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읽기
read 17230 vote 0 2007.10.07 (08:41:46)



요즘 유행어 ‘막장’을 떠올릴 수 있다. 분청사기를 보면 이건 정말 막장에서 살아 돌아온 작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도자기가 추구할 수 있는 최후의 세계. 그래서 막장이다.

도자기는 예술이 아니라 산업이었다. 그 당시는 그랬다. 도공은 자기 자신을 예술가로 인식하지 못했다.

좋은 물건이 나오면 망치로 깨뜨려 버렸다. 그런 걸작은 가마를 헐면 100에 한 개나 나오는 건데 그 내막을 보르는 귀족이 좋은 것으로만 100개를 주문하고 그대로 조달을 못하면 매질을 하려드니 귀족의 주의를 끄는 좋은 것은 아예 만들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중국제 도자기는 크고 화려하고 느끼하다. 예술이 아니라 산업이다. 지방 졸부의 허세가 반영되어 있다. ‘어떤 걸 원하세요? 뭐든 원하는 대로 제작해 드립니다. 우리 살람 못만드는게 없어요. 하오하오!’ 하는 제조업 종사자의 비굴한 태도가 엿보인다.

일본 꽃병도 마찬가지다. 거기에는 확실히 주문자의 기호에 영합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어떻게 하면 소비자가 좋아할까 참 세심하게도 고려했다. 고려청자도 귀족의 취향에 맞춘 것이다. 조선 백자에는 확실히 양반의 기호가 반영되어 있다.

요즘 나오는 도자기도 그렇다. 예쁜 것도 많고 특이한 것도 많고 세련된 것도 많은데 대략 소비자의 눈길을 끌려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값을 올려받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한 느낌이다. 그건 상품이다. 도자기가 아니다. 장식품이다.

분청사기는 어느날 도자기 산업이 망해서 귀족들의 주문이 끊어지자 도공이 ‘에라이 막장이다’ 하며 그냥 자기가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든 것처럼 보여진다. 그렇게 느껴진다. 도자기산업이 무너지면서 산업에서 예술로 변형된 것이다.

분청사기는 정말이지 누구 눈치 안 보고 만든 것이다. 성의가 없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흙으로 도자기를 만들려면 응당 이래야 한다는 논리의 지극한 경지에 닿아있다.

주문자의 기호와 취향과 신분과 이데올로기가 반영되어 있으면 그것은 진짜가 아니다. 분청사기에는 그것이 없다. 고려 귀족문화가 막을 내리고 조선 양반사회가 유교주의 이데올로기의 광기를 부리기 전에 잠시 순수의 시대가 있었던 것이다.

소비자의 통제도 귀족의 통제도 이데올로기의 통제도 없이 그냥 마음대로 만든 것이다. 그것은 제작되는 것이 아니라 발굴되는 것이다. 발명되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는 것이다. 인위가 배제되고 자연의 본성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수석과도 같다. 내가 원하는 형태의 돌은 자연에 없다. 다만 자연이 원하는 형태의 돌이 굴러다닐 뿐이다. 나의 기호와 자연의 본래가 우연히 일치하는 지점이 발견된다. 본래 있던 것이 저절로 배어나오는 것.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찾아진 것.




List of Articles
No. 제목 글쓴이 날짜sort 조회
공지 닭도리탕 닭볶음탕 논란 종결 2 김동렬 2024-05-27 20927
공지 신라 금관의 비밀 image 7 김동렬 2024-06-12 9030
5064 구조론이란 무엇인가? 김동렬 2007-09-27 11597
5063 질 입자 힘 운동 량 김동렬 2007-09-28 11707
5062 개혁+호남은 옳은가? 김동렬 2007-09-29 14498
5061 구조론은 건조한 이론이오. 김동렬 2007-09-29 12415
5060 학문의 역사 보충설명 김동렬 2007-09-30 14922
5059 정동영 딜레마 김동렬 2007-10-06 15661
5058 이오덕과 권정생에 대한 추측 김동렬 2007-10-06 17375
» 분청사기의 충격 김동렬 2007-10-07 17230
5056 일치와 연동 김동렬 2007-10-07 14498
5055 민주화세력의 성공과 실패 김동렬 2007-10-09 14455
5054 영어와 한자의 학습원리 김동렬 2007-10-11 17450
5053 너와 나의 구분이 없는 경지 김동렬 2007-10-16 14158
5052 원자론과 구조론 김동렬 2007-10-18 12509
5051 여행 하지마라 김동렬 2007-10-18 14901
5050 구조론 나머지 부분 김동렬 2007-10-20 12560
5049 학문이란 무엇인가? 김동렬 2007-10-22 19257
5048 구조란 무엇인가? 김동렬 2007-10-25 14576
5047 왜 인문학이어야 하는가? 김동렬 2007-10-27 15322
5046 일단의 정리 김동렬 2007-10-29 11311
5045 구조론의 착상 김동렬 2007-10-31 11605