시키고 돌멩이는 중력을 받아서 저울을 성립시키고 망치는 못을 만나서 저울을 성립시킨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을 뿐 모든 존재하는 것은 반드시 저울을 가진다. 그것이 구조다.

세상 모든 것은 저울을 가진다. 그러므로 진리의 보편성이다. 두루 통한다. 통하지 않는 것은 없다. 그 어떤 존재도 외부에서의 작용에 대하여 반작용 함으로써 통하고 통함으로써 존재인 것이다. 여기서 벗어나는 존재는 없다.

이때 저울의 절반만 가진 컵이 입술과 닿아 평형을 성립시킬 때 지금 그 입술을 만나지 못하였지만 아직 단 한번도 사용되지 않았지만 언제라도 사용될 때를 기다리며 대비하고 있는 그것이 진리의 일반성이다.

언제라도 짝을 만나 쌍을 완성시키고자 한다. 투수의 공은 타자의 방망이를 만나려 하고, 낮은 밤을 만나려 하고, 남자는 여자를 만나려 하고, 마이너스는 플러스를 만나려 하고 언제나 만나려 하는 그것이 일반성이다.

그것이 있다. 구조가 있다. 일반성+일반성=보편성이 있다. 짝+짝=쌍이 있다. 기타가 소리를 내는 것은 현이 있기 때문이고 종이 소리를 내는 것은 공명통이 있기 때문이고 피리가 소리를 내는 것은 리드가 있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저울이 있다. 리드가 있고 공명통이 있고 떨림판이 있고 성대가 있고 현이 있고 날이 있고 스위치가 있고 방아쇠가 있다. 접점이 있다. 그러므로 통한다. 그것이 근원의 보편성이다.

모든 구조는 닮아있다. ‘짝+짝=쌍’, ‘밤+낮=하루’의 법칙에 어긋나는 구조는 없다. 요(凹)와 철(凸)의 접촉으로 안테나를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직관할 수 있다. 통제할 수 있다. 결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구조는 통제의 구조다. 저울에 눈금이 있으므로 계량할 수 있다. 피리에 리드가 있으므로 음의 강약을 조절할 수 있다. 안테나가 있으므로 주파수를 찾을 수 있다. 건축의 구조가 있으므로 튼튼하게 지을 수 있다.

그러므로 구조를 안다는 것은 날뛰는 말에 고삐를 채움과 같고, 자동차에 핸들을 둠과 같고, 피아노에 건반을 둠과 같고 총에 방아쇠를 둠과 같고, 컴퓨터에 자판을 둠과 같에서 그것을 제어하고 조정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모든 구조는 공간의 얼개로 시간을 통제하는 형태로 되어 있다. 시간의 길이는 공간의 거리에 비례한다. 공간과 시간 사이에 작용 반작용이 성립한다. 그러므로 제어할 수 있다. 강약과 고저와 장단을 두어 통제할 수 있다.

대저울의 눈금을 움직이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천칭저울이 평형을 회복하는 데도 시간이 걸린다. 진자가 왕복하여 밸런스를 이루는 데도 시간이 걸린다. 구조는 만남이며 만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그러므로 통제할 수 있다.

구조는 절대적으로 방향성을 가진다. 항상 축에서 날개로 가고, 보편성에서 일반성으로 가고, 전체에서 부분으로 가고, 높은 질서에서 낮은 질서로 가고, 균일≫불균일로 간다. 그러므로 통제할 수 있다.

무사가 칼을 쓰건 사수가 활을 쏘건, 포수가 총을 쓰건, 요리사가 음식을 조리하든, 서예가가 글씨를 쓰든, 악사가 연주를 하든 그것은 모두 통제하는 것이며 작용과 반작용의 접점에서 평형이탈과 평형회복을 결정하는 것이다.

머리가 꼬리를 흔들 수는 있어도 꼬리가 머리를 흔들 수는 없다. 왜인가? 작용이 반작용과 만나기 전에, 밤이 낮을 만나기 전에, 여자가 남자를 만나기 전에, 일반성이 보편성에 이르기 전에는 구조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총알이 총을 만나기 전에 격발될 수 없고, 화살이 활을 만나기 전에 쏠수 없고, 붓이 먹을 찍기 전에 그릴 수 없고, 칼이 무를 만나기 전에 자를 수 없고 연주자가 바이얼린을 만나기 전에 연주할 수 없다.

만나야 구조다. 구조라야 통제한다. 그러므로 구조는 언제나 방향성을 가지며 그러므로 통제되는 것이다. 이격하는 방법으로 통제할 수 있다. 칼을 칼집에 넣고 붓을 붓두껍에 넣고 화살을 전동에 넣어 통제할 수 있다.

자동차 부품을 한 곳에 쌓아두었더니 우연히 부품들이 결합되고 자동차가 조립되어 저절로 고속도로를 달리게 되는 일은 절대로 없다. 하늘이 두쪽나도 그것은 가능하지가 않다. 구조는 전적으로 통제된다. 그것이 구조의 의미다.

그렇다면 그 구조를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 우선순위를 따라야 한다. 먼저 활을 잡고 다음 화살을 집어야 한다. 먼저 총을 잡고 다음 탄창을 결합해야 한다. 구조를 안다는 것은 그 순서를 안다는 것이다.

먼저 지붕을 올리고 난 다음에 기둥을 세우려 한다면 절대로 실패한다. 언제라도 기둥을 먼저 올리고 나중에 들보를 놓고 지붕을 올려야 한다. 건축은 지구의 중력에 의지하므로 지구중심에 가까운 곳부터 시공해야 한다.

구조는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에 따라 절대로 순서를 가지며 그 순서를 아는 것이 구조를 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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